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정원

길종갑展 / GILJONGGAP / 吉鐘甲 / painting   2018_1115 ▶︎ 2018_1128

길종갑_엄마의 정원_캔버스에 유채_130×162.2cm_2018

초대일시 / 2018_1115_목요일_05:00pm

갤러리 토크 / 2018_1123_금요일_05:00pm~07:00pm 1부. 최형순 평론가 「길종갑의 작품세계」 2부. 작가와의 대화

후원 / 강원문화재단

관람시간 / 11:00am~06:00pm

명동집 Myungdongzip 강원도 춘천시 명동길 14-1 4,5층 Tel. +82.(0)10.9229.1621 www.myungdongzip.com

그의 작품 경향을 설명할 수 있는 본령은 역시 대작(大作)에 있다. 캔버스의 하얀 밑바닥이 드러나게 투명하고 맑은 그림은 이렇게 세련된 작가가 다 있을까 생각하게 할 정도다. 거대한 산들에 둘러싸인 마을에서 바라보는 풍경의 감성이 그대로 녹아 있다. 얇게 디테일이 드러난 식물로 가득 찬 「엄마의 정원」은 크지 않은 작품이지만 이 역시 기품을 보여준다. 그 화면은 어떤 시각적 강요도 없이 우리 눈에 녹아드는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있다. ● 그렇지만 그런 매끄러움에 빠지도록 자극 없이 우리를 그냥 내버려둘 리 없는 그다. 우리 눈을 불편하게 하는 필치와 감성을 쏟아내는 그림은 작품 「돼지의 습격」으로 거의 절정을 보여준다. 그걸 어떤 이해로 읽어야 할지를 고민하게 한다. 뭉크가 회오리치는 풍경 안에서 절규하는 해골 같은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를 놀라게 하였듯, 독일표현주의 작가들이 도끼로 도려낸 듯 거칠게 다듬은 조각 같은 인물을 그렸듯 말이다. 그리고 또 있다. 마티스가 녹색 줄이 선명한 그의 부인을 그린 거라든가 피카소가 울고 있는 연인을 로봇처럼 거칠게 다루고 있는 것 말이다. 그 모두가 각각의 이유를 가지고 설명되듯 길종갑의 이런 거친 그림들도 이유를 들어보아야 한다.

길종갑_엄마의 정원_캔버스에 유채_60.6×72.7cm_2018
길종갑_저녁모임Ⅱ_캔버스에 유채_60.6×72.7cm_2018

「엄마의 정원」에 나오는 소재는 세 가지가 눈에 띈다. 두류산, 어머니, 이 마을에 살고 있는 모자(母子)의 에피소드. 작가와 어머니 이야기가 펼쳐지는 화천 사내면(面)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웅장한 산은 역시 화악산이다. 까마득히 높은 산 바로 북쪽 아래 있는 그의 마을은 그림자 진 겨울 산의 위세에 눌려 쳐다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에 반해 두류산은 이 마을을 남쪽에 두고 있다. 1천 미터에 육박하는 높이의 산이지만 상대적으로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을 가진 채 언제나 해를 가득 품고 마을 사람들을 맞아주고 있다. 그 때문일까 역사와 웅장함과 유명세를 가진 화악산은 작가가 전에 많이 다루던 것과 달리 이번 전시에서는 한 편으로 밀려나 있다. ● 두류산(頭流山)은 지리산의 옛 이름이기도 하다. 두류산은 원래 '백두산에서 흘러나온 산줄기의 끝에 있는 산'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 산이 이곳에 작은 산 하나를 떨어뜨려 놓고 지리산으로 갔다는 것이다. 그게 오늘 그림에서 보게 되는 화천의 두류산이다. 금강산을 찾아가던 신선들이 이 두류산의 경치에 반해 잠시 쉬어갔던 곳이기도 하다. 이 산을 북서쪽에서 보면 여인이 옆으로 누워있는 형상이라 당대 최고의 미인인 '명월'의 이름을 붙여 명월산이라고도 불렀다. 그 북서쪽 마을은 지금도 '명월리'다. ● 이 산이 어머니와 아들이 사는 곳인 사창리를 감싸고 있다. 이름이 좀 이상하다고 말하곤 하는 사창리(史倉里)는 '나라의 곳간'이 있던 곳이라는 뜻이다. 그만큼 요지로서의 위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어서 그곳 사람들이 오히려 자부심을 갖는 이름이기도 하다. 봄부터 겨울까지 사철 그곳에 있는 두류산이 작가 모자(母子) 삶의 일부를 이룬다. 그들이 일구는 배추밭에서도 두류산은 마치 그림의 주인처럼 화면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길종갑_두류산풍경(봄)_캔버스에 유채_130.3×162.2cm_2018
길종갑_두류산풍경(여름)_캔버스에 유채_112.1×193.9cm_2018
길종갑_두류산풍경(가을)_캔버스에 유채_112.1×193.9cm_2018
길종갑_두류산풍경(겨울)_캔버스에 유채_130.3×162.2cm_2018

