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노라마 삼부작: 베를린 - 서울 - 홍천 Panorama Trilogy: Berlin – Seoul – Hongcheon

용해숙展 / YONGHAESOOK / 龍海淑 / photography   2018_1107 ▶ 2018_1113

용해숙_너절한 변명_잉크젯 프린트_90×270cm_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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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8_1107_수요일_05:00pm

촬영후원 / 강원문화재단_홍천문화재단 장소협조 / Kulturpalast Wedding International_홍천고속터미널_나무화랑

관람시간 / 11:00am~06:30pm

나무화랑 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4-1 4층 Tel.+82.(0)2.722.7760

천사의 눈, 사진의 절대적 평면성 ● #1. "백 개의 눈을 지닌 거울처럼 사물 앞에 드러누울 뿐 그것들로부터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때, 그런 것을 나는 온갖 사물에 대한 '때묻지 않은 깨달음'이라고 부른다."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에서)

#2. "시간지리학은 하나의 공간을 상정한다. 시간지리학이 추적하는 사람들의 경로가 아로새겨지는 공간은 포괄적인 공간이다. (...) (그 포괄적인 공간 내에서) 행위주체성과 구조의 반복되는 상호작용은 "당신과 나, 그리고 사회전체에 역사와 일상생활이 끊임없이 서로 침투"함을 의미했다." (질리언 로즈, 『페미니즘과 지리학』 중에서) ● 용해숙 작가의 사진은 특이하게도 가로가 넓은 와이드스코프 형태지만, 가장자리로 가도 원근법의 단점이나 사람 눈의 한계가 엿보이지 않는다. 형태나 원근법은 관람자가 서 있는 위치에 따라 그 대상이 크게 보이거나 윤곽이 달라보이는 주관성도 있지만, 아무래도 관람자의 시선을 참조했기 때문에 시점과 대상 사이의 관계가 주변부로 갈수록 흐려지는 단점이 있다. 이는 서구의 표상 체계가 가진 원천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결국 사람 눈의 근원적인 설계 하자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용해숙 작가의 사진은 모든 방향에서 등가적인 밀도를 가진 표면을 유지하는데, 이 점이 아주 기이한 효과를 자아낸다. 어떻게 해서 그럴까. ● 용해숙 작가의 개인전 『파노라마 삼부작: 베를린 – 서울 – 홍천』(2018. 11.7-13 나무화랑)에서는 1950년대 할리우드 영화가 안방의 텔레비전 시스템과 맞붙어서 '풍경의 경쟁력'을 뽐냈을 때 등장했던 시네마스코프1)라든가 시네라마2) 같은 와이드스코프 형태의 사진 작업이 전시되었는데, 놀랍게도 그 사진의 내용을 이루는 상징적인 이미지와 사물의 배치, 상황의 부여, 작가 자신의 실존적 참여의식, 물질적 상상력 등이 대단히 영화 같은 다이내미즘의 코스모스적 우주를 암시하고 있었다. 이 우주는 가장자리가 일그러짐이나 왜곡, 굴절 없이 모든 표면이 선명하게 그 초점을 유지하고 있었다. ● 작가의 말을 따르면, 이 사진의 파노라마적 풍경을 구성하기 위해서 여러 차례의 촬영이 이루어졌고, 그 촬영의 결과물들이 교묘하게 포스트인터넷의 후반 작업 공정을 거쳤다고 한다. 반년에 걸친 삼부작의 이러한 노력이 2018년 한해 동안 인화작업으로 거의 동시에 이어졌고, 이 '풍경적 퍼포머티브'는 마치 황금가지의 그늘을 드리운 신화적 트릴로지처럼 육박해오기 시작한 것이다. "현대미술은 신화를 파는 예술이다"(백남준) 라는 명제대로 용해숙 작가의 이 사진 작업은 범상하지 않은 동시대의 신화적 공간, 그럼으로써 복잡계적 뮈토스의 새로운 출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 이 신화적 구성주의를 이야기하기 이전에 앞서 언급한 사진 표면의 절대적 평면성을 지향하는 작가적 선택이 어떤 시각성을 내포하거나 시사하는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보통의 2차원 평면은 겉보기와 달리 밀도가 다 다른 법이지만, 그 밀도를 측정하기 위해서는 라이프니츠의 미분법을 쓴다. 이 철학자는 해석기하학적 좌표계 위에서 꿈틀대는 곡선을 "한없이 위에서 내리쬐는 빛으로 투사하면 x축에 그 곡선 기울기=밀도가 그림자로 투사된다"라는 방식으로 미분하는 놀라운 방법을 썼다. 즉 x축 자체가 그림자로 표상되어 밀도의 셈여림이 보여지는 스크린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미분법을 응용하면, 마찬가지로 하나의 평면 역시 이러한 방식으로 '밀도의 스크린'이 될 수 있다. 말하자면, 여기서 "한없이 위에서 내리쬐는 빛"이 등가성의 관건이다. 이 빛이 하나의 방향에서 균등하게 평면 위로 쏟아진다고 한다면, 그러한 방식의 시선을 우리는 '천사의 눈'3)이라고 부른다. 즉 하나의 스크린 위에 등가적으로 쏟아지는 빛의 절대적 평면성을 가능하게 하는 시선이 바로 '천사의 눈'이다.

