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장된 매뉴얼 The Expanded Manual

강서경_김민애_이은우_정소영展   2018_1211 ▶︎ 2019_0217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8_1214_금요일_04:00pm

관람시간 / 10:00am~08:00pm / 주말,공휴일_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SeMA, Nam-Seoul Museum of Art 서울 관악구 남부순환로 2076 (남현동 1059-13번지) Tel. +82.(0)2.598.6247 sema.seoul.go.kr

동시대 미술 담론에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니꼴라 부리요(Nicolas Bourriaud)는 그의 책 『포스트프로덕션(Postproduction:Culture as Screenplay: How art Reprograms the World)』(2002)에서 오늘날 예술적 질문들은 "어떤 새로운 것을 우리가 만들 수 있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고 했다. 즉 정보 시대의 전 지구적 문화라는 급증하는 혼란에 반응, 동시대 예술가들은 형식들을 구성하기 보다는 상업용 제품들, 기존의 형식들, 앞선 이들의 흔적이 가득한 세상을 프로그램화하고 사용한다는 것이다.*

확장된 매뉴얼 The Expanded Manual展_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_2018

최근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프랑스 예술단체 '오비우스(Obvious)'가 14 ~ 20세기에 그려진 초상화 1만 5000점의 데이터를 투입, 19세의 인공지능(AI) 예술가와 프로그래머에 의해 제작된 작품 「에드몽 벨라미 Edmond Belamy」가 5억 원에 육박하는 금액에 낙찰됐다고 한다. 예술가들이 세상 모든 것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재조합하고, 재생산하는 가운데 인공지능 역시 부리요의 표현처럼 '역사화 된 양식과 형식에 거주하기', '이미지 사용하기'**에 동참하고 있다. 모든 게 빠르게 생산되고, 널려있고, 어디서나 쉽게 소비되는 세상이다. ● 그렇다면 이러한 흐름 안에서, 외부가 아닌 내부로 시선을 돌려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참조하고 사용하여 다시 작품을 제작하는 것 또한 동시대 예술의 의미 있는 한 양상이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 이 전시는 시작됐다. 작품 선정을 위해서는 가장 기본으로 돌아가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들 중, 남서울미술관 공간에 적합한 조각, 설치 작품들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작업의 새로운 전개, 변화, 발전을 위해서 내용 또는 형식에 있어 비결정성, 미완결성, 개방성 등을 가진 작품에 주목, 강서경(1977), 김민애(1981), 이은우(1982), 정소영(1979) 등 네 명의 작가를 선정하였다. 이들은 한국 동시대 미술에서 독자적인 행보를 보이는 중요한 여성 작가들이기도 하다.

강서경_검은 유랑_철에 도색, 실, 황동, 나무, 로프, 볼트, 가죽_가변설치_2016~8
강서경_검은 유랑_철에 도색, 실, 황동, 나무, 로프, 볼트, 가죽_가변설치_2016~8

각 작가는 자신의 미술관 소장 작품을 다시 세밀하게 살펴보고 이를 매개로 구조물 또는 작품을 추가로 제작, 전시를 위한 새로운 시나리오를 구성하였다. 강서경은 「검은 유랑」(2011~2016)을 응용, 새로운 구조물을 더하여 확장된 장면을 만들고, 김민애는 「화이트큐브를 위한 구조물」(2012)의 설치 방법을 변경하기 위해 새로운 구조물을 제작하고, 여기서 파생된 작품들을 전개한다. 이은우는 「붉은 줄무늬」(2016)를 중심으로 사물과 예술 사이를 오가는 작품 제작 방식의 발전을 보여주는 전·후 작품을 함께 설치하고, 정소영은 「잉크 드롭」(2007)을 중심으로 기존 작품을 변형한 작품들을 모아 한 장면이 되도록 한다. 이제 각 소장 작품은 기존의 설치 매뉴얼에 더하여 확장된 새로운 설치 매뉴얼을 갖게 되면서 풍부한 형식과 내용을 가진 작품으로 거듭나고, 이들은 전시장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작동된다. ● 강서경은 전통 회화의 방법론을 회화, 설치, 영상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공감각적으로 확장하면서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연속선상에 놓인 현재의 삶을 동시대적으로 구현하는 작업을 해왔다. ● 소장 작품인 「검은 유랑 Black Meanders」(2011~2016)은 총 18점의 개별 단위들이 모인 설치 작품이다. 작가의 작품은 단일체가 아닌 구조물을 더하고 빼는 것이 가능한 개방적 구조를 갖기 때문에 내용을 유지하면서도 작품이 위치하는 공간에 따라 개별 구조물의 위치나 전체적인 규모가 달라질 수 있다. 북서울미술관 야외에 설치됐던 작품은 이번 전시를 위해 기존의 개별 단위들을 예민하게 지지하고 재조합할 수 있는 구조물들을 추가로 제작, 새로운 장면으로 구성되었다. 여기에 다양한 설치 장면을 사진으로 기록한 매뉴얼을 책으로 만들어 관람객이 작품의 변주를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강서경_검은 유랑_철에 도색, 실, 황동, 나무, 로프, 볼트, 가죽_가변설치_2016~8
강서경_검은 유랑_철에 도색, 실, 황동, 나무, 로프, 볼트, 가죽_가변설치_2016~8

