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그림자

강경구展 / KANGKYUNGKOO / 姜敬求 / painting.sculpture   2018_1018 ▶︎ 2019_0113

강경구_우러라 우러라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0×259cm×2_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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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8_1018_목요일_05:00pm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료 / 2,000원(카페 음료 주문 시 무료)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주말,공휴일_10:30am~07:00pm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Art Center White Block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헤이리마을길 72 Tel. +82.(0)31.992.4400 www.whiteblock.org

먼 그림자, 혹은 현실의 배꼽-강경구의 미술현상학과 그 상징들"'물의 상징'은 잠재적 가능성·근원성·형상 이전·창조적 힘의 원천·생명의 근원·풍요·치유·정화(淨化)·소멸·재생 등을 표상화(表象化) 한다." (정진홍, 『엘리아데 종교와 신화』, 살림, 2003) ● "물은 생명을 만들어내고 유지시키는 창조적, 생성적 바다이며, 살아 있는 물은 정체성이 담긴 물질, 영혼이 담긴 물질, 자아가 담긴 물질이다." (베로니카 스트랭 지음, 하윤숙 옮김, 『물-생명의 근원, 권력의 상징』, 반니, 2015) ● 이번 전시의 주제와 제목은 '먼 그림자'이다. 2010년 5월, 갤러리 스케이프가 기획한 개인전이 『먼 그림자』였고, 2011년 6월의 사비나미술관 전시도 『먼 그림자-산성일기』였다. 2008년에는 같은 이름의 작품 「먼 그림자」(캔버스에 아크릴 채색, 112.1×162.2cm)를 그렸고, 2011년에도 「먼 그림자」(켄트지에 목탄, 76×112cm)를 그렸다. 그에게 '먼 그림자'는 어떤 의미일까?

강경구_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_합판에 수묵_244×244cm×2_2018

거룩한 하루 ● 2003년 갤러리 피쉬에서 기획전 『다섯 사람 여행도』(7.16~7.29)가 있었다. 이 전시를 소개하는 글에 "다섯 작가가 2003년 2월 6일부터 22일까지 인도의 뭄바이, 아잔타, 조드푸르, 자이살메르, 바라나시 등을 여행한 후의 기록"이라고 적혀있다. 다섯 작가는 강경구, 안창홍, 김성호, 김을, 김지원이다. 강경구는 그 이전에도 인도에 간 적이 있을까? 인도를 방문한 뒤에(혹은 인도에서) 그는 스스로 깨달음(自覺)의 어떤 순간을 맞이한 듯하다. 그 이후 15년의 시간을 오롯이 '먼 그림자'의 세계를 궁구했고, 그것의 회화적 장면들을 그리고 있으니까. 그가 그곳에서 맞닥뜨린 깨달음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그때 그 하늘, 그 강, 그 시간, 그 사람, 그 주검들, 그 영혼들.... 어쩌면 그 순간들이 혹 '성현(聖顯, 성스러움의 현현)'과의 마주침이 아니었을까? M. 엘리아데는 성현을 '존재의 드러남'으로 바꾸어 말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스스로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 그것이 곧 '성현'이라고. 인도인들에게는 성현이 삶의 지루한 일상일 수도 있겠으나, 그가 마주한 갠지스강에서의 순간은 분명히 '다른 실재'였을 것이다. 그에게 그곳의 장면들은 그가 살아온 일상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기 때문에. 그러므로 인도에서의 나날은 그에게 그들과는 다른 하루로서 '거룩한 하루'였을지 모른다. 엘리아데는 성현을 삶 속에서 만나는 직접적인 실재라고 했다. 어떤 사물이 하나의 실존 주체에게 의미를 지닌 실재로, 곧 성(聖)으로 드러났을 때 그것은 실재이고, 거기 그것이 있어 그렇게 경험되는 것일 때 또한 그것은 의식의 현상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성현은 '경험적 실재'이며 거룩한 것의 드러남이다. 그러므로 그가 '실재'를 깨닫게 된 순간의 하루는 거룩한 하루일 것이며, 그 하늘은 거룩한 하늘이요, 그 강은 거룩한 강이며, 그 시간은 거룩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 강에서 '먼 그림자'를 떠올리며, "현실과 피안의 세계를 종횡하는 수없는 영혼의 교차가 그들을 그토록 신념화시켰을까? 내세를 관통하는 정신적 힘이 그들을 그렇게 단단히 무장시켰을까?"를 의문했다. 1) '현실과 피안의 세계를 종횡하는 수없는 영혼의 교차', 바로 그것이 그가 궁구하는 '먼 그림자'의 어렴풋한 실체라는 생각이다. ● ""떠나가는 배에 가득한 영혼과 영혼들의 만남, 그 도도한 흐름들. 강은 꼭 그 강의 너비만큼 우리를 저들과 갈라놓는다. 다가설 수 없는 영혼들. 그들은 결코 우리를 거부하지 않지만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 의해 거부되고 있다." (강경구, 「天竺國에서」, 2003)