용해숙_우울한 열정 리덕스_잉크젯 프린트_90×270cm_2018

#3. "거울 속 깊이 바람은 드세게 몰아붙인다. 거울은 왜 뿌리가 뽑히지 않는가. 거울은 왜 말짱한가. 거울은 모든 것을 그대로 다 비춘다 하면서도 거울은 이쪽을 빤히 보고 있다. 셰스토프가 말한 그것이 천사의 눈일까" _김춘수, 시 '거울' 중에서 ● 용해숙 작가의 사진은 묘한 시선을 갖고 있다. 이쪽을 빤히 쳐다보는 것 같은, 어떤 절목節目, 마디 눈)처럼 보이지 않는 눈이 의식되는 현상이 있다. 실제로는 사진 속의 인물의 시선은 아래를 향하고 있거나 화면 저쪽 편을 보고 있다. 그럼에도 『파노라마 삼부작』을 구성하고 있는 석 점의 사진, 즉 『너절한 변명』 『우울한 열정 리덕스』 『진지한 정원』은 백 개의 눈을 지닌 거울4)은 아니더라도 '밀도의 스크린' 위에 미분되는 풍경들, 그 단편들 각각이 이쪽을 빤히 보는 듯한 시각성을 내보인다. 그것이 혹시 이 사진 표면의 절대적 평면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닐까. 그 평면성이 모더니즘의 그것을 뛰어넘어 눈의 역사를 자극하는 것은 아닐까. 그럴지도 모른다. ● 가령, 『너절한 변명』에서 사진 속에는 두 개의 촛불 이미지가 있다. 하나는 사진 속에 있는 리얼한 이미지지만, 나머지 하나는 사진 속의 거울 안에 비친 이미지이다. 그런데 이 후자의 촛불은 전자의 그것과 미세하게 흐릿하며 형태가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에 살짝 날리고 있다. 후자의 촛불은 단계적으로 사진 찍는 과정에서 나중에 찍혔고, 그 찍히는 조건이 다소 달랐기 때문이다. 이 시간성의 차이, 이 이미지의 차이는 미분적이며, 무리수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측정불가능한 차이는 결정적으로 새로운 시선의 생성을 자극한다. 마치 철학자 푸코가 17세기 스페인 궁정화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서 이끌어낸 "'표상'이 지닌 '본질적인 요소의 모든 것'을 내포한 '표상의 표상'"5)과 나란히 비견하고 싶다. 『시녀들』 그림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은 뒤쪽 벽의 '거울'이고, 그 '거울'에 비치는 왕과 왕비의 장소가 '본질적인 공허함'이라는 위상에 있다는 것이다. '거울'을 통한 그 희미한 출현은 오히려 공허함의 형식을 통해 '부재' 자체를 나타낸다는 것. 그럼으로써 푸코는 그림 속의 욕망의 중심에 있는 '신체'를 놓치고, 그 공허함의 중심에서 주체나 신체의 이니셔티브라는 휴머니즘의 굴레에서 벗어나 표상은 표상 그 자체로서, '표상의 표상'을 스스로 가리키는 뜻밖의 시선을 갖게 된다는 주장.6) ● 『너절한 변명』에서 이러한 미분적이며, 무리수적 이미지로서 촛불 이미지가 있으며, 동시에 그 곁에는 두 개의 고전적인 석고두상이 교차하는 시선으로 마주하고 있다. 이 교차하는 시선의 구도는 촛불 이미지와 거울 속 촛불 이미지 사이의 차이를 다시 반추하는 듯이 어떤 반사각, 그것도 이중적인 반사각을 이룬다. 여기에는 푸코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서 여러 겹의 거울들 사이 중첩이 낳는 효과 속에서 '본질적인 공허함'을 획득해내는 것과는 달리 어떤 '본질적인 충실함' 쪽으로 증식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왜냐하면 이 두 개의 고전적인 석고두상의 시선(들)은 다분히 신성성과 예술 사이를 마술적인 언어로 당대의 사람들이 소통할 수 있는 지점들을 예리하게 긍정했던 18세기 잠바티스타 비코7)의 구도 아래에서 이해될 수 있다. '여자 헤르메스'의 가슴에 달린 거울의 반사(1차 반사)는 곧이어 '남자 호메로스'의 예술적 도구로 반사(2차 반사)되어 시, 연극, 음악을 비롯한 다양한 예술로 분화된다. ● 말하자면, 두 개의 교차하는 시선의 구도는 비코가 선구적으로 짚어낸 "보는 법을 배우기"8) 하는 어떤 위상학적 방식이며, 이는 용해숙 작가가 자신의 사진 작업이 복잡계적 시각성을 합성해낼 때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작동한다. 이는 『우울한 열정 리덕스』에서 서로 얼굴들이 3분의 1 정도씩 겹쳐진 사람들의 사진을 작은 버전과 큰 버전으로 나란히 대조시키고, 그 곁에 여러 형태의 원형 형상들이 배치되어 있는 것과도 연결된다. 부분들의 시스템적인 조합, 어떤 결합술적 배치에 의해 절목마디 눈)의 상징적인 눈뜸이 도처에서 일어난다. 이 눈들이 『진지한 정원』에서는 구형의 입체 형상으로도 배치되기에 이른다. 그 중앙에는 작가 자신이 물과 불이라는 "물질'파'적 상상력"9)을 자신의 고유한 신체적 점유 장소와 섞여드는, 신체적 접변으로서의 퍼포먼스가 실행되는 장면이 연출된다. 아마도 이는 이 파노라마 치는 힘들, 에너지들, 이미지들의 코스모스적 질서를 잡는 강한 주관성으로서 하나의 항해 키잡이 구실을 하는지도 모른다.

