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합풍경 Blended Landscape

전현선_하지훈 2인展   2018_1115 ▶︎ 2018_1229 / 일,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8_1115_목요일_06:00pm

기획,주최 / THE TRINITY GALLERY 와인 협찬 / 인터와인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월요일 휴관

더트리니티 갤러리 THE TRINITY GALLERY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17길 18(옥인동 19-53번지) 1층 Tel. +82.(0)2.721.9870 www.trinityseoul.com/17_blanded-landscape

THE TRINITY GALLERY는 '전현선', '하지훈'의 2인전 『Blended landscape 혼합풍경』 전을 개최한다. 두 작가는 구상과 추상의 경계에서 혼합된 기억의 풍경들을 전통적인 '그리기' 방식을 통해 작업해왔다. 작가가 가진 기억의 조각을 캔버스 위로 꺼내어 나열하고 기록하며 해소해 나가는 과정을 겹겹이 쌓인 레이어(Layer)를 통해 보여주는 작업이다. 『Blended landscape 혼합풍경』 전을 통해 구상과 추상, 실재와 부재, 기억과 상상 등 혼합된 경계의 모호함에서 오는 혼란을 관람자가 각자의 경험에 비추어 자신만의 의미를 발견하고 해석하는 방식을 갖기를 권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두 작가의 2018년 신작을 포함 총 30여점이 전시된다.

혼합풍경 Blended Landscape展_더트리니티 갤러리_2018
혼합풍경 Blended Landscape展_더트리니티 갤러리_2018
혼합풍경 Blended Landscape展_더트리니티 갤러리_2018
혼합풍경 Blended Landscape展_더트리니티 갤러리_2018

전현선의 풍경은 그동안 사건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부분적으로 수집해서 한 화면 안에 배치하여 구성하는 형식을 갖춰왔다. 화면 속 무심하게 놓인 도형들과 사물들은 기억을 빗대어 표현한 요소로 자리한다. 안과 밖이 서로 교차되어 튕겨 나오고 시공간이 뒤섞인 듯한 혼란스러운 사건의 인과관계가 나열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작가는 "현재의 판단들과 잠정적인 결론들은 순간적이고 번쩍여서, 쉽게 잊혀진다. 흐르는 물 위에 지은 집처럼 불안해서 금세 떠내려가 버리고 만다. 그림 속에서는 그 모든 것이 잠시라도 정착할 수 있다. 이해된 것보다는 이해되지 않은 것들이 받아들여진다. 보류된 확신 또한 그림 속에 자리 잡을 수 있다."라고 덧붙인다. 그리기라는 행위는 작가에게 일종의 메모였던 셈이기도 하다. 작가는 수채화 물감과 아크릴 미디엄을 혼합하여 캔버스 위에 페인팅한 후 바니쉬로 마무리하는데, 캔버스에 수채화 물감을 메인으로 사용하여 만들어낸 전현선 작가만이 가진 고유의 터치감은 젊은 나이 불구 작가만의 총체적 스타일을 만들어내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 최근 전현선 작가는 인물과 풍경적 요소가 생략된 채 기본적인 도형의 형태로만 남겨지는 새로운 변주를 보여주기도 한다. 대부분의 서사적 요소가 생략되고, 이미 전현선이 즐겨 쓰던 화면 속에서 회자되어진 도형이 중심이 되는 연작이다. ● 하지훈의 풍경은 자연이라는 모티브에서부터 시작하는데 구체적인 형상에 대한 묘사가 담긴 풍경이 아닌 화려한 색감의 붓터치와 덩어리가 남겨진 풍경이다. 선과 면의 중첩이 만들어낸 하나의 '보석' 또는 '빙하의 조각', '섬'과 같이 느껴지는 풍경은 과거에 그가 경험했던 기억의 흔적들을 더듬어가는 행위이기도 하다. 배경과 이미지를 구분 짓는 아웃라인을 제외한 덩어리의 표현은 우연적 요소에 따라 변화한다. 화려한 색채와 함께 강렬함이 느껴지는 굵직한 선, 기억의 조각들을 퍼내어 올린 듯 나이프로 표현해낸 면, 손으로 화면을 비벼내 만들어진 뭉개진 또 다른 면들은 화면 위에서 각자의 속도감과 에너지를 갖고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그의 작업에 대해 작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전한다. "결국에 내가 주목하는 것은 자연의 모습에서 개인의 경험을 통해 숙성되어진 영구적 형태로서의 전환이다. 과거 사건들의 무대이자 배경이었던 풍경의 모습은 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감정과 뒤섞여 의식 속에 모호하게 남아있고, 나는 이러한 이질적 잔영과 낯설음을 발견하고 이것을 구체화시키려 한다. 자연이라는 모티브를 통해 대상의 단편적인 사실이 아닌, 대상의 이면이나 기억과의 연관성에 대해 말하고 싶다. 그림 속 풍경은 개개인의 경험만큼 보여 질 것이며 낯설음의 경험과 감정이 가시화된 이미지를 통해 공유되었으면 한다." ■ 더 트리니티 갤러리

