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예술창작스튜디오 11기 입주작가 릴레이전 & 오픈스튜디오

The 11th Artists-in-Residence of Yeongcheon Art Studio Relay Exhibition & Open Studio   2019_0326 ▶︎ 2019_1208

김선_먹갈기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김선展 / 2019_0326 ▶︎ 2019_0330 이다겸_김조은展 / 2019_1023 ▶︎ 2019_1027 박예지나_채온展 / 2019_1106 ▶︎ 2019_1110 김민지_윤현미展 / 2019_1120 ▶︎ 2019_1124 이미성_황해연展 / 2019_1204 ▶︎ 2019_1208

주관 / 영천시

관람시간 / 10:00am~06:00pm

영천예술창작스튜디오 YEONGCHEON ART STUDIO 경북 영천시 왕평길 38 (교촌동 298-9번지) 1,2전시실 Tel. +82.(0)54.330.6062 www.yc.go.kr

김선展 / 2019_0326 ▶︎ 2019_0330 나눌 수 없는 외부(Outside) : 사건의 세계-우리 속에 있는 나, 내 속에 있는 우리 ● 세상은 덮어버리면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책이 아니다. 덮는 순간 그곳을 빠져나와 그곳에서 있었던 모든 일이 끝나버리는 그런 곳이 아니다. 세상은 '월리'만 찾으면 그 많은 사람이 맺고 있던 복잡한 관계가 사그라드는 『월리를 찾아라』와는 다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월리와 월리가 아닌 것으로 나눌 수 없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모두가 월리이기도 하며, 모두가 월리가 아니기도 하다. 우리의 세상에서 월리는 월리가 아닌 사람과 끊임없이 말을 하고, 감정을 나누고, 자신을 투영한다. 월리와 월리가 아닌 사람 사이에는 '나눌 수 없는 빈 공간'이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 ● 김선 작가는 '김서방'을 찾아 나섰다. 그에게 '김서방'은 월리이다. 특정 인물을 찾기 어렵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말하는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라는 속담은 너와 나의 구별 불가능성, 나눌 수 없는 경계, 주체의 타자화와 타자의 주체화의 동시적 작동을 연상시킨다. 김서방은 우리 속에 있는 나이고, 내 속에 있는 우리이다. 그 사이에는 나눌 수 없는 빈 공간, 외부, 주체/타자의 세계가 존재한다. 그래서 김선 작가에게 '김서방 찾기'는 결국 '김선 찾기'이고, '김선 찾기'는 자신 안의 '김서방 찾기'이다. 2019년 작가는 '김선 찾기'를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모습 속에서 급격히 변하는 현재의 '사건'으로 충만한 세계를 우리가 대면하도록 이끈다.

