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득이하게 Unavoidably

윤기언展 / YOONKIUN / 尹基彦 / painting   2018_1019 ▶︎ 2018_1101

윤기언_풀_화선지에 수묵_70×824cm_2018_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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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8_1019_금요일_06:00pm

서울문화재단 2018 예술작품지원사업 선정展

후원 / 문화체육관광부_서울특별시_서울문화재단

관람시간 / 01:00pm~07:00pm

스페이스 나인 SPACE 9 서울 영등포구 경인로 739(문래동2가 4-2번지) 2층 Tel. +82.(0)2.6397.7253 www.facebook.com/space9mullae

부득이 하게, 그러나 필연적으로 - 윤기언의 '공간 이야기(spacial stories)'Ⅰ. 소통과 교감을 위하여_윤기언의 시각 언어 ● 이 시대에 예술 창작이 부여하는 의미는 다양하다. 치유, 화합, 발언, 통섭, 호명 등, 21세기를 표상하는 수많은 단어들이 창작의 화두가 되어 다양한 물성으로 시각화 된다. 윤기언도 동시대의 화두를 그림으로 풀어내는 한국화가이다. 서예가인 부친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 붓을 든 이래 한 순간도 지필묵을 저버린 적이 없는 그는 전통 재료를 매개로 자신만의 조형성을 꾸준히 탐구해왔다. 특히 윤기언은 '소통'과 '교감'에 천착하여, 창작 의지와 이에 내재된 작가의 감정이 관객에게 오롯이 전달되도록 노력해 왔다. 작가의 언술대로, 시각언어란 가시적이거나 혹은 비가시적인 대상을 가늠케 하며 미처 체험하지 못한 세계의 유추를 선사하는 상상과 상징의 기능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윤기언이 탐구한 소통과 교감의 시각언어는 무엇일까. 그는 2003년 개인전에서 '불안'을 이야기했다. 마을 앞 장승, 돌무더기 등 정확하지 않은 사물을 모노 타입의 먹으로 재현하며 형용할 수 없는 에너지를 이입하고자 했다. 그 결과 형상들은 일그러지고 주변과 혼재되어 불안한 감정을 야기했다. 그러나 왜곡된 사물들은 정돈된 채색의 바탕에 견고하게 안치되어 불안이 아닌 안정의 코드를 예고했다. 또한 사람의 얼굴을 신문지 바탕에 그리기고 했다. 하루하루 쏟아져 나오는 뉴스를 활자로 묘사하면서 그 시대를 기록하려는 의도이지만, 화폭의 신문기사는 일부 분절되거나 생략되었다. 객관적 사실 너머 다른 무엇이 있을 것이라는 암시이다.

윤기언_담_한지에 수묵_33×33cm_2018

2005년 개인전 『가지 않는 길』에서는 자화상을 소재로 한 '길 앞에 서다' 시리즈를 선보였다. 윤기언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모색하거나 길을 찾기 어려울 때 마다 자화상을 그린다고 한다. 나의 모습부터 관찰하여 창작의 답을 찾고자 함이다. 그림 속 자화상은 예사롭지 않다. 찡그리고 있거나 불안해 보이며 의심에 가득한 눈초리가 허공을 맴돈다. 선택의 순간 혼란에 빠지는 불편한 자화상이다. 가지 않는 길을 굳이 가기 위해 길 앞에 서 있는 '나'인 셈이다. ● 일련의 작품에서 목격되는 불안과 불편은 자신감의 결여, 결정의 혼란, 전달의 미숙에서 파생된 단절의 감정들이다. 윤기언은 이를 극복하고자 소통과 교감의 또 다른 시각 언어를 고안했다. 바로 '점'이다. 2007년부터 1년간 국립고양창작스튜디오에 입주 작가로 머물면서 화폭에 '점'을 찍어 색을 덧입혔다. 그리고 크고 작은 색점을 비즈 목걸이처럼 연결했다. 점을 찍고 이으니 구체적인 형상이 드러났고, 반복적이고 간결하며 화사한 화면이 형성되었다. 특히 색점에 얼굴을 그린 '구슬 자화상'을 완성하여 제목을 '話(talk)'라고 했다. 구슬 속의 자화상은 환하게 웃고 있다. 불안과 불편의 감정을 해소하고자 일그러진 얼굴 대신 웃는 자화상으로 대화를 시도한 것이다. 아마 윤기언이 생각하는 소통과 교감은 따스한 색점의 연결 고리처럼 반복적이고 간결하며 화사한 것이 아니었을까. ● 이후 윤기언은 손을 그렸다. 인간의 신체기관 중에서 가장 할 일이 많은 손은 동서고금의 미술에서 여러 의미를 표상하는 소재로 활용되었다.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독특한 손짓을 '수인(手印, Mudra)'이라고 하여 절대자의 구도와 가르침, 구원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전달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듣기와 말하기에 장애를 겪는 이들을 위한 수화에서도 손짓은 자음과 모음을 대신하는 언어이다. 그러나 윤기언의 손은 수인이나 수화의 소통 이상의 소통을 지닌다. 특정 손짓을 '원 유닛(one unit)'으로 간주하고 이를 다층적으로 조합한 군상을 창안했다. 결국 색점과 마찬가지로 손짓은 윤기언 만의 시각 언어였던 셈이다. 따라서 하나의 손짓보다 그것이 이룩한 큰 형상이 더욱 중요하다. 이렇듯 그가 생각한 소통과 교감은 하나의 유닛으로는 불가한, 즉 등가의 유닛이 조합된 군상으로만 표출 가능한 감정이다.