전현선_나란히 걷는 낮과 밤(19)_캔버스에 수채_112×145.5cm_2018
전현선_사과_캔버스에 수채_60.5×60.5cm_2018

전현선모든 것과 아무것도 ● 성실하면서도 담백한 화면, 오랜 시간을 보낸 듯하면서도 얇은 표면이 만들어 내는 양가적인 감성은 그동안 내가 전현선의 회화를 보며 느낀 공통적인 특징이다. 캔버스에 드문드문 놓인 산이나 열매, 나무 등은 그가 인터넷에서 수집한 이미지들을 다시 그림으로 재현한 것인데, 인터넷 이미지가 그림이 되는 과정에서 생기는 뻣뻣함을 수채화의 매체적 유동성을 빌려 마치 젤라틴 같은 몽글몽글한 상태로 보이게 한다. 이번 「모든 것과 아무것도」(2017)에서 선보이는 동명의 작품은 가로형 캔버스를 사용하여 공간 전체를 숲의 풍경으로 둘러싼 대형 삼면화이다. 작가는 이번 작품을 통해 스케일에 대한 실험과 화면 외부의 현실을 인식하는 태도를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이는 본인의 그림에 대한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자신의 회화를 구성하는 요소들 사이에서 직, 간접적으로 발생하는 의미들을 엮어내는 일과 맞물려 있다.

전현선_나란히 걷는 낮과 밤(16)_캔버스에 수채_112×145.5cm_2018
전현선_나란히 걷는 낮과 밤(18)_캔버스에 수채_112×145.5cm_2018

반복의 몽타주 ● 전현선의 작업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던 '인물'과 '뿔'의 자리를 최근 삼각형이나 사각형, 직선과 색면 등이 대체하면서 조형의 근본 언어에 대한 탐구가 확대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번 작품에서 주목해야 할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화면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그림의 단위들이 과거의 스케치나 드로잉 또는 작품을 축소하여 옮겨온 것이라는 점이다. 낱장 스티커처럼 캔버스 위에 얹혀있는 이 그림 속 그림들은 그것이 과거로부터 소환됨으로써 입체적인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데, 여기서의 입체감이란 아이폰이 자동으로 분류해놓은 인물사진의 묶음이 지니는 두께 즉 상황에 따라 하나의 것이 수십 개가 되는 뉘앙스의 묶음으로 설명할 수 있다. ● 전현선은 이처럼 자기 이미지의 반복과 재배치를 통해 자신이 사용하는 낱말의 유의어를 확장시켜나간다. 한 가지 더 살펴볼 것은 이 과거의 그림들이 서로 간의 위계 없이 '캔버스 위'라는 동일선상에 놓이게 된다는 점인데 작가는 시간이나 거리의 개념이 화면 안에서는 애초에 무효였다는 것을 말하려는 듯, 과거의 그림들을 현재의 그림 사이로 불러들인다. 이러한 자기 반복은 보는 이에게는 어떤 인상으로서 작용하고, 작가에게는 과거의 그림과 현재의 그림 사이, 나아가 미래의 그림 사이의 좌표점을 설정하는 일이자, 단어로만 존재했던 말들을 완성된 문장으로 쌓아나가는 행위가 된다.

