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NOT FINISH

홍란展 / HONGRAN / 洪蘭 / painting   2019_0309 ▶︎ 2019_0428 / 월요일 휴관

홍란_지나칠 수 없는 풍경 CAN NOT IGNORE SCENERY_ 캔버스에 유채_130.3×486.6cm_2018_부분

초대일시 / 2019_0323_토요일_02:00pm

박수근미술관 창작스튜디오 13기 입주작가展

관람료 / 성인 3,000원 / 학생(초,중,고) 2,000원 20인 이상 단체 1,000원 할인 7세 이하, 65세 이상, 국가유공자, 장애인 무료

관람시간 / 09: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 Park Soo Keun Museum in Yanggu County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박수근로 265-15 Tel. +82.(0)33.480.2662,2581 www.parksookeun.or.kr

드러나지 못한 것에 다가서기: 그 의미 있는 '한 뼘' ● 우리는 '살아가고'는 있으나 그 살아감에 대한 진정성과 가치는 늘 의심스럽지 않은가라는 의문을 지워내지 못한다. 세상은 온통 모순과 그에 대한 구조적 대립성을 갖고 있는 탓이다. 예술 또한 표피적 이미지에 감춰진 진정한 감동의 소외에 탐닉하고, 우리를 둘러싼 많은 이기들이 획일적인 통합과 이질적 소외아래 구축된 것이라는 점을 스스로 합리화하는 과정의 표상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객체 누구라도 갖고 있는 의식이다. 이념이 일종의 변증법적으로 운동을 거쳐 발전하는 과정에 있어 본래 자기가 의도한 것과는 다른 것이나, 원래와는 반대의 것으로 전화(轉化)하는 과정과도 같다. 즉, 이념은 즉자적인 운동의 최후 단계에 머무르며 이상적이어야 할 정신적 자아를 부정하거나 상실하고, 그로부터의 인간들은 자기를 소외하며 물질적인 자연으로 외화(外化)하는 현상과 같다는 것이다.

홍란_지나칠 수 없는 풍경 CAN NOT IGNORE SCENERY_ 캔버스에 유채_130.3×486.6cm_2018

홍란의 근작에는 문자화 혹은 조형화되지 못한 것이 배회한다. 삶에 있어 제한되거나 제약받는 상황에서 싹을 틔우고, 밤새 이어진 작업에서의 조형은 드러남과 감춰짐의 틈을 열람케 하지만, 드러남과 감춰짐은 '삶의 궤적'에서 체감했을 법한 어떤 결을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어렴풋이나마 삶과 죽음 사이에서 체감한 절망이나 현실의 암담함 또는 그것으로부터 비롯된 깊은 어둠을 느낄 수는 있다. ● 작가의 작가노트를 펴니 'YOU CAN (NOT) FINISH'라는 문장이 눈에 띈다. 이는 분명 조형의 빌미일 것이다. 또한 밖에서 안으로 향하는 바라보기의 다른 말일 테고, 안에서 꾸며진 외부라 해도 무리는 없어 보인다. 한편으론 삶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자아의 투사일 수 있다. 즉, 심리의 그늘에서 피어난 여러 정신작용의 주관임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 홍란의 과거 몇몇 작품을 보면 환상 아닌 환상이 부유한다. 현실과 이상의 거리감이 놓여 있다. 하지만 끝내 세상이라는 그물을 벗어나진 못한다. 그렇기에 결핍과 충족의 괴리는 더욱 짙고, 심적 혼란을 유발하는 불안으로부터 이탈하려는 갈망과 자유를 향한 바람도 강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자의식이라는 소실점으로 향한다. 그 소실점을 축으로 굴레로부터의 자유, 소통, 욕망, 성찰 등의 명사가 놓인다. 이런 현상은 근작에서 더욱 도드라진다.

