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mon Minamikawa & Nathan Hylden

미나미카와 시몬_네이슨 힐든 2인展   2019_0131 ▶︎ 2019_0310 / 월요일 휴관

미나미카와 시몬_팩트체크 Fact Check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5×194cm_2017

초대일시 / 2019_0131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학고재청담 Hakgojae Cheongdam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89길 41 B1 Tel. +82.(0)2.3448.4575~6 www.hakgojae.com

시간의 창, 제 1장: 미나미카와 시몬의 회화 ● "「웨이팅 그라운드(The Waiting Grounds)」는 외계 행성을 배경으로 한 나의 몇 안 되는 글 중 하나다. 태양계에 있는 우리가 사실상 생명을 다한 우주에 마지막으로 도착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순환적 관점으로 보더라도 우리가 파티에 마지막으로 도착한 손님인지, 혹은 다음 파티의 첫 손님이 될지 결정하기 어려울 수 있음에도 항상 나를 매혹시켰다." - J. G. 밸러드 (J. G. Ballard) (1977) ● 나는 작가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그의 작업실에 여러 번 방문했다. 그러나 벽에 기대어 둔 캔버스들은 항상 이미 완성되어 있거나 아직 칠을 시작하지 않은 상태였다. 미나미카와 시몬은 너무 늦게 찾아온 것일까, 아니면 너무 일찍 온 것일까? 나는 알 수 없었다. 이러한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너무 늦은 것인지, 혹은 너무 이른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우선, 나는 작가에게 있어 '제시간에' 존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나는 여전히, 또는 더 이상, 누락을 결정하는 양극의 사이를 알 수 없다. 그것은 '너무 늦게 존재하는 것'과 '너무 일찍 존재하는 것'의 사이이다. 사실 지금은 빙하시대라고 한다. 회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우리의 시대, 즉 지난 4천만 년간 지속되어 온 것으로 추정되는 빙하시대에 관해 인정받고 있는 학설이다. 1만 년 전에 끝난 것은 빙하시대 그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사실상 정확한 온도 범위가 없는 '빙하시대' 내의 상대적으로 추운 '빙'기에 가까운 듯하다. 다시 말해, 우리가 알고 있는 현재란 이미 지나갔으며 다음 것이 찾아온다는 빙기 사이의 상대적으로 따뜻한 '간빙기'라는 것이다. 이 이론은 마치 내가 두꺼운 얼음판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고 느끼게 한다. 이는 아마도 내가 이번 빙하시대에서 돌고 도는 빙기 사이에 살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미나미카와 시몬_무제 Untitled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45.5×112cm_2017

