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사냥꾼

허보리展 / HURBOREE / 許보리 / mixed media   2019_0201 ▶︎ 2019_0226

허보리_채끝살 니들 드로잉 II_붉은 넥타이 23개, 실, 자수_90×220cm_20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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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보리 홈페이지_www.hurboree.com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9:00pm

백희갤러리 BECKY ART SPACE 전북 전주시 완산구 어진길 94-6(경원동2가 40-35번지) Tel. +82.(0)63.232.6748 becky.co.kr

오전 8시 45분 ● 수많은 사람들이 지하철입구에서 쏟아져 나온다. 그들은 한결같이 어두운 양복바지와 허연 와이셔츠, 비슷하게 생긴 자켓을 걸친 채 출근을 한다. 잠시 뒤 점심시간이 되면 무채색의 사람들이 또다시 와르르 밥을 먹으러 나오는 것이다. 1시간 안에 식사를 구겨 넣고, 이를 쑤시며 다시 각자의 일터로 들어간다. 나는 일터에 나와있는 모든 이들이 사냥꾼으로 생각되었다. 우리네 세상이 이렇게 발달하기 전 사슴사냥을 하지 않으면 굶어 죽는 원시의 사회가 있었음을 모두가 알고 있다. 우리는 돈을 사냥하지만 그 돈으로 산, 팩에 담긴 붉은 소고기를 보면 '사냥'이라는 원시적인 개념이 아직 존재한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 정육을 하다 보면 소의 부위별로 보여지는 단면이 매우 다른데 그것의 조형미는 한 폭의 멋진 추상화 같았다. 나는 잦은 세탁으로 목주위가 낡아 버리게 되는 와이셔츠, 유행이 지난 넥타이나 양복들을 직장인들에게서 수거하여 무기를 만드는 작업을 했는데, 양복에서 유일하게 화려한 부분인 넥타이에는 아름다운 고기의 마블링을 수놓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수를 놓는 일은 마치 매일 없어지는 밥을 만드는 일이나 매일 빨아야 하는 속옷이나 그런 매일의 지루한 노동같이 죽도록 단순한 일이었다. 그런 단순한 노동으로 만들어진 화려한 패턴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부와 명예, 그리고 마음속 깊이 자리한, 이루지 못한 꿈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고생한 날 저녁, 잘 구운 한점의 고기가 목구멍에서 사라지듯이 매일의 출근, 매일의 살림, 매일의 노동은 그렇게 하루하루 모래바람처럼 날아가 버리고 있다. 나의 자수라는 작업방식이 이러한 모래바람을 기억하는 일이 되었으면 한다. ■ 허보리

허보리_채끝살 니들 드로잉 II_붉은 넥타이 23개, 실, 자수_90×220cm_2016~8_부분
허보리_등심 니들 드로잉_넥타이, 실, 자수_70×93cm_2019
허보리_살치살 니들 드로잉 II_넥타이, 실, 자수_45×90cm_2019

광화문 사냥꾼과 고기 미학 ● 하나같이 비슷한 양복차림의 수많은 직장인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출근길의 광화문의 일상적인 풍경을 보며 허보리작가는 가족 부양을 위해 사슴사냥을 나가던 원시부족사회의 '사냥꾼'을 떠올린다. 아이를 안고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할 때엔 본인의 모습이 사냥을 떠나는 남편을 배웅하는 간난아이에게 젖을 주는 과거 움집의 여인과 다르지 않다 느끼고, 식구(食口)들을 위해 부위별로 포장된 붉은 살코기들을 고르며 사냥꾼이 획득한 전리품을 상상한다. 이렇게 허보리작가의 작업은 유독 주변에 대한 관찰과 삶을 향한 따뜻한 시선에서 출발한다. ● 과거 무장가장시리즈에서 작가는 승자독식, 피라미드 구조의 사회 속에서 가족 부양을 위해 일하는 가장들의 모습을 힘없는 무기로 표현한바 있다. 이전 작업들이 '무장가장-사냥꾼'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번전시는 사냥꾼이 획득한 '전리품'에 주목한다. 이 시대의 가장들은 진짜 피를 흘리지는 않지만 매일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전쟁터에서보다 더 치열하게 싸워 전리품인 '월급'을 얻는다. 작가는 현대사회의 전리품을 기념비로 만들어 사냥꾼들의 노고에 찬사를 보내며 경의를 표한다.

허보리_안심 니들 드로잉 Gold_와이셔츠, 실, 자수_44×63cm_2019
허보리_안심 니들 드로잉 Gold_와이셔츠, 실, 자수_44×63cm_2019_부분
허보리_ 채끝살 니들 드로잉 III Pink_넥타이, 실, 자수_27×37cm_2018

이번 전시 『광화문 사냥꾼』에서 선보이는 10점의 작품은 고기의 부위별 마블링을 수놓은 위풍당당한 고기추상이다. 언젠가는 굉장히 훌륭했던 무기였던 광화문 사냥꾼들의 넥타이와 와이셔츠를 뜯고 자르고 이어붙인 바탕 위에 반복적인 바느질이란 노동집약적 행위를 통해 전리품을 기념비로 만들었다. 면사 여섯가닥이 꼬여있는 자수실을 한가닥씩 뽑아 마치 소묘를 하듯 수놓은 채끝살, 살치살, 등심, 안심, 양지머리의 각기 다른 마블링은 와이셔츠와 넥타이 위의 추상화가 된다. ● 허보리작가는 가장 아름다운 패턴을 찾기 위해 그녀의 심미안으로 참 많은 고기들을 수 없이 들여다보고 가장 예쁜 마블링을 가진 고기를 발견한다. 넥타이와 셔츠를 고르고 해체하고 꿰매는 행위, 전리품의 아름다운 패턴을 수실로 한땀한땀 수놓는 수없이 반복적인 행위와 시간이 모여 화려한 작품이 완성된다. 처음부터 의도된 것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작품을 완성하기까지의 과정은 옷을 해입고 이불을 꿰매던 과거의 여성들의 손바느질과 오롯이 닮아있다. ● 그녀는 바느질과 전통 자수를 작업의 방식으로 택함으로써 매일의 반복적 노동을 적층시킨다. 얇은 수실이 반복적으로 수놓아져 만들어지는 고기의 마블링은 현대인들의 매일의 노동이자 수고로운 시간의 기록인 것만 같다. 입체적이면서도 다분히 회화적인 허보리의 고기추상은 발탁 받은 임금노동자-광화문 사냥꾼들의 수고에 찬사를 보내는 동시에 남녀 간의 전통적 역할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현대사회에서조차 여전히 전통적인 여성성을 강요받는 여성들의 그림자 노동을 동시에 조명한다. ■ 석혜원

Vol.20190203b | 허보리展 / HURBOREE / 許보리 / mixed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