강경구_DMZ_합판에 판각_122×61×58cm_2018

'먼 그림자'의 첫 화두 ● '먼 그림자'는 그림자가 멀리 있다는 뜻일 터인데, 그 의미를 밝히려면 그림자는 누구의 그림자이고, 왜 그림자는 멀리 있는 것인지를 살펴야 할 것이다. 2008년 학고재의 전시는 『강경구展』이었다. 그는 이 전시에 아크릴 채색으로 그린 「먼 그림자」와 「구름바다」를 출품했다. 벌거벗은 인물이 발목 깊이의 물에 들어가 가만히 물을 응시하고(아니면 사념에 잠겼거나), 또 뒷짐 지고 앉아서 어딘가를 바라보는 모습이다. 「먼 그림자」와 「구름바다」의 인물은, "흙으로 사람을 짓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니 '생령(生靈)'이 되었다"는 신화를 떠올리게 한다(창세기 2장). 왜냐하면 그 인물은 사람의 형상이지만 그의 몸은 온통 붉은 흙빛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마치 '최초의 사람'처럼 보인다. 그런 그가 허리를 숙여 물속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다. 물에 앉아서 구름바다를 보고 있다. 그가 바라보는 곳, 그러니까 '그림자'는 물속에 있거나 구름바다에 있는 게 아닐까. 수면(水面)의 안팎을 깊게 들여다보는 일은, 고대 샤먼들이 청동거울에 어린 먼 그림자를 찾는 것과 다르지 않다. 샤먼은 청동거울의 수면에서 과거를 꺼내어 해원(解冤)했고, 미래를 살펴서 기원했다. 그렇다면 '먼 그림자'는 우리 삶의 전경(全景)과 후경(後景)일 것이 분명하다. 눈앞의 현실을 전경, 눈 뒤의 현실을 후경이라 해보자. 전경은 생생한 삶의 현실이고, 후경은 그 현실에 맞붙은 현실 너머의 비현실/초현실의 세계일 것이다. 풀어 말하면, 우리 눈앞에 펼쳐진 현실이 전경이라면, 후경은 현실 너머에 있는 현실의 배꼽과 같은 그 무엇이다. 후경은 전경의 그림자와 같아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으며 만져지지도 않는다. 신체의 감각을 내려놓은 자리에 영혼의 감각을 불 틔워야만 느낄 수 있는 그 무엇이라 할 수 있다. 2) 「먼 그림자」의 인물은 어떤 실체로서의 '누구'라기 보다는 존재의 원형과 같은 어떤 '추상(抽象)'이지 않을까? 강경구는 「다섯 사람 여행도」 전시에 자화상 「十一面觀世音」을 걸었다. 드로잉으로 그린 자화상은 벌거벗었고 그야말로 여러 얼굴과 여러 손을 가졌다. "스스로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의 표현이리라. 얼마 전에 작고한 시인 허수경은 "나는 마음이 썩기를 원한다. 오로지 몸만 남아 채취되지 않기를, 기록되지 않기를, 문서의 바깥이기를. 이것이 마음의 역사이다. 그 역사의 운명 속에 내 마음의 운명을 끼워 넣으려 하는 나는 언제나 몸이 아플 것"이라고 했다. 갠지스강에서 강경구는 불로 활활 타는 육신과 그 육신이 떠내려가는 강물을 보면서 그와 같은 생각을 했으리라. 문서의 바깥에서 마음의 역사로 남는 존재를 사유하면서, 추상같은 원형질의 존재를 떠올리면서. 그가 궁구해 온 15년의 '먼 그림자'는, 그 역사적 상상력은, 아니 그 신화적 상상력은 이승의 이 현실과 저승의 저 현실이 맞붙은 곳에서 생생화화(生生化化)로 피어난 풍경일지 모른다. 그는 그 풍경으로 잠입하기 위해 종종 「먼 길」(캔트지에 목탄, 2014)의 사내처럼 이승과 저승 사이를 흐르는 레테의 강을 건너는 것이고. ● "제 삼의 눈이었다. 그 눈은 양미간 그 어디쯤엔가 있어 그 곳을 통해 그들은 현세와 내세를 왕래하고 있었다. 시공간을 초월한 끝없는 허공 속으로 영혼의 간단없는 울림을 토해내고 또 감지해 내고 있었던 것이다." (강경구, 「天竺國에서」, 2003)