회화사에서 작가의 위치를 묻는 가식적이고 진부한 질문(갑절로 늦은)으로 미나미카와의 작품에 접근하는 것은 결코 나의 의도가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그의 작업 주제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을 하려고 하거나, 그의 작품 속 구성 요소들을 보다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 그의 말을 신중하게 인용하거나, 소위 형식적 분석이라는 것을 시도함으로써 얼버무리거나, '... 로서의 회화'와 같은 바보 같은 문구를 통해 구성과 엮이기를 거부하면서도 작품으로부터 의미/가치를 훔치려고 하거나. 즉, 그러한 글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지려고 결정한 순간, 미나미카와에 대한 나의 생각은 극도로 애매한 시간대로 진입했다.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설명하기 어렵다. 일본어로는 동음이의어인 '타소카레(黃昏, 황혼/그는 누구인가?')나 '카와타레(彼者誰, 어슴새벽/누구인가, 그는?)'와 같이, 낮도 밤도 아닌 황혼의 때. 즉, 밤을 기다리는 사람들과 낮을 기다리는 사람 모두를 위한 여기도 저기도 아닌 때. ● '어쩌면 회화 또한 어느 순간에서부터 이 시간대에서 멈춰버렸을 것이다'. 이미 오랫동안 그래왔으며, 앞으로도 한동안 그럴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회화 예술로 생긴 이 시간대 정체와 회화의 장르로 인해 발생한 이 시간대의 연장은 늦어도 미니멀리즘의 발생과, 소위 미니멀 아트를 구성하는 작품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미니멀'이라고 묘사되었던 1960년대의 회화를 거의 완전히 무시했던 당대의 비평과 저널리즘과 함께 시작되었다. '미니멀'이라고 불리는 것과 미니멀 아트. 회화, 그리고 회화가 아닌 예술. 이 전혀 어렵지 않은 구별이 왜 아직 지어지지 않았으며 아직도 혼동을 불러일으키는지에 대해 여기서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겠다. 어쨌거나, 미술사가들과 자칭 '미니멀리스트' 회화가들과 같은 사람들의 분노를 풀어주는 이 깨달음은 미나미카와와 함께한 회화의 장르와 그것의 예술 속 진부함에 관한 대화에서 비롯되었다. 실제로, 미나미카와는 회화의 진부함이 그가 작업하는 동기 중 하나라고 말한다. ● 미나미카와가 소설가 J. G. 발라드(J. G. Ballard, 1930~2009)의 단편 「웨이팅 그라운드(The Waiting Grounds)」(1959)를 통해 이야기했던, 시간의 창(time windows)에 대한 비유를 통해 자신의 작업에 대한 생각을 피력했음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나는 두 지질학자의 흔적을 찾으며 현장을 돌아다녔다. 한쪽에 찌그러진 캔이 가득 놓인 테이블은 녹색 페인트에 기포와 긁힌 자국이 있었다. 나는 뒤집어 보고, 서랍을 빼서 새카맣게 탄 공책과 수화기가 녹아서 받침대에 붙어버린 전화기를 발견했다." 주인공 케인(Quaine)은 '전임자' 탈리스(Tallis)가 일 년 전에 남긴 흔적을 따라가다가 지질학자들의 야영지를 찾았다. 말할 것도 없이, "탈리스는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전임자'가 그의 일을 후임에게 인계할 때에는 비밀이 지켜져야 한다. 주인공이 지질학자들로 추정되는 베일에 싸인 두 사람에 대해 아무 단서를 찾을 수 없을 때 느끼는 좌절, '뒤늦게 온 사람(late-comer)'를 기다리는 심리는 발라드의 캠프에 관한 모든 묘사에 스며들어 있다. 