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어리, 숲

박송이展 / PARKSONGEI / 朴송이 / painting   2018_1012 ▶ 2018_1028 / 일요일 휴관

박송이_덩어리 숲_캔버스에 유채_90.9×72.7cm_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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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8_1012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02:00pm~06:00pm / 일요일 휴관

살롱 아터테인 SALON ARTERTAIN 서울 서대문구 홍연길 32(연희동 708-2번지) Tel. +82.(0)2.6160.8445 www.artertain.com

그림처럼, 우린 늘 그곳에 있었다 ● 인간의 감정은 기본적으로 흔들림을 전제로 한다.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에도 떨림이 있고, 우리의 시각 에너지에도 떨림이 있기 때문이다. 그 떨림의 정도와 소통에 따라 흔히 말하는, 동화, 감동, 갈등, 혼란과 같은 일반적인 감상에 필요한 감정이 일어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동화, 감동과 같은 긍정적인 경우야 대상과 우리의 시각 에너지가 같은 파장을 타고 있다고 볼 수 있겠지만, 갈등이나 혼란과 같은 부정적인 경우는 살짝 얘기가 달라진다. 그 파장은 불확실하고, 막연한 파장들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움직이는 방향 조차도 전혀 파악되지 않는다.

박송이_덩어리 숲3_캔버스에 유채_65.1×53cm_2017
박송이_숲덩어리_캔버스에 유채_50×60.6cm_2018
박송이_검은 숲_캔버스에 유채_50×60.6cm_2018

숲 덩어리를 그리고 있는, 박송이 작가의 시각적 에너지는 어쩌면, 대상의 파장을 고의적으로 피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일상의 의미, 삶의 가치에 대해 끊임없이 애정 어린 시선을 지니고 있었던 듯 하다. 하지만 세상은 그의 의미와 가치를 너무나 무심하게 바라보았고, 심지어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었다. 그에 대한 작가의 반작용일지는 모르겠으나 작가는 일부러 불확실하고, 막연하게 대상을 바라보았던 같다. 그러나 그렇게 엇갈리게 바라보는 그의 에너지에도 명백한 메시지는 있었다. ● 말하자면, 그의 엇갈린 시선이 막연하기만 하고, 치밀하지 않았다고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가 바라 본 세상은 아름다웠고, 행복했었을 것이다. 작가의 그 시선은, 사회적 구조라든지, 집단의 이기라든지, 결국 누군가의 이익과 권력으로 이어지는 부품으로서 우리는 살고 있구나. 라고 하는 허탈감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엇갈려서 보는 것이 더 정확하거나 권력을 지닌 괴물 같은 대상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 어차피,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대상들은 이미 그 자체의 순수한 기원을 잃었다. 대상 그 자체가 지니는 순수한 의미와 존재는 그것을 대신하는 사회적 이해 관계에 의해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인간, 자연, 행복, 인연, 등… 실존하는 사물이든, 정신적 감성에 관한 이야기든, 이미 문자와 같은 흔적이 남겨지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는, 그 자체의 순수한 의미는 원래의 의미를 그대로 가지고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박송이_검은 숲_캔버스에 유채_50×72.7cm_2017
박송이_검은 숲속3_캔버스에 유채_45.5×37.9cm_2017
박송이_덩어리 숲2_캔버스에 유채_60.6×40.9cm_2018

박송이 작가의 숲 덩어리는, 말 그대로 도저히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숲을 가장한 덩어리들이다. 또한, 그 숲이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는지 알 수도 없다. 화면 전체를 통해 물위에 혹은, 언덕 한 구석에 놓여 있다. 그의 숲은 인공적이지만, 그 동안 우리가 알 수 없었던 숲의 기원일 수도 있겠다는 착각마저 들게 한다. 그것은 오염된 문자로 숲을 대신하기 보다는 지치고 힘들게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대신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 단언하자면, 자연은 인간이 넘을 수 없다. 지배라는 말 자체는 아예 입밖에 낼 수도 없는 것이 자연과 우리와의 관계다. 한마디로, 서구 철학적 논리와 종교적 자만이 만들어낸 위험한 사고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단지, 이 작고 허무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아등바등 살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숨쉴 수 있고, 이 땅을 딛고 살 수 있다는 것. 여기, 이 자연 때문이다. 작가는 바로, 그 자연을 숲 덩어리와 같은 새로운 메커니즘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기원을 잃어버린 사물들, 권력중심으로 발전하고 있는 사회적 관계를 바라보고 있는 엇갈린 시선으로 말이다.

박송이_검은 숲속2_캔버스에 유채_45.5×53cm_2017
박송이_숲속_캔버스천에 유채_36.5×20.5cm_2018
박송이_어떤 일이 있던 강_캔버스천에 유채_23×22.5cm_2018

'숲 덩어리를 그리는 행위는 면밀하게 자신의 행동들을 살피지 않았던 일상의 반성이다' 라고 작가는 말한다. 면밀하게 반성해야 하는 작가의 일상은 과연 어떤 것일까. 무엇인가 단단하게 얽히고 설킨 숲 덩어리 일 것 같다. 그리는 행위. 그에게 그림은 반성의 결과이기도 하고, 그리고 있음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느끼게 해 주는 것 같다. 따라서 그렇게 얽히고 설킨 숲 덩어리는 한편, 그에게 사회적 삶을 살아가는 두려움으로 다가올 수 있겠지만, 그것을 그리면서 오히려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 아무것도 살 수 없을 것 같은 숲 덩어리, 오직 식물들만으로 이루어진 작가의 숲 덩어리는 사실, 우리가 잘 아는 곳에 있다. 강이 있는 곳, 바다가 있는 곳, 심지어 아파트가 있는 곳에도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 숲 덩어리는 우리가 아는 순수한 자연,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순수한 인간, 그 자체로 여전히 우리의 정신에, 삶의 흔적 곳곳에 있어 왔다는 것이다. 각박한 삶의 현장이기도 하면서, 그 각박한 현실이 행복의 순간으로 변할 수 있는 그 어떤 힘으로서, 작가의 숲 덩어리는… 있어왔었다면, 그곳에 늘 그렇게 있었으면 좋겠다. ■ 임대식

Vol.20181015i | 박송이展 / PARKSONGEI / 朴송이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