전현선_나란히 걷는 낮과 밤(17)_캔버스에 수채_112×145.5cm_2018
전현선_나란히 걷는 낮과 밤(20)_캔버스에 수채_112×145.5cm_2018

변신하는 그림들 ● 앞서 밝힌 것처럼 전현선은 이미지를 수집한다. 그는 그리는 대상에 대한 몰입을 배재하기 위해 그리고자 하는 소재가 생기면 이미지를 통해 재현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오직 재현만을 위한 수집은 아닐지라도 그는 작업을 위해 많은 이미지를 찾아내고, 간직하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보는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이렇게 모아둔 이미지들 가운데 잘 보여주고 싶은 것들을 골라 책가도와 같은 진열장 형태를 빌려 그림 속의 작은 전시를 만든다. 구체적인 예로 이번 전시의 삼면화 중 오른 편의 「모든 것과 아무것도-원래는 하나의 점이었던 두 개의 세계」(2017)를 보면 화면 양쪽으로 무게중심이 되는 진열장 형식의 두 구조물이 놓여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여러 가지 사물들이 놓여있는데, 이 사물들은 맞은편 구조물의 그것과 서로 느슨한 대응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예를 들면 한쪽에서는 불빛이었던 것이 다른 쪽으로 이동하면서 노란색 종이로 치환되는 식이다. ● 호기심이 생기는 부분은 처음 진열장에서 경직되어있던 사물들이 이동하면서 부유한다는 점이다. 원근의 세계에서도 결국 일직선상에 있던 사물들은 작가가 설정한 치환을 경험하며 형태가 변신함은 물론, 사물의 거리감 자체가 상관 없어진 것처럼 자유롭다. 시야를 좀 더 넓혀서 이 치환을 바라본다면 이것이 사물들 사이에서만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삼면화의 화면에서 맞은편 그림과 분할선이 우연히 이어져 있다든가, 동그란 창이 거울처럼 마주 보고 있는 등 큰 골격에서도 유효하게 적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게시판에 붙어있는 전단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결국 하나의 판위에 있는 것처럼, 전현선은 화면에 여러 가지 요소를 배치하고 서로 간의 포물선을 그릴 수 있도록, 그래서 그것이 결과적으로 어떤 거대한 풍경을 이루기를 기대한다.

전현선_도형과 도형_캔버스에 수채_80×80cm_2018
전현선_녹색 뿔_캔버스에 수채_112×145.5cm_2018

솟아나는 숲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전현선의 「모든 것과 아무것도」는 우리를 그림 앞에 불러놓고 사실은 이것이 발밑의 늪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또는 검은색과 형광색은 서로 반대편 컬러 차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곁에, 혹은 등을 맞대고 있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스스로 시작하는 지점과 끝나는 지점을 설정하고 건축가처럼 그림을 화면 안에 배치하는 수행적인 행위를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양극을 이야기하면서도, 그의 회화는 굳건하게 우리 앞에 서 있다. 결국 그림은 전현선에게 현실과 이상을 점유하는 (모든) 것이거나 그러면서도 등 뒤에 있어 눈앞에 보이지 않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 최희승

하지훈_gemstone isle#27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유채_150×105cm_2018
하지훈_gemstone isle#26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유채_175×140cm_2018
하지훈_classical landscape#47_캔버스에 유채_46×53cm_2018