윤기언_나무_화선지에 수묵_138×69cm×2_2018

Ⅱ. '나'를 찾는 여정, 부득이하게 그러나 필연적으로 ● 프랑스 철학자 미셀 드 세르토(Michel de Certeau, 1925-86)는 그의 저서 󰡔일상생활의 실천󰡕(The Practice of Everyday Life)에서 현대적 풍경을 이루는 도시를 사유할 때 높은 곳에 올라 풍경 전체를 조망하는 것은 시각적 풍경을 소유한다는 환상만 심어줄 뿐, 지식의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대신 고정되지 않고 이동하는 경험, 즉 걷기를 통해 제안된 장소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이동이 만들어낸 여정은 수많은 '공간 이야기(spacial stories)'를 가능케 한다고 제안한다. ● 윤기언은 올해 봄부터 주변의 소소한 일상과 풍경을 목도했다. 너무 가까이 있어서 소중함을 몰랐던 물건들을 찾아 '자유로운 이동'을 시작한 것이다. 끊임없는 '걷기'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항상 보아 왔지만 무심코 지나쳐 버린 것을 간직해야 한다는 사명감도 생겼다. 마음에 저장하는 방식은 화폭에 끄적이는 스케치와 순간적인 스냅 사진이었다. 주변 사물을 그리고 찍으면서 익숙함이 불러오는 타성이 야기하는 무관심과 이에 내재된 소중함을 동시에 깨달았다. 자유로운 이동을 통해 시선이 머문 곳은 길가에 서 있는 가로수, 담쟁이 넝쿨이 늘어진 돌담,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돌멩이, 길바닥에 놓인 화분, 거리를 떠돌아다니는 고양이와 비둘기, 늘 동네에 서있던 동상 등 각양각색이다. ● 마음을 두니 사물이 달리 보였다. 태풍으로 흔들리는 담쟁이 넝쿨은 아른 거리는 빛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춤사위를 펼치는 공연의 주인공들이다. 우연히 지나친 전 대통령의 동상은 뒷모습의 인상이 남다른 특이한 돌이다. 매일 오고가는 도로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소품들이 어느 순간 짜릿한 진동으로 다가왔고, 이 심연은 직접 보고 확인한 것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전환되었다. 작가는 진동과 심연을 느끼며 두려움과 설렘이 공존했다고 고백한다. 거시적인 것을 애써 외면하고 미시적인 것을 '부득이하게' 재현하게 된 계기이다.

윤기언_담_한지에 수묵_212×459cm_2018

윤기언의 작업 태도는 일견 남송대 화원화가인 마원(馬遠, 12세기 활동)과 하규(夏珪, 12세기)의 소경 산수화를 연상시킨다. 사대부 그림의 기본 철학을 생략하고 소소한 풍경에 시감을 이입하여 아름다운 먹색으로 완성한 그들의 산수화는 감상자에게 낭만과 따스함을 선사한다. 이번 개인전 『부득이하게』의 출품작도 소소한 풍경이다. 그러나 윤기언의 풍경은 장소성과 시간성을 동시에 시사한다. 그리하여 풍경이 부여하는 힘은 묵직하고 강렬하다. 같은 지역에서 다른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 그 장소는 제3의 공간으로 탄생된다. ● 포착된 소재는 평범하지만 표현 방식을 달리하고 싶어, 화선지를 긁어내리는 붓질을 사용했다. 윤기언이 고안한 찰준(擦皴)이다. 속도가 붙은 찰준은 굳이 각각의 사물을 자세히 묘사하거나 화사한 색상을 덧입히지 않아도 대상이 부여하는 특유의 느낌과 분위기를 여과 없이 전달한다. 어찌 보면 윤기언의 찰준은 과거 그가 구사한 색점이나 손과 맥락이 같은 '원 유닛'이다. 그러나 색점과 손이 이성적이고, 객관적이며, 가시적인 유닛이라면, 찰준은 감성적이고, 주관적이며, 비가시적인 유닛이다. 찰준으로 드러난 형상이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이유이다. ● 윤기언은 미술도 하나의 언어라고 생각한다. 전에는 먹을 잘 다루고 형태를 완벽하게 재현하는 것이 작업의 목표였다. 손끝의 기술로 멋진 무언가를 보여주려 하였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표현하는 것이 작가의 본분임을 자각하니 보잘것없는 미물들이 포착되었다. 미적 용도로 존재하지 않았던 것, 그리고 아무렇게나 버려진 것에 생명력을 부여하고 싶어졌다. 김춘수 시인의 『꽃』처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고,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관심의 시작은 '부득이' 했으나 창작의 결과는 '필연적'이었다. 일련의 과정에서 내가 발견되었다. 그림을 매개로 사물과 내가 소통과 교감했기 때문이다. 결국 나와 사물은 하나였다. ● 『부득이하게』는 가장 익숙한 풍경에서 출발했다. 자신이 서 있고 평범한 삶의 시간을 보내는 공간은 작가의 손을 거쳐 유의미한 '필연적' 공간으로 탄생되었다. 이 순간 작가는 사물을 보고, 호명하며, 정체성을 부여하는 이른바 조물주이다. 그리고 작가의 시선이 머문 익숙한 풍경은 단순한 자연이나 인공물이 아니다. 바람과 햇빛이 창조하고 넉넉한 인간의 삶을 부여하는 풍요로운 선경(仙景)이자 마음이 반영된 심상경(心象景)인 셈이다. 이것이 한국화가 윤기언이 부득이하게, 그러나 필연적으로 창출한 '공간 이야기'가 아닐까 한다. ■ 송희경

Vol.20181019i | 윤기언展 / YOONKIUN / 尹基彦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