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락원 魚樂園 fish paradise

전항섭展 / JEONHANGSUB / 全項燮 / sculpture   2018_1129 ▶︎ 2019_0320

전항섭_물고기의 꿈 Fish dream_패널에 아크릴채색, 나무, 옥석, 동판, 백자, 삼베_244×576×7cm_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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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항섭 홈페이지_www.art500.or.kr/blog/jeonhangsub.do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08:00am~10:00pm

더스테이 힐링파크 아트스페이스 THE STAY HEALING PARK ART SPACE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한서로268번길 157 Tel. +82.(0)31.580.3800 thestayhealingpark.com/culture/art

물고기의 낙원 또는 케렌시아전항섭의 평면조각전에 대한 아홉 개의 단상하나. 물고기는 물이라는 살아있는 공간에서 유영한다. 물고기의 움직임은 한정된 공간에서 판에 박힌 일상을 사는 사람들의 삶에 전혀 다른 차원의 상상력을 제공한다. 물고기에 대한 상상은 온 곳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의 회귀나 잉어가 거센 물살을 뚫고 뛰어 올라가 용이 된다는 중국 고사와 같은 이야기를 통해 인간이 추구해야 할 힘찬 생명력과 보다 나은 곳에 대한 열망이라는 가치로 환원된다. 여기에는 자유로운 낙원을 향한 인간의 욕망과 의지가 투영되어 있다.

. 물 속에서 자유로이 움직이는 물고기의 유유자적은 아름답다. 이 자유는 아무런 대가 없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물 속에는 물고기를 위협하거나 경쟁하는 다른 생명체들도 허다하다. 물고기는 이들과도 싸워야 하고 다른 모든 생명체들처럼 부지런히 먹이를 구하거나 때로는 짝짓기를 위해 끊임없이 돌아다녀야 한다. 한가하게 노니는 듯이 보이는 물고기의 움직임도 이러한 생명유지의 필요에 따른 것이다. 그러므로 물고기의 자유로운 유영은 그 자체로 삶을 위한 치열한 움직임이다. 그들은 잠시 쉬는 동안이나 한가로운 곳에서도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된다. 그물이나 낚시바늘에 걸려 어부에게 잡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물고기의 삶의 조건은 갖가지 경쟁과 위협에 노출된 사람들의 것과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그들이 더 자유롭게 보인다면 그것은 물고기들이 삶터인 물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적응하여 거기에 온몸의 움직임을 온전히 일치시키기 때문이다. 그토록 위험한 곳에서도 물고기는 때때로 평화롭고 한가로이 쉬는 듯 보일 때가 있다. 투우에서 소가 잠시 도피하여 안전하게 쉬는 곳을 일컫는 케렌시아(querencia)는 삶의 경쟁에서 이따금 안식처를 찾아 잠깐 휴식의 시간을 가지며 다음을 준비하는 것을 말한다. 모든 개체는 고통과 걱정에서 잠시 비껴나 활력을 얻고 용기를 회복하여 다시 삶을 이어가기 위한 힘을 되찾을 필요를 느낀다.

