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박기원_장승택_전명은_조소희展   2018_1101 ▶︎ 2018_1222 / 일,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8_1101_목요일_05:00pm

큐레이터 토크 / 2018_1128_수요일_07: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수요일_10:00am~09:00pm / 일,월요일 휴관

OCI 미술관 OCI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45-14(수송동 46-15번지) Tel. +82.(0)2.734.0440 www.ocimuseum.org

미술 작품에서 위안을 얻어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매우 특별한 경험이라는 점에 동의할 것이다. 작품과 마주한 시선에 온몸이 전율하며 환희와 적막에 빠지고, 찰나일지언정 하나의 세계가 온전히 구축되었다 사라진다는 것을 말이다. 어떠한 말과 글로도 설명이 부족한, 순수한 형상(image)의 세계가 있음을 우리는 안다. ● OCI 미술관의 가을 기획전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시각 예술이 빚어내는 침묵의 세계를 엿보고자 구상되었다. 출발은 예술에 대하여 누구나 한 번쯤 고민해보았을 내용, 즉 "무엇이 예술을 예술답게 만드는가?"라는 질문에서부터였다. 고작 사람이 만들어낸 것인데, 어찌하여 예술품은 우리에게 울림을 줄 수 있는 것일까. 예술도 다변과 요설로 버무려져 있다지만, 그럼에도 어떤 작품은 여전히 누군가의 마음에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렇다면 이 시끄러운 세상에서 한 번쯤 말 없는 미술의 본모습을 찾아가 보면 어떨까. 조형의 원형을 찾아가 보고자 이번 전시에서는 네 명의 작가를 초대하였다. 박기원, 장승택, 전명은, 조소희로, 각기 다른 매체를 다루는 이들의 작업을 통하여 이미지가 주는 함축으로부터 세계의 근원에 도달하고자 하는 시각예술가의 여정에 동참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展_OCI 미술관 1층 장승택 섹션_2018

우선, 1층에서 마주하는 장승택의 작품은 그의 '폴리 페인팅(Poly-painting)'과 '폴리 드로잉(Poly-drawing)' 연작 중 2018년 신작이다. 'Poly-'라는 접두어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는 폴리카보네이트 플라스틱 계열의 재질을 사용하여 회화를 만든다. 붓의 터치가 주는 흔적보다는, 화폭 안에 중첩적인 빛과 색을 담아내는 작업이다. 얼핏 검은색인가 싶어서 가까이 다가가면 초록이, 보라가, 이 색과 저 색이 얇게 도포되어 웅크리고 있다. 'poly-'라는 어휘에 걸맞게, 재질도, 색상도, 기법도, 의미도 다중적이고 다층적이다. 물리적으로는 딱 평면 회화의 화폭만큼 두께를 지녔으면서도, 깊은 곳으로, 더욱 깊은 곳으로 시선을 끌고 들어가는 장승택의 작업은 빛을 내포하는 어둠이자 빛의 반사이다. 감각적인 동시에 인식적인 그의 작업은 불투명한 거울처럼 세상을 담으며 사유의 심연으로 향한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展_OCI 미술관 2층 박기원 섹션_2018

이어 박기원의 「안개」는 비물질이 점유하는 공간이다. 최소한의 개입을 통하여 하나의 공간을 조명하고 볼륨을 드러내는 작업으로, 1층과 2층이 뚫려있는 OCI 미술관의 전시장 특성을 십분 활용하였다. 장소 특정적이라고도 설명되는 박기원의 작업은 장소에 대하여 복잡다단한 내러티브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즉자적으로 감지되는 대기나 분위기 등을 주요 재료로 다룬다. 거시적 시점에서 과감하고도 감각적으로 공간을 읽어내기에, 장소의 구조적 원형성을 유지하면서도 몇 가지 장치를 통하여 전혀 성격이 다른 공간으로 전환한다. 오브제의 형태로 손에 쥘 수도 없고 그저 공기처럼 스며드는 작업으로, 이번 전시에서는 LED 조명과 얇은 비닐을 사용하여 맑고 투명한 깊이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展_OCI 미술관 2층 조소희 섹션_2018

