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 자리 Space of scenery

이지영展 / RHEEJIYOUNG / 李知映 / photography   2018_1210 ▶︎ 2019_0105 / 일요일 휴관

이지영_Space_피그먼트 프린트_224×150cm_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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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영 블로그_spinat.blog.me

초대일시 / 2018_1210_월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3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분도 Gallery Bundo 대구시 중구 동덕로 36-15(대봉동 40-62번지) P&B Art Center 2층 Tel. +82.(0)53.426.5615 www.bundoart.com

풍경의 자리 ● 여기, 작가가 머물렀던 곳이 사진 속에 담겨있다. 하지만 그곳들이 별다른 장소는 아니다. 잠시 쉬었다 가는 경관을 바라보며 나도 잠깐 쉬자. 지난 일주일 동안 다섯 편의 평론과 두 개의, 그러니까 영화학과 사회학에 관련된 글을 썼다. 하필이면 나처럼 다섯 건의 개인전을 쉼 없이 치러내는 프로젝트에 관한 비평문, 기호학의 개념으로부터 조형을 끌어낸 인스톨레이션 전시에 관한 글, 어느 미디 어 아티스트의 레지던시 전시서문, 미술 권력에 대한 조롱에 가득 찬 신진작가론, 그리고 미추의 경계를 주제로 한 작품론이 그것들 이다. 그리고 이제 현대미술가 이지영의 글을 쓸 차례가 왔다. 공교롭게도 지난 일주일의 코스가 한국화, 설치작업과 서양화, 영상작업, 팝아트, 조각을 살펴보는 시간이었던 까닭에, 사진 장르를 다루는 이 텍스트가 나의 포스트시즌의 대진표를 깔끔하게 정리해준다. 더불어 그의 작품은 지쳐있는 내게 안식을 준다. 언젠가부터 내가 줄곧 그렇게 해 온, 산만하고 들뜬 분위기의 글쓰기를 그대로 담았 던 네 편의 비평과 달리이 글의 톤은 차분히 깔릴 수밖에 없다. 이게 다 이지영 작가덕분이다. 관조, 마음으로 대상의 핵심을 살펴보기. 이 점은 다른 작가들이 아닌 특별히 그녀의 작품이 가진 효용이다. 작가가 품은 미술을 개념 정의하긴 쉽지 않다. 한 번은 내용을 논리적으로 풀어놓은 설명을 작가로부터 들은 적이 있었는데, 이해하려고 할수록 미로 속 한복판을 향하는 느낌을 받았다. 말로 풀어낸 설명과 시각적으로 제시된 작업 사이의 간극은 작가 본인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을 것이다. 사진작가는 보통 사람들이 눈에 그대로 담을 수 없는 것들에 관하여 상상하는 사람들이다. 그 이미지가 아무리 사진가의 상상 속에서 구조화되더라도 사진은 현 세계의 조건을 기계에 남긴 흔적이다. 미술학도로서 보낸 그녀의 성장기를 지배했던 리얼리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조는 각각 양극단의 과잉을 그 당시 작가들에게 요구했다. 독일 유학 이후 사진과 영상 매체를 다루기 시작한 이지영의 초기작들도 돌이켜보면 그 영향이 드러나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지영은 장르적인 형식 탐구보다 내면의 미세한 요동에 더 주목해왔다. 그 결과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작품으로 드러난다.

이지영_Space_피그먼트 프린트_224×150cm_2018
이지영_Space_피그먼트 프린트_185×124cm_2018
이지영_Space_피그먼트 프린트_185×124cm_2018
이지영_Space_피그먼트 프린트_각 185×124cm_2018