강경구_먼 그림자-썰물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4×259cm_2018

다시 '먼 그림자', 물의 씨알 ● 강경구는 작년과 올해 '먼 그림자' 여섯 점을 더 그렸다. '먼 그림자'에 딸린 부제는 「북서풍」(2018), 「썰물」(2018), 「바람소리」(2018), 「역사의 시간」(2017), 「운석」(2017), 「아름다운 것들」(2018)이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은 여전히 황토 빛의 '흙사람'이다. 첫 「먼 그림자」(2008)의 인물보다 더 강렬하다. 환한 흙빛으로 힘차다. 흙덩이 같기도 하고, 불덩이 같기도 한 인물을 보고 있으면 뜨거운 기운마저 느낀다. 그것이 생령의 '(뜨거운) 숨결'인지 아니면 활활 거리는 불의 심장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몸이 불의 몸이요, 대지의 뜨거운 존재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가스통 바슐라르가 『몽상의 시학』3) 에서 "불들은 우리의 기억에, 아주 오래된 추억 너머에서 잠들어 있는 태고의 삶이 우리 속에서 그 불꽃으로 깨어나서, 우리의 비밀스러운 넋의 가장 깊은 나라를 우리에게 계시해줄 만한 힘을 행사한다."고 했을 때, 바로 그 불꽃으로 깨어난 넋의 가장 깊은 곳을 생각할 뿐이다. 그런데 그 불의 이미지는 그의 작품에서 언제나 물과 더불어 현존한다.「먼 그림자-썰물」은 뜨거운 불/흙의 존재가 몸을 숙인 채 왼손으로 찬 물을 한 움큼 떠올려 보는 장면이다. 물을 가만히 응시하던 「먼 그림자」(2008)의 존재가 10년의 시간을 건너와 '물의 얼굴(水面)'을, 그 푸른 얼굴에 스민 먼 그림자를 슬쩍 떠 보는 것일 터. 물밀어 들었다 빠지는 썰물에서 그가 본 그림자는 무엇일까. 물은 근원이자 원천으로서 모든 존재 가능성의 저장소라고 엘리아데는 말했다. 또 물은 모든 형태에 선행하며 모든 창조를 받쳐줄 뿐만 아니라, 모든 창조의 모델이 되는 이미지는 물결 한 가운데 갑자기 나타나는 '섬'의 이미지라고도 했다. 반대로 침수는 형태 이전으로의 퇴행, 존재 이전의 미분화상태로의 회귀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물의 상징은 죽음과 재생을 모두 내포하고 있을 터. 4) 엘리아데가 『이미지와 상징』에서 사유한 물의 상징은 강경구가 회화적 사유로 드러낸 물의 상징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먼 그림자-북서풍」은 불/흙의 존재가 숲으로부터 걸어 나오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숲은 숲 본래의 생태적 순환을 가진 생명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은 어둠이요, 닫힌 세계이며, 탈주할 수 없는 경계선처럼 보인다. 그곳으로부터 불/흙의 존재가 물의 상징 속으로 걸어 들어오는 장면이랄까. 그는 지금 물결 한 가운데에 갑자기 성현으로 드러난 존재의 섬일 것이다.

강경구_먼 그림자-아름다운 것들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4×518cm_2018

