보고 싶은 얼굴 UNFORGETTABLE FACES

류준화_박경훈_신은미_이하_정정엽_조습展   2018_1011 ▶︎ 2018_1231 / 일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8_1011_목요일_06:00pm

오픈식 / 신은미 작가의 한국화 퍼포먼스

아티스트 토크 / 2018_1011_목요일_07:00pm

후원 / 서울특별시

관람시간 / 10:00am~05:00pm / 토요일_01:00pm~05:00pm / 일요일 휴관

이한열 기념관 LEEHANYAL MEMORIAL MUSEUM 서울 마포구 신촌로12나길 26 (노고산동 54-38번지) 3층 Tel. +82.(0)2.325.7216 www.leememorial.or.kr

기억의 의미를 묻다 ● 영화 『1987』의 엔딩 크레디트에 나오는 문익환 목사님의 조사를 떠올린다. 그가 이한열의 장례식장에서 열사들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부를 때 연세대학교 교정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는 얼마나 많은 이들의 희생 위에 이루어진 것일까? 해방 후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돌아가신 분들이 600명이 넘는다. 이한열기념관에서는 이름도 얼굴도 남김없이 스러져 간 희생자들을 함께 기억하려 한다. ● 올해 우리가 만날 얼굴은 고미애, 권문석, 권미경, 이덕구, 장현구, 최옥란이다. 이들의 생애를 신은미, 이하, 류준화, 박경훈, 조습, 정정엽 작가가 그린다. 올여름 무더위를 벗 삼아 작업한 작품과 돌아가신 이들의 유품과 기록물, 사진을 함께 전시한다. 불꽃같은 삶을 살다 간 이들의 삶을 기억하고 함께 애도하는 것은 우리의 아픈 현대사를 치유하는 일이다. 또한(삭제) 이 전시가 과거의 인물을 회고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현재적 의미를 찾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기대한다. ● 『보고 싶은 얼굴』展은 올해로 4회를 맞았다. 여러 차례 전시를 준비하다 보니 첫해에 느꼈던 무거움이 조금은 옅어졌다. 평탄하지 못한 죽음을 대면하는 게 두려웠던 것이다. 어쩌면 죽음 그 자체가 두려웠는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새로운 얼굴을 만날 때 두려움보다는 설렘으로 다가가려고 한다. ■ 문영미

류준화_보라색 소국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3×33.4cm_2018
류준화_나를 위한 시간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117cm_2018

권미경 ● 1969년 전북 장수 출생. 초등학교를 마치고 보세공장 노동자가 되었다. 노동자들의 독서모임 '도서원 광장'에 나가면서 노동자 의식에 눈을 떴다. 그가 근무했던 (주)대봉의 노동 강도는 강했고 강제 연장근로도 많았다. 관리자들은 노동자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권공순", "박공돌" 등으로 불렀다. 1991년 12월6일 품질검사에서 불량을 낸 노동자를 관리자들이 심하게 야단쳤다. 오후 4시 무렵 그는 왼팔에 유서를 남긴 채 회사 옥상에서 몸을 던졌다. 유서의 마지막은 "내 이름은 공순이가 아니라 미경이다"였다.

그녀의 짧은 약력에 슬펐고 그녀의 개인 사진이 너무 적은 것에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그룹사진 속에 다른 이들은 삭제하고 권미경만 그렸다. 초등학교를 마치자마자 시작된 노동자로서의 삶은 그녀의 손발을 늘 쉬지 못하게 했을 거란 생각에 산 정상에서 느긋하게 차를 마시는 모습을 그렸다. 또 한 작품은 늘 누군가를 위해 살았을, 죽음조차 동료를 위해 몸을 던진 권미경이 어린 권미경에게 꽃을 선물한 모습을 그렸다. 보라색 소국은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꽃이다. ■ 류준화

박경훈_덕구덕구이덕구_디지털 프린트, 무쇠솥 등 혼합재료_100×60cm, 가변설치_2018

이덕구 ● 제주 4·3항쟁 유격대장. 1920년 제주 조천 출생. 유년기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대학 재학 중 학병으로 끌려가 태평양전쟁을 겪었다. 해방 후 귀향해 조천중학원에서 역사와 체육을 가르쳤다. 남한단독정부수립 반대투쟁 과정에서 1948년 입산하여 인민유격대 대장을 맡았다. 1949년 6월 토벌대에 의해 사살될 때까지 무장대를 이끌었다. 그의 사망과 함께 무장대의 체계적인 항쟁은 막을 내린다. 당시 그의 나이 29세, 시신은 관덕정 광장에 전시된다.

토벌대의 장난인지는 모르나 그를 조롱하기 위해 반 동강 난 놋숟가락을 그의 왼편 가슴 상의 포켓에 꽂아 놓았다. 당시 빨치산들은 기다란 놋숟가락 자루를 반 동강을 내서 상의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놋숟가락은 일명 '빨치산의 인식표'로 불렸다.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 '북받친 밭'은 한때 이덕구 부대가 은신했던 곳이며 지금도 이덕구 산전으로 불린다. 그곳에 가면 깨진 무쇠 솥이 남아있다. 그 솥을 볼 때마다 나는 4·3의 소용돌이 속에 불타버리고 무너져 내린 제주공동체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 박경훈

신은미_어둠을 이기는 빛_장지에 먹, LED 패널_110×90cm_2018

고미애 ● 약사. 1965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숙명여대 제약학과에 다녔다. 4학년 때 약대 학생회장을 맡으며 1987년 유월항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1988년 졸업한 그는 '가진 자만이 제대로 치료를 받을 수 있고 없는 자들은 제대로 약 한번 제대로 못 사먹는 벽을 허물기 위해' 도시빈민지역의 약국으로 들어간다. 1989년 부천의 공단지역에 아람약국을 개업하고 약사이자 지역의 일꾼으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1992년 2월 12일 이주노동자의 폭행으로 안타까운 죽음을 당했다.

