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의 겹

김은진展 / KIMEUNJIN / 金恩眞 / painting   2018_1017 ▶︎ 2018_1023

김은진_시선_한지에 채색_100×100cm_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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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00pm

갤러리 도스 Gallery DOS 서울 종로구 삼청로7길 28 신관 Tel. +82.(0)2.737.4679 www.gallerydos.com

사유하는 시간, 그 시간의 층위에서 순환하는 관계와 존재 ● 작가 김은진은 오랫동안 나무를 그려왔다. 이는 단순히 그리기 어려운 대상인 나무를 골라서 화가의 묘사력을 보여주겠다는 의도가 아니다. 그녀는 쉼 없는 시선으로 계절에 따라, 일조량에 따라, 때로는 장소에 따라 변화하는 나무의 면모들을 추적해 왔다. 그리고 그 다양한 면모 속에서 인간이 갖고 있는 다층적인 모습을 발견했다. 작가에게 한 그루의 나무가 확산되어 이룬 숲의 군상은 한 인간이 여러 인간들과 만나 부딪히고 조율하며 살아가는 도시의 군상과 같다. 그 숲 속에서 직접 마주 본 나무 하나하나는 개별 인간처럼 크기, 색채, 그 생김새가 모두 다르다. 한 여성이 딸 또는 어머니, 아내, 직장 내 상사와 부하, 선배와 후배, 가까운 친구이거나 먼 이웃 등의 여러 모습을 갖고 있듯이 나무 또한 위, 아래, 옆 또는 정면 등 상황에 따라 다른 모습을 갖고 있다. 이는 단지 피지컬의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분명 나무도 시공간 속에 현존한다는 그 존재감을 그림자로 암시한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있는 한 뇌 속의 갈라진 신경망들이 외부 상황을 끊임없이 감지하듯이 나무도 그 살아있음을 수없이 뻗어가는 가지들로 증명한다. 다만 이렇게 복잡하게 얽힌 인간의 사고와 감각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나무는 그 현재 상태를 선명히 드러낸다는 점이 다른 것이다. 때문에 작가는 그 삶의 여정이 읽히는 나무에 화가의 시선을 둠으로써, 분명 예민한 예술가의 지각으로 느꼈지만, 보이지 않았던 인간 삶과 그 관계성을 말하고자 한다. ● 이와 같이 나무와 인생을 동일시하는 시선은 고대로부터 내려온 인류학적인 관점과도 상통한다. 인간들이 볼 때 나무는 자연의 생명과 죽음과 연관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자연의 재생산과 시간의 재시작을 상징한다. 인생의 큰 전환점인 출생, 결혼, 죽음에는 중요한 순간인 만큼 각 민족마다 통과의례의 풍습이 있었는데, 이 의례 절차에서 대부분 나무를 심음으로써 나무와 인간의 운명을 밀접하게 관련시켰다. 이처럼 나무가 인간 삶의 중요 의례와 동반되는 것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 가운데 특히나 나무가 삶의 모든 총체인 시간을 유사하게 공유한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 또한 원시신앙으로부터 이어온 민속신앙에서는 나무가 하늘, 땅, 지하 세계를 잇는 우주의 축이며, 특히 대지에서 싹을 터 한 몸이 된 존재로서 대지신의 신체로 보기도 하였다. 해가 뜨고 비를 내리는 하늘과 직접 생산을 담당하는 땅을 남성과 여성의 관점으로 본다면 땅은 지모신(地母神)으로서 모성적 신앙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땅과 한 몸을 이루는 나무 또한 여성원리를 간직한 대상으로 여겨져 왔다. 이러한 의미로 보자면 김은진 작가에게 나무는 넓게는 인간을, 좁게는 한 여성을, 더 좁게는 작가 자신을 상징하는 매개체이다. 그리고 이 여성성의 원리에는 비단 작가가 여성이어서 일뿐 아니라 늘 작품을 생산해야하는 작가의 업을 가졌다는 점에서 그 원리를 공유한다.