하지훈경계에서의 회화 ● 하지훈의 그림은 물감과 붓질에 의해 구성된 모종의 형상/덩어리가 화면 중앙을 '조각적'으로 차지하고 있다. 평면적으로 칠해진 바탕 면에서 입체적인 덩어리(산, 섬)가 부감되는 형국이다. 물론 그 덩어리 내부는 물감의 다양한 상황을 보여주거나 물감의 물리적 상태를 풍경처럼 보여준다. 물감이 특정 도구의 일정한 압력에 의해, 속도와 시간에 의해 혹은 작가의 신체성에 의해 밀려나가고 씻긴 자취 등으로 얼룩져있다. 어쩌면 작가는 물감이 외부적 조건과 연계되어 파생시킨 여러 상황성을 안겨주고자 하는 그림으로 보인다. 물감의 물리적 표정, 평면적 붓질이 모여 일루젼을 주는 동시에 물감 그 자체로 부단히 환원되는 과정이 읽혀지는 그림이다. 물감이 자아내는 순수한 물리적, 촉각적인 붓질(몸짓)과 함께 두드러진 마티에르 등은 이 그림을 추상과 개념적인 회화로 읽히게 한다. 동시에 뒷걸음질 치면서 일정한 거리를 확보하면 화면은 이내 풍경을 떠올려준다. 그런 면에서 이 그림은 여전히 전통적인 구상화, 풍경화의 전형성을 떠올려준다. 안정적인 수평선과 수직으로 융기한 섬이나 산을 연상시키는 형태가 맞물려서 수직과 수평의 안정적인 구도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이 그림은 일반적인 풍경화의 관례를 따르고 있는 재현회화에 속한다. 그러나 그 재현성에 균열을 이루는 것은 내부를 채우고 있는 다소 혼돈스러운 붓질과 카오스적인 물감의 엉킴, 흘러내림, 뭉개짐 등이다. 물감을 다루는 작가의 신체성이 고스란히 감촉되는 부분이다. 따라서 색채를 지닌, 색채의 스펙트럼이 넓고 화려해 보이는 물감의 집적은 색을 구체적인 사물의 지시나 재현에서 벗어나 모종의 상황성을 안기는 질료적인 측면으로 구사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특히 작가의 색은 온갖 다양한 색을 한 공간에 섞어서 쓰는 편이다. 색의 구별을 없애는 시도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작가에게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색이란 없다고 본다. 당연히 모든 색은 화면 안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거나 다채로운 색을 속도, 시간, 힘 등에 의해 변형태로 만들어 보여준다. 그러는 순간 색/물질은 낯선 질감과 감각을 발생시키는 존재가 되어 유동적인 생명체처럼 자리하고 있다. 화면이 살아있거나 생성적이거나 활성적인 존재인 것처럼 다가오는 것이다. 정적인 부동이 자세로 자리한 덩어리 안에서 엄청난 에너지의 활력이 느껴지고 동적인 흐름이 감지되는 역설이 빚어진다. 그런 측면에서 하지훈의 그림은 세잔의 풍경화를 강하게 연상시킨다. 단속적인 붓질의 흐름과 한색과 난색의 교차와 충돌로 이루어진 세잔의 회화는 납작한 캔버스의 평면 안에서 물감과 붓질, 색채만으로도 깊이와 입체감, 심지어 사물의 견고함을 동시에 안겨주는 편이다. 그런 측면에서 하지훈의 그림은 세잔의 조형의식과 조우한다. ● 화면의 중심부에 설정되어 보는 이의 시선에 우선적으로 걸려드는 이 섬/산 이미지는 물감의 물성, 색채 감각, 그리고 회화가 뿜어내는 묘한 아우라 등을 보여주기 위한 매개로 호명된다. 물감을 바르고 문지르고 밀고나가며 마치 동양화의 획을 치듯이 운행되는 붓놀림, 순간적인 동작과 직관적인 칠하기로 인해 발생하는 효과 등은 분명 기존 붓질과는 다른 감각을 발생시키려는 특이한 붓질에의 모색으로 보이며 이러한 방법론의 특이성을 통해 표면에 미묘한 감각을 발생시키고 낯선 느낌을 자아내려는 연출로도 보인다. 어쩌면 이런 방법론이 작가가 시도하는 회화의 새로움(?)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아날로그적이면서도 어딘지 영상적인 잔영을 연상시킨다.

하지훈_gemstone isle#3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유채_73×73cm_2018
하지훈_gemstone isle#30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유채_73×73cm_2018