용해숙_진지한 정원_잉크젯 프린트_90×270cm_2018

#4. "거울에 비친 그대의 모습을 보시라. 그 아이는 내게 말했지. 거울 속을 들여다본 나는 비명을 질렀고, 나의 마음은 뒤흔들렸지. 거울 속에서 내가 아니라 악마의 험상궂은 얼굴과 비웃음을 보았던 것이다."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 '거울을 들고 있는 아이' 편에서)

#5. "첫 번째 수수께끼: 보면 사람처럼 보인다. 울리면 철소리처럼 울린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물건이다. 어떤 대장장이가 이런 물건을 만들 수 있었을까? ● 두 번째 수수께끼: 거울의 빛은 알 수 없는 특징을 보인다. 물이 통과할 수 없는 파란 물건(tsenher)이다. 빛(gerel)이 통과할 수 없는 파란 물건이다. ● 세 번째 수수께끼: 거울은 '자아(self)'와 '타아(other)'의 관계를 문제 삼는다. 이렇게 보면 나처럼 보인다. 저렇게 보면 너처럼 보인다. 하나를 둘로 만든다. 이름도 없고 하얗다. 보면 사람 같고 생각해보면 시체(ühdel) 같다. _몽골시인 욀지후탁의 시 '구리거울' ● 용해숙 작가는 베를린, 서울 그리고 홍천을 잇는 긴 여정 속을 흐르는 시간의 지리학적 사상적 배치를 위에서 언급한 석 장 사진 속에 빼곡이 배치해두었다. 이 배치는 '밀도의 스크린'으로서 사진 표면에 여행의 흔적과 무의식뿐만 아니라 작가 자신의 문제의식, 가령 서구남성중심주의 비판, 여성성과 양가성의 탐문, 물질'파'적 상상력, 신화적 사유 등등이 개입되어 있는 방식이다. 즉 베를린에서 주워온 양탄자, 먹다 남은 수박 조각, 타고 있는 촛불과 그 표상으로서의 거울 속 촛불 이미지, 규칙적으로 잎이 배열되어 있는 나뭇가지, 그 반대쪽에 공업용 각목의 야적과 널빤지 그리고 그 위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줄기, 공간 가운데 방향의 위쪽에 매달린 전등에서 나오는 물줄기로 머리감기, 전등과 연통의 대조, 좌우에서 사진 프레임의 균형을 잡아주고 풍경을 실재화하는 기둥10), 그 기둥 뒤쪽으로 놓여진 사다리 위에서 물뿌리는 남자의 부분적 신체, 석고두상의 교차하며 어긋나는 마주보기, '너절한 변명'이라고 거울에 비친 듯이 거꾸로 보이는 타이포그래피 등등 사진 『너절한 변명』은 물질'파'적 상상력과 에너지의 우주뱀들이 서로를 향해 순간적으로 달려들어 똬리 틀 듯이 맹렬하면서 고요하다. 똬리 트는 그 순간은 영원히 응결되어 있는 거울 속의 '풍경적 퍼포머티브'으로 여기게 하는 동시에 그 마술적 봉인에서 벗어나 여전히 그 선명한 백 개의 거울들을 '본질적인 공허함'으로 다시 인식시킨다. 우리는 그때 남몰래 소스라치게 된다. 이 재인식은 '밀도의 스크린'에 대해 용해숙 작가는 이렇게 말하는 것과 연결된다. "나는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의 얼굴과 신체만을 보지 않습니다. 그 대상과 함께 저 너머의 풍경까지도 함께 꿈틀거리는 파노라마로서 포착되어집니다. 이것은 어릴 때부터 저의 남모르는 비저너리였습니다." ● 풍경 속에서 사람을 본다는 것이 사진 속에서는 단순히 자연적인 형태의 사진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그 내부에 꿈틀대는 '힘'과 기류가 내밀하게 작동하면서 다른 모티브들과 상호위상적으로 뒤엉키는 식의 배치를 의미한다. 상호위상이란 서로가 서로에 대해 변수로서 되먹임이 상대적으로 끊임없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새로운 사물이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관계맺기가 관건이라는 것이다.11) "나-아-너와나"(시인 이상)라는 싯귀처럼 동일자와 타자는 그 퍼포머티브한 관계를 맺는 덧없는 시간 속에서 '아-'라는 소리가 된다. 하나의 소리. 용해숙 작가의 사진은 상호위상적으로 '너'와 '나'를 안의 눈과 바깥의 눈 사이, 안의 거울과 바깥의 거울적 징후 사이에서 길을 잃게 한다. "이렇게 배치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저는 이 사진 속의 구도를 '이것임'heccit)이라고 생각될 때까지 저의 ASC12)에 의지했고 믿었습니다."