'세계-내-존재'와 존재를 감싸는 장소 ● 세계와 나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세계를 이루기에 세계가 없으면 개인은 의미를 잃는다. 따라서 한 개인은 존재'한다'가 보다는 현상학적 측면에서 존재'된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가 '현존재(Dasein)'를 구성하는 근원적 틀로 '세계-내-존재(Das in-der-welt-sein)', 즉 현존재가 세계 내에서 '의존해있음(Angewiesensein)'을 말한 것도, 우리가 특정한 시·공간적 상황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김선 작가에게 사건의 시·공간은 무척 중요하다. ● 2014년부터 김선은 「김서방을 찾아라」 연작을 시작했다. 이 연작은 '세계-내-존재'로 내던져진(피투彼投된) 우리의 자화상을 보여준다. 아마도 작가는 동양화의 전통적 그림인 반차도(班次圖; 궁중의 행사 장면을 그린 그림)나 행차도(行幸圖; 왕실의 행차 장면을 그린 그림)가 마르틴 핸드포드(Martin Handford)의 『월리를 찾아라(Where's Wally?)』와 유사해 보여서, 그 형식을 차용하여 동양화로 구성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이것이 이 연작의 계기로 보인다. 하지만 작업을 시작하면서 그 의미는 다른 양상을 갖게 된 듯하다. 수많은 김서방을 그리기 위해서는 그들이 존재할 공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작가는 적당한 공간을 찾아다니고, 그 공간을 그리면서 공간에 스민 사건을 깊이 사유하게 된다. "광장은 많은 경찰 인력과 세월호 천막 등이 생깁니다. 그때 저는 공간이 주는 어떤 강력한 에너지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작가의 말) 작가는 「김서방을 찾아라」 연작을 준비하던 2014년 3월 말 광화문을 스케치하게 됐는데, 그 스케치 기간에 세월호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작가에게 광화문 광장을 이전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이제 광화문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이 경험은 작가에게 있어서 '공간'이 어떻게 '사건'으로 전환되었는지 알려준다. 이-푸 투안(Yi-fu Tuan)이 "인간이 공간을 더 잘 알게 되고 가치를 부여하게 되면 공간은 장소가 된다"라고 언급했듯이, 무균실의 '공간(space)'은 비로소 사건이 스며있는 '장소(place)'로 작가에게 다가온 것이다. 작가는 그 이후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한국 방문'이라는 사건을 「교황행차도」(2014)로 그렸고, 2015년 '메르스 사태'를 「메르스와 슈퍼채플-김서방을 찾아라」(2015)로, '남북 분단 문제'를 「DMZ(demilitarized zone) Parade」(2015), 「비무장지대 행차도」(2015)로 그렸다. 그리고 '무장소(placelessness)'(에드워드 렐프Edward Relph)나 '비장소(non-place)'(마르크 오제Marc Augé)가 되어버린, 일종의 스치는 구역으로 조직된 공항이라는 환승체계(transit)를, 그 성격이 드러나도록 「공항 행차도」(2017)를 그렸다. 이러한 작업은 단순히 미립자화 된 인간(김서방) 개개인의 양태를 들어내기보다는 사건을 품고 있는 거대한 공간에서 우리, 혹은 나 자신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거대 서사라 할 수 있다.

장소를 넘어서 사이트(site)로 ● 작가는 2017년부터 '정리정돈'이라는 주제에 천착한다. 여기서 이전에 탐색하였던 '사건으로서 장소'의 개념이 변화되는 모습을 보인다. 영어에서 '공간/장소'를 의미하는 단어는 space, place, site로 구분된다. 이 단어들은 space가 '공간', place가 '장소(곳)', site가 '지역'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인터넷 사이트(internet site)'라는 용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site는 가상의 지역(장소)을 나타낼 때도 흔히 사용된다. 김선은 2017년 '정리정돈'이라는 주제를 시작하면서 장소(place)에서 가상의 지역(site)으로 개념적 변화를 보인다. 그는 '빈 공간을 만드는 행위'와 '청소'를 연결하여 상징적인 기호 'C'를 구상하기도 하고, '정돈'을 농경지나 구획을 나누는 모양을 연상시키는 해시태그(hashtag) '#'로 설명하기도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물질적이고 실존하는 장소를 가상적이고 상징적인 공간(site)으로 변모해 나갔다. ● 이러한 변화된 공간 개념은 「비밀기지」(2018)나 「유골단지를 위한 선반」(2018) 등과 같은 개념적인 설치작업을 등장하게 한 계기가 된 듯하다. 더불어 기존의 '김서방 찾기' 작업과 연장선으로 보이는 「청소 행차도」(2018)나 「#만약 북극곰이 내 옆집에 산다면」(2018)과 같은 동양화 작업을 이끌어낸 것으로 보인다. 이 두 동양화 작품에서 주목해야 할 특징은 작가가 가상적 지역을 창조하여, 마치 비판적으로 세상의 축소판을 보여주려는 듯이, 그곳에 세상의 풍경을 담았다는 사실이다. 쓰레기 처리의 문제점과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드러낸 「청소 행차도」나 기묘하게 구성된 우리 세계를 해시태그(#)로 구획화하여 압축적으로 드러낸 「#만약 북극곰이 내 옆집에 산다면」은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작가가 창조한 가상적 지역이다. 이것은 광화문이나 청계천, 비무장지대(DMZ) 등 실재 장소를 바탕으로 그렸던 기존의 '장소+사건'의 공간이 '사건'만이 존재하는 개념적 공간으로 옮겨왔음을 뚜렷이 보여준다.