하지훈의 그림은 일종의 풍경이면서도 붓질, 물감의 흔적들이다. 구상이자 추상이고 질료덩어리다. 나로서는 그의 그림이 무엇보다도 붓질의 방법론으로 읽힌다. 그러나 그는 전통적인 붓질 대신에 붓질을 암시하는 손, 막대를 비롯한 다양한 도구를 끌어들여 물감을 바른다. 물감을 바르는, 칠하는 특별하고 낯선 방법, 매너로 인해 이질적인 상황, 감각을 표면에 안착시키고자 한다. ● 붉은색조가 두드러진 화면은 거대한 색 면 추상의 흔적도 어른거리지만 일정한 거리에서 보면 섬을 그린 '심플'한 풍경화로 다가온다. 화면의 중심부에는 커다란 덩어리(섬 이미지)가 차지하고 있고 그 내부는 다채로운 색상의 물감, 붓질로 채워져 있다. 그 덩어리는 화면 하단에서부터 차올라 화면 상단으로 솟아오르는 형국이다. 따라서 그림을 감상하는 관자의 신체 앞에 단독으로 설정된 저 섬의 위용이 다소 압도적으로 다가온다. 화면 안의 섬/이미지가 화면 밖의 관자의 신체와 비교적 긴밀한 연관관계를 도모하게 되는 것이다. 단일한 색 면으로 칠해진 바탕과 수평선이나 대지를 연상시키는 하단이 대조를 이룬다. 수직과 수평으로 구분된 단호한 화면 구성이다. ● 이것은 분명 섬에 관한 인상적인 형상이다. 그러나 특정한 섬의 재현은 아니다. 섬의 형상을 빌어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표현이 옳다. 그림을 그리기 위한 매개로 섬의 형상이 요구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섬은 또한 작품의 주제의식을 반영하는 희미한 단서로도 분명 기능한다. 최소한의 기능! 작가에게 그것은 모종의 풍경을 대변한다. 어린 시절 경험한 잦은 이사, 바닷가와 섬에 대한 추억, 낯선 이국땅에서의 생활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의 경험과 기억을 반추하기 위한 그림이기에 '풍경'이 필요했다. 그래서 섬을 닮은 풍경, 거대한 덩어리로 내 앞에 자리한 저 존재가 호명되었다. 그러니까 그림 안에 자리한 풍경, 섬으로 보이는 이미지/덩어리는 그림을 그리기위한 최소한의 매개이자 그림을 그려나가기 위한 작가 자신의 감정과 내용, 나름의 서사를 확보하기 위한 최소한의 단서로서 자리한다. 작가는 그동안 접했던 풍경에 대한 인상, 기억, 누적된 시간과 감정을 응축해서 하나의 덩어리 안에 응고시키고자 했다. 섬의 형태를 닮은 덩어리는 섬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도상)이자 오랜 시간 풍경을 보면서 발생한 온갖 기억, 감정 등 시각화하기 어려운, 곤혹스러운 모든 것들의 표현/표현될 수 없음의 토로에 해당하는 몸짓을 함축하고 있는 덩어리/공간이다. 그 공간을 또한 재현과 비재현의 사이에서의 갈등구조를 드러내는 붓질이 가득 채우고 있다. ● 섬의 내부를 채우고 있는 혼란스러워 보이는 붓질은 구체적인 풍경의 세부를 묘사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것과는 무관한, 자발적인 붓질, 색채들이다. 특히 강약의 조절과 붓에 의존하기보다는 손과 막대기, 나이프 등의 도구를 활용해 물감을 문지르고 누르고 밀고 나가는 등의 제스처로 이루어진 그림은 묘한 기운과 힘을 느끼게 해준다. 그것은 전적으로 추상적이다. 외부세계를 재현하거나 묘사하는 대신에 붓질, 물감, 색채, 물성 그 자체를 보여주고 있다. 물론 그 안에는 작가의 감정, 기억, 복합적인 여러 정서의 편린들이 잠복해있고 그 이름 지을 수 없는 모호함을 대신하고 있는 '이미지/물질'이기도 하다.

하지훈_gemstone isle#29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유채_73×73cm_2018
하지훈_gemstone isle#33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유채_73×73cm_2018
하지훈_o.T.(individuelle landschaft)_판넬에 유채_22×16cm_2018

작가는 자신의 육체에 각인된 풍경의 경험을 다시 내놓는다. 살아있는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 자신의 육체를 써서 삶의 구체성에 부닥치는 것이다. 인간이 세계와 직접 맞닥뜨릴 수 있는 그런 관계를 갈망한다. 그것은 삶을 개념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삶의 일상성과 구체성에 직접 맞닥뜨리면서 그런 길을 모색해나가려는 제스처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회화를 하는지도 모른다. ● 하지훈이 붓을 대신해서 손, 나이프, 막대기 등을 통해 자신의 몸, 신체성을 직접적으로 실어 나르거나 또는 붓질로 이루어지는 그림의 관행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방법론은 기존 회화의 한계, 혹은 정형화된 스타일에서 벗어나려는 의도로 읽힌다. 관습적인 회화의 패턴에서 벗어나 새로운 감각을 발생시키려는 표면에의 욕구가 그와 같은 방법론, 스타일을 호출한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론이 효과적인 표면 내지는 새로운 감각을 발생시키고 있는가는 좀 어려운 문제다. 그것은 단지 방법론에 머무는 것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타자와 다른 감각을 통해 세계와 사물을 달리 보는 것, 그리고 그에 따른 새로운 방법론의 도출이 문제일 것이다. ● 그림 안에서 다양한 표현의 성질들을 점검하는 하지훈의 그림은 일종의 메타회화적 성격이 강한 그림이다. 그는 구상과 추상, 내용과 형식, 붓질의 속도와 차이, 완급의 조절, 명확함과 모호함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다. 일종의 경계에서 머무는 그림인 셈이다. 작가는 그렇게 경계에 위치한, 위치할 수밖에 없는 동시대 회화의 운명을 즐기는 것도 같다. 아니 그런 경계만이 회화가 머물 수 있는 자리임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박영택

Vol.20181125g | 혼합풍경 Blended Landscape-전현선_하지훈 2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