「검은 유랑」(2016~2018)은 작가의 초기 설치 작업인 「그랜드마더 타워 Grandmother Tower」와 「정井」 사이의 과도기적 작품으로 중요하다. 전자에서 시작된 사각 틀과 쌓기 방식이 계승, 발전되는 과정에 있다. 동양화의 한지에서 시작된 사각 틀은 세상을 바라보고 담아내는 기본 방식이자 발화의 최소 단위, 시작점이다. 이는 작가가 세종이 창안한 유량악보인 정간보(井間譜)를 연구하면서 점차 심화, 발전하게 된다. 정간보가 정(井)자 모양으로 칸을 질러 놓고 음의 높이와 길이뿐 아니라 연주자의 몸짓 또는 행위를 나타내는 것처럼, 작가는 공간을 바탕으로 사각 틀을 단위 삼아 이야기를 전개한다. 각 개인의 목소리와 움직임을 아우르는 공간으로써 사각 틀은 쌓거나 이어 붙이는 방식을 통해 다양한 이야기로 확장 가능하다. 여기서는 사각 틀을 원이나 사선 등으로 쪼개거나 나누는 등의 다양한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머리, 몸, 다리를 의미하는 세 개의 사각 틀이 쌓인 의인화 된 구조물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유랑하는 주체이다. 아직 본연의 자리를 찾지 못한 채, 둥근 무게, 따뜻한 무게, 큰 발, 모인 삼각 등 다양한 개별 단위들 사이로 떠도는 개인이다. 이처럼 「그랜드마더 타워」의 할머니부터 지금까지 작가의 작품에서는 언제나 신체가 중요하게 작동한다. 쌓기 방식 역시 마찬가지다. 「검은 유랑」에 개입, 기존 단위들의 다른 배열을 가능케 하는 새로운 구조물들은 각기 지닌 무게, 높이에 따라 지탱할 수 있는 위치, 영역, 경계 등을 나타낸다. 이들의 역할과 위치가 정해진 공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 행위, 목소리를 담고 있다. 공간을 오가는 관람객은 의인화된 구조물들과 함께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에 참여하게 된다. 한편 제목에서'검은'은 동양화의 먹에서 연유하는데, 검은색은 회화의 바탕, 모든 것의 기본이 되는 색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여기서는 떠도는 신체의 암담함, 알 수 없는 미래를 노래하는 듯하다. ● 이 시기를 거쳐 사각 틀은 이야기, 노래, 움직임, 안무까지 지시하는 정교한 발화의 장치, 함축적인 시스템으로 진화한다. 사각 틀의 반복과 중첩, 각 단위들의 유연한 구성으로 이루어진 작품은 공간에서 각 개인의 서사뿐 아니라 사회에서 개인이 겪는 모순과 갈등 너머 모두가 공존할 수 있는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는 장이 된다. 이는 작가의 말처럼 문인화의 시詩, 서書, 화畵의 응집, 발화의 과정과 다르지 않다. 오래된 논리를 통해 만들어진 추상적 풍경은 다양한 변주로 동시대 삶과 해석, 조화로운 미래를 향해 열려있다.

김민애_화이트큐브를 위한 구조물_철 도색, 우레탄 바퀴_100×140×140cm×4_2012 김민애_네 모서리_알루미늄 도색_115×160×160cm_2018
김민애_바퀴로 움직이는 조각_폴리카보네이트, 우레탄 바퀴_128×190×190cm_2018