김은진_겹쳐진 시선_한지에 채색_162×112cm_2018
김은진_붉은 숲-감정_한지에 채색_100×100cm_2018

그렇다면 동양화를 전공한 작가로서, 서울이라는 대도시가 구축한 도시적인 관계망의 체험자로서, 긴 시간 일정 가치관을 지향해온 한국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작가가 체험했던 우리 사회와 지금의 사회가 바라보는 시간의 속성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 원론적인 이야기로 시작해 보면, 시간은 우리에게 세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바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이다. 그런데 이 셋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시간은 미래를 현재로, 현재를 과거로 만들기 때문이다. 오직 과거만이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다. 이러한 과거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는 "과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과거는 실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과거는 현재 안에 앙금을 남기며 온갖 필연들을 쌓아 놓는다. 그럼으로써 과거는 현재의 원인 중 하나가 된다. 또한 과거가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의 증조할머니가, 세종대왕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현재에 속하지는 않지만 분명 한 때는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 그런데 근대 이후 대량 생산을 통해 성립된 자본주의 사회는 시간을 분절하여 관리하는 것이 생산성을 높이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해서 특히 노동력이 집약된 도시에서는 이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현재를 늘 미래를 위한 수단으로 여기도록 강조하였다. 이에 따라 과거보다는 현재를, 현재보다는 미래가 중시되어 왔고, 과거, 현재를 미래의 수단으로 의식하는 관점은 늘 새로운 정보로 빠르게 업데이트 되어가는 우리 사회에서 더욱 강요되어 왔다. 지난 수십 년간 우리 사회는 경제 성장을 위해 질주해 왔고 그 결과 짧은 시간 안에 목표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 성공의 이면에는 빠른 목표 달성을 위해 주입된 공동체를 위한 관점들이 일률적인 가치관으로 남게 되었다. 유독 우리 사회에서는 한 개인의 개성이나 능력에 맞게 판단하려 하지 않고, 특정 대학, 특정 직장, 특정 배우자를 선호한다. 서울의 대다수가 아파트에 살고, 그 일률적인 척도로 성공을 가늠한다. 이러한 일괄된 사회 속에서 인간도 그 기준에 맞는 인간을 두고, 그 평균 인간을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여겨온 것이다.

김은진_원_삼베에 채색_50×50cm_2018
김은진_사잇길_한지에 채색_19×33.5cm_2018

김은진 작가의 삶은 아마도 우리 사회가 원하는 이러한 이상적인 인간상에 가까웠을 것이다. 대체로 온건하고 성실하며, 실패를 하지 않고 남들에게 신뢰받는, 어떤 그룹에서도 무난하게 받아들여지는 사람 말이다. 그런데 이런 삶을 자의적, 타의적으로 유지해온 작가는 알고 있다. 그 이상적인 인간상에 맞추기 위해 본질적으로 다름과 개성을 품고 있는 그 사람을 부단히도 다듬어야 된다는 사실을. 작가는 특별한 감수성으로 인간관계 안에서 서서히 생성되는 미묘한 흐름들을 캐치한다. 한 존재가 관계망을 구성하고, 그 관계가 복잡하게 얽히며 확산될수록 우리 사회의 스테레오타입에 대한 압박감은 심해진다. 이 스테레오타입은 아주 유별나게 재능이 많거나,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인색하거나, 사치하거나, 고매하거나, 이치를 따지는 비평균적인 인간을 싫어하고 배척한다. 누군가가 특별히 잘되거나 잘사는 사람에게는 질투로, 그 질투가 헐뜯는 일로 곧잘 진전한다. 또 특별히 고생하거나 마음의 상처를 가진 사람에 대해서는 마치 자신이 그렇게 될까봐 회피하듯 거리를 둔다. 다시 말해 평균인간 이상으로 뛰어나도 소외 요소가 되고, 평균 인간 이하로 떨어져도 소외 요소가 되는 것이다. ● 이러한 관계의 잣대를 체득적으로 감지한 작가는 수없이 뻗어간 나무의 잔가지 속에서 그 인간 삶의 복잡한 면모를 비추어 본다.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는 결코 일괄된 기준으로 파악될 수 없다는 것을 다양한 나무의 모습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한 존재가 품고 있는 다층적인 면모는 어느 한 시점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과거의 시간이 누적되면서 현재의 자기를 이루어가고 과거의 흔적은 현재 속에서 새로운 관점으로 덧입혀지면서 끊임없이 변화의 과정을 겪어갈 수 있다. 따라서 한 개인의 과거, 현재, 미래로 이루어진 삶의 총체인 시간을 바라볼 때, 과거를 현재를 위한 도구로만 볼 수 없고, 현재를 미래를 위한 희생으로만 강요할 수 없다.

