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무휴 年中無休 365Days

정기훈展 / JEONGKIHOON / 鄭祺勳 / installation   2018_1126 ▶︎ 2018_1210

정기훈_연중무휴_설치_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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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8_1126_월요일_07:00pm

후원 / 서울문화재단

관람시간 / 11:00am~07:00pm

서울 성동구 둘레7길 15 2층 Tel. +82.(0)2.323.1913

연중무휴 ● 이것은 작가의 이야기가 아니다. 보통 사람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에 가깝다. 동네 점포에서 볼 수 있는 '연중무휴'는 이것이 주는 편리함, 그리고 내가 원할 때 언제든지 취할 수 있다는 안도감과 더불어, 휴무없이 일하는 사람의 고단함 그리고 피곤함의 등가이다. 나의 편리함은 누군가의 노동으로 채워진다. 누군가의 시간을 보내는 것, 쓰는 것 우리는 이것을 사회적인 용어로 '노동' 이라 부른다. 먹고 살기 위해 일하고, 일하기 위해 먹고 이 끝없는 순환 속에서 우리의 하루와, 일상이 채워지는 것을 보면, 이것은 그냥 '삶'이자 '인생'이다. ● 작가, 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자의/타의 로 이 순환의 바깥에 위치해 있다. 이와 같은 적당한 거리에서만 가능한 관조적 시각은 작가의 지난 전시 『몸놀림』(2011)에서 사회적 체계에 훈육된 신체에 관한 조롱과 비틀기를 작업으로 선보여왔다. 이보다 먼저 공적 표지물에 소극적 제스처로『Marking』(2007) 사회의 규범과 규율을 상징하는 대상들을 의미 있게 희화화 하여, '계란으로 바위치기' 식의 허무한 시도가 주는 위트를 자아내기도 했다.

정기훈_연중무휴_설치_2018

결국 작가에게 '무의미함'으로 대표되는 '비효율' 혹은 '쓸데없음'은 거대 시스템이라 불리는 사회적 통제와 규율에 맞서는 나름의 전략이다. 『9 to 5』(2014)에서 작가는 공장대량생산으로 제작된 공산품들의 생산방식을 거스른다. 최대한 빠르게, 효과적으로 생산된 대못, 벽돌, 숟가락, 유리병, 컴퓨터 자수, 그리고 원단 같은 공산품을 작가는 갈고, 부시고, 해체한다. 이는 마치 수작업이 중심인 전근대적 공예 장인의 수행과도 닮아 있어, 이와 같은 행위는 대량생산시스템의 경제적 고효율을 주창하는 자본주의의 견고한 시스템 밖으로 (시대적으로)비껴 선다. 앞서 시도했던 행위들이, 소극적, 우회전략, 제스처라는 용어로 대변되는 '무의미함'이었다면 작가는 『9 to 5』에서는 위와 같은 행위들을 전시장 안의 퍼포먼스 즉, 작업으로 '강등' 시킨다. 이 무의미한 시도는 무모한 재치가 아니라 그 자체로 예술적 행위이자, 결과물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보편적 의미에서의 쓸모 없음을 여전히 견지하고선 말이다. 이렇게 작가의 관조적 시선은 무용한 행위와 예술적 행위의 경계를 허물어 '쓸모 없음' 자체가 '예술' 이 되는 어찌 보면, '쓸모 없는 예술' 이란 보통사람들의 흔한 자조적인 멘트를 몸소 구현한다.

정기훈_연중무휴(1mm)_종이에 연필_140×2862cm(설치크기 180×1500×60cm)_2018

이와 같은 의도적인 '무용'의 가치를 보다 정면으로 드러낸 『백발무중』(2015)에서 작가는 비효율의 가치를 더욱 적극적으로 취한다. 아니, 목표로 한다. 그간 진행해왔던 의도적인 헛수고는 작가의 중의적 전략으로 형식적 틀을 갖추는데, 예를 들어 시간은 금이다 작업의 경우, 금을 갈아 없애 버리는 무용의 행위가 예술이란 이름으로 의미를 획득하지만, 그 자체가 작업과정의 일부인 금세공사의 행위로 보면 이는 무용이면서 (금세공사의 과업에 합당한)유용한 행위가 된다. 금세공사의 반복적 행위가 주는 시간의 켜는 금과 등가인 가치로 환산 가능한 '그' 시간이 아니다. 이렇게 작가는 관조적 거리를 좁혀 사회적 규범과 거대한 시스템의 면면에 개입과 문제제기를 시작한다. 이는 이전 작업이 거대한 시스템에 대한 냉소적 유머를 자아낸 반면, 이 시스템을 지탱하는 논리에 대해 지속적으로 의문을 제기한다.