과거와 미래의 사건 사이에 존재하는 '김선 찾기' ● 2019년에 김선 작가는 새로운 찾기를 시작한다. 바로 '자신을 찾는 작업'이다. 김선 작가는 디지털 사회가 익숙한 세대(1990년대 생)에 속한다. 하지만 그는 지금도 여전히 벼루에 먹을 갈아서 동양화를 그리고 있다. 지나버린 기술과 도래한/할 기술을 동시에 지닌 '김선'은 단순히 '김선' 개인이 아니라, 빠른 시대 변화 속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가 혼재된 시대를 살아가는 그 세대의 표정을 보여준다. '김선 찾기' 작업에서 작가는 '사건'으로 가득 찬 '세계-내-존재'인 작가 자신과 자신의 주변을 환기함으로써, 자신(더 나아가 자신의 세대)에게서 발생하는 '사건'의 메커니즘을 탐색한다. ● 이러한 '김선 찾기' 작업은 크게 물질적 사건(물질의 변화)과 의식적 사건(무지, 비학습)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물질적 사건은 「자유로운 무게」(2019)와 「파괴된 호크룩스」(2019)로 표면화되어 나타난다. 「자유로운 무게」는 휴대 가능한 크기와 무게가 그에 상응한 본질과 어떻게 결합하는지 밝히려는 듯한 작업처럼 읽힌다. 이 작업은 크기가 유사한 돌, 벼루, 스마트폰을 나열하여, 자연적 무게, 예술의 무게, 세상의 무게로 연결하여 각 물질의 의미를 일깨운다. 더불어 이제 작가 세대의 몸처럼 되어버린 스마트폰이 그 이전 시대보다 훨씬 더 가볍고 자유로움을 주는 무게가 되었음을 묵시적으로 알려준다. 「파괴된 호크룩스」의 경우는, 부서진 외장하드가 주요한 작품으로, 그 무엇보다 중요해진 정보화 시대에 자신이(혹은 자신의 세대가) 정보를 몸처럼 여기가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김선은 호크룩스(horcrux)가 『해리포터와 죽음의 성물』에 등장하는 "불사의 몸을 얻기 위해 자신의 영혼을 쪼개어" 담아두는 물건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외장 하드 Portable USB는 단순한 물건이지만 주인의 일부가 담긴 호크룩스와 같다"라고 말한다.(작가노트) 이것은 비물질적인 정보(디지털 데이터)를 담아두는 물건이 작가나 작가의 세대(혹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세대)의 분신이 되었음을 암시한다. ● 물질적 사건이 물질이 가진 상징성을 드러냈다면, 의식적 사건은 과거와 현재의 의식적 교란 양상을 보여준다. 이러한 작업으로 「먹갈기」(2019)와 「난치기」(2019)를 들 수 있다. 영상과 오브제로 전시된 이 작업들은 과거의 관습이나 관행이 현재의 시점에서 오작동 되는 모습 속에서 과거와 현재의 단절을 선언적으로 드러낸다. 「먹갈기」는 현대의 필수품이며, 작가에게는 마치 휴대용 벼루처럼 보이기도 하는 스마트폰 —벼루가 작가에게 작업을 위해 중요한 것처럼, 스마트폰은 작가가 생활할 때 중요하다. 따라서 유사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에 먹(墨)을 가는 행위를 보여주는 작업이다. 그리고 「난치기」는 일종의 언어유희(言語遊戱)로, '난을 그리다'는 의미의 '난을 치다'라는 행위를 직접적으로 받아들여 '난을 주먹으로 치는 행위'를 보여주는 작업이다. 이 행위들은 우스꽝스럽고 황당하지만, 과거와 다른 방식으로 살 수밖에 없는 작가 자신, 혹은 작가의 세대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마냥 웃고 있을 수만은 없다. ● 김선은 '김서방 찾기'를 통해 사건이 스민 '장소'와 그 속에 있는 나눌 수 없는 나와 우리를 보여줬다. '정리정돈'을 통해서는 '사건'만이 존재하는 개념적이며 가상적인 공간을 우리에게 선보였다. 그리고 '김선 찾기'를 통해 '세계-내-존재'인 작가 자신, 혹은 작가의 세대(더 넓게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세대)가 '사건'으로 가득 찬 급변하는 시대에 대해 사유하도록 이끈다. 우리 속에 내가 있고, 내 속에 우리가 있듯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세대를 초월하여 비슷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김선은 '지금-여기'에서 우리의 모습을 자신의 몸짓으로 형용하고 있는 것이다. ■ 안진국