홍란_지나칠 수 없는 풍경 CAN NOT IGNORE SCENERY_ 캔버스에 유채_112×193.9cm_2018

그럼에도 그의 작업은 맨 얼굴로 마주하는 진실한 / 진실 하려는 무대이자 세상에 대한 반응이다. 어느 작가나 그렇듯 홍란 또한 세상이란 몸과 정신으로 느끼고 체감한 것들의 반영이다. 특히 그의 근작들은 살며 살아가며 느끼는 기쁨과 슬픔, 좌절과 고통, 비애와 환희 등을 미적 거름망을 통해 걸러낸 결과물이다. 그럼 익명의 작품들과 그의 작품은 무엇이 다른가. ● 홍란은 "사람들은 고통과 상처를 마주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불편한 일들은 회피하려한다. 힘든 상황이 닥칠수록 우리는 그 상황을 마주하지 않을 수 있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어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 우린 피하는 게 익숙하다. 비난과 비판이 구분되지 않는 시대에서 언쟁, 논쟁은 불편하다. 예민한 사안에선 곧잘 외면하도록 연습되어 있다. 더구나 우린 내면에 무언가를 꼭꼭 숨긴 채 드러내지 않는 삶을 미덕이라 여기는지도 모른다. 심지어 나의 이야기를 타인은 얼마나 귀담아들을까라는 의구심은 솔직함을 위축시키는 원인이다. ● 회피와 도피는 스스로를 옥죈다. '드러나지 못한 것'을 기준으로 할 때, 배경의 합당함을 인정해도 그의 그림은 완전한 진술이 아니다. 자신의 반추임에는 틀림없으나 에둘러 다가서는 여운이 없지 않다. 작가는 그 머뭇한 중간에서 때론 쌍둥이처럼 복제된-거울 같은 모습으로, 가끔은 특정한 사건이나 기억과 연관된 의미와 무의미라는 양가적 측면을 동시에 보여준다. ● 이러한 양가성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작가 개인과 관계되는 모든 것과의 단락에서 '의미-적'일 수 있는 것이자 표현의 당위이고, 내용적으론 본능 아래 행하는 예민한 관찰이자 조응을 뒤로한 관조이다. 때문에 관조와 관찰로써의 조형은 어떤 해결점을 위한 길이 되고, 시공을 포박한 내적 기록은 이미지와 결합됨으로써 내면의식과 외부와의 관계를 재소환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 물론 이를 확장하면 단절과 소통, 주체와 타자 간 상호성에 관한 실마리 역시 제공한다. 홍란 작업의 화두인 삶에 있어 동질화와 탈영역화를 통한 현존에 관한 자문은 여기서 비롯된다. 하지만 작가는 이와 같은 흐름을 눈치 채지 못하도록 조형요소로써의 내밀성을 넘어 밀도에 집중한다. 아쉽게도 우린 그 밀도에 현혹되어 '드러나지 못한 것'을 망각한다 / 망각해왔다.

홍란_뱀을 뒤집어 쓴 여자 Snake faced woman_ 캔버스에 유채_193.9×130cm_2019
홍란_배설과 참회의 시간 Time of excretion and penitence_ 캔버스에 유채_130×193.9cm_2019
홍란_YOU CAN NOT FINISH展_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_2019

