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의 불 Fire of beginning

안종현展 / ANJONGHYUN / 安鍾現 / photography   2019_0305 ▶︎ 2019_0403 / 월,공휴일 휴관

안종현_시작의 불 factory 01_피그먼트 프린트_140×185cm_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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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9_0305_화요일_05:00pm

작가와의 대화 / 2019_0315_금요일_04:00pm

주최,주관 / 복합문화공간 에무 기획 / 임수미(갤러리에무 큐레이터) 진행 / 임수미(갤러리에무 큐레이터)_이수연(갤러리에무 어시스턴트 큐레이터) 후원 / 사계절출판사_AGI society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공휴일 휴관

복합문화공간 에무 Art Space EMU 서울 종로구 경희궁1가길 7 B2 Tel. +82.(0)2.730.5514 www.emuartspace.com

'시작의 불'을 중심으로 ● 불은 대개 고체가 아니라 그저 뜨거운 온도와 빨간 빛이라고 단순하게 인지되곤 한다. 그런데 정말 불은 그렇게 명확한 것인가. 명약관화. 즉 '불 보듯 뻔하다'라는 말도 있지만 인간에게 있어 불은 무언가 정의할 수 없는 것이다. 안종현은 이 기체적 현상이 가진 미디어적 속성에 도전하고 있다. 사진이 가진 성격이 그와 비슷하다는 것을 그는 오랫동안 생각해왔다. 인류의 태동과 함께 밤과 낮은 자연의 가장 큰 제약 중 하나였고, 지금도 그렇다. 여기에 균열을 내기 시작한 것을 찾는다면, 인간이 불을 사용하고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왔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불에 대한 인간의 몰이해와 욕망은 스스로를 통제 불가능한 상황으로 만들어왔다. 그것도 여러 차례나, 인간은 스스로 불의 심판을 받고 사라질 뻔했다. 이것은 단지 바람이 부는 대로 가는 것이어서 방향을 예측하기 어렵다는 생활 과학 수준에서의 불에 대한 예측 불가능성 차원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바람'이라는 욕망의 실체는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불분명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그 문제의식을 시각적으로 다루는 작업은 맘대로 흩어지고 있는 불을 허깨비처럼 잡아내고자 하는 유아적인 카메라 놀이에서 찾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안종현의 '시작의 불'은 그 시작이 바라보거나 혹은 이미 초래되고 있는 끝에 주목한다. 그가 주목하고 있는 끝은 불이 자연과 인간의 경계에서 어떻게 경계를 허물어왔는지에 대한 천착이다. 그 경계는 잿더미가 된 화재 현장이기도 하고, 불을 찾는 행위를 시뮬라끄르적으로 구현한 게임적 상황으로 재현되기도 한다. 설치된 홀로그램 팬이 보여주고 있는 불빛은 드디어 기계로서의 발전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 카메라와 비슷한 시기에 발명된 성냥을 중요한 오브제로 환기하기도 한다. 벤야민은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프에 관하여」를 통해 19세기 중반 성냥의 발명은 동작 한 번으로 가능하게 하는 기술혁신을 대표하며, 카메라의 '찰칵Knipsen' 동작 역시 이와 유사하다고 밝혀둔 바 있다. 특히 여기서 우리는 "카메라가 사건이 벌어진 순간에 가한, 이른바 사후적 충격"이라는 점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인식은 이러한 진술을 만나는 순간 카메라가 가진 속보성이라는 뉴스 저널리즘의 기능으로 가볍게 편입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안종현의 잿더미가 된 산불 현장은 뉴스보다는 르포르타주적인 방식에 가깝다. 가치중립적인 척 하면서 자꾸만 도덕성을 입으려고 하는 다큐멘터리 쪽과도 거리가 있다. 망원렌즈를 쓰지 않고 바로 앞에서 표준 화각으로 작업을 진행해온 안종현은 군, 붉은 방, 미래의 땅, 통로, 풍경 시리즈로 이어지며 본질적으로는 그 현장에 잿더미처럼 남아있는 무언가를 찍으려 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첫 시리즈인 '군'(2007)의 당시 사진들을 만나자마자 느꼈던 것은 '차가운 뜨거움'이었다. 