이다겸_plant pot plot-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6.8×91cm_2019

이다겸_김조은展 / 2019_1023 ▶︎ 2019_1027 조명(照明)된 일상 ● 이다겸은 작업실에서 하루 10시간 이상 그림만 그리는 화가 그 자체라 할 만한 인물이지만, 학부 때와 독일 유학 때 미디어아트에 집중했던 작가이다. 다수와의 협업, 새로운 표현을 가능하게 해줄 새로운 기기를 계속 업그레이드해야 하는 현실적 문제 외에, 이제는 현실 자체가 미디어화 되어 있다 보니, 오히려 그림이라는 오래된 형식이 새롭게 다가오기도 한다. 삶 속에서 자율과 자유의 영역이 알게 모르게 줄어드는 현대에 회화는 무엇보다도 자기 주도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매력적인 형식이다. 이다겸의 그림은 이전의 미디어 작업을 포함하여 일상 속 스펙터클의 체험이 녹아있다. 그것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스케치 대용으로 사진을 찍거나 작업의 자료를 찾기 위해 구글링을 하는 차원을 넘어선다. 작가는 산책길의 장면들을 찍곤 한다. 인덱스가 있는 사진의 속성은 지시대상이 해체될 지경까지 복잡해진 화면에서도 유지된다. 원색과 야광색으로 들떠 있는 화면조차도 최소한의 중력감은 있으며 위아래의 구별이 있다. 이다겸의 그림은 그러한 평범함도 예술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의미일까. 작가는 화려한 소재를 화려하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소박한 소재를 화려하게 표현한다. ● 구석진 일상의 한켠이 눈부시게, 때로는 어른어른한 옵티컬 효과에 의해 눈이 아플 만큼의 강렬함으로 구현되어 있다. 대상은 그림을 위한 최소한의 알리바이에 불과하다. 출발은 현실이지만 그것이 도달하는 것은 현실이 아니다. 작품 속 나무들은 마치 지글거리는 에너지 같은 패턴으로 채워진다. 사물의 외곽선이 바탕으로부터 확실하게 도드라지지 않기 때문에 관객의 눈은 숨은그림찾기처럼 화면의 표면을 떠돈다. 마치 공백공포증 환자처럼 구획된 공간을 조금의 빈틈도 남기지 않고 채워나가는 치밀함은 길섶의 초라한 식물과 사물을 매우 화려하게 나타나게 한다. 이다겸의 풍경은 따로 광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내부에 광원이 있는 듯이 자체 발산하는 빛이 특징적이다. 자연에는 변화를 위한 여지 외에는 빈틈이 없는데, 작가 또한 그러한 자연의 원리를 따른다. 자연의 재현이기 보다는 자연적 원리의 재연이다. 그래서 식물들은 겉모습이자 투시도처럼 보인다. 자연적 대상은 곡선적 표현에 어울리며 자극적인 색감은 인공물과 어울린다. 길에 놓인 화분과 화단의 꽃 등이 있는 일상의 한켠으로, 작가는 이를 '사람 손은 탔지만 무방비로 내쳐진 곳'이라고 특정한다. 아크릴 물감으로 촘촘히 겹쳐가며 그리는 화면은 결국 가장 가는 붓이 지나간 선들로 나타난다. ● 종일 작업해도 근 한 달이 넘는 작품 하나당 5-6 자루의 붓이 닳아 없어지는 노동 강도가 필요한 작업으로, 그림이라기보다는 거의 사경(寫經)을 떠올린다. 작가는 이처럼 선으로 쌓고 채우는 방식을 쓰기와 비교한다. 작품 제목에는 서사라는 단어도 있다. 선의 나아감은 시간성을 암시한다. 이야기 또한 시간을 타고 진행된다. 공간적 매체인 회화에 수없이 접어 넣은 선들은 그것을 하나하나 펼쳐 읽어볼 관객을 위한 이야기가 된다. 작가가 수행한 시간의 공간화는 관객들로 하여금 공간의 시간화라는 역순을 밟게 한다. 그러나 서사의 주인공인 인간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작품 속에서 인간은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과 그 시선을 남기는 흔적으로 암시될 뿐이다. 요즘 하는 작업은 2014년경에 시작되었고 그 이전에는 인물이 주가 되었다. 그 인물은 화면의 중심을 차지하기는 하지만 실루엣으로만 있으며, 그 내용물을 채우는 것은 기호였다. 정보로 채워진 초상 드로잉은 미디어 사회에 대한 직접적 언급이면서 회화로 넘어가기 위한 단계이다. 일상의 소소한 장면은 미디어 파사드 같은 화려함으로 재탄생한다. 인공적 스펙터클의 뒷면에 칙칙한 현실적 바탕이 있다면, 화가의 수행적 작업은 물화된 일상을 유토피아적인 에너지로 전환 시킨다.