. 부조(浮彫)나 그림에서 대상은 보이지 않는 부분을 쉽게 유추하거나 상상하도록 묘사된다. 그러나 물고기는 한 쪽만 보아도 대칭이 되는 반대편의 모습을 쉬이 알 수 있다. 물고기를 표현할 때 대개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앞모습이나 뒷모습으로는 잘 그리지 않는다. 그 모습으로는 물고기의 전체 형태를 한 번에 보여줄 수 없기 때문이다. 물고기는 유선형의 몸집을 가지고 있다. 물고기의 일반적인 모습은 어탁(魚拓)처럼 옆모습으로 전체를 보여주는 평면적 형태이다. 이 모습은 평면적 입체, 또는 입체적 평면이랄 수 있다. 물을 쉽게 가르고 나아가기 위한 최적의 형태로 진화한 이 평면적 유선형의 물고기들이 조각가 전항섭의 평면패널 위에 자리하고 있다. 그의 2차원적 패널평면은 물고기에게 움직임의 모태로서 마치 물처럼 이질감 없이 주어진다. 그렇다면 이 평면은 미술적 장치로서의 환영적 평면이 아니라 실질적 평면이자 물고기의 삶의 환경으로 치환된 평면이다. 패널마다 각각 다양한 효과가 부여된 평면은 물고기를 위해 마련된 여러 환영적 공간이자 물고기 조각의 실질적 환경으로써 자리한다. 일반적으로 조각은 외부환경에 노출되면서 자연스럽게 주어진 배경이 어쩔 수 없이 실제 조각의 환경이 된다. 그래서 작가들은 전시되는 조각작품을 대개 좌대(座臺) 위에 올려놓거나 적절히 조명을 비춰주는 등의 방법으로 실제환경으로부터 어느 정도 유리시킨다. 그러나 전항섭의 평면조각은 배경이 되는 평면패널이 그 자체로 조각의 환경으로서 함께 주어진다. 각각 다른 표현으로 칠해지거나 조성된 다양한 환경에 놓인 물고기들은 이 환경들과의 관계로부터 연계되어 생성되는 각자의 잠재성을 품고 있다. 물고기는 비록 패널에 평면적으로 덧붙여있지만 몸통이 삼베천으로 둘러싸여 있거나 옥석, 동판, 자기, 흑단, 박달나무, 자작나무, 대추나무 등의 구체적인 재료의 몸을 빌어 화면 안에 오브제처럼 자리한다. 이로써 물고기들은 조각의 3차원적 요소를 갖추고 실재감을 갖는다. 이때 조각으로서의 입체적인 물고기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평면은 더 이상 2차원적 붙박이 평면이 아니고 물고기 오브제를 에워싸는 다차원의 살아있는 공간이 된다.

전항섭_물소리 1·2·3 The sound of water 1·2·3_ 삼목판에 삼베, 자작나무, 삼베_40×40×3cm, 48×50×4cm_2018
전항섭_물소리_삼목판에 삼베, 자작나무, 삼베_40×40×3cm_2018

. 한 마리가 패널의 중심에 놓일 때와 여러 마리가 약간씩 다르게 자리잡은 구성에서 물고기의 의미와 강도는 각각 달라진다. 많은 수의 물고기가 등장하는 작품에서는 다양하게 배열된 물고기들이 세상에 제 무게를 가진 개체로서 살아가는 각각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한 마리 물고기가 모든 물고기를 지시하는 보통명사로 쓰인다면 여러 집합적 물고기 속에서의 한 마리는 개체의 속성을 띤 특별한 물고기이다. 한 마리 물고기는 그 자신이요 여러 물고기 중의 한 마리는 여럿의 일부이다. 물고기는 개별적 성격과 제 각각의 구체성을 가지고 무리와 합류하여 또 다른 더 큰 몸체와 하나가 된다. 전시장 벽을 꽉 채우는 대형패널에 등장하는 각각의 물고기들은 많은 개성을 지닌 여러 물고기의 집합이다. 물고기떼가 불어날수록 개체의 속성은 드러나지 않고 무리의 움직임으로만 나타난다. 물고기들은 떼를 이룸으로써 보다 큰 하나의 개체가 된다. 어떤 종의 물고기들은 자신들을 위협하는 더 큰 물고기를 만나면 거대한 물고기 한 마리의 형상으로 뭉쳐서 자신들을 위협하는 포식자를 물리친다. 그것은 여럿이 하나의 단위가 되어 발휘하는 집단지성의 힘이다. 물고기의 자유로운 이합집산은 물이라는 환경이 허용하는 공간의 순응성에 힘입는다. 이 때의 물은 물고기에게 적응의 공간이자 응전의 공간이고 수동적이며 능동적 공간이다. 커다란 패널은 전시장의 수동적인 벽을 열린 무한공간으로 확장하여 물고기들을 능동적 방향성을 가진 떼로 수용한다. 평면패널은 모든 벽으로 이어지며 전시장의 빈 공간을 물의 순응적 공간으로 대체한다. 이 순응적 무한공간이 바로 물고기의 낙원, 즉 어락원(漁樂園)이다.