「먼 그림자-바람소리」는 「먼 길」(켄트지에 목탄, 캔버스에 아크릴 채색, 2014), 「먼 길」(목탄화, 2015)의 장면성을 그대로 잇는 작품이다. 「먼 길」(아크릴 채색)이 불타는 하늘의 검은 바다를 건너는 푸른 존재라면, 「바람소리」는 달빛이 짙게 깔린 물결을 헤치며 건너가고 있는 그림자 존재다. 그 존재는 몸의 균형을 잡듯이, 물을 거슬러 가듯이, 두 팔을 벌리고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 건너는 그의 뒷모습은 짙고 어두운 그림자이다. '검은 바다'는 늪과 같아서 잔물결조차 일지 않으나, '바람소리'는 달빛에 튕겨서 일어서는 푸른 물비늘을 타고 이편으로 실려 오는 바람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일까? 불현 듯 그의 그림자 뒷모습에서 '먼 그림자'를 본다. 처음에 나는 그림자가 '누구의 그림자'인지를 물었는데, 그것은 이제 바다의 그림자 같고, 역사의 그림자 같고, 신화의 그림자 같다. 그 '먼 그림자'는 그래서 남한산성이었다가 숲이었다가 별밤이었다가 부유하는 숱한 '가슴들'이었다가, 여행자가 된다. 강경구는 물속에 서 있는 네 명의 존재들을 그려 놓고 「꽃은 언제나 하늘 속에 있다」(2014)고 이름 붙였다. 그 존재들 여섯이 첫 「먼 그림자」처럼 무릎을 구부리고 허리를 숙여 물을 응시한다. 이번에 「먼 그림자-아름다운 것들」이다. 하나에서 넷이 되고 여섯이 되는 그가 깨달은 것은 "물은 근원이자 원천으로서 모든 존재 가능성의 저장소"라는 인식이 아닐까. 그러면 물은 또 어디에서 왔을까. 「먼 그림자-운석」은 물의 상징이 '운석'이라는 돌에서 비롯되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때 돌은 돌이 아니다.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운석은 그의 '꿈꾸는 머리'(혹은 잠자는 머리)이다. 그러므로 운석은 물의 씨알을 품은 몽상의 시학이라 해야 할 것이다. ● "깊은 바다가 걸어왔네 / 나는 바다를 맞아 가득 잡으려 하네 / 손이 없네 손을 어디엔가 두고 왔네 / 그 어디인가, 아는 사람 집에 두고 왔네 // (...) 바다가 안기지 못하고 서성인다 돌아선다 / 가지 마라 가지 마라, 하고 싶다 / 혀가 없다 그 어디인가 / 아는 사람 집 그 집에 다 두고 왔다" (허수경, 「바다가」,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창작과 비평사, 2001)

강경구_흐르지 않는 강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59×388cm×2_2018

현실, 기우뚱 거리는 ● 「우러라 우러라」 연작은 여덟 점이다. 이번 전시에서 주목할 것은 '먼 그림자'의 세계에서 '우러라 우러라'의 풍경으로, '흐르지 않는 강'의 군상으로 전화(轉化)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러라 우러라'는 「청산별곡」의 시어(詩語)이다. "우러라 우러라 새여 자고 니러 우러라 새여. 널라와 시름 한 나도 자고 니러 우니로라."의 '우러라'는 현대어로 '우는 구나' 또는 '울어라'이다. 이 시는 현실과 세속을 피하는 공간으로 '청산'과 '바다'를 그린다. 화자는 그곳을 동경하지만, 현실은 술로 시름을 달래거나 포기할 수밖에 없는 고려인의 삶과 비애를 노래한다. 강경구의 「우러라 우러라」는 「청산별곡」의 시적 비애를 공유하나 현실을 피하는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드러내는 회화적 풍경은 지극히 현실에서 비롯된 것이며, 역설적으로 그 현실적 풍경이 아이러니하게도 너무나 비현실적이었을 따름이다. 그가 그 풍경을 두고 술로 시름을 달래거나 포기하려고 했던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는 덕소 건너편의 새로 뚫린 춘천고속도로 아래 한강변에서 외래종 넝쿨식물이 강변 숲을 완전히 뒤덮은 장면을 목격했다. 덤불 그물을 씌워 놓은 듯 숲 전체를 장악하고 포섭해 버린 그 장면에 그는 소스라쳤다. 소름 돋는 경악이었다. 무어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모습에서 그가 떠올린 것은 우리 현실이었다. 굳이 포스트 식민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우리 현실은 온갖 외래적인 것들로 뒤덮여 있지 않은가. ● 그는 그 장면들을 회화적으로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그 숲은 회화적 상상을 위한 실마리일 뿐이다. 그가 구상한 것은 외래종의 식물과 그 내부의 나무들을 마치 군상처럼, 살아있는 어떤 사물들처럼 배치하면서 '역설적 정황'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역설이나 갈등으로 서술될 수밖에 없는 삶을 인식의 논리를 통해 해체하여 그렇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역설과 갈등을 포함하는 전체적인 '구조'의 수용을 통하여 그러한 현실을 넘어서게 하는 것"으로서의 상징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 속 덩어리들은 색채의 현란한 생동감으로 넘쳐날 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서로 견제하고 밀어내고 부딪히면서 '갈등'의 구조를 불러일으킨다. 심지어 푸른 색 군상들이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작품은 그들을 뒤덮은 넝쿨식물을 머리로 받아서 밀어내는 형국인데, 그 모습이 마치 어깨를 걸고 거리를 행군하는 시위대 같기도 하다. 또 비슷한 녹음 짙은 인물들의 군상은 하나하나가 기념비처럼 서서 기우뚱 거린다. ● "우리는 그들의 삶 속으로 결코 한 발자국도 다가설 수 없었다. 그들의 삶은 예측할 수 없는 어떤 계시에 의해 혹은 완고한 어떤 운명의 힘에 의해 지탱되고 있었다. 소위 21세기 문명사회의 일반적 사고로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을 것 같은 그래서 많은 우리의 예상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는 그들이었다." (강경구, 「天竺國에서」, 2003)