그러나 「웨이팅 그라운드」의 중간부에 쓰인 이 장면은 이야기의 클라이맥스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는 그저 많은 중간 장면들 중 하나일 뿐이며, 마침내 '늦게 온 사람'이 갑자기 다음에 오는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의 정체에 대해 추측한다(주인공의 마음이 '대지'와 하나가 되기 전까지). 다른 모든 중간 장면들과 같이, 이 장면은 「웨이팅 그라운드」의 서사 구조 전체와 닮아 있으며, 이 유사성은 각각의 미나미카와의 회화가 그의 전체 작업과 가지는 관계와도 같다.

미나미카와 시몬_세개의 스핑크스 Three Sphinx_ 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45.5×112cm_2017

도쿄 스테이션 갤러리의 큐레이터 하지메 나리아이는 미나미카와의 회화가 "자유롭거나 게으른 것처럼 보일 수 있는 붓질과 선들. 직관과 미완성 사이의 차이를 흐리는 노출된 캔버스와 희미한 색채"에 의해 특정 지어진다고 말했다. 하지메는 미나미카와의 작업이 회화에 있어 균형과 완성도가 그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는 자신이 말하는 같은 묘사 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모든 인상인 '자유'와 '게으름' 그리고 '미숙함'과 '불완전성'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이들은 미나미카와의 작품에서 구분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작가의 의도에 대해 추측하는 것을 꺼리는 하지메의 글은 그림을 의인화하지도, 자신의 감성에 대한 '묘사'도 아니다. 대신, 그것은 그러한 분석에 대해 글로 저항하는 수행적인 반응이며, 그런 표현에서 벗어나는 하나의 방법이다. 그래서 하지메는 미나미카와의 작업에 대해 '목소리 훈련'이라고 비유한다. ● "이는 공연을 적절히 끊는 휴식과 쾌감이다" 하지메의 이 표현이 비록 작가를 불편하게 만들더라도 특별한 의미가 있다. '리허설'의 목적은 더 나은 공연에 있지만, 그 향상의 정도는 '쇼타임' 전까지 알 방도가 없다. 이러한 평범한 가정을 바탕으로, 하지메는 미나미카와의 감상자들이 예정된 '쇼타임'을 미루고 때맞춘 클라이맥스를 누락시킨 작업에 관한 예술을 고찰하도록 이끈다. ● 미나미카와의 회화는 분명, 내가 지금 그렇게 남겨두고 싶은 방식대로 오랫동안 알고 있던 바와 같이 '쇼타임'의 허식 바깥으로 튕겨나간 문제들을 주요시하고 확대한다. 이것은 관람자들이 미나미카와의 그림에서 현저하게 씻긴 사물의 흔적을 눈치챌 때 확실히 알아보는 것이다. (2017년 9월 (다음에 계속)) ● 저자 노트: 위의 인용은 J. G. 발라드가 잡지 『뉴 월드(New Worlds)』 1959년 11월 호에 투고한 "웨이팅 그라운드"에서 가져온 것이다. 비문은 발라드의 『발라드가 쓴 베스트 공상과학소설』(1977, 퓨추라 출판사, p.54)에 다시 출판한 글에서 따왔다. 하지메가 미나미카와에 대해 한 언급은 전시 도록 『이뎀 패리스 동시대 작가 20인의 목소리: 몽파르나스의 어느 리소그래피 작업실』(도쿄 스테이션 갤러리, 2015)에 실렸다. 나의 글을 읽어본 미나미카와는 내게 "이것은 꼭 월병(月餠) 같은 글이군요"라고 했다. 이는 분명 최고의 찬사로 여겨졌으나, 나는 갑자기 미나미카와가 아직까지 월병을 그린 적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우에사키 센

