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어가는 빛 Dampened Light

이동혁展 / LEEDONGHYUK / 李東焱 / painting   2018_1208 ▶︎ 2018_1220

이동혁_식어가는 빛展_스페이스 나인_2018

초대일시 / 2018_1209_일요일_06:00pm

후원 / 서울문화재단

관람시간 / 01:00pm~07:00pm

스페이스 나인 SPACE 9 서울 영등포구 경인로 739 (문래동2가 4-2번지) 2층 Tel. +82.(0)2.6398.7253 www.facebook.com/space9mullae

일종의 고백 ● 미량의 빛과 다량의 어둠. 새벽녘의 흐리고 성긴 푸른빛은 모든 사물들을 공간의 일부처럼 감싼다. 이 공간의 빛과 어두움의 비율 관계는 정적과 깊이를 생산하며 그 안으로 귀와 시선을 조용히 흡수한다. 그리고 그 어둠의 깊이 속에서 희미한 빛을 머금은 장면들을 더듬거리듯 바라보도록 유도한다. 새벽녘 청색조의 어둠 속에서 조용히 드러나는 폐교회의 공간과 사물들은 오랫동안 방치된 듯 낡고 부서지고 부식되고 변색되고 얼룩져 있다. 구석구석 무르고, 습하고, 연약한 피부를 가진 공간은 곧 허물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태롭다. 더 이상 이곳에는 신성도, 기적도 감지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온전치 못한 공간 안에 마찬가지로 온전치 못한 신체를 지닌 환영들이 유령처럼 등장한다.

이동혁_낚는_캔버스에 유채_130.3×162.2cm_2018

이 환영들은 기이하다. 그들은 현실의 물리적 법칙과 무관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그들의 신체는 합성되고 재단된다. 「머리 된 자」(2017)를 보면 물구나무 선 인물의 머리 부위를 중심으로 여러 개의 팔과 다리들이 결합하며 몸은 집단화된다. 여기서 몸은 거대한 조형물과도 같은 더 큰 몸의 일부가 될 뿐이다. 이러한 기이한 형태의 신체 합성은 새의 경우에도 발견된다. 두 마리 새의 머리가 하나로 합쳐져 입이라는 기관을 잃은 새는 더 이상 지저귈 수 없다(「비린 지저귐_2」(2016). 다른 장면에서는 특정한 틀 안에 속하기 위해 틀 밖으로 튀어나온 몸의 일부를 떼어내기도 한다(「안에 속한 자」(2016)). 이처럼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기이한 환영들에서 우리는 신체의 합성과 재단을 통해 개별적인 신체의 자유를 제한하는 힘을 감지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힘의 다른 이름은 아마 폭력일 것이다.

이동혁_게으른 술래-2_캔버스에 유채_112.1×145.5cm_2018
이동혁_비린 지저귐-5_캔버스에 유채_162.1×227.3cm_2018

하지만 여기서 암시된 폭력은 자각되거나 감지되지 않는 종류의 폭력이다. 군데군데 깔끔하게 절단된 신체 부위들은 고통을 호소하지 않는다. 훼손이 자각되지 않는다. 그만큼 이 힘의 폭력은 은밀하다. 이들이 자신의 신체에 가해진 훼손과 폭력에 무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충분히 성숙한 판단력이 형성되기 이전의 시기인 유년기부터 이미 누군가는 신자의 자녀라는 이유만으로 교회 집단에 속하게 된다(「자녀 된 이에게」(2017)). 자신의 탄생 이전에 준비된 기독교 서사 속에서 소년은 이미 죄인이다. 본인은 목격한 적 없는 먼 과거, 인간의 죄를 대신해 벌을 받은 예수의 희생에 빚을 진 소년은 어느새 늘 죄책감을 안고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스스로 검열하게 된다(「비린 지저귐_4」(2017)). 자기 검열은 스스로를 향한 일종의 폭력이다. 그렇게 폭력은 내면화된다. 그리고 내면화된 폭력은 더 이상 폭력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오히려 따라 마땅한 무엇이 되어 어느 순간 타인에게 향하기도 한다.

이동혁_민족의 욕_캔버스에 유채_72.7×72.7cm_2018

양손이 묶여 있지 않아 스스로 목을 매단 것으로 보이는 자들을 향해 군중들은 애도 대신 적개심이 담긴 손가락질을 하며 비난과 아유를 쏟아낸다(「일찍 죽임당한 양」(2018)). 절단된 자기 신체의 뒷부분인지도 모르고 그 냄새를 맡는 개를 묘사한 장면은 이 집단에 내면화된 폭력성에 대해 충분히 의심하지 않는 맹목적인 믿음의 행태를 비꼬는 듯 하다. 그림은 교회라는 집단에서 목격되는 폭력성과 맹목성을 거쳐 결국 허망함을 암시하는 장면들에 가닿는다. 자의와 상관없이 세례를 받고 유년기부터 시작된 이 공동체 생활은 지팡이에 몸을 의탁해야 하는 노년기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갈대처럼 얇고 가는 지팡이에 잔뜩 수그러든 노인의 몸을 의지하는 일은 위태로워 보인다(「갈대 같은 지팡이」(2017)). 「깊은 눈」(2016)은 자글자글한 눈가 주름이 암시하는 세월만큼 깊지만 텅 비어있다.

이동혁_식어가는 빛展_스페이스 나인_2018
이동혁_비린 지저귐-4_캔버스에 유채_130.3×162.2cm_2017

폐교회의 기이한 환영들의 몸을 빌어 작가는 자신이 평생에 걸쳐 몸담아온 개신교의 이면을 내부자의 관점에서 고백한다. 그곳에서 자신은 암묵적이고 은밀한 폭력을, 맹목성을, 그리고 허망함을 경험했노라고. 그런데 그가 고백하는 어조가 독특하다. 그의 어조에는 감정의 동요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이는 아마 진폭이 거의 없는 차분하고 일관된 리듬의 붓질과 채색 때문일 테다. 그의 붓질은 자신이 그리는 것과 어떤 거리를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말하는 동시에 자신의 이야기를, 그리는 동시에 자신의 그림을, 자신의 경험을 거리를 두고 관조한다. 고백하는 내용은 상대방의 숨을 잠시 멈추게 만들 만큼 기이하고 자극적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러한 형식의 강도와 내용의 강도 사이의 대비에서 비롯된 낙차감은 역설적으로 그가 느꼈을 허망함의 깊이를 전달하며 보는 이의 마음 역시 깊이 출렁거리게 만든다. ■ 황윤중

Vol.20181208j | 이동혁展 / LEEDONGHYUK / 李東焱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