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 & Hong 3rd show

킴앤홍 프로젝트展   2019_0208 ▶︎ 2019_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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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참여작가 / 김규식_현홍

관람시간 / 1층_10:30am~07:00pm / 2층_10:30am~10:30pm

키미아트 KIMIART 서울 종로구 평창30길 47(평창동 479-2번지) 1,2층 Tel. +82.(0)2.394.6411 www.kimiart.net

ABSTRACT PICTURES : conversion of light ● 작업을 하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들 : 빛이 투과되지 않는 종이, 자, 연필, 디바이더, 칼, 펀치, 드릴 그리고 아무것도 찍히지 않은 필름들. ● 사진을 찍는 행위는 없다. 단지 선과 면을 오려낸 여러 장의 종이를 바꿔가며 필름의 입자를 인화지에 감광하는 것이 전부이다. 물론 종이가 겹치는 부분을 정교하게 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연습이 필요하다. ● 1850년대에는 이러한 방식을 조합인화라 불렀는데 나의 작업과는 너무 달라서 그 이름을 쓰고 싶지는 않다. 이미지를 합성한 것이 아니고 빛의 투과되는 영역과 시간을 조절해 만든 사진이기 때문이다. 이런 비구상적인 시도는 다양하게 있어 왔다. 장노출로 이미지를 흐리게 하는 것, 추상적 대상을 찍는 것, 초접사로 입자의 패턴을 보여준 사진들도 그렇다. 그러나 엄연히 대상은 존재한다.

김규식_Black dot on White n2_젤라틴 실버 프린트, 셀레늄 톤_36.4×36.4cm_2019
김규식_Black on White_젤라틴 실버 프린트, 셀레늄 톤_36.4×36.4cm_2019

처음부터 대상이 없는 사진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자코비(Lotte Jacobi)의 '포토제닉'시리즈는 불빛에 인화지를 그을려 만든 사진으로 대상이 없는 사진이다. 나의 시리즈 중에 레이저가 달린 진자가 회전하며 감광한 사진인 「진자운동실험」도 그러한 예이다. ● 그러나 우연성에 기반한 사진들이라 이번 작업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오히려 구상했던 것을 완벽하게 드로잉하고 오려내는 것이 더 중요한 작업과정이다. 인화는 정확한 시간의 배수로 만들어져 동일한 인화를 다시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 암실의 테스트인화는 이러한 방식을 잘 보여준다. 최종인화를 얻기 위해 선행하는 테스트 인화는 보통 빛의 투과량을 일정하게 하고 시간을 배수로 노광하는 것을 의미한다. 일정한 시간의 노광을 통해 흰색으로 표현되었다면 다시 같은 시간을 배수로 계속 늘려 노광을 하게 되면 흰색이 중첩되어 검은 색이 된다. 흰색 위에 흰색을 계속 더하면 검은색이 된다는 것이다.

김규식_Combination of circles n1_젤라틴 실버 프린트, 셀레늄 톤_36.4×46.4cm_2019
김규식_Composition n1_젤라틴 실버 프린트, 셀레늄 톤_36.4×46.4cm_2019

빛 자체나 강한 빛을 반사하는 사물의 표면 같은 것은 사진에서 흰색으로 표현된다. 검은색은 빛이 없거나 아주 어두운 그림자 등이며 반사율이 낮은 대상도 검은색이다. 그러나 이 작업에서 아무것도 찍히지 않은 필름(네거티브)을 사용했으니 정상적인 인화였다면 모든 사진은 검은색이어야 한다. 사진 속의 모든 농도는 다 같은 하나의 색(농도)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것들이 선과 면이 되고 노광시간이 오버랩되면 특정한 형태가 드러난다. ● 작업중 하나인 'grain to form'에서는 절대성을 의미하는 사각형이 원근법적으로 휘어져 있고 마치 테이블처럼 그 위에 구체적 사물이 등장한다. 촬영된 필름은 사용하지 않았고 닷징과 버닝만으로 빛과 그림자를 강조해 만든 것이다.

김규식_grain and line to plane_젤라틴 실버 프린트, 셀레늄 톤_36.4×36.4cm_2019
김규식_line to plane_젤라틴 실버 프린트, 셀레늄 톤_36.4×36.4cm_2019

실제 촬영된 필름과 같은 입자의 구조를 지녔다면 이 사진을 보고 우리는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사진의 표면은 가증스럽게도 재현이라는 사진의 굴레가 더해지면 우리의 눈을 이미지를 뚫고 나아가 실제의 세계로 들어가게 한다. 사진은 대상의 재현을 버리고 절대적인 빛의 재현에 도달 할 수 있을까. 그렇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 김규식

김규식_Quadrilateral scale n1_젤라틴 실버 프린트, 셀레늄 톤_36.4×46.4cm_2019
김규식_grain to form_젤라틴 실버 프린트, 셀레늄 톤_36.4×36.4cm_2019

Photographic look 3 - a de + sign. ● 포토그라픽 룩 세번째 작업이다. 앞서 작가노트에서 언급했듯, 포토그라픽 룩 시리즈는 사진적으로 보기 또는 그 보기에 따른 결과물에 관한 작업으로, 결국 사진만이 할 수 있는 작품들로 채워져 갈 것이다. 바로 전 작업은 싸인sign에 대한 것이었다. 이번엔 디+싸인 de+sign 이다.