(용해숙) ● 본래 페미니즘 이론에서 흘러나온 시간지리학은 일상공간의 객관 영역과 여성 주체의 주관 영역 사이에 주로 밀집해 있지만, 용해숙 작가의 경우는 대륙길과 해양길을 가로질러서 그 주객관의 상호관계를 따져물어야 한다. 시간의 체험이 밀도화된 이 여행길은 어떻게 여성 주체의 내면 속에서 읽을 수 있을까. 가령, 이런 장면. 그 횡단의 여행 중에 문득 타오르는 불길을 이고 인왕산과 빌딩을 마주한다. 『우울한 열정 리덕스』에서 작가는 벤야민이 말하는 토성좌의 멜랑콜리를 떠올리지만, 그 연상은 이내 신체적 불길-엠페도클레스 콤플렉스13)로 타오르기 시작하고 이는 흔히 '물의 산'으로 지칭되는 인왕산과 마주하며 기대하는 상극조화를 이루는 동시에 거대 빌딩의 유리 벽면을 거울로 활용하여 반영 이미지를 드리운다. 불꽃의 유희나 에트나 산 분화구의 용암의 움직임의 축소된 이미지라고나 할까. 작은 것이 큰 것을 운명적으로 암시하는 이 상응성의 구도는 이 사진 작품을 무시무시하게 감탄스럽게 바라보게 한다. 작가는 다른 사진들과 달리 꼿꼿하게 서 있으며, 여성 주체로서 마치 프리드리히의 폭풍우 속의 순례자처럼 영웅적이며 신화적인 직립을 퍼포먼스한다. 이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시간지리학은 재가 되는 듯하며, 다시 그 잿더미 속에서 새의 형체로 갱신되는 것이 아닌가 짐작할 뿐이다. ● 그것은 저 아래쪽 바닥에 불길과는 극히 대조적으로 1980년대 한국 운동권 문화의 일부로서 마르크스와 레닌의 저작이 매우 낡은 형태로 방치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어쩌면 이는 다른 사진들 속의 다른 상극적인 대조군과 유사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시대착오처럼 배치된 사상 역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다시 갱신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불온한 기대와 몽상에 잠기게 한다. 그만큼 그 불길의 기세는 인왕산의 수자원적 이미지 그 위쪽에서 군림하는 것이고, 비코적인 입장에서는 신의 진리가 헤라클레이투스 타입으로 현현하는 — 1차적 반사이든 2차적 반사이든 개의하지 않고 — 어떤 결정적 장면으로 우뚝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퍼포머티브한 풍경 속으로 작가 자신이 거울의 안과 바깥처럼 대조될 때, 역시 거기에는 수많은 눈들로 반짝거리는 거울(들)의 암시가 역시 두근대기 시작한다. 이는 불가피하다. ● 상징과 은유, 그리고 사물들과 이미지들의 디졸브가 우연치 않게 혹은 의도되지 않은 의도로써, 즉 미필적 고의로써 작동하고 있을 때, 작가가 사용하는 물과 불의 액막이적이며 물질'파'적 상상력은 마니에리슴적이다. 비코 같은 선구자는 마니에리슴의 비틀린 형태학뿐만 아니라 타블로 위에 우주적인 배치를 통해 실제의 우주이자 실제의 신과 교통한다는 사상의 끈을 놓고 있지 않다. 다분히 범심론적 발상! ● 용해숙 작가 역시 그럼으로써 근대 이전의 어느 시기, 말하자면 르네상스와 바로크 사이에 잠깐 꽃피웠던 마니에리슴14)의 우주성 — 물질적 재료를 써서 내부에서 비틀 듯 정신적 존재의 전체 운동을 빚어내는 특성 —을 선보인다고 할까. 평면이 하나의 복잡계의 생명 서판을 지향할 때, 그 서판은 소우주가 전체우주의 에센스를 담아내려는 의지를 엿보게 한다는 것이 마니에리슴 아닌가. ● 이러한 관점에서는 사진이라는 매체의 특성에 즉물적으로 접근한다거나 사진 위에 무엇인가 후반 작업을 한다기보다 그 사진이라는 순간의 미학 — 바슐라르의 표현을 따르면 "시간은 솟구친다" -- 으로 전체로서의 질서를 구성하려는 연출이 돋보인다고 할까. 순간이라는 사진 자체의 시간성에 충실하면서도 그 순간의 구성주의적 작업을 통해 에너지의 파노라마로 퍼포먼스가 일어나는 생명 서판을 출현시키려는 시도로 보인다고 할까.