정기훈_손금자(Measure)_잉크젯 프린트_20.3×30.5cm_2018

규칙과 규율이 불편하고 이질적인 이유는 개개인의 삶을 재단하기 때문이다. 안전표지판과 같은 사회적 표상은 나의 행위를 제약하고, 관습화된 규범은 무작정 따르기를 종용한다. 집단의 효율적인 지배방식은 획일화되고 표준화된 틀에 개인의 생활방식을 재단하여야 효율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근대적, 효율적 '시간의 거스르기'는 보다 정교해진 무용의 행위로 예술과 노동, 작가와 장인, 단순한 행위와 예술적 실천 사이에서 위치한다. 이번 『연중무휴』에서 작가는 스스로 규칙을 정하고 실행하여 기존 관습과 규칙에 대한 거부를 구체적으로 수행한다. 전시를 구성하는 각각의 작품은 저마다 다른 기준과 규칙이 적용된 결과물로 기존 규칙을 대체해버린다.

정기훈_연마술(Grinder)_돌_31×15×30cm_2018

1년 동안 1mm씩 줄어든 이미지를 보여주는 드로잉 작업인 연중무휴(1mm) 는 작업을 위해 할당된 365일이라는 시간이, 드로잉을 1mm씩 지워나가는데 쓰인 예술적 행위의 시간과 상응됨을 보여준다. 여기서 작가는 1mm씩 그려나가는 것이 아니라 지워나감으로써, 작가가 지속해온 갈아서 사라지는 방식을 연상시킨다. 이미지가 점차 작아지는 행위로 말미암아 그 흔적의 공백은 시간과 예술의 결과물로 남게 된다. 반대로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최소 측량단위로 선택된 1mm는 예술적 결과물의 정량적 (보편적으로 가시적인)단위가 됨으로써, 작가는 1mm라는 표준화된 측량단위가 의미하는 기준과 가치를 교란한다. ● 한편으로 자신의 손금에 맞는 '작은 조각' 들을 모은 작업인 손금자(Measure)는 작가가 지속적으로 취해온 소비, 낭비, 허비를 통한 냉소적 태도를 여전히 견지한다. 쓸모 없는 일이라 보면 이 역시 시간 낭비이다. 하지만 작가는 작은 조각들을 모아 비교적 생산적인 행위를 하거니와, 측정되는 대상이 많아질수록 손금자의 역할과 기능은 '증대'된다. 내 손금으로만 측량 가능한 단위를 제시하는 것, 그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이 작업은 제목 그대로 내 손금자 라는 작가가 내린 규칙을 성실히 따르고 있다.

정기훈_사시미(Sashimi)_단채널 영상_00:12:00_2018

작가가 취하고 있는 무용과 허비, 헛수고의 방법론은 '반복적 행위'에서 가능해진다. 이와 같은 행위를 할 때 우리는 '장인'을 떠올린다. 작가 역시 반복적 행위에서 오는 시간의 켜나 수행적 경험에서 현대미술이 상실한 '장인'에 대한 가치 회복을 언급한 바 있다. 오늘날 기성품과 대량생산이라는 사회적 시스템의 대척점에는 근대 이전의 장인과 도구가 위치한다. 그 도구의 기원이라 말할 수 있는 선사시대 '석기'처럼 돌을 갈아만든 작업 연마술(Grinder) 은 예술과 노동, 작가와 장인, 단순한 행위와 예술적 실천이라는 행위가 분화되기 훨씬 이전의 근원적인 생산과정과 도구에 대한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작가가 긴 시간 갈아 만든 '간석기'는 물체를 단련하고 다듬는 반복행위가 가진 성스러움과 무념무상의 자기성찰이라는 형이상학적 가치를 호출한다. 도구란 "재료를 다듬거나 일을 할 때 쓰도록 만든 물건"이라는 온전히 기능에 목적을 둔 사전적 의미를 갖는다고 볼 때, 간석기가 불러일으킨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 생산하거나 창작하는 행위에 대한 근원적 가치에 대한 질문은 작가의 예술적 행위의 결과물로 치환된다. ● 이 석기는 영상작업 사시미(SASHIMI) 에서 다시 등장한다. 얼추 예리함을 갖춘 간석기는 신선한 생선의 회를 뜨기 위한 도구로 쓰인다. 다소 서투르지만 나름의 재량으로 손질된 횟감은 간석기를 명실상부 도구의 정체성을 부여한다. 영상에서 비춰진 싱크대와 도마는 간석기가 가진 인류학적 상징과 이를 연마한 예술적 행위, 그리고 회를 뜨는 작가, 이 모두를 온전히 무심한 일상적인 풍경으로 환원해버린다. 사실 이와 같은 행위로 작가는 오늘날 노동시장에서 효율적 생산과정에 투입된 일반사람들의 삶의 단편을 연상시킨다. 효율성이 강조되는 수치적 생산시스템과 그것이 보편적 통념이 되는 사회 속에서 개인은 지워지고 삶의 가치는 의미지어지긴커녕 거세된다. 둔탁한 도구로 생선을 거칠게 손질해가는 모습은 보편적 가치 속에 사라지는 개인의 쓸모 없음, 비효율, 무용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 작업은 무엇보다 가족과 국가라는 틀 안에서 규범에 의해 지워진 책임감을 감내하는 보통 사람들에 대한 작가의 메시지이자 나지막한 응원이다.