네이슨 힐든_무제 Untitled_알루미늄에 아크릴채색_104×85.7cm_2018

네이슨 힐든, 당분간 계속 ● 벨기에에 위치한 SONS?(The Shoes Or No Shoes?) 뮤지엄은 다양한 종류의 신발을 수집한다. 네이슨 힐든은 SONS? 뮤지엄에 자신의 스니커즈를 기부할 생각을 해왔다. SONS? 뮤지엄의 컬렉션은 전통적인 신발부터 연예인이 신던 신발까지를 아우르는 방대한 발의 역사로, 여기에는 글과 그림, 그리고 디자이너, 음악가, 그리고 작가 등으로부터의 기증이 포함된다. 미국의 배우 겸 가수 라이자 미넬리(Liza Minnelli)가 신던 펌프스와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이 신던 모카신이 있다. 부탄의 남성용 부츠 초글램(Tshoglam) 한 켤레와 미얀마의 한 도시 랑군(Rangoon, 오늘날의 양곤, Yangon)의 어린이용 슬리퍼, 남아프리카 보츠와나에서 온 부시먼족의 샌들, 그리고 부담스러운 여성용 샌들 쿱캅(Kub Kab) 한 켤레, 아프리카의 동쪽 국가인 지부티(Djibouti)에서 온 나무를 깎아 만든 샌들이 있다. 19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미국의 조각가 클래스 올덴버그(Claes Oldenburg, 1929~)가 신던 신발도 있다. 물감으로 얼룩진 올덴버그의 더비 슈즈는 작가가 직접 신던 것처럼 보이지만 확실히 알 수는 없다. 이 부분은 추측에 맡겨야 한다. ● 힐든은 작업실에서 신는 신발을 기증하는 것을 고민했지만, 그 결과로 작업에 어떤 영향이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새 신발을 길들여야 할 텐데, 그러나 그렇게 되면 작업 방식도 다시 길들일 필요가 있을까? 매일 똑같은 신발을 신고 다니는 것에는 어떤 평온함이 있다. 그의 로스앤젤레스에 위치한 작업실에서는 제작하는 것, 혹은 보다 중요하게는 모든 '행위'가 작업이 된다. 어쩌면 신발을 기증하는 것은 그다지 나쁜 생각은 아닐 것이다. 그럼으로써 알맞은 새 신발의 필요에 따라 하나의 작업 방식을 내려놓고 새로운 방법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과정과 발견에 대한 질문이다. ● 최근 도쿄의 미사코 & 로젠에서 진행했던 「당분간 계속(For Now and So)」은 이것의 전형적인 예다.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지속적인 과정이 회화에 반영된다. 기계적 생산의 측면과 팩시밀리가 이미지들이 만들어지는 대로 부서뜨리는 것처럼, 하나의 흔적은 다른 흔적으로 이어진다. 모두 '무제'로 명명된 최근의 몇몇 작품은 진정으로 끝나고 완성된 이미지들의 '실패'에 대한 다양한 관점이 포함되어 있다. 이 전시에는 다섯 점의 알루미늄판위에 그린 아크릴 회화, 겹쳐진 사진 실크스크린과 알루미늄판위의 스텐실 작업, 그리고 녹색에서 구릿빛으로 급격하게 색이 바뀌는 붓 자국이 지나간 오래된 신문 모음을 붙인 여섯 점의 작은 회화 콜라주가 포함되었다. 이 콜라주들은 다른 작품들과 차이점을 보이지만 작업실에 놓여있는 재료로 만들어진 듯, 형식과 과정에 대한 연구인 것처럼 과거의 워크북을 참고해 나머지 작품들과 연결성을 띄기도 한다. 이 작업들은 짧은 글에 담겼고, 나중에 이를 다듬어 '시간'과 '존재', 그리고 같은 작업 공간에 반복해서 방문하는 행위에 대해 강조하는 전시 제목 '당분간 계속'이 되었다. 작업에 대한 고민은 작업실에서의 과정과 작업 방식 때문에 더 많은 일을 만드는 듯하다. 작업실은 작업의 주제가 탄생하는 곳이다. 작업실 바닥에 놓여 있던 물건들은 촬영되어 회화 속 요소가 된다. 이미지들은 과정을 거쳐 프린트되고, 잘리고, 스프레이가 뿌려진다. 작업실이 주제라면 회화는 도구다.