용해숙_파노라마 삼부작: 베를린 - 서울 - 홍천展_나무화랑_2020

『진지한 정원』에서 작가는 물조리개로 지구본 위에 물을 뿌린다. 지구 이야기는 이 물줄기 속에서 잘 자라듯 그 나머지 풍경의 가장자리에서 싹트고 증식하기 시작한다. 화분들, 저 바깥의 날씨들, 돌과 TV 수상기, 터미널 대합실과 상점의 일상적인 잡화, 수많은 창문 프레임들 등등이 이 물줄기의 지배 영역 바깥에서 각자의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반짝거리는 백 개의 눈을 뜬다. 아니, 작가는 오십개의 눈만 떴다고 본다. 그 비루함, 비웃음과 험상궂음이 작가의 마음을 뒤흔들었을까. 마음의 흔들림은 이 절대적 평면성을 Cogito=나는 생각한다 라는 선상에서 벗어나게 한다. 사진이 표상하는 것과 물의 물질'파'의 상상적인 것은 어긋난다. 실제로 작가는 이 어긋남에 주목하여 재촬영을 거듭했다. ● 이렇게 『너절한 변명』의 폭포처럼 쏟아지는 이미지가 구름15)이 된 것인 양 물의 물질적 상상력을 보여준다면, 『진지한 정원』의 분사되는 물의 이미지는 전혀 다르다. 저 바깥의 날씨와 관리되는 이 안쪽의 환경이 대조되면서 물은 오직 작가의 내면을 적시는 쪽으로 작동하지 않는가. 마치 작가의 여행이 이 홍천터미널 공간에서 스톱하듯이. 이미 지구가 '여자 헤르메스'로서의 양가성16) 이미지 그 발 아래 놓여 있다. 물의 신이자 지구의 대지모신처럼, 그러나 온갖 일상적인 비루함 — 50개의 거울이 비추는 자기반영의 수치 혹은 자각 — 이 함께 동거하면서. 이러한 물의 이미지들 사이에 『우울한 열정 리덕스』는 저 위쪽과 아래쪽 사이의 위계화된 공간적 구획을 불길의 모든 원한감정17) 태우는 권능 속에서 재정립하고자 한다. 불길의 위용은 사진 전면을 압도한다. 여기에 피닉스의 이미지가 있다. ● 잿더미 속에서 다시 물길이 흐른다면? 이 파노라마 치는 트릴로지의 연작이 새로운 눈을 생성시킨다면? 그것은 지구의 눈의 역사, 그 눈의 연대기를 거슬러 올라 독특한 눈의 생명적 권능을 호출해야 간신히 성립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만일 그 눈을 '천사의 눈'으로 부르고 싶다면! ● 다시 말해서 용해숙 작가의 사진 표면을 평면성의 관점에서 본다면, 어떻게 보일까. 이것은 백 개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닌가. 저 위쪽에서 평행한 방향으로 수많은 눈들이 균형하게 내리쬐는 빛의 시선으로 보아내는 것이 아닌가. 그 무수한 눈들끼리 인접해 있을 때, 눈빛끼리의 간섭 효과에 의해 평면은 왜곡되거나 굴절되는 부분 없이 완벽하게 평면이지 않을까. 눈이라는 기관이 평면과 상대해온 지구의 역사 속에서 이러한 '완벽한 평면'을 마주한 것은 놀랍게도 첫 번째 지구의 눈으로 발명되었던 고생대의 삼엽충이었다고 한다. 3억년이라는 시간의 규모는 인간이 감히 예단하기 힘든 장엄한 시각 연대기를 짐작하게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전파망원경들이 무수히 도열해 있는 것처럼 후기 삼엽충은 가히 백 개의 눈으로 색수차 현상 -- 몇 광년 저편의 우주로부터 날아오는 별빛이 천체망원경의 렌즈에 닿을 때, 가장자리의 형상이 흐려지는 불가피한 현상 — 이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 바다에 누워 우주의 어둠을 뚫고 날아오는 천체의 빛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삼엽충이란 존재는 매우 시적이다. 용해숙 작가의 개인전 『파노라마 삼부작: 베를린 – 서울 – 홍천』은 3개의 도시를 잇는 여정 속에서 작가 자신의 구성주의적 사진 작업을 진행해온 바, 이는 물과 불의 액막이 타령 속에서 마치 저 장구한 지구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 모더니티 따위에는 눈길도 마음도 주지 않는 고생대의 생명계의 눈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만 이 퍼포머티브한 밀도의 현상학, 그 파노라마 풍경의 구성주의를 보다 온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 김남수