강경구_무제_종이에 혼합재료_109.5×79cm_2018

회색인, 멈추어 선 존재들 ● 2003년의 기록에 "그 곳에는 시간이 흐르고 있지 않았다"는 표현이 있다. 그러면서 "무엇일까? 그들을 이끄는 힘은. 어떤 보이지 않는 실타래에 의해 조종되고 있는 듯한 사람들."이라고 적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로부터 십 수 년이 지난 뒤, 우리 현실도 그와 비슷하게 흘렀다. 우리의 정치적 현실이 그랬고 그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의 풍경이 이어졌다. 그 시간은 불가항력이었다. 흐르지 않는 시간은 고스란히 흐르지 않는 강과 다르지 않았다. 현실로 직립해 들어가는 회화가 아닐지라도 그의 회화는 늘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에 그 풍경을 더듬기 시작했다. 「먼 그림자」, 「먼 길」의 존재들이 찰랑거리는 푸른 물결을 걷고 서고 건넜다면, 「흐르지 않는 강」의 존재들은 죽은 강가에 앉거나 서서 서성거릴 뿐이다. 흐르지 않는 강은 죽은 강이지 않겠는가. 그래서 색은 한 없이 무채색이고 사람들의 눈빛은 텅 비었으며 비스듬한 계단은 불안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각각의 사람들은 모두가 낱낱이다. 여럿을 그렸으나, 그 여럿은 홀로 여럿일 뿐이다. 고립이요, 고독이며, 소외이다. 이 작품과의 적절한 비교는 최인훈의 『회색인』일지 모른다. 1963년 6월부터 1964년 6월까지 『세대』에 연재한 소설이지만, 이야기 배경은 1958년 가을부터 1959년 여름까지다. 한국전쟁 이후 젊은이들이 겪는 갈등과 고뇌는 물론, 4.19혁명 직전의 우울과 전망을 동시에 보여주는 작품인 것. 무엇보다 당대 우리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날카롭게 드러내면서 지적이고 비판적인 성찰을 담아낸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소설 속에서 등장인물 독고 준은 현실로부터 스스로를 소외시키며 적응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상념의 시간들을 보내는 자신의 비겁함과 소심함에 끊임없이 갈등하는 인물이다. 강경구의 「흐르지 않는 강」의 인물들도 모두 '회색인'이다. 1958년으로부터 60년이 지난 2018년의 현실 또한 지난 두 정부를 살아야 했던 많은 사람들의 고뇌와 우울과 소외가 만만찮았다. 촛불 시민혁명 직전의 우울과 전망은 4.19혁명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강경구는 그때와 동일하게 모순과 부조리가 판쳤던 우리 사회를 성찰했다. 그리고 독고 준처럼 스스로를 소외시키며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어디로도 흐르지 않았고 그래서 멈춰버린 존재들이었다. 전망 없는 시대의 존재론적 고뇌와 고통이 이어졌다. ● "다가설 수 없는 영혼들. 그들은 결코 우리를 거부하지 않지만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 의해 거부되고 있다. 놀람과 충격과 경외감. 도저히 답변이 불가능할 것 같은 질문, 질문들. 그들은 도대체 누구이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 (강경구, 「天竺國에서」, 2003)