누구보다도 왜소했던 그녀가 뿜어낸 에너지는 제 체구 몇 배였다. 커다란 눈망울은 순수하고 강직했다. 짓밟은 이의 암흑은 그녀의 빛을 꺾을  수 없었고 그 빛은 꾸준히 주변을 물들였다. 그것은 마음이 아릴만큼 청렴한 신념이었기에 더 많은 사람들이 동요했고 애달프게 울어댔다. 지금도 그들은 그녀의 빛을 쫓아 세상의 암흑을 빛으로 바꿔나가고 있다. ■ 신은미

이하_권문석_복합재료_150×107cm_2018

권문석 ● 1978년 서울 출생. 국민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라고 생각하여 기본소득과 최저임금 인상을 통해 이를 실현하고자 했던 사회운동가. 96년 학생운동을 시작했고, 2007년 한국사회당 금민 대선캠프에 참여하며 정당운동을 시작했다. 이후 기본소득네트워크 운영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불안정노동시장이 확대되고 있던 2013년, '알바노동자'와 '최저임금 1만원'을 이슈로 만들며 바쁘게 활동하던 중 35세의 나이에 급성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권문석의 사후 어느 날, 어머니가 큰누나에게 "문석이는 왜 그런 일을 했대?"라고 물었다. 누나도 그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고 싶었다. 진보운동을 한다는 것은 끊임없는 손가락질과 가난, 실패와 좌절을 친구로 두고 있는 삶이다. 그럼에도 왜 그 일을 할까? 그것은 바로 그의 "운명"이다. 이 순간에도 또 다른 권문석은 절망이란 친구를 곁에 두고 자신의 운명대로 몽상가로 살고 있다. 그 몽상은 언젠가 현실이 되고 절망은 희망이 된다. 어느덧 최저임금 1만원은 현실이 되어 가고 있다. ■ 이하

정정엽_벽앞의 웃음-최옥란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130cm_2018

최옥란 ● 최옥란은 태어난 지 100여 일만에 열병을 앓고 뇌병변 1급 장애인이 되었다. 장애인문제연구회 '울림터'와 뇌성마비연구회 '바롬'을 창립했다. 학교에 가고 싶었고, 친구들과 어울려 뛰놀고 싶었고, 아들과 함께 살고 싶었던 그녀는 장애인 이동권 투쟁부터 최저생계비 현실화를 요구하는 수급권 반납투쟁까지 거리 곳곳에서 온 몸으로 현실의 벽에 저항했다. 양육권과 수급권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괴로움 끝에 2002년 3월 자살시도 후유증으로 생을 마감했다.

뇌병변 1급 장애인 수급자 최옥란에게 세상은 벽이었습니다. 그 벽 앞에 하늘을 흔들 듯 웃고 있는 모습은 당장에 나를 사로잡았습니다. 마음에 새겨진 이 장면을 오려두고 오랫동안 간직하였습니다. 나의 서랍 속에 있던 최옥란의 웃음은 2006년 '사라지는 여자들' 추모 웹사이트 작업으로 만났다가 2018년 '보고 싶은 얼굴'작품으로 다시 만나게 됩니다 세상의 고통과 어려움을 아프게 날려버리는 큰 웃음, 100호의 캔버스에 그 웃음이 색채로 소리로 꽝 꽝 울리길 기대합니다. ■ 정정엽

조습_잊지않겠습니다.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50×100cm_2018

장현구 ● 1969년 서울 출생. 1989년 경원대학교 전기공학과에 입학했다. 1992년 그는 '경원대 학원자율화 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사학재단 비리척결을 요구하는 투쟁을 주도했다. 이때부터 학교로부터 무기정학, 제적, 고소, 고발을 당했으며 93년에는 교수들에 의한 감금폭행까지 당했다. 대통령 공정선거 캠페인을 벌이던 중 경기 성남 중부경찰서에 연행돼 심한 구타와 고문을 당했다. 이후 큰 정신적인 충격을 받고 자살 기도를 하는 등 트라우마를 겪었다. 1995년 12월 4일 분신하였으며 10일 후 숨을 거두었다.

1995년 당시 26살에 세상에 대한 정의감과 국가폭력의 부조리함을 못 이겨 스스로 분신을 선택한 선배가 만약 살아있다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 내가 20대에 목격한 선배의 죽음 이후 143일의 시간과 40대에 바라본 여객선 침몰 이후의 1622일의 시간. 두 사건의 시공간은 확연히 다른데도 진실을 찾기 위한 시간이 십여 곱절이나 늘었을 뿐, 내가 사는 이곳은 달라진 것이 없다. ■ 조습

Vol.20181011d | 보고 싶은 얼굴 UNFORGETTABLE FACES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