* 각주 1) 1953년 할리우드에서 TV보급에 위협을 느껴 대안적으로 발명한 2.39:1의 와이드스크린 화면비율. 2) 1952년 개발된 3:1 화면비율의 영화로서 상영시에는 3대의 영사기를 하나의 스크린에 투사했다. 3) 이러한 개념은 20세기초 러시아 철학자 셰스토프가 "사형대의 도스토예프스키"가 살아난 사건으로부터 '밀도의 스크린'을 보아내는 일종의 비저너리visionary)를 '천사의 눈'으로 명명하면서 알려졌다. 4) 라이프니츠와 니체의 관점에서 이는 복수주의, 다양체, 결합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시각을 상징한다. 5) 이 표현은 고바야시 야스오의 『회화의 모험』 140쪽에서 인용. 6) "필시 벨라스케스의 이 그림 속에는 고전적 표상의 표상, 그리고 그것을 통해 펼쳐진 공간의 정의와 같은 것이 존재한다.(...) 그러나 거기에서 이 표상이 그 모든 것을 수렴하고 전개하는 이 산란 속에서 어떤 본질적인 공허함이 모든 방면에서 유무를 가질 수 없는 방법으로 가리키고 있다. 즉 고전적인 표상을 기초로 두는 것의 소멸, 요컨대 표상이 그것에 유사한 것과 그 눈에 표상이 유사하기만 한 필연적인 소멸을 나타낸다. 이 주체 자체, '동일한 것'인 주체가 생략되어 버린 것이다. 그에 따라서 주체라는 속박 관계에서 드디어 벗어난 표상은 마침내 스스로를 순수한 표상으로써 제시할 수 있게 되었다."(푸코, 『말과 사물』 중에서) 이러한 푸코의 논지를 따라가면, '본질적인 공허함'이라는 장소로부터 '표상의 표상'이 뜻밖에도 순수한 시선으로 볼 여지가 있음을 알아채게 된다. 7) 비코가 『새로운 학문』 서문에서 설명하는 하나의 그림은 물과 불이 액막이를 하고 있는 구도에서 삼각형의 빛으로 표현된 신의 진리가 '여자 헤르메스'의 가슴 거울에 반사되어(1차 반사) 꺾이고, 다시 '남자 호메로스'의 도구에 반사되어(2차 반사) 다양한 예술 매체로 표현된다. 이 2번의 거울 반사를 통해 신의 진리는 상대화되고, 다원화된다는 것이 비코의 주장이다. 8) 역사가들은 조상들이 그들 자신을 보았던 것처럼 그들을 '보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결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비코는 말, 전승, 이야기, 신화, 전설, 그리고 법률 체계의 뿌리를 중요한 실마리로 여겨 면밀히 조사했다. 계몽주의자 볼테르가 보기에 지상의 인간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초자연적 존재에 관한 이야기는 무지와 미신을 의미했다. 