다섯. 삼목판(杉木板)에 덧씌운 삼베천 위에 놓인 나무물고기 주변에 물감의 물기가 배어있다. 물기는 나무물고기에게 생명을 주고 나무물고기는 물감에 살아있는 공간의 활기와 비옥한 생식력을 부여한다. 물고기의 활기가 내뿜는 자리의 생식성은 생명이 서로 탄력적으로 삼투하는 공간이다. 이 곳에서 물과 물고기의 탄성이 자연스럽게 서로 삼투하듯 삶의 환경은 삶의 주체에게 자양분처럼 스며든다. 주체와 환경의 상호 순환은 사람이 실질적으로 몸담고 사는 환경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반대로 사람이 환경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이른다. 이러한 자연의 상호 관계성과 순환성에 근거하여 그의 작업은 환경을 다스리거나 지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서로 상생해야 하는 삶의 모태임을 보여준다. 전항섭은 그간 나무조각을 통해 나무가 가지고 있는 생명성에 기반한 생명형태학적 작업을 해왔다. 생명형태학은 생명적 활성을 추구하는 형태의 문제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예술가의 생태적인 태도와도 맞닿아 있다. 그것은 예술가가 삶과 재료를 등가적으로 합일시키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이는 자라서 목재로 쓰일 때에도 올곧은 결을 거스르지 않는 나무를 숭고한 '나무경'으로 삼는 작가의 경건한 자세로까지 확장된다. '나무경'은 죽음까지도 삶의 연장이 되는 나무의 심성에 대한 경배이다. 삼베천에 감싸인 삼목판과 그 위에 놓인 나무물고기에는 우화(羽化)를 기다리는 듯한 질료의 잠재적 움직임이 '물소리'라는 시적 울림을 통해 내재되어있다. 이처럼 그가 다양한 환경의 평면패널 위에 물고기의 생태학적 자리를 마련해주는 작업은 질료가 품고 있는 생성의 씨앗을 산포시키는 일과 다름없다.

전항섭_개기일식_박달나무, 호도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삼베, 마대_122×122×5cm_2012

여섯. 춘천옥이나 옥석으로 만든 물고기들이 삼베천에 싸여있다. 왕이나 귀족들의 부장품에서 흔히 발견되는 옥에서는 부귀와 영생을 염원하는 고인들의 불멸의 의지가 읽힌다. 힘찬 생명력을 가진 물고기가 옥으로 환생하여 죽음과 생명의 순환에 대한 깊은 상징을 담고 있다. 물고기들이 두른 삼베천은 죽어서 온 곳으로 돌아가는 생명체의 순환을 함축한다. 수의에 쓰이는 삼베에 감싸인 물고기는 이승에서의 삶을 끝내고 저승길로 떠나는 일이 또 다른 차원의 생명을 잉태하는 것임을 은유한다. 이처럼 옥돌로 만든 물고기를 삼베천이 감싸고 있는 작품에는 죽음이 곧 탄생이라는 역설적 의미가 스며있다. 단단한 대추나무나 박달나무, 흑단, 잘 썩지 않는 자작나무로 만든 물고기에도 또한 영구불변적 생명력이 깃들어있다.

일곱. 물고기들이 팔방(八方)에 놓여 순환하는 형세를 갖추고 있다. 개기일식은 낮에 달 그림자가 태양을 가려 지구가 어두워지는 현상으로 빈틈없이 순환하는 행성의 움직임 가운데 드물게 발생하는 특이한 이변이다. 대낮에 그림자가 태양을 가리는 변고에 대해 서양에서는 신의 노여움이라 여겼고 동양에서는 왕권의 쇠퇴나 흉사의 징조로 치부했다. 일식을 부정적 현상으로 보았던 사람들은 거기에 어두운 상징을 부여했지만 전항섭의 '개기일식'은 각각의 방위에 자리하는 물고기들의 파동에 따라 '우주의 시계'가 순차적으로 회전하면서 일으키는 리듬의 미세한 파닥임을 암시한다. 그 우주 시계의 생성적 일탈은 세계의 순환에 잠재적 휴식을 제공하는 낙원의 질서이다.