훈련 중인 군인은 결코 식은땀을 흘리지 않는다. 식고 있는 뜨거운 땀을 흘린다. 그것은 '냉전'이라는 오랜 정치적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화력이 응집되어 있는 군부대에서의 나날은 긴장감과 방만함을 오간다. 그러나 다시 사회로 나온 전역자 중심의 담론은 그것을 '추억'이라는 무력함으로 전승한다. 안종현의 사진에는 그런 것들이 없다. 그가 기록한 과거는, 그러나 마치 전시 상 황의 전투 전야처럼 긴장되어 있다. 폐기 직전의 탄약들이 가진 마지막 가능성은 그래서 더더욱 무서웠다. 그런가 하면 '붉은 방'(2011)은 100년간 주인이 계속 바뀌며 병참기지 노릇을 해온 서울의 노른자 땅 용산의 가장 음습한 치부의 붕 떠버린 시공을 마주하고 있다. 매일 밤 불장난 같은 욕망과 불쏘시개로 전락한 여인들의 기운마저 사라진 채 또 다른 개발을 기다리고 있던 잿더미 위에서 안종현은 그것을 할퀴고 간 흔적들에 우리를 서성이게 했다. 또한 화석 연료 중심의 근현대가 보여준 자본주의의 속성을 보여준 '미래의 땅'(2013) 역시 이제는 식어버려 무관심 속에 고체화된 영월 상동을 조명함으로써 불 한 번 지피지 않고 과거로부터 미래였던 현재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 시간의 무상함은 다시 전통의 중심인 종로를 향한다. '통로'(2014)는 과거의 영광이 우리의 일상에 할 말을 잃고 서 있는 낯선 풍경으로서 잡아낸 것이며, '풍경'(2017)은 말 그대로 풍경이라는, 그래서 가장 가치중립적인 것으로 이해되는 자연으로 풀어낸 일종의 도전이었다. 인류의 역사와 반대편에 표백된 채 서 있을 것 같으면서도 계속해서 생성과 소멸을 해온 자연의 이중성은 안종현에게 있어 더욱 적극적으로 다가가고자 한 무엇이었다. 그리고 이제 전작들이 가지고 있는 반어법들은 잿더미로 변해버린 산이 가진 생명력으로 우리 앞에 서 있다. 여기서도 역시 안종현은 불을 그대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뜨겁게 결합하고 태워버린 이후에 주목함으로써 그 경계의 모호함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안종현이 말하고자 하는 불이란 진화인가, 아니면 퇴행인가. 양립하기 어려울 것 같은 두 기제를 모두 수행하고 있는 카메라를 통해 불은 여러 의미와 형태의 시각적인 것이 되었다. 따라서 그가 주목해온 소멸은 이미 '현재'라는 시점을 '보통'이라고 고체화했던 태도와도 닮아 있다고할 수 있다. 안종현은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생명 있는 피사체는 피해를 입게 된다."고 말하는데, 그것을 굳이 윤리와 도덕의 법정으로 회부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그의 카메라가 우리를 그 고체화된 현장 앞에 세우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사진을 보며 굳이 소멸이 문드러지고 있는 무언가로, 또는 기억의 저편으로 넘어가고 있는 슬픔으로 보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물론 현대인들에게 있어 죽음을 극히 자연스러우며 거역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끔찍하고 부당한 재앙이라고만 받아들이는 사회가 되었다는 점에서 수전 손택이 「사진에 관하여」를 통해 제기한 바 있는 문제는 여전히 유효하지만, 그의 사진에서는 어쩐지 슬픔의 끝에 서 있는 시작의 새로움도 한 송이 꽃 따위의 작위 없이 느껴진다. 오히려 불에 탄 무덤 몇 기가 말없이 그 생명의 역설에 말을 보탠다. 안종현은 '미래의 땅' 작업에서 보여준 테크니션으로서의 정점으로부터 힘을 빼고 자연의 일부로서의 불이 현재 어디에 와 있는가를 탐구함으로써 자신이 다루고 있는 카메라의 속성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그 분명할 듯 하면서도 결코 분명할 수 없는 시각의 본성을 보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멍청한 뜨거움 위를 달려왔는지, 그래서 그 끝에 부서져 있는 차갑고 숙연한 오늘은 어떤 진화 혹은 퇴행을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말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보자마자 느끼게 되는 우리의 직관은 무엇인가. 감성인가? 아니면 이 역시 분석할 수 있는 이성의 것인가. 불은 꺼져 재가 되었지만, 아직 꺼지지 않은 것들이 있다. 새로운 논의를 시작해보자. ■ 배민영