김민애는 사회적으로 주어진 조건이나 보이지 않는 규범들, 또는 시스템 속에서 한 개인이 겪게 되는 모순적인 상황을 드러내는 작업을 해왔다. 이는 자연스럽게 미술이라는 체계에서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미술관이나 갤러리와 같은 대상이자 장소에 관한 생각을 보여주는 것으로 옮겨갔다. ● 2012년 갤러리 현대에서 개최된 『세상만큼 작은, 나만큼 큰』전시를 위해 공간에 맞춰 제작, 전시됐던 소장 작품 「화이트큐브를 위한 구조물 A Set of Structures for White Cube」(2012)은 전형적인 화이트큐브 공간 구조의 갤러리가 갖는 권위와 제한, 규정 등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작품이다. 90도의 각도를 가진 구조물 중 세 개는 '모서리를 바르게 유지시키는'장치로서 벽과 벽 사이에 설치됐다. 그러나 바퀴까지 달린 구조물은 바닥에서 약간의 거리를 둔 채 마치 전형적인 회화 작품처럼 못으로 고정되어 있을 뿐 제목이 주장하는 기능을 하지 못한다. 세 구조물은 벽의 각도를 유지하는 척 걸려있으며, 심지어 나머지 하나는 그마저 실패한 듯 바닥에서 나뒹굴고 있다. 이는 사각형의 갤러리라는 주어진 환경을 재인식시키는 동시에 모순된 상황에서 작가 스스로의 역할과 태도를 재고하는, 일종의 자화상 같은 작업이다. 그런데 남서울미술관은 분명 미술관으로서 화이트큐브 맥락을 갖지만, 벽을 훼손해서는 안되는 문화재로서 자체 맥락이 있기에 작품은 기존 방식대로 벽에 고정될 수 없다. 작가는 이러한 조건에 반응, 가벽을 세워 기존 설치 방식을 고수하는 대신에 십자형 거치대인 「네 모서리 Four Corners」(2018)를 고안, 네 개의 구조물이 가운데 모여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재 작업하였다. 전시에서 기존 작업은 비로소 공간 중앙에 바로 서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바퀴는 공중에 떠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십자형 거치대는 기능은 있으되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네 개의 구조물 역시 다시 거치대에 의존하고 있을 뿐이다.

김민애_바퀴로 움직이는 조각_폴리카보네이트, 우레탄 바퀴_128×190×190cm_2018_부분
김민애_자립조각_철 도색, 경첩_120×1,320×120cm 내 가변설치_2018

「바퀴로 움직이는 조각 Sculpture on Wheels」(2018)은 「화이트큐브를 위한 구조물」과 「네 모서리」를 조합한 전체 형태에서 특징적인 부분만을 발췌하여 제작한 작품이다. 기능하는 구조물과 기능하는 척하는 구조물이 뒤섞이고 바퀴가 바닥으로 내려오면서 작품은 움직일 수 있는 독립적인 조각으로 거듭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각은 그 원형이 되는 작업과 비교하여 실제 기능이나 유사 기능, 혹은 역할조차 없이 다만 일종의 장식으로 존재하며, 따라서 투명한 몸체를 가진 채 마치 유령처럼 빈방과 복도를 오가며 낯설게 부유한다. ● 이는 다시 미술관 정원에 설치된 작품 「자립조각 Freestanding Sculpture」(2018)으로 전개된다. 이는 FREESTANDING을 이루는 각 알파벳을 철판으로 만든 뒤 경첩으로 연결하여 스스로 서있도록 만든 구조물이다. 일견 조각은 그 뜻처럼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은 채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 같지만, 실은 각 알파벳이 지그재그로 연결되어 서로를 지지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양상이다. 보행로 한 가운데 서서 독립적 존재임을 과시하는듯하나 결국 주어진 조건이나 상황을 벗어나 나만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흰색으로 칠해져 언뜻 무미건조하게 느껴지는 조각은 일종의 기본 값으로 이러한 의미를 더욱 드러내는 듯하다. 한편 정면에서 보는 「자립조각」은 마치 추상조각처럼 보이는데, 걸음을 옮기면 각 알파벳 사이로 보이는 복잡한 철판 구조물들, 넘나드는 풍경, 그 위로 드리워지는 그림자로 작품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이는 공간을 열어 관람객을 유도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동시에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에 관해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면서 이야기를 생성한다.

이은우_붉은 줄무늬_우레탄 페인트, 철_60×180×88cm_2016
이은우_3, 5, 8, 9mm / W R B Y G NY NO NR NP NG_ 모눈종이에 라벨 스티커_21×29.7cm×77_2008