현홍_Photographic look 3. a de + sign 06_젤라틴 실버 프린트, 셀레늄 톤, 아크릴채색, 나무 프레임_30×30cm_2018
현홍_Photographic look 3. a de + sign 07_젤라틴 실버 프린트, 셀레늄 톤, 아크릴채색, 나무 프레임_30×30cm_2018

1. 추상사진에 관한. ● 추상을 찍으면 추상사진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다. 추상이란 의지와 작법과 발현이라는 세가지 것의 합주다. 즉, 먼저 작가 내면으로부터의 추상의지가 있어야 하고, 그것을 표현할 적절한 작법이 있어야 하며, 작법과 함께 그 의지가 작품을 통해 구현되는 것을 추상이라 말한다. 당연, 위 세가지 것은 작품이라는 하나의 '곳'에서 시작되고 끝이 나야 한다. ● 좀더 세분화하자. 스티글리츠 Alfred Stieglitz 의 구름사진은 추상사진이 아니다. 추상은 사람이 하는 것이지 자연이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연에서 추상을 얻고자 하는 것은 그래서 넌센스다. 구름은 단지 추상적으로 보여지는 것이지, 추상은 될 수 없다. 그렇다고 이미 추상적으로 만들어져 있는 인공물들을 찍은 사진은 추상사진일까. 이 역시 아니다. 작가는 추상적으로 보이는 것을 발견하고 기록했을 뿐 사진을 추상화한 것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추상이란 의지와 작법과 그 발현이 모두 한 곳에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 그럼 추상사진은 뭘까. 뭐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다. 추상미술을 떠올리면 된다. ● 보통 사진을 설명할 때 사용되는 수사들은 다음과 같다. 사실, 객관, 증거, 기록, 중립, 재현, 현실, 반영, 실재, 진실 등등. 만약 그것들에 반하는 작가의 의지가 있다면, 그래서 다음과 같은 충동을 가지고 있다면 그리고 사진 작법으로 인화지에 발현된다면 다 추상이 된다. 가공, 주관, 조작, 누락, 극단, 비재현, 가상, 방관, 허구, 거짓 등등. 대부분의 구체사진 concrete photography 이 그렇고, 사진 고유의 다양한 기계작법에 의한 사진들이 그렇다. 잘된 작업이든 못된 작업이든 일단 그러하면 추상의 요건을 가지는 건 사실이다. 보링어 Wilhelm Worringer의 이론은 그림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추상은 일차적으로 재현의 거부이고, 현실로부터의 도피이자 미적 망명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대부분의 추상사진은 싸인 sign (photography) 이 아닌, 디+싸인 de (not) + sign (photography) 의 성격을 가진다.

현홍_Photographic look 3. a de + sign 08_젤라틴 실버 프린트, 셀레늄 톤, 아크릴채색, 나무 프레임_30×30cm_2018
현홍_Photographic look 3. a de + sign 09_젤라틴 실버 프린트, 셀레늄 톤, 아크릴채색, 나무 프레임_30×30cm_2018

2. 디자인이라고 읽히는 디+싸인 de+sign. ● 님이라는 글자에 점하나를 찍으면...인화된 사진에 점 하나를 찍으면, 님이 남이 되는 것만큼이나 엉뚱한 결과를 가져온다. ● 그림에 붓칠 한번 더 했다고 그림이 아닌 것은 아니다. 다 쓴 소설에 단어 하나 더 했다고 문학이 아닌 것은 아니다. 음악에 악기 하나 더 집어넣는다고 음악이 아닌 것은 아니다. 영화 중간에 컷 하나 집어넣는다고 영화가 아닌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사진만은 그렇지 않다. 하나의 완결된 사진 위에 또 다른 사진 하나를 붙여 넣었다고 하자. 나아가 그림 같은 이질적인 것들이 더해졌다고 하자. 이걸 사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수상한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 ● 사진의 구석 구석, 모든 부분에는 재현이라는 사진의 소명이, 잉여도 여분도 없이 빼곡하고 또 촘촘하게 깔려있어서, 사실과 일대일 대응관계에 있지 않은 것들은 그 사진으로부터 쫓겨나게 되어 있다. 비사진적인 요소를 좀처럼 허용하지 않는 사진의 자폐적인 연유로 이질적인 것들은 모두 불순한 그 무엇이 된다. 큰 이물감으로 다가온다. 사진은 재현이라는 스테오로타입 stereotype에 강하게 묶여있기 때문이다. ● 그래서 다른 의지가, 다른 물질이, 다른 질감이, 다른 비재현적 요소가 사진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곧바로 싸인 sign 이 디+싸인 de+sign 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추상이 된다는 것이다.