정기훈_축배는 없다(No more Cheers)_ 술병, 술잔_5.5×5×5cm, 16×11×6.5cm, 21×7.5×7.5cm_2018

작가가 취한 무용은 예술적 행위에 힘입어 유용으로서 전환을 꾀한다. 축배는 없다(No more Cheers) 에서 작가는 갈아버린 유리병 조각을 한데 모아, 맥주병 조각은 맥주잔에, 소주병 조각을 소주잔, 그리고 같은 방식으로 와인잔에 담는다. 오브제가 내용을 대치하여 이해되는 것은 물질로 대변되는 현대문화의 속성이다. 맥주병이 맥주로 가늠된다고 볼 때, 조각 조각 갈아버려 형태를 잃은 맥주병은 그 원래의 질량만큼 맥주잔에 담겨 다시금 맥주의 정체성을 회복하지만 마실 수는 없다. 형태가 곧 기능이 되는 기준에 따르면 눈에 보이는 물질이란 형태를 부정하는 것이 무용의 행위로 의미된다. 이로써 작가는 사회적 규범과 질서에 대한 거부와 더불어 스스로 제시한 대안을 방패삼아 무조건적 저항과 반대의 가벼움과 거리를 둔다. ● 무엇보다 거대 시스템은 쉽사리 부정, 거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존 시스템에 대한 의도적 부적응, 어긋남은 비록 이것이 소소할지언정 완벽한 질서라는 온전한 그림에 생채기를 냄으로 완벽의 조건을 끝끝내 만족시켜주지 않는다. 52시간(52hours) 은 그간의 연약하고 미미한 그러므로 지속가능한 지점 보여준다. 백색 퍼즐은 그 어떤 힌트 없이 온전히 조각의 형태만으로 이를 채워야 한다. 또한 이것은 어떤 시각적 유희도 없이 오롯이 형태를 맞춰가는 목적에만 충실하다. 형태적 완성을 위한 이 퍼즐은 마지막 한 조각의 튕겨져 있음으로 끝끝내 완성되지 않는다. 의미 없이 무의미하게 채워지지 않는다는 듯, 튕겨진 마지막 퍼즐 조각은 흡수당하지 않겠다는 작가의 지난한 의지와 닮아 있다.

정기훈_52시간(52hours)_퍼즐_37.8×51.7cm_2018

이것은 더 이상 무용하지 않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예술가는 무용할 수 있다. 하지만 작가의 행위는 무용함을 예술적 유용으로 전환시키고, 이렇게 기존 가치를 교란한 작가적 메세지는 현실의 규칙과 규범이 주는 검열의 시선을 거부한다. 정기훈 작가의 『연중무휴』는 노동이 곧 삶인,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반복적인 삶의 가치가 전환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작가는 더 이상 관조적 시선으로 자조적 몸 개그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 행위에 자신의 수행적 태도를 중첩하여 한데 뒤엉켜버린다. 이렇게 거대한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규범과 질서는 변칙과 오류를 경험하게 되고, 이것이 과연 신뢰 가능한가에 대한 문제제기를 지속한다. 작가는 샐러리맨이 아니다. 하지만 시스템 바깥의 사회적 약자로서 예술가 삶에 대한 자조를 읊조리는 것이 아니라, 일반사람들이 겪는 일상의 피곤함에 대한 공감을 바탕으로 한 동시대인으로서의 일종의 연대의식을 작업으로 풀어내는 것이다.

정기훈_열쇠의 행운(Good Luck)_금 4×8.5cm, 잉크젯프린트 42×59.4cm_2018

그래서 작가는 천국으로 가는 '행운의 열쇠'를 쥐어준다. 시간은 금이다 작업과 이어지는 열쇠의 행운(Good Luck) 은 현실 세계에서 불가능한 기복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한다. 'Good Luck' 이라고 새겨진 열쇠는 금이 상징하는 물성, 효용, 화폐가치에 더해 보통 사람들이 원하는 현실에서의 탈출, 구원으로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을 물질가치와 동일시한다. 내가 그동안 앞만 보고 쫓아온 경제적 목표는 행운이란 말 속의 비현실성만큼이나 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우리는 행운을 돈으로 사는 것인지, 돈이 행운을 사는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 작가 정기훈은 거대한 시스템위에 몸소 일상의 순환을 깨뜨리고 숨트기를 제안한다. 쳇바퀴를 벗어나는 것은 스스로의 자각으로 가능한 일이다. 쳇바퀴 밖의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긍정을 갖는 것, 자신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내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의 표명임을 상기시키면서 말이다. 이는 조직을 위해 혹은 가족을 위해 사라져야 하는 개인에 대한 작가의 깊은 공감과 그런 삶에 대한 작가의 애정 어린 시선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 장윤주

Vol.20181126h | 정기훈展 / JEONGKIHOON / 鄭祺勳 / 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