네이슨 힐든_무제 Untitled_알루미늄에 아크릴채색_104×85.7cm_2018

힐든이 작업실에서 '현재를 시작하는'것은 물성 다루기와 관련이 있다. 미국의 추상화가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 1936~)의 선언 "네가 보는 것이 곧 네가 보는 것이다"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그것은 물성의 현전(現前)을 가리키며, 또한 감각적 물성이 존재를 촉발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는 제작의 결과로 존재하는 작품들로 인해 더욱 힘을 얻는다. 미국의 조각가이자 설치미술가인 마이크 켈리(Mike Kelly, 1954~)가 말했듯, "대량 생산된 대상을 그 '훼손되지 않은' 특징 덕에 완벽한 대상으로" 본다는 것은 완성된 '완벽한' 대상이나 이미지로 마무리하는 데 있어 무엇이 필요한지를 배제한 일부 이야기일 뿐이다. 완벽한 대량생산된 물건과 그것의 필연적인 '실패'의 간극은 만들어진, 혹은 실제로 생산된 거의 모든 것들에서 나타난다. 힐든의 작업에서 보이는 잘라낸 자국, 여러 번 겹쳐 프린트된 모습, 씻어내리는 듯한 큰 붓 자국들은 스텔라의 선언과 켈리의 추상적 표현 모두를 자신만의 유머감각으로 풀어낸다. 그의 작업과정은 여러 번 반복된다. 알루미늄 시트와 콜라주에서 유머감각이 엿보인다. 은유적이고 직접적인 정교함이란 미술작품이 언제나 외견상 수작업과 정교한 생산 사이에서 불안하게 흔들린다는 것을 뜻한다. 저자성(큰 붓 터치)과 생산성(정교한 판화 작업, 가공된 알루미늄)의 오프셋 판화 작업은 작가의 몇몇 전작들이 특정한 프린트 방식과 마감을 위해 외부에 맡겨졌을 때 작품들이 작가의 손길을 거치지 않고, 별다른 특징 없이 작업된 것처럼 보이기 위함이다. 작가에게 있어 작품을 작업실로 가져와 다시 작업한다는 것은 그것이 대개 작업실에서만 할 수 있는 일부 재작업이거나, 아니면 작가가 직접 해야 하기 때문이다. ● 하나의 작업은 다른 작업에 영향을 미친다. 큰 붓 자국이 있는 다섯 점의 회화에는 다른 작품의 외곽선을 따라 뿌려진 스프레이 자국이 있다. 이 추상적이고 형체 없는 콜라주 모음은 일종의 규격이자 스프레이가 뿌려질 지점 역할을 하는, 작업실 바닥에 흩어진 종이와 만나 금속 위의 그래픽 성좌로서의 추상적 제스처를 가리킨다. 자신감 넘치는 작품들은 때때로 불안해 보이기도 하며, 작품 속 어색한 희극적인 면모는 원래 희극이 그러하듯,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에 의지하고 있다. 풍자가 그렇듯 회화는 일상 속에서 무작위로 중요한 점을 이끌어내는데, 이는 마치 작가 마이클 스미스(Michael Smith, 1951~)가 1986년 '사진의 세계(The World of Photography, 1986)' 프로그램에서 연기한 캐릭터 마이크(Mike)가 이유도 모른 채 자신이 '사진에 소질이 있는지' 고민함으로써 결핍을 표현한 방식과 비슷하다. 힐든의 회화는 마치 영상 속에 등장하는 마이크의 사진 현상소와 같이, 대개 배제되어 온 것들을 가장 중요하게 다룬다. 이 희극적 단면은 가장 단순하고 솔직한 것을 놀랍다 못해 거의 신화적인 기준으로 과장하는 데서 나온다. 이는 작품이 전시에 걸리는 방식까지 이어져, 일부 작품이 시야에서 벗어난다 할지라도 공간의 비율을 있는 그대로 취한다. 「당분간 계속」은 헛됨과 그 실패의 원인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과정을 담은 각각의 재배열된 캔버스와 자유로운 붓 터치 속에 나름의 유머감각을 감추고 있다. 힐든의 작업방식이 어떻든 간에, 이 제목 없는 회화들의 모호하고 불특정한 특징은 힐든이 SONS?에 신발을 기증하게 된다 할지라도 잘 어우러졌을 것이다. 『무스(Mousse)』 (2018년 6월 20일) ■ 스튜어트 먼로