여리고 섬세한 조소희의 작업은 한 걸음, 한 걸음 침착하게 전개되는 지적 여정이다. 얇은 실, 속이 비쳐 보이는 종이, 있는 그대로의 벽면, 높게 펼쳐진 하늘 등 흔히 볼 수 있는 사물과 환경에서부터 세계를 탐색하며, 그 속에서 색과 형태, 언어의 본질에 도달하고자 한다. 결코 예술의 기원에 도달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과정을 포기할 수 없는 아름다운 몸짓이다. 바느질처럼 몸에 밴 손놀림과 반복적으로 축적된 행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그의 작업은 한 땀 한 땀 시간을 잣고 사색으로 침잠하여, 스스로 세계를 투과하는 창이자 세계의 연결고리가 된다. 가느다란 선들의 겹침 속에 나지막이 일렁이는 마음의 웅성거림, 간절함, 고독과 이해, 포용이 모두 담겨 있어서, 한없이 가볍고 고요한 작업이지만 선명하고도 육중한 존재를 드러낸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展_OCI 미술관 3층 전명은 섹션_2018

이윽고 3층에서 마주하는 사진 작업은 전명은의 작품이다. 조각의 표정을 담았다. 매체의 물성과 그 내부 구조를 탐색하는 추상 조각, 석고 모형을 찍은 것으로 얼굴이 없는데도 여간 표정이 풍부한 것이 아니다. 사진의 피사체는 지금은 고인이 된 조각가가 남긴 흔적들이다. 그의 오래된 모형을 꺼내놓고 조각가의 딸, 전명은이 사진을 찍었다. 입체 조형물을 평면 사진으로 옮기고, 아버지의 언어를 딸의 언어로 옮긴 '번역의 번역'이다. 사실, 이미지의 세계에서 번역은 필연적이다. 형체가 없는 진리, 근원, 영혼에 어떠한 모양을 입히는 것은 일종의 언어 없는 번역이다. 찰칵, 셔터를 눌러 실재의 겉모습을 떠내는 사진처럼, 모든 시각 예술은 침묵하는 세계의 표피를 떠내어 우리의 눈앞으로 옮긴다. ● 침묵에 대한 예찬론, 저서 『침묵의 세계』에서 막스 피카르트(Max Picard, 1888-1965)는 형상과 침묵의 사이를 이렇게 정리한다. "형상은 침묵하고, 침묵함으로써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 형상 속에는 침묵이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지만, 그 침묵 곁에는 말이 있다. 형상은 말하는 침묵이다." (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 최승자 옮김(서울: 까치, 2015) p. 103) 형상은 침묵과 말 사이의 경계에 있다. 피카르트는 뒤어이 서술한다. 형상이 그렇게도 인간을 감동하게 하는 것은 그것이 '말 이전의 현존'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라고. 형상은 인간 내부에 현존에 대해 동경을 불러일으키고 이는 영혼에 속한 것이다. 말로 표출되지 않은, 형상이 내포한 함축적인 긴장에 우리는 전율한다. ● 침묵을 해치지 않기에 전달되는 무언의 세계가 있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많아서, 말로는 전부 표현할 수가 없어서, 미술가는 입술을 움직여 단어를 옮겨내는 대신 형상으로 말을 전한다. 언어의 밖에 있어서 오히려 분명하게 보이게 된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네 작가의 작업은 말이 되지 못한 무수한 형상 중의 일부이다. 함부로 말하려 들지 않고, 쉽게 설명되지도 않으나 진실하게 형상의 세계를 마주하고 있다. 이들의 작업이 형상 전부는 아닐지언정 형상의 침묵으로 인도하는 안내자가 되기를 바란다. 보다 현존에 가깝도록, 보다 본질에 다가갈 수 있도록.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아직 말해지지 않았다. ■ 김소라

Vol.20181104e |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