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깊이

박길주展 / PARKGILJU / 朴吉珠 / painting   2018_1109 ▶︎ 2018_1130

박길주_내 마음의 바다_캔버스에 유채_97×162.2cm_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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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8_1109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 / 09:00am~06:00pm

설문대여성문화센터 제주도 제주시 선덕로8길 12(연동) www.jeju.go.kr/swcenter/index.htm

자연을 탐(探)하다, 나를 구(究)하다 ● 박길주의 작품은 장소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 장소의 분위기가 빚어내는 시각경험의 산물이다. 장소는 구체적인 윤곽(배경)과 이름(개념)을 갖지만, 분위기는 시·공간의 소산물이면서도 보편적·추상적인 기분을 형성하여 장소를 물들이는 독특한 색조에 더 가깝다. 장소는 명명되고 호출되고 묘사되지만, 장소의 분위기는 시각경험하는 이의 전 생애 틈바구니 속에 파묻힌 감성과 정서를 소환한다. 달리 말해, 장소는 지각을 통한 코드화된 현실경험의 대상이라면, 장소의 분위기는 직관을 통한 충만한 미적경험의 대상이다. 박길주 작품의 관전 포인트는 바로 이 지점이다.

박길주_마음의 안식처_캔버스에 유채_112.1×162.2cm_2018

박길주가 선보이는 장소의 분위기 그 중심엔 늘 자연이 있다. 내가 그녀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2년 전 제주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라비니츠 현대미술전』(2016년)에서였다. 클로즈업된 울창한 수림(樹林)이 화폭을 온통 뒤덮고 있는 작품이다. 아니, 초록과 노란색에서 확장된 다양한 색채들로 화폭을 촘촘하게 채워 넣으니 마침내 울창한 나무숲이 된 작품이다.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부챗살 같은 빛이 나무 숲 사방에서 번져 나와 따뜻한 깊이를 더하고 있었다. 그 어떤 이름(개념)도, 지시도, 경계도 없이 오로지 청명하고 그윽한 색채들로 이루어진 절대 풍경 앞에 미미한 전율이 일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박길주_숲의 바다2 _캔버스에 유채_227.3×181.8cm_2018

이번 설문대여성문화센터에서 열리는 『발칙한 깊이』展은 최근 2년 사이 그녀가 한 단계 더 공들인 작품들로 구성되었다. 언뜻 보면 관념화된 추상화 같지만, 그의 창의적이고 역동적인 색채구사는 제주의 오름과 숲, 동네 산책길에서 만난 싱그러운 자연, 가족 소풍 길에서 만난 따사로운 자연, 태풍에 포위된 자연에서 얻은 시각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다. ● 그린그레이, 샙그린, 레몬옐로우, 카드뮴그린, 코발트블루, 울트라마린의 절묘한 조합으로 구현된 초록계통과 바이올렛그레이, 핑크, 블루그레이, 울트라마린 블루로가 혼합된 보랏빛계통의 색채들의 향연은 그 자체로 자연의 아름다운 표면과 동시에 무서운 깊이를 전달하는데 충분해 보인다.

박길주_숲의 바다_캔버스에 유채_130.3×162.2cm_2018

박길주의 작품들은 재현·모방의 리얼리즘이 아니라, 시시각각 새롭게 다가오는 시각경험의 '리얼리티'를 추구한다. 비록 보이지 않지만, 화폭 속에 바람이 불고, 향기도 나고, 촉감도 살아있는 회화적 이미지를 독특한 구성적 터치로 구현하고 있다. ● 가령, 대형 캔버스에 그린 보랏빛 세계 「마음 속 풍경」을 보자. 이 작품은 폭풍우 몰아치는 듯한 마음 속 풍경을 담은 최근 실험작이다. 실제로 제주에서 태풍 부는 날 화가가 본 시각경험과 절묘하게 매칭된 그림이다. 태풍은 주변의 모든 형체들을 삼켜버린다. 모든 것이 엉켜서 떠다니며 형체를 알아 볼 수가 없다. 오직 바람소리와 그 바람에 실려 시시각각 변하는 원색의 자연만 남는다. 이는 마음속의 동요, 공포, 불안, 욕망의 색채들과도 오버랩 된다. 화가에 따르면, 작품 자체로 보면 색을 더 올려야 할까 하는 망설임도 있었지만, 마음 속 태풍 현장의 '리얼리티' 차원에서 보면, 그 이상의 묘사와 의미부여는 도리어 현장감을 변질시킬 것 같아 저 지점에서 붓 터치를 멈췄다고 한다. 불안하면 불안한 대로 그 자체를 화폭에 담으려했다는 화가의 말에서 조심스럽지만 더 큰 희망을 보게 된다.

박길주_향기로운 나무_캔버스에 유채_97×162.2cm_2018

박길주의 작품에는 늘 반전이 있다. 빛과 그림자, 가벼움과 중후함이 교차한다. 소박함과 웅장함, 쾌활함과 우울함, 발칙함과 심오함도 교차한다. 그 사람도 작품과 닮았다. 그녀는 풀잎처럼 청초하고 여린듯하면서도, 숲을 이루는 거목처럼 인내심이 강하고 사려 깊다. 차분한 엄마가 되었다가도 발랄한 소녀가 되고, 번잡한 일상을 보내다가도 철저히 스스로 고립되어 온전한 화가로 돌아온다. ● 그녀에게 그림을 그린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색채에 취해 색채의 향연에 그저 만족하는 '일요일의 화가(Peintre du Dimanche)'라 보기엔 그 스케일이 남다르다. 돌이켜보면 그의 그림 행위는 불안한 자아의식과 세계의 진실에 직감적으로 다가가려는 여정이라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자연을 모티브로 한 독특한 구성적 터치와 색채의 향연이 더욱 박진감 넘치게 다가온다. 거기에는 개념이나 추론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오직 시각경험 속에서 세계를 새롭게 보는 통찰의 시선이 사방에 머물러 있을 따름이다.

박길주_황홀경_캔버스에 유채_130×162.1cm_2018

동짓달 11월 제주의 바람이 분다. 화가에게 이 바람은 어떤 색채를 띨까? 한라산의 겨울 숲은? 포효하는 제주 바다는? ……벌써 그녀의 다음 작품들이 기다려진다. ■ 고영자

Vol.20181110f | 박길주展 / PARKGILJU / 朴吉珠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