네이슨 힐든_무제 Untitled_알루미늄에 아크릴채색_78.4×64.4cm_2019

Time Windows, Part I: The Paintings of Shimon Minamikawa ● "'The Waiting Grounds' is among the few of my stories set on an alien planet. The idea that we in this solar system may be late-comers to a universe whose life is virtually over has always intrigued me, though given a cyclical view of things it may be hard to decide whether we are the last guests at a party or the first to arrive at the next." —J. G. Ballard (1977) ● Seeking to uncover the painter's secret, I made multiple visits to his studio. But the canvases propped against the wall were always either already finished or as yet unpainted. Had the painter Shimon Minamikawa arrived too late, or too early? I had no idea; nor whether to ask such a question was itself already too late, or still too early. In the first place, I don't know how important being in time even is for a painter; on top of which, I still/no longer can/can't tell the difference between the two poles defining the condition of missing out—that is, between "being too late" and "being too early." In fact, they say we're currently in an ice age. I'm not talking about painting. It's established theory about this epoch, this ice age, which has supposedly continued for the last forty million years. It seems that what ended around ten thousand years ago was not the ice age itself but rather a relatively cold "glacial" period within the "ice age," which in fact has no definite temperature range. This means that what we know as the present is a relatively warm "interglacial" between the glacial that is said to have passed and the next to come. This theory makes me feel as though I'm struggling to survive, wriggling in the gaps between thick slabs of ice. I guess this means I was in time for one of those moments between recurring glacials in this ice age. ● It was never my intent to approach things from the pretentious and lame question (lateness squared) of the artist's place in the history of painting, but when I tried committing to a direct explication of the themes in his practice, or carefully quoting his statements to elucidate the compositional elements in his works, or equivocating by playing at so-called formal analysis, or attempting to steal some kind of meaning/value from the work while refusing engagement with the composition by means of silly phrases like "painting as . . ."— well, the moment I decided to keep as far away as possible from that kind of writing, my thoughts on Minamikawa entered an extremely vague time zone. The kind where you feel there's something worth noting, but it's hard to describe what. The kind of twilight zone, neither day nor night, which in Japanese is given names that play upon notions of mistaken identity like tasokare (who is he?) and kawatare (he is who?)—a time neither here nor there for both those awaiting the night and those awaiting the day. ● And perhaps, at a certain point, painting also got stuck in this time zone. Perhaps it's been that way for a long time already, and perhaps it will stay that way for a while longer yet. To my mind, the retention in this time zone that was produced by the art of painting, the extension of this time zone enabled by the genre of painting, begins at the latest with the emergence of minimalism and the almost complete disregard by the criticism and journalism of the time for the fact that the paintings of the 1960s that depicted the "minimal" fundamentally differ from the works constituting so-called minimal art. The depicted "minimal," and minimal art. Painting, and art that is not painting. I won't go into the reasons here for why this hardly difficult distinction was left unmade and confusion allowed to reign. In any case, this realization, which courts the ire of art historians and self-styled "minimalist" painters alike, was inspired by a conversation with Minamikawa about the genre of painting and its obsolescence in art. In fact, Minamikawa says the obsolescence of painting was one of his motives for wanting to become a painter. ● Now I understand the time zones (time windows) Minamikawa depicts in his take on painting through analogy with the time windows J. G. Ballard works (fenestrates) into the narrative in his short story, "The Waiting Grounds" (1959): "I walked round the site, looking for some trace of the two geologists. A battered tin field-desk lay on its side, green paint blistered and scratched. I turned it over and pulled out its drawers, finding nothing except a charred notebook and a telephone, the receiver melted solidly into its cradle." The protagonist, Quaine, has found the geologists' camp by following the trail left a year earlier by his "predecessor," Tallis. It goes without saying that there, "Tallis had done his job too well." A secret remains when the "predecessor" hands his job over to the successor. The frustration the protagonist feels when he cannot find any clues about the mysterious pair of supposed geologists—the particular mentality awaiting the "late-comer"—permeates all of Ballard's descriptions of the camp. But it must be said that this scene, described in the middle of "The Waiting Grounds," is not the climax of the story. It is just one of the many intermediate scenes that are insistently drawn out until, at last, the "late-comer" suddenly assumes the identity of the one waiting for the next arrival (until the protagonist's mind becomes one with the "ground"). As with all the other intermediate scenes, this scene resembles the narrative structure of "The Waiting Grounds" as a whole, and this parallelism recalls the relationship that each of Minamikawa's pictures has with his overall practice. ● Hajime Nariai has described Minamikawa's pictures as being characterized by "brushwork and lines that could be considered either free or lazy. Swathes of exposed canvas and a lack of color that confound distinctions between immediacy and incompleteness." Is Nariai saying that Minamikawa's works do not meet his expectations for balance and completeness in painting? Not so. He is well aware that the tendencies like "free" and "lazy," "immediacy" and "incompleteness" he identifies—all impressions that seem to be articulable—are kept undifferentiated in Minamikawa's works. Avoiding the trap of speculating about the artist's intent, Nariai's text is neither a personification of the picture nor a "picturing" of his own sensibility; instead, it is a performative response to the resistance of the works to such readings, and the way they escape articulation. So Nariai applies the analogy of "voice training" to Minamikawa's art. "[It is] the relaxation and pleasure that stop short of performance proper"—even if it rubs the painter the wrong way, Nariai's analogy is significant. The aim of "rehearsal" is improvement, but the degree of improvement is inevitably constrained by the time until "showtime"—it is on the basis of this common assumption that Nariai guides Minamikawa's viewers to a consideration of an art that defers the appointed "showtime," and a practice that misses a timely climax. ● Minamikawa's pictures certainly foreground and magnify matters that normally (as has long been the understanding [which is how I'd like to leave it for the moment]) would be polished out of the veneer of "showtime." This is something viewers will surely recognize when they notice the traces of things that have been markedly wiped from Minamikawa's pictures. (September 2017 [To be continued]) —Translated by Andrew Maerkle ● Author's note: The quotations above are taken from J. G. Ballard, "The Waiting Grounds," in New Worlds (London) 30, no. 88 (November 1959). The epigraph comes from a comment by Ballard reproduced in The Best Science Fiction of J. G. Ballard (London: Futura Publications, 1977), p. 54. Hajime Nariai's commentary on Minamikawa was published in Voices of 20 Contemporary Artists at Idem Paris: A Lithography Studio in Montparnasse, exh. cat. (Tokyo: Tokyo Station Gallery, 2015). After reading what I had written so far, Minamikawa told me, "This is a mooncake-like essay." Setting aside that this tribute was clearly meant as the highest praise, I suddenly realized that Minamikawa has never depicted a mooncake in his works to date. ■ Sen Uesaki