현홍_Photographic look 3. a de + sign 11_젤라틴 실버 프린트, 셀레늄 톤, 아크릴채색, 나무 프레임_30×24cm_2018
현홍_Photographic look 3. a de + sign 13_젤라틴 실버 프린트, 셀레늄 톤, 아크릴채색, 나무 프레임_24×30cm_2018

3. 시선이 추상을 그리다. ● 역설적이게도, 사진은 재현과 동시에 끝이 나지만, 언제나 또 다른 창작의 시작이기도 하다. 항상 그 어떠한 것의 가능태로 남아있기에, 또 다른 시각예술의 입구이자 출구가 됨은 사진의 즐거운 사실이다. ● 이번 작업의 출발선은 그 가능태로서의 사진이고, 싸인sign 을 디+싸인 de+sign 하는 과정에서의 사진이었다. 인화지위의 구상 위로 기하적 패턴이 새겨졌다. 재현에 성실했던 구상과 그 위의 기하가 연결되어 하나의 복합이 된다. 흑백의 젤라틴실버트린트 위로 컬러의 아크릴 물감이 묻힌다. 그리고 점과 선과 면들은 구상 사이를 반복하고 횡단하고 교차하고 분할한다. 이질적인 색과 형들이 다른 물질, 다른 질감으로서 모종의 협력을 만든 것이고, 그리고 그 협력은 모종의 어울림으로 보여진다. ● 덧붙이고 싶은 것은, 이러한 추상 패턴이 시선의 패턴을 만든다는 것이다. 재현을 바라보는 습관적인 시각은 그 속도와 방향이 기하패턴의 의도래도 유도된다. 눈의 두 개의 시선은 구상과 추상을 교차적으로 따라다니며, 인력하고 척력한다. 시선이 사진을 디자인하는 것이고, 시선이 추상을 그리는 것, 곧 감상이 추상적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사진들은 감상자의 시선에 의해 디+싸인 de+sign 되고, 추상이 된다. 수용자의 머릿속에 시선의 모양이 박히다. 모든 예술작품은 하나의 새로운 발견이다.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

현홍_Photographic look 3. a de + sign 15_젤라틴 실버 프린트, 셀레늄 톤, 아크릴채색, 나무 프레임_24×30cm_2018
현홍_Photographic look 3. a de + sign 17_젤라틴 실버 프린트, 셀레늄 톤, 아크릴채색, 나무 프레임_24×30cm_2018

4. 그래서? ● 아, 항상 이 '그래서'가 문제다. 그래서? 그렇게 한 것 까지는 좋은데 그래서 뭔데? 그래서 '왜' 그렇다는 건데? 미치는 거다. ● 작가가 작업을 할 때엔 무엇을, 어떻게, 왜, 이 세가지 요소의 적절한 균형을 염두해야 한다. 다 아는 사실이다. '무엇'만을 강조하다간 단순한 소재주의로 흐르기 쉽고, '어떻게' 즉 방법론에만 치중한 작업들은 작업은 안보이고 방법론만 보이기 십상이다. 그런 작가는 나중에 망한다. '왜'만 고민하는 경우엔 너무 공허하다. 작품도 그렇고 감상도 그렇다. 형식과 내용은 적절한 균형 속에서 더 빛을 발하는 법이다. 오히려 수학이나 과학이 만들어내는 개념이 더 예술적일 수 있다. ● 그러나 사실 '왜'에서 부터 출발하지 않은 작업들도 많다. 작품의 당위와 가치와 직결되는 '왜'가 빠진 건데도 말이다. '왜'가 없는데 '왜'를 만들어내기는 당연 힘들다. 이 경우 주로 작가 자신이 찾지 않고 외주?를 준다. 없을 때는 없다고 솔직히 말할 수도 있어야 한다. ● 창세기에는 야훼가 세상을 왜 창조했는 지에 대해서는 씌어있지 않다. 다 만들어놓으시고 그저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만 기록되어 있다. 세상은 이유 없이 있는 것이고 그저 보시기에 좋았을 뿐이었다.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질문, '이 우주는 왜 있는 것일까'의 대답도 '그저 있는 것이다' 일 수 있다. 때로는 보기에 좋은 것만으로 가치가 있어야 한다. 감상과 평가에 그 정도의 이해와 여백은 필요한 것이 아닐까. ● 이번 내 작업은 '왜'가 부족하다. 앞의 수사들은 '무엇'과 '어떻게'에 관한 것이지, '왜'에 관한 것은 아니다. 이번 작업이 매체실험적인 면이 강했던 것이 이유이다. ● 사진을 통해 현실이 확인 받는 시대가 되 버렸다. 이미지와 현실이 역전 당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닌 시대이다. 그 어마어마한 이미지는 어마어마한 물량공세로 어마어마하게 접속하고 교환하면서 다시 증식한다. 그 틈바구니에서 예술사진은 그 것들과 무슨 차이를 두고 있는 것일까? 사진은 어떠한 예술적 성취를 더 할 수 있는 것일까? 너무나 낡아 버린 그 새로움이라는 것은 또 어떠한 새로움으로 거듭 날 수 있는 것일까? 다음 작업을 준비하면서, 마지막으로 짧고 솔직한 푸념이다. ■ 현홍

Vol.20190208a | Kim & Hong 3rd show-킴앤홍 프로젝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