두류산의 4계절을 보면 작가의 필치가 어떻게 대별되는가가 보인다. 봄과 여름은 붓 선이 두텁다. '두류산의 봄'에서는 붓의 흔적으로 생명이 꿈틀댄다. 위로 붉게 물든 꽃들이 살아있듯 산의 생생함을 펼쳐낸다. 비온 후 이는 운무가 하늘로 피어오르는 여름도 힘차다. 인물화로 삶의 이야기를 다룰 때의 바로 그 필치다. 관찰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감정을 드러내는 만큼의 힘을 실은 그림이다. 고흐의 거친 붓 선들이 꿈틀거리는 것과도 통한다. 반면 가을 겨울의 두류산에서 이런 작가의 붓 길은 감추어져 있다. 산마다 골짜기마다 나무와 숲과 눈과 논밭의 작은 생명들이 작가의 필치대신 살아나 있다. 즉 처음 아름답게 보았던 대작들이란 이런 디테일이 살아있는 그림이었던 것이다. 이와 달리 봄여름의 거친 필치가 잔뜩 묻어있는 그림에서는 작가의 감정이 드러나고 있다. ● 그 두류산 같은 어머니일 것이다. 백의에 백발이 성성하고 살아온 세월을 견딘 주름이 가득한 어머니. 우리는 안다. 그 얼굴 안에 얼마나 많은 세월의 깊이를 작가가 하나하나 담았는지를, 또 그 주름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뭉클함을 전하고 있는지를. 세월도 삶의 깊이도 모두를 덮을 만한 감동의 순간을 위해 누구든 사는 것이 아닐까. 예술이 있는 이유가 바로 그런 감동임을 우리는 누차 마음에 새겨왔다. 그런 감동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라면 화면의 색과 필치와 구성과 조형성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게다가 이 어머니 얼굴 속에서 작가가 다루는 필치는 아무리보아도 예사롭지 않다. 지금껏 다루었던 그의 인물들과는 확연히 다른 '정성'을 담고 있다. 필력이라는 부분에 매달리지 않았던 작가의 작풍(作風) 속에서 좀처럼 보여주지 않던 원숙함을 뽐내고 있다.

길종갑_끝고추 고르는 노인_캔버스에 유채_65.1×45.5cm_2018
길종갑_갈겆이(줄강낭콩 따는 노인)_캔버스에 유채_72.7×90.9cm_2018
길종갑_불때는 노인_캔버스에 유채_45.5×53cm_2018

「고추 다듬는 노인」 연작에서는 파란 고추더미가 있는 것이 가장 멋진 작품이다. 앉아 일하고 있는 작가의 어머니는 화면 멀리 있다. 원근의 깊이가 사람을 그 풍경 안에 넉넉히 품고 있다. 때로는 「가을이와 하늘이 야단치는 노인」이나 「돼지의 습격」에서처럼 불같이 용감한 모습으로 작가는 어머니를 보고 있다. 그런 한편 「불 때는 노인」이나 「밥 주는 노인」처럼 항상 작은 일들을 챙기고 혹시나 있을 사고를 걱정하며 지키는 우리의 어머니들 모습도 포착해 보여주고 있다. ● 어머니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작품은 역시 「엄마의 정원」이다. 물론 이번 전시 전체가 '어머니의 정원'이라는 콘셉트로 이루어져 있긴 하다. 그러니까 어머니와 함께 이루어지는 모든 일과 그 주변에 있는 나로서의 작가, 어머니가 가꾸는 '진짜' 정원이나 화분, 그리고 높은 산들에 둘러싸인 대자연 속의 삶 그 모두가 어머니의 정원인 것이다. 그 중에서도 이 작품 「엄마의 정원」의 완성도는 돋보인다. 바닥이 드러나는 옅은 채색, 긁어 낸 선으로 이루어진 조형 처리들, 강약을 맞춘 잔잔한 색의 물결이 서로를 지탱해주고 있는 전체적 효과는 부드러우면서도 강하다. 100호 유화는 좀 다른 경우인데, 그 속에는 어머니와 작가의 에피소드가 가득 펼쳐지고 있다. 앉아있거나 일하거나 사다리를 오르는 여러 사람은 작가의 이야기를 여러 장면으로 펼쳐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하나하나 좇아가는 우리의 시선도 편안하게 그 정원을 따라 걷게 된다. ● 그를 만나고 나면, 강한 그림이 어떤 독기를 내뿜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오해라는 걸 알게 된다. 조금만 다듬으면 좋겠다는 우리의 희망에 영합하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거칠다는 말은 우리의 길들여진 시선과 그의 숨김없는 표현과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자신을 위해 무장하지 않는 그의 속내가 작품으로 솔직히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그 그림 세계에 온전히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그 때 그 정원의 산책은 얼마든지 여유롭고 편안할 것이다. ■ 최형순

Vol.20181115j | 길종갑展 / GILJONGGAP / 吉鐘甲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