Nathan Hylden, For Now and So ● The Shoes Or No Shoes? Museum (SONS?) in Belgium collects footwear from all walks of life, and artist Nathan Hylden has been thinking of sending them his sneakers. The SONS? collection spans ethnography to celebrity—a wide history of feet—and includes texts, drawings, and other contributions from designers, musicians, and artists alike. There are pumps worn by Liza Minnelli and moccasins from Michael Jackson. A pair of men's Tshoglam from Bhutan, children's slippers from Rangoon (now Yangon), bushman's sandals from Botswana, and a pair of ladies' Kub Kab, sandals carved from wood that hail from Djibouti. There is also a pair of shoes from Claes Oldenburg dating back to 1995. Covered in paint, these derby shoes from the American sculptor seem to have been worn by the man himself, but there is no knowing for sure. That little detail is left open to speculation. ● Hylden has considered donating the shoes he wears in his studio, but wonders what might happen to his work as a result. He'd need to break in a new pair, but would that mean his working practice would need re-breaking in too? There is something comforting about wearing the same shoes day in, day out. In his Los Angeles studio, making, or more importantly "doing" remains an ambiguous pursuit, making sense of everything. Perhaps donating his shoes isn't such a bad idea after all—a way for him to draw a line under one form of practice and seek out another through the need for appropriate footwear. It's all a question of process and discovery. ● His current exhibition, For Now and So at Misako & Rosen, Tokyo, exemplifies this. A continuous process of image making feeds into each painting. Mark making in one informs another, while aspects of mechanical production and facsimile have as much to do with how images are broken down as how they are built up. Several bodies of recent work, all untitled, cover different aspects of the idea of "failure" for images to ever truly be finished and complete. The works on view include five acrylic aluminum paintings, a conjoined photographic silkscreened work and stencil on aluminum, and six small paint collage studies, which include clippings from old newspapers countered by brushstrokes that shift in color, from green to bronze. Although distinct from everything else, these collages follow on from the rest, made as they are from material found lying around the studio, as studies in form and process, making reference to workbooks produced in the past. All of this is framed by a short text later reworked into the exhibition title, placing emphasis on "time" and "presence," and the act of going over and over the same productive territory. Perhaps due to the process and practice of the studio, thinking around the work feeds the making of even more work. The studio is where a subject begins. Things found across the floor are photographed, then applied to paintings. Images are processed and printed, cut out and sprayed through. The painting becomes the tool while the studio becomes the subject. ● Hylden "begin present" in the studio is as much to do with coaxing out a materiality. Frank Stella's declaration "what you see is what you see" is two-fold. It points at the immediate presence of materiality and also hints at the sensation materiality can trigger in its presence. This is compounded by artworks that exist as a consequence of object making. As Mike Kelley states, seeing "the manufactured object, by virtue of its 'untouched' quality, as a perfect object" is only part of the story, leaving out what it takes to end with a finished, "perfect" object or image. The division between the manufactured object as perfect and its inherent "failure" appears in almost everything made or indeed manufactured. Hylden's cuts, overprints, and washed-off brushstrokes all operate between Stella's words and Kelley's abstraction, obscuring both with his own brand of humor; the process appears and reappears in later iterations. A sense of humor lurks behind each aluminum sheet and collage. Metaphorical and literal craftiness means that the artworks always waver in terms of appearance between being crafted and craftily manufactured. The offset between authorship (washing off brush marks) and production (fabricated printing, machined aluminum) has meant that while some of his previous works were outsourced to achieve a particular print and finish, they appeared distant and uncharacteristically detached. Wrestling the process back to his studio has for the most part reasserted the need for work to be studio-bound and more immediate. ● One piece affects another. The five washed-brushmark paintings bear the spray outlines of other pieces. The abstract and disembodied collage clippings echo the waste paper on the studio floor as both a template and a guide to be sprayed with, literally rendering these abstract gestures as a graphic constellation on metal. Confident and self-assured, each painting is at times unnerving, its awkward comedy relying, as comedy does, on apprehension about the unknown. As satire, paintings draw importance from the mundane without knowing what will it will bring, like the absence expressed by artist Michael Smith's wonderful character Mike, wondering if he "had an aptitude for photography" (The World of Photography [1986]) without really understanding why. Hylden's paintings, like Mike's Photo Lab, absorb what's normally excluded, treating it with the utmost importance. This aspect of comedy comes from exaggerating the simplest and most straightforward things to extraordinary, almost mythic proportions. That even extends to the way paintings are hung, taking the proportions of space as literal, even if it means that some works are out of reach or out of sight. For Now and So hides its sense of humour behind each re-articulated canvas and wayward brushstroke — a process that happily embraces futility and its own undoing. Regardless of his working practice, the ambiguous, unspecific nature, of each untitled painting means if Hylden were to donate shoes to the SONS? Museum, they will be in good company. (Originally published by Mousse (June 20th, 2018)) ■ Stuart Munro

Vol.20190131f | Shimon Minamikawa & Nathan Hylden 미나미카와 시몬_네이슨 힐든 2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