김은진_보이는 것 만큼_한지에 채색_112.1×162.2cm_2018
김은진_숲_한지에 채색_193.9×130.3cm_2018

과거에 대한 상반된 관점을 두 명의 소설가에게서 찾을 수 있다. 스콧 피츠제럴드(Scott Fitzgerald, 1896-1940)는 과거가 그 어디에도 없으며 갓 지나간 순간마다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깊은 구렁 속으로 사라진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는 깊이 파묻힌 행복의 순간들은 영원히 잃어버린 것이고, 절대 돌이킬 수 없기에 아픈 것이라고 생각했다. 반면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는 기억을 순화하는 작업을 통해 옛날의 행복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떠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과거의 인상을 어떤 것을 매개로 기억의 표면으로 다시 불러낼 수 있으며, 잃어버린 것을 되찾음으로써 참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과거를 설명하는 두 입장은 모두 설득력이 있다. 과거의 어떤 사건을 시간은 돌이킬 수 없게 또는 잊혀지게 만들기도 하지만, 상황이 제거된 순화된 기억은 우리의 현재를 더 풍요롭게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김은진_시선의 겹展_갤러리 도스_2018
김은진_시선의 겹展_갤러리 도스_2018
김은진_시선의 겹展_갤러리 도스_2018

또한 시간을 직선적인 흐름이 아니라, 동양화에서 오랫동안 담고자 했던 순환적인 흐름으로 본다면, 시간의 끝이라 생각되는 앙상한 가지는 어린 새싹의 과거가 된다. 이처럼 나무가 계절에 따라 순환하는 시간 속에서는 모순적이지만 미래가, 현재가 과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삶에서 중요한 순간들을 이야기할 때와 닮아 있는데, 우리는 병에 걸리거나 사랑에 빠지거나 마음에 큰 상처를 받은 일들을 일어난 순서에 따라 중요도를 매기고 정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간과 인간 존재는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다. 때문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가 그의 저서에서 존재와 시간을 함께 사색하기로 선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시간을 통해서만 존재를 이해할 수 있고 존재를 통해서만 시간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존재와 시간에서는 바로 조그만 접속사 '와'에 중대한 문제가 숨어 있다. 아마도 김은진 작가는 이 '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일 것이다. 그런데 이 '와'의 이야기는 앞으로의 미래가 어떻게 다가올지 모르기 때문에 언제나 비정형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순환하는 시간, 주관적인 시간 속에서는 과거 또한 열린 텍스트가 된다. ● 이에 작가는 나무로 대변된 인간 존재와 시간의 관계를 말하기 위해 물감을 수없이 덧바르면서 시간의 흔적을 남긴다. 이 시간의 흔적은 처음에는 선명했지만 덧바름을 통해 지워지면서 또는 잊혀지면서 두께감이라는 존재로 남는다. 이 두꺼운 층을 구축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덧칠하는 붓질 속에서 시간은 순환된다. 그리고 그 순환하는 시간 속에서 작가는 과거의 상처들을, 그리고 관계 속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지워간다. 때론 찬란했던 기억으로 남기고 싶은 과거는 방해말 가루를 크기에 따라 선택적으로 구사하면서 반짝임이 더 선연해지도록 각인시킨다. ● 대체적으로 그녀의 나무들은 모호한 경계를 갖는 색채의 층위에 위치함으로써, 그리고 흘러내리는 안료가 만들어낸 추상적인 공간에 놓임으로써 절대 명확하게 인지할 수 없는 관계들을 암시한다. 타인의 생각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놓고 다가갈 수 없는 두려움은 관계를 맺으면서 언제나 따라오는 감정이다. 때로는 관계 속에서 갖는 탐색에 대한 피곤함 때문에 보여지거나 보는 시선을 차단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작가는 그러한 감정을 벽에 막혀 일부만 드러내는 나무로, 또는 불투명한 창을 통해 어른거리는 나무의 실루엣으로 나타낸다. 인간 존재는 사회 속에서 관계를 맺지 않고 살 수는 없지만 아무리 많은 관계를 맺으며 뻗어가도 자기에게 다가올 미래는 모른다는 것과 타인의 속내는 알 수 없다는 사실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사실이 긍정적일지 부정적일지는 그 또한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세상의 표상, 관념과 사물, 존재와 변화 사이에 있을 수 있는 관계를 놓고 무모하게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사람은 예술가뿐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은진 작가의 앞으로의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고 싶다. ■ 이현경

Vol.20181017i | 김은진展 / KIMEUNJIN / 金恩眞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