이 전시는 작가가 품어오고 겪은 개인의 체험을 인지체계(신체와 정신 구조)와 기술의 사회체계(사진기계와 사진술)의 결합으로 이끌어 낸 문화체계가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는 장이다. 문화체계란 곧 다른 장르나 다른 작가와 구별되는 스타일을 말한다. 평론가이면 서 동시에 사회학자인 내가 탈코트 파슨스(Talcott Parsons)의 사회구조론을 이지영의 작업에 잘난 척 끌어들인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녀는 자기규정을 어떻게 하고 있을까? 스스로를 굉장히 예민하며 감성적인 세계의 관찰자로 볼까? 혹은 미디어 기계 작동원리에 능숙한 숙련가로 생각할까? 아니면 언젠가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정지을 영광의 길을 꿈꿀까? 답은 세 가지 모두다. 옵저버, 테크니션, 스타일리스트 각각 유기체와 사회와 문화로 층을 나눈 시스템의 관리자로서 그녀의 방법론을 설명할 수 있다. 처음에 내가 미궁 속으로 빠져들 것 같았던 모호함은 그 추상성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내 식으로 정리를 다시 했다. 작가는 밝히기를, 영상을 찍으려고 대상을 고를 때 인상에 집히는 몇 가지 존재가 있다고 했다. 작가와 대상, 즉 주체와 객체가 서로 관계 맺는 인지적 수준의 시스템 작동, 몰입된 순간을 확정하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라는 사회적 수준의 작동, 그리고 사진 인화와 디스플레이를 통해 완결된 작품을 관객이 의사소통하며, 타인의 몰입과 경탄과 존경으로 구성되는 문화적 수준의 시스템이 있다. 작 가는 거기에 자기 힘을 내 맡긴다. 작품 이야기를 조금 하자면, 이지영의사진은 촬영 후 보정 작업을 제외한다면 동시대 미술이 곧잘 행하는 일체의 속임수가 없다. 그 녀가 스스로 풍경이라고 부르고는 있지만, 그 플레임은 광폭에 담아낸 전경보다 일정한 공간 분할로 잘라낸 조각에 가깝다. 그래서 내가 보기에 작품들은 열린 공간보다 닫힌 공간의 느낌이 더 짙다. 이 사진들은 장면의 순간적인 포착보다 스튜디오에서 준비된 촬영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한 작가가 비의도적인 공간의 끌림이라는 수사적 표현을 쓰는데, 작가가 능동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힘을, 작 가 주변으로 몰려들어 작품을 이루는 창발적인 에너지의 존재를 가리키는 말일까? 나는 모르겠다. 비평 한다는 사람이 무책임하게 모른다하면 될 일이라며 따진다면, 난 그런 힘은 '없다' 쪽에 한 표를 던질 것이다. 그녀 주변에서 벌어지고 그것을 깨닫고 작품으로 흡수하는 에너지는 '옛날하고도 옛적, 머나먼 은하계에 퍼져있던 포스' 따위가 아니라 바로 작가가 투입과 산출과 피드백의 전 과정을 통제해야 되는 사회적 힘이다. 그 힘은 잠시 나타나서 빛을 발하다가 또 사라지곤 한다. 전시는 그 순수한 에너지를 하나의 공간에 가 장 확실하게 붙잡아두는 사건인 셈이다. 한 가지 더, 순전히 이지영 본인의 작업 동기론을 빼면 서운하다. 작가에게 이번 작업은 베를린과 대구로 이어진 레지던시 생활의 영 상 일기라고 봐도 된다. 일기는 특별한 사건이나 생각을 비망록처럼 쓸 수도 있고, 평범한 일을 기록으로 남길 수도 있다. 따지고 보 면 작품도 그렇지 않나. 또 예술로서의 사진 말고 핸드폰으로 찍는 일상의 사진도 마찬가지다. 사진이 일기 형식을 외형으로 두른다 면, 별난 경험이나 스펙터클을 찍기보다 강박증처럼 규칙적으로 기록하는 행위가 더 가치 있다. 폴 오스터의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와 이 소설을 각색한 웨인 왕 감독의 영화 「스모크」가 그렇고, 한국화가 유근택의 작업실 풍경 연작 또한 일정한 시차를 지키며 반복해 나간 관찰의 예술이다. 미술가 이지영의 작업은 이런 예술가들의 일기 프로젝트보다 수줍음 많고, 동시에 충동적인 이끌림에 기댄다. 그래도 나쁠 건 없다. 단지 시간의 축적이 문제다. 작업량이 쌓이면 된다. 이번 전시가 그 계기가 될 것이다. 이지영에게 사진은 우연히 마주하는 유일한 시공간의 이미지다.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희노애락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둔 무위의 상태다. 또 그것은 충분한 논리로 기술할 수 있는 글자의 권리를 포기하는 대신에, 빛과 구도의 법칙 아래 새로 맺는 매혹의 방식이기도 하다. ■ 윤규홍

Vol.20181210a | 이지영展 / RHEEJIYOUNG / 李知映 / 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