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함의 힘

양순실展 / YANGSOONSIL / 梁順實 / painting   2019_0227 ▶︎ 2019_0331 / 월요일 휴관

양순실_고요함의 힘展_삼례문화예술촌 모모미술관_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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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9_0227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삼례문화예술촌 모모미술관 momo art museum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 삼례역로 81-13(후정리 247-1번지) Tel. 070.8915.8121 www.samnyecav.kr

슬픈, 지천명知天命 ● 子曰吾十有五而志于學三十而立 / 四十而不惑五十而知天命六十而耳順, /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 당혹감, 양순실의 그림을 보며 첫 번째 들었던 생각이었다. 그녀가 보내준 그림들을 보면서 단번에 들었던 느낌이 그녀가 자신의 삶을 혹은 과거를 정리하려고 하는가였기 때문이다. 이 근거 없는 의구심은 이번 전시에 선발된 그림들이 그녀가 아파트 거실에 갇혀있을 때 그렸던 이미지들이기 때문이다. 내게는 나무 밑둥에 올려놓은 왜소한 마네킹, 비스듬히 등 돌리고 서있는 작은 아이, 녹아내릴 듯한 결혼식 케익이나 아이스크림 같은 백색의 이미지가 모두 '과거'적 상징으로 다가온다. 여전히 그녀의 그림에서는 달콤함이 저지당하고 있고, 제 등에서 홀로 핀 아름다움의 실체를 보지 못하는 작은 아이는 부유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나무 둥지 위에 올려진 여인의 상반신은 결의에 찬 모습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양순실_고요함의 힘展_삼례문화예술촌 모모미술관_2019
양순실_고요함의 힘展_삼례문화예술촌 모모미술관_2019

이후, 그녀가 아파트의 문을 '꽝'하고 닫아버리고 길을 나선 뒤 포착된 산수풍경화 이미지도 다시 등장하고 있다. 여전히 핏물은 강물처럼 흘러내리고 꽃잎은 천연덕스럽게 휘날리고 있는 가운데 허공에 정지된 새만이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고 있다. 여기에 의자그림도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다만 화면의 중심을 견고하게 지키고 있던 의자가 구석으로 치워지고 불쑥 쏟아난 대나무에서 댓잎이 간지럽게 흘러내리고 있을 뿐이다. 이번 전시에서도 드레스는 반복되고 있다. 나무 밑둥에 올려진 여자의 몸이 화폭을 가득 메우며 성장해있지만 이것 또한 익숙한 이미지다. 아니, 오히려 이번 전시에서는 좀 더 담백하고 고요해진 모습으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이곳에서 유일한 소음이라면 세 마리의 물고기의 살랑거림이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들에게는 '눈'이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 이번 전시에 등장하는 물고기들의 에너지는 모두 맹목적盲目的이다.

양순실_In the shade-고요함의 힘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1×97cm_2018

이번 전시에서의 변화는 잠복되어 세 번 변주되고 있다. ● 제 1 변주는 대나무 숲에 놓인 두 개의 의자나 두 개의 드레스 그림에서 보인다. 두 정물은 서로를 침범하지 않고 거리를 유지하고 있으면서 찰나의 평온과 고요한 불안을 형성한다. 집요하게 공격적이었던 새들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오직 한 방향으로 흐르는 댓잎 사이, 허공에 떠 있는 새는 제 자리를 지탱하려 애쓰고만 있다. 여전히 등장하는 '새'는 이제 날기를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흡사 먹이를 찾으러 멀리 날아갔다가 돌아와 자신의 둥지가 약탈당했다는 것을 확인한 것처럼, 그렇게 정처없이 허공에 정지되어 있다. 그래서 푸른 대 숲에 놓인 두 개의 정물은 견고하게 자신의 위치를 점유하고 있어서, 고요하게 불안하며 불안하게 안정적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하나'가 아니고 둘이 되어 전경을 이루고 있다.

양순실_In the shade-고요함의 힘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3×162.1cm_2018

제 2 변주는 달이 뜬 숲의 등장이다. 이 숲은 2011년에도 있었다. 2011년, 붉은 핏물 위에서 선홍빛 황새는 갓 지옥에서 빠져나온 듯이 허둥지둥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이후로 오랜만에 양순실의 '숲'이 다시 등장한 것이다. 바위로 가득한 산수화 풍경이 정리되고 등장한 숲 속에는 갓 심어놓은 연약한 나무들이 잔바람에도 휙하니 풀려버릴듯한 붉은 실선들에 기대어 무리를 이루고 있다. 그나마 시간을 견뎌주는 흰 달빛이 있어서 위로가 되는 숲 속에는 더 이상 핏물이 보이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 피울음을 삼킨 그녀의 대지 위에서 자라는 저 나무들이 언젠가는 숲을 이뤄 그늘을 만들어 줄 때까지 맹목의 물고기들은 그 자리에서 여전히 유령처럼 맴돌고 있을 것이다.

양순실_In the shade-wish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각 40×30cm_2018

제 3 변주는 목화밭 풍경이다. 이번 전시에서 처음 선보이는 목화밭 그림은 예술가로 살았던 화가의 슬픈, 지천명을 보여주고 있다. 경쾌하고 포근하게 맺혀있는 목화솜들은 언제 딸 수 있을까? 저 밭에 시기를 살펴 씨를 뿌렸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집요하게 꽃의 화려함과 달콤함을 탐했던 새들이 이제 등돌려 날아가고 있다. 미련이 남은 새들이 주저하고 있지만 이 새들도 언젠가는 달빛에 홀려 제 갈 길을 갈 것이다. 새들이 다 날아간 자리에서 터지지 못한 목화는 그제야 수명을 다하고 하나 둘씩 바닥에 떨어질지도 모르겠다. 중견의 길에 들어선 양순실은 목화밭 그림처럼 언제나 자신이 걸어온 삶을 수확할 수 있을까?

양순실_In the shade-고요함의 힘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8×233.4cm_2019

우리 모두는 인생의 길 위에서 자신의 '숙명'을 환히 알게 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그것은 죽음과 같은 절망감이기도 하고 안분지족安分知足의 경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천명을 안다는 것은 '꺾임'에서 비롯된다. 이 '꺾임'에는 洛花의 향기도 없고, 목화밭의 그늘 속에 감추고 싶은 고요한 통곡이 담겨있다. 한 번 목 놓아 울어본 사람은 쉽게 울지 않기에 묵묵히 걸어갈 수 있는 힘이 있다. 슬픔이 우리를 慧眼으로 인도할 것이다. 양순실의 그림은 여전히 살아있다. 그리고 살아있기에, 우리는 슬픈, 지천명이 다하고 언젠가는 우리가 원하는 바(所欲)를 그대로 따라가도(從心) 아름다움과 그리 멀지 않은(不踰矩) 경지를 기대할 수 있다. 살아있다는 것이 곧 슬픔이라는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곳에서 그녀의 그림이 들어온다. ■ 이정훈

Vol.20190227e | 양순실展 / YANGSOONSIL / 梁順實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