이은우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물건에 관심을 두고 작품과 물건의 경계를 오가는 작업을 해왔다. 작가에게 물건은 산업, 직업, 노동, 유통 등 물건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모든 방식들이 담겨진 세상이고 정치·사회학적 맥락의 총화이다. 여기서 물건의 본질, 의미는 그것이 맺고 있는 관계에 따라 결정되기에 그것이 상품인지 작품인지, 유용한지 그렇지 않은지는 물건이 위치하는 상황, 조건, 의도, 생산과 소비의 주체에 따라 결정 된다. ● 초기 작업인 「3, 5, 8, 9㎜ / W R B Y G NY NO NR NP NG 」(2008)는 일상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30개 종류의 스티커 크기와 색깔을 조합하여 만들 수 있는 모든 형태를 모눈종이 위에 나열한 작업이다. 여기에 쓰인 스티커는 3㎜ 하양, 빨강, 파랑, 노랑, 초록, 5㎜ 하양, 빨강, 파랑, 노랑, 초록, 8㎜ 하양, 빨강, 파랑, 노랑, 초록, 형광노랑, 형광주황, 형광빨강, 형광분홍, 형광 초록, 9㎜ 하양, 빨강, 파랑, 노랑, 초록, 형광노랑, 형광주황, 형광빨강, 형광분홍, 형광 초록이다. 스티커라는 사물은 작가라는 주체의 집요한 수작업을 통해 수많은 조합을 이루고, 이는 다시 77개의 다채로운 평면으로 구성되면서 하나의 추상 작업으로 귀결된다. 이처럼 색이나 형태, 의미 등 다양한 참고와 규칙을 통해 추상성을 구현하는 작품 제작 방식은 이후 작업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난다. ● 소장 작품인 「붉은 줄무늬 Red Stripes」(2016)는 일반적으로 거실에 놓이는 소파, 의자, 테이블 등을 간결하게 구현한 작품이다. 여기서 소파의 경우, 1980년대 출시되어 여전히 생산되고 있는 이케아(IKEA)의 2인용 소파 클리판(KLIPPAN)을 참고했다고 한다. 더하여 이는 위 물건들의 표준 규격, 외형, 용도 등을 참고, 재료 삼아 이들을 평면에 한 붓 그리기 형식으로 단순하게 이미지화한 뒤 이를 다시 입체로 구현하는 방법을 통해 만들어진 추상 조각이다.

이은우_3, 5, 8, 9mm / W R B Y G NY NO NR NP NG_ 모눈종이에 라벨 스티커_21×29.7cm×77_2008_부분
이은우_오뚝이_폴리에스터 레진, 파이버 글라스, 우레탄 페인트_55×60×60cm×3_2018

「오뚝이 Roly-poly」(2018)는 이번 전시를 위해 새로 제작된 작품이다. 지름이 약 4인치씩 차이 나는 원형구조물을 쌓아 위에서 보면 과녁 형태를 가진 덩어리를 제작한 뒤 같은 형태로 3개를 주조하여 설치하였다. 작품은 일견 무게가 있는 돌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강화플라스틱(FRP)으로 주조한 뒤 돌무늬로 마감했기에 실제로는 속이 텅 빈 작품이다. 작품 하단에는 서로 다른 무게 추를 달아서 3개의 작품은 오뚝이처럼 다른 방향으로 기우뚱거린다. 그간 돌무늬는 스프레이건의 노즐을 조절해가며 페인트를 분사해 만들어졌다면, 이번에는 페인트를 문지르는 새로운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작가가 관심을 기울이는 물건들 중에 실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인테리어 자재들은 돌이 아니면서 돌인 척, 나무가 아니면서 나무인 척, 대리석이 아니면서 대리석인 척하는 가짜 무늬 천지다. 작가는 수많은 가짜로 둘러싸인 세상에서 가짜가 정말 가짜로 그치는 걸까라는 의문, 이 정도 상황이면 가짜는 그냥 진짜, 즉 실재를 이루는 하나의 진실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러한 물건들을 무시하기 보다는 받아들이게 되고 이들의 방식을 작업으로 전환한다. 또한 세상에는 가짜가 여러 방식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여기서 가짜를 다르게 만드는 방식 역시 중요하다. 우리를 둘러싼 물건과 이를 참고한 작품, 결국 세상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둘은 다르지 않다. 작가는 둘 사이를 오가는 열린 태도로, 관람객 역시 작품을 대하는 전형적인 태도와 방식이 아닌 물건을 사용하듯 쉽게 작품을 대하기 바란다.