강경구_무제_종이에 혼합재료_109.5×79cm_2018

드로잉, 사유의 파편들 ● 그의 드로잉은 한 편의 시적 조형물 같다. 깊게 생각한 뒤에 '한번 그음'으로 완성해 나간 드로잉들은 한 편 한 편이 하나의 서사를 구축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놀라운 회화성을 획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몇몇 드로잉이 「우러라 우러라」의 밑 작업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수적인 것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강렬한 색채를 드러내는 작품과 달리 호분을 호방한 붓질로 붓춤을 추듯 칠해나간 드로잉에서 더 힘찬 골계미를 느낀다. 붓의 질감이 살아서 덧칠하고 덜 칠한 흔적들이 먹의 농담보다 더 생생하게 묻어나는 형국은 산세나 기세의 기운생동을 실감으로 끌어 올린다. 농묵(濃墨)이 짙게 배었으되 가장자리가 슬쩍 번지는 먹의 효과와는 비교할 수 없는 흔적들이다. 그러니 이 드로잉들에서는 '군상'이 아니라 겸재의 인왕재색이 먼저 떠오른다. 표암 강세황의 『송도기행첩』에 실린 '태종대'를 보는 듯, '영통동 입구'를 보는 듯, 그 그림들 속의 큰 바위를 큰 집으로 그린 듯한 드로잉들은 또 어떤가. 압도하는 덩어리들로 화면을 구성했으되, 얼기설기한 덩어리들의 배치에도 불구하고 꽉 짜인 균형은 그 어떤 회화보다도 일품의 멋이다. 게다가 그 덩어리들 속 어딘가에 빈틈의 창을 내고 인물을 그려넣은 꼴이 꼭 '매화초옥도'의 한 장면이다. 매화도 초옥도 없이 '매화초옥도'을 떠올리게 하다니! 첩첩산중인양 덩어리와 덩어리가 집과 집으로 첩첩을 이룬 장면들이기는 하나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선 창문과 작은 인물이 숨을 틔워서 첩첩을 연다. 나는 이 드로잉들에서 그의 작품 세계가 다시 진일보하는 어떤 세계로 넘어가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가 그동안 보여주었던 '먼 그림자'의 세계는 물의 세계였고 물의 상징이었으며, '존재'를 질문하는 세계였다. 그런데 이 드로잉의 세계는 현실과 잇닿아 있으면서도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회통하는 사념적 세계관을 동시에 표출하고 있다. 건축용 '아시바'를 현실 세계의 위태로운 그물망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그 그물망이 다시 한 존재와 이어져서 나무가 되거나 의자가 되고, 실이 된다. 현실계와 상상계가 접경을 이룬 곳의 회화는 강경구가 이 세계에 던지는 새로운 상징언어다. 나는 그 언어에서 오래 누워 있었고, 오래 앉아 있었으며, 또 오래 서 있었던 미륵을 떠올리기도 한다. 운주사 와불과 금동 미륵 반가사유상과 바위처럼 서 있는 풍찬노숙(風餐露宿)의 미륵불들을. 하지만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 단정해서도 안 될 것이다. ● 강경구의 사유는, 그 사유의 파편들은 드로잉으로 풀릴 때 너무도 자유로워서 그 세계의 현상학이 어디로부터 비롯되는지 알기 힘들어 보인다. 어쩌면 그 스스로가 '먼 그림자'여서 자신의 존재론적 고뇌를 풀어 헤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그 고뇌의 시작은 그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의 배꼽이지 않을까. 그 배꼽이 곧 중묘지문(衆妙之門)이고. ■ 김종길

* 각주 1) 강경구, 「天竺國에서」, 2003. 평론을 준비하면서, 그가 쓴 이 글을 여러 번 정독했다. 짧은 에세이였으나, 2003년의 이후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좋은 실마리를 제공했다. 각 소주제별로 에세이의 부분들을 발췌해서 싣는다. 2) 김종길, 「굿춤의 눈물, 환희, 그 소리들-조습의 해학적 카오스와 사진미학」, 2018. 3) 가스똥 바슐라르 저, 김현 역, 『몽상의 시학(기린총서 34)』, 기린원, 1989. 4) 미르치아 엘리아데 지음, 이재실 옮김, 『이미지와 상징-주술적 종교적 상징체계에 관한 시론』, 까치, 1998. 참조.

Vol.20181018f | 강경구展 / KANGKYUNGKOO / 姜敬求 / painting.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