안종현_시작의 불 factory 03_피그먼트 프린트_140×185cm_2019
안종현_시작의 불 factory 15_피그먼트 프린트_140×185cm_2019
안종현_시작의 불 forest 01_피그먼트 프린트_100×145cm_2019
안종현_시작의 불 forest 01_피그먼트 프린트_100×145cm_2019

시작의 불 해가 달처럼 보이는 세상 밝은 낮 검게 그을린 세상에서 불을 찾아 헤매인다. 인류는 '재'에서 시작되었다.  2017년 봄 강릉에 큰 산'불'이 나서 며칠 동안 '불'이 꺼지지 않는다는 신문기사를 보았다. 현대화된 사회에서 불을 며칠이나 걸려서도 끄지 못한다는 사실이, '불'이 났다는 사실보다 신기하게 다가왔다. 인류가 사용하는 '불' 중 원자력 발전소의 '불'은 끄고자 하여도 끄는 기술이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 '불'은 인간이 사용하는 가장 강력한 '불' 중 하나이지만, 끄고 싶을 때 끌 수 없는 '불'이다. 통제되지 않는 기술을 사용하는 인간의 욕망과 미래의 대한 생각으로 이어지니 원자력의 '불'은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생각하니 며칠이 지나서 꺼진 산'불'이 고맙게까지 느껴졌다. 현실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 원자력의 '불'과 비슷하면서 다른 의미를 가지는 불은 성서에 나오는 모세가 만난'불'에 대한 기록이 아닌가 싶다. 모세는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떨기나무 불'을 목격하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한다. 그 불은 아무것도 태우지 않고 '불' 형태를 가지고 있는 다른 '불'이였다. 화재가 일어난 현장을 찾아간 것은 '불'에 대한 단상을 작업으로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밝은 태양 아래 까맣게 탄 나무들을 보며 죽은 듯 보이는 나무에서 역설적으로 생명력을 느꼈다. 이러한 경험은 까맣게 탄 공장을 보면서도 비슷하게 느껴졌다. 오래된 유적을 보는 듯한 시각적 경험은 이곳의 원래의 기능에서 벗어나 새로운 영적인 신전 같은 이미지를 느끼게 되었다. 시작의 불 작업을 진행 하면서 '불'에 대한 보편적 단면과 사적인 경험을 인한 시각적 이미지가 연결되는 경험을 하였다. 화재가 난 현장에 대한 시각적 재현은 이미지를 통해 현실의 가상의 경계선을 구축하고 반영하고 가로지른다는 전제로부터 시작하였다. 결과적으로 사진적 재현을 통해 어떻게 이러한 경계가 미학적 주관화와 객관적 과정에 반영되어 있는지를 탐구하며, 이러한 미학적 과정들을 통해 다양한 관점을 제시하는데 본 작업의 의의를 둔다. ■ 안종현

Vol.20190304g | 안종현展 / ANJONGHYUN / 安鍾現 / 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