반면 비코가 보기에 그것은 사람들이 그들 자신에 관해, 그리고 우주에서의 자신들의 위치에 관해 가지고 있던 개념을 탐구할 수단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9) 이 표현은 철학자 바슐라르의 '물질적 상상력'이란 용어가 그의 철학적 에센스로서 양자역학의 파동적 간섭효과에서 나온 것임을 감안하여 보다 정확하게 '물질'파'적 상상력'으로 변경했다. 10) 이 기둥이 똑바른 수직으로 왜곡없이 서 있기를 바랐다는 것, 이 기둥의 완벽한 재현에 의해 사진 표면의 등가성을 그대로 표상하고 싶었다는 것이 작가의 소회이다. 11) 수학자 앙리 푸앵카레의 말. 12) 변성의식 상태Altered States of Consciousness)의 약어. 13) "이 몽상은 인간의 운명을 증폭시킨다. 작은 것을 큰 것에 연결시키고, 아궁이를 화산에 연결시키고, 장작의 삶을 세계의 삶에 연결시킨다. 매혹된 존재는 화형대가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그에게 파괴는 변화 이상의 무엇이다. 그것은 갱신이다. 매우 특수하면서도 또한 매우 일반적인 이 몽상은 불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결합하는, 삶의 본능과 죽음의 본능이 결합하는 하나의 진정한 콤플렉스를 결정짓는다. 서둘러 말하자면 이를 우리는 '엠페도클레스 콤플렉스'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바슐라르, 『불의 정신분석』, 42쪽.) 14) 1957년 독일의 구스타프 르네 호케의 『미궁으로서의 세계』가 출간됨으로써 이 '마니에리슴'은 단순히 특정한 시기의 사조가 아니라 역사 시대의 예술 활동을 관통하는 특별한 태도로써 재평가되었다. 가령, 포스트모던은 '현대의 마니에리슴' 운동의 일면을 지니면서도 특이하게도 본래의 '마니에리슴'이 지닌 신성성의 지향, 소우주와 대우주 사이의 상응, 마술적 수법 등이 제거되어 있다. 15) "구름은 수자원적 이미지로서 이미 폭포이다" 라고 생각한 것은 미셸 세르이다. 분자적 수준에서 이러한 생각은 일리가 없는 것이 아니다. 16) 본래 흑해 북쪽으로부터 수입된 헤르메스 신격은 유목민과 초원의 환경에서 유래했으며, 그 탓에 선과 악의 양면을 동시에 긍정하는 양가성ambivalence)이 강하다. 즉 상인의 교환경제도 보호하지만, 폭력적인 재분배로서 약탈이나 절도 역시 긍정한다. 이 전령과 양가성의 신격이 여성성을 띠고 나타나게 되는 것이 용해숙 작가의 이번 사진 작업에서 하나의 중요한 모티브라고 할 수 있다. 17) 니체는 '원한감정'이 없는 긍정의 정신을 선양했고, "(원한감정에 사로잡힌) 타란툴라의 춤은 춤이 아니다" 라고 그 반응적인 형태를 비판했다.

Vol.20181109k | 용해숙展 / YONGHAESOOK / 龍海淑 / 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