그의 작품들은 '걸러낸 자리'다. 즉 내면과 외계 간 마찰과 충돌로 거친 듯 조용하게 여울진 장소에 들어선 건 희구(希求)요, 그 자체로 치유의 과정이며, 새로운 의미부여를 통한 극복의 시간과 다름없을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치유와 극복은 애써 오늘을 회피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결과이기도 하다. 원하는 것, 바라는 것, 보이는 것, 볼 수 있는 것을 포함한 '궤적의 풍경'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 '궤적의 풍경'이 가리키는 건 실존에 관한 탐구이다. 조형은 삶의 여정에서 거둬들인 가시적인 것과 감추어진 것,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서의 비동일성의 증표이다. 비동일성의 증표는 평범한 일상에서도 날카롭다. 실제로 인간에게 놓인 현실은 잔인하고 무섭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우린 누구나 저마다의 굴곡을 지닌 삶을 산다는 것을 직간접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부유하든 그렇지 않든, 권력이 있든 없든, 나이가 많던 적던 어느 하나 예외 없이 고통, 슬픔, 비애를 안고 살아가고, 누군가에겐 작은 희망을 품는 것조차 버겁기조차 하다. ● 이러한 현실은 불안을 심어준다. 하지만 그 불안과 아픔을 대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정면으로 응시하거나 어디론가 숨거나 둘 중 하나이다. 예술가인 홍란은 멈춰있는 육체에 반해 정신은 다른 공간과 차원에서 새로운 세계를 그려낼 수도 있다. 19세기 말 상징주의자들이 그러했고 2차 세계 대전 이후 쉬르리얼리스트들이 그러한 것처럼 현실을 이겨내기 위한 방법으로 형이상적 또는 신비적 내용을 암시적 표현으로 넘어서고, 무의식의 세계를 도피처로 삼는 게 가능하다. 그건 외면적이고 객관적 경향에 대한 반동이다.

홍란_나는 너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한다 : 염증 I don't understand your pain : Inflammation_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거즈, 클레이_가변크기_2018

그러나 현실은 달라지는 게 없다. 「나는 너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한다 : 염증」 시리즈에서처럼 아침에 눈을 뜨고 나면 세상은 그대로다. 상처는 아물지 않으며, 오히려 군데군데 덧나 고름마냥 맺힌다. 어느 경우 회피가 현실에 미치는 영향이 그토록 미미하다는 것에 놀라기도 한다. 여기까진 앞서 언급한 익명의 작품들과 홍란 작가의 작품 간 실질적인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다행인 건 홍란 작가의 근작은 더 이상의 도피는 수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는 점이다. ● 필자는 인간관계와 그로부터 느끼는 감정들, 삶 속에 뿌린 내린 희망, 사랑, 행복 등의 종착이 아닌 과정에 대한 고백적 시놉시스(synopsis)격인 홍란 작가의 과거 작업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의 포트폴리오와 대화만으로도 예술과 감정, 세상보기의 흔적은 파악할 수 있다. 덕분에 미처 꺼내지 못한 감정, 기억, 사건이 배어 있다는 것도 체감 가능하다. 그건 바로 인간의 삶은 아름답고 찬란할 수 있으나, 반면 씁쓸하고 덧없고 고독한 것이 또한 삶이라는 것이다. 홍란 개인의 고통과 좌절의 경험에 의한 반작용임에도, 발버둥 치며 살아가는 오늘이 어제와는 다르길 염원하는 우리 모두의 주술도 투사되어 있다. ● 홍란 작가의 작품에는 새롭게 혹은 채워지지 않는 결핍을 갈구하는 것처럼, 채웠다고 믿는 것에 관한 파기의 불안감, 연속되길 기원하는 인간욕망, 타자로써 완성되는 실존에 관한 질문 역시 배어 있다. 그러고 보면 '진짜'는 잔혹하고 괴이한 묘사가 아니라 갈급하고 절대적이며 반드시 필요한 정화의 시간이다. 괴이함은 되레 신성한 믿음의 기호이며, 상처 난 하나하나의 대상은 가시적이지 않은 실존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다. ● 이를 작가에게 대입해도 역할은 달라지지 않는다. 아직까진 온전한 드러냄이라 여겨지지 않으나 고통과 마주하고 살아가야할 자세, 고통이 고통으로 덮이는 현실에 좌초하지 않고 보다 덜어내기 위한 작가의 태도는 옛 작업과의 '차이'를 부여한다. 언젠가 지금의 고통과 기억이 저 너머로 사라지면 창작의 동기는 무엇일 될 수 있을까를 염려하게 함에도 근작의 무게는 만드는 행위 자체의 고통과 상황에서 빚어지는 희망보다는 가볍고, 한 뼘 더 다가선 비워내기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 ■ 홍경한

Vol.20190309c | 홍란展 / HONGRAN / 洪蘭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