전항섭_강강수월래Ⅰ·Ⅱ_박달나무, 참나무, 삼베, 광목_81×81×5cm_2012
전항섭_빛의 길 1 The Path of Light 1_삼목판에 잉크, 대추나무, 삼베_90×122×4cm_2018 전항섭_빛의 길 2 The Path of Light 2_삼목판에 잉크, 대추나무, 삼베_100×100×3cm_2018

여덟. 강강수월래는 여럿이 손을 잡고 둘러서서 끊임없이 돌고 도는 놀이이다. 이 놀이는 하나의 중심을 두고 동일한 인물들이 계속해서 돌고 또 도는 순환구조를 가진다. 같은 곳을 지나가지만 매번 다른 시간을 지나간다. 똑같은 일이 반복되지만 그때마다 약간씩의 차이를 보인다. 반복과 차이는 동일한 일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른 강도로 고조되며 벌어지는 일이다. 일정한 시차를 따라 돌고 도는 인생 역시 매일이 같은 듯 하지만 하루하루가 다르다. 매번 같은 일상을 사는 듯하지만 고비마다 삶은 달라지며 각각의 마디 안에서 내용과 의미도 조금씩 변한다. 빙빙 돌며 강강수월래를 추는 사람들의 수는 일정하지만 멀리서 그것을 보는 사람들에게는 끝없이 지나가는 무수한 사람들의 행렬로 보인다. 하나가 시간을 두고 벌이는 끝없는 펼침이다. 이것은 이순신 장군이 왜군들과의 중과부적이던 상황에서 활용했던 전술의 요체이기도 하다. 같은 장소에서 출발하는 사람들의 삶도 각자 서로 다른 드라마를 펼친다. 사랑과 미움, 욕망과 체념 등 몇 가지 한정된 요소로 이루어지는 삶도 그것이 펼쳐지는 양상은 무한대이다. 이승에서 못다 이룬 생은 저승으로까지 이어져 보이지 않는 영혼의 차원과도 맞물리며 끊기지 않는 인과의 업(業)으로 불어난다. 물고기들이 꼬리를 물고 돌아가면서 그리는 곡선은 끝이 다시 시작으로 이어지는 순환운동이다. 원운동은 원의 궤적으로도 나타나지만 자유로운 움직임의 시작과 끝이 맞물리는 순환고리로서의 원이기도 하다. 똑같은 순환고리 안에서 생(生)은 수천 수만의 가능성으로 변환된다.

전항섭_빛과 그림자 The light and shadow_패널에 아크릴채색_2018
전항섭_빛의 마음 heart of light_삼목판에 잉크, 자작나무, 동판_2018
전항섭_심연의 기억 A memory fo the abyss_패널에 유채, 옥석, 동판_2018
전항섭_어락원 魚樂園 fish paradise展_더스테이 힐링파크 아트스페이스_2018

아홉. 고리를 완성하기 위하여 언젠가는 떠났던 곳으로 돌아오는 연어는 감동적이다. 숱한 여정을 거쳐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연어의 회귀본능은 삶의 뜨거운 완결성을 보여준다. 그 길은 삶에서 얻은 '산을 품고' 오로지 빛을 향해 가는 '빛의 길'이다. 꼭 연어가 아니더라도 물고기는 끊임없이 제게 맞는 자리를 찾아 움직인다. 가장 편하고 자기에게 익숙한 곳. 그곳은 자신이 떠나온 곳이며 삶의 모든 고통을 내려놓고 돌아와 삶의 고리를 완성하고 싶은 곳이다. 그곳은 바로 물고기의 낙원이요 순환고리로서의 케렌시아이다. ■ 서길헌

Vol.20181127l | 전항섭展 / JEONHANGSUB / 全項燮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