정소영_잉크 드롭_FRP, 철, 우레탄 도장_ 115.5×182×160cm, 193×83×69cm, 49×86×1,000cm_2007 정소영_물질 Ⅰ- Ⅷ_유리, 석고, 시멘트, 자갈, 에폭시_약 70×250×150cm_2013~8
정소영_잉크 드롭_합성수지, 철, 우레탄 도장_ 115.5×182×160cm, 193×83×69cm, 49×86×1,000cm_2007

정소영은 우리가 사는 시간과 공간, 즉 우주이자 자연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현상들과 여기서 생성되는 이야기들을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연속선상에서 파악하고 이를 물질화하는 작업을 해왔다. ● 작가의 초기 작업이라고 할 수 있는 소장 작품 「잉크 드롭 Ink Drop」(2007)은 종이 위에 떨어뜨린 잉크가 만든 점의 형태를 다시 3차원의 공간에서 아래로 흐르는 형상으로 구현한 작품이다. 각기 다른 높이에서 흘러내리는 용액이자 자라나는 종유석 같기도 한 형상은 하강과 상승, 액화와 고화라는 상반된 현상을 동시에 보여준다. 이는 해체와 재조합, 양각과 음각이 공존하는 다양한 작업으로 이어지는데, 상반된 현상의 동시적 구현은 미결정, 미완결의 상태로 스스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동시에 공간을 해체, 재구성하여 유동성을 형성한다. 이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수많은 존재들이 생성과 소멸을 되풀이하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의 현상과 다르지 않다. ● 공간의 생성과 소멸에 대한 관심은 이후 완성되지 않은, 현재 진행형인 장소들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소장 작품을 중심으로 기존의 작품을 변형, 설치한 「물질 Ⅰ~Ⅷ Material Ⅰ~Ⅷ」(2013~2018)과 「라이트 콜렉터 Light Collector」(2015~2018)는 모두 이러한 장소들을 조형화한 작품이다. 「물질 Ⅰ~Ⅷ 」은 2013년 개인전 『움직이지 않고 여행하기』에 전시됐던 작품 「물질 Ⅰ~Ⅶ Material Ⅰ~Ⅶ」 일부를 포함하여 다시 만든 작품이다. 전시는 한국에서 흔히 사용하는 시멘트를 즉석에서 부어 자연의 퇴적층인 동시에 도시의 건설 현장을 의미하는 장면을 구현했는데, 이는 건설의 기본 재료들을 만들어내는 자연과 이를 이용하는 인위적 행위가 시간의 차를 두고 충돌, 작용, 함께 진화하는 지점이다. 여기서 파편들을 발굴한다는 가상 시나리오를 설정하고, 파편들과 유리 상자를 함께 전시하여 두 시간의 간극, 과거와 현재를 경험하도록 하였다. 이번 전시에서는 「잉크 드롭」을 구성하는 세 개의 작품들 사이에 놓인 유리 상자들 안팎 또는 위에 기존의 파편들과 새로 제작된 다양한 형태의 파편들을 설치한다. 여기서 유리 상자는 파편이라는 과거를 담은 타임 캡슐을 의미하는 동시에 빛을 반사, 투과, 굴절함으로써 「잉크 드롭」과 함께 끊임없이 변화하는 공간,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정소영_물질 Ⅰ- Ⅷ_유리, 석고, 시멘트, 자갈, 에폭시_약 70×250×150cm_2013~8
정소영_라이트 콜렉터_유리, 철, 도장_200×120×100cm_2015~8

「물질 Ⅰ~Ⅷ 」이 가상 풍경이라면 2015년 『공명하는 삼각형』에 출품됐던 「라이트 콜렉터」는 제주도 동문모텔을 미술관으로 리모델링하는 실제 현장에서 시작됐다. 이는 모텔의 창문틀을 막아버린 벽돌의 표면을 주조한 유리를 구조물에 나열한 뒤, 내부에 조명을 설치함으로써 빛이 차단된 창문에 다시 그 과거의 흔적을 빛으로 전환, 새롭게 불러들이는 작업이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때 제작했던 유리판들을 공간에 맞게 새로 제작한 구조물과 함께 설치하고 조명을 비춰 과거를 담고 있으면서 새로운 미래 사이에 존재하는 과도기적, 비결정적 공간을 구현하였다. 이제 과거의 기억과 흔적은 새로운 세계로 거듭나게 된다. ● 새로운 형식으로 제작된 세 작품들은 한 공간에서 자연의 끝없는 변화와 그 안에서 거주하며 빠르게 생성되고 소멸되는 인위적 행위들을 보여준다. 지금 우리의 풍경은 결국 소멸하지만 거대한 자연 안에서 이는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고 변화하는 순환의 과정에 놓여있음을 일깨운다. 정소영의 작업은 우리가 인지할 수 없는 무한한 시공으로 열려 있는 이 세계의 현상들을 공간에 펼쳐놓은 풍경이다. ■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 니꼴라 부리요(2002), 『포스트프로덕션』, 정연심, 손부경 옮김, 서울: 그레파이트 온 핑크, 2016 참조 ** 앞의 책 참조

Vol.20181211d | 확장된 매뉴얼 The Expanded Manual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