김조은_수만가지∞_한지에 먹, 채색, 혼합재료_가변설치_2019

숲을 이루는 생각의 뿌리 ● 그림이나 설치작품으로 나타나는 김조은의 초상들은 반인반수의 존재이다. 평면이나 입체작품에 나타나는 나무는 인간이라는 동물에서 뻗어 나오고 있을 뿐 아니라, 그 맹렬한 확장성이 동물성을 떠올린다. 전시 공간이 허락하는 한, 이어진 가지들이 담긴 패널을 계속 이어붙일 수 있는 개방적 구조를 가진 작품에서, 식물은 자신이 자리한 주변환경과 최소한의 상호관계를 가지는 수동적인 유기체라는 인상을 불식시킨다. 알뿌리 같이 생긴 인간의 초상에서 뻗어 나온 가지/뿌리가 종횡무진 확장하는 작품에서 식물은 끊임없는 분지를 통해 이동하는 듯하다. 식물에서 지상에 보이는 나뭇가지만큼 지하의 뿌리를 가정할 수 있다. 로베르 뒤마(Robert Dumas)는 [나무의 철학]에서 깊은 뿌리박기는 가지의 무성함을 위한 조건임을 지적한다. 프랙털 이론 등에서 강조된 바 있듯이, 나무의 가지/뿌리는 다른 자연현상과도 유사하다. 하늘에서 번개 치는 장면에서 나무의 가지/뿌리의 구조를 볼 수 있는 것처럼, 위아래로 확장되는 줄기들에서 잠재적 동감이 느껴진다. 머리로부터 출발하는 양상은 이러한 뿌리줄기의 정신적 맥락 또한 강조한다. 김조은의 작품은 마치 평행우주론의 가설처럼 보이는 부분과 보이지 않는 부분의 동형성을 말한다. 나무의 가지와 뿌리는 동형적 구조이며 대칭적으로 배열된다. 작가는 같은 모양새를 가지는 조각을 거울 위에다 놓는 연출을 통해, 반영 상 또한 작품의 주요한 부분으로 끌어들인다. 회화작품에서는 캔버스라는 잠재적인 현실반영의 형식을 활용하여 거울 상같은 이미지를 암시했다. 보이는 것만큼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는 가정은 보이는 것만을 현실로 간주하는 피상적 사고를 비판한다. 눈감은 얼굴은 사유의 가지/뿌리를 말한다. 초상의 시작은 자신의 얼굴이었지만, 굳이 자신의 외형을 묘사하려 하지 않는다. 작가는 자신의 시각 대신에 타자의 시각을 활용한다. 특히 동화 작가가 꿈이라는 딸아이가 그려준 자신의 모습을 참고한다. 자연 화 된 인간의 모습에서 치졸한 자기 중심주의는 무디어진다. 석가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듯, 인류학적 상상계에서 나무는 사유에 대한 이미지로 간주 되어 왔다. 체계적으로 분지된 나무의 이미지는 질서 있는 사유의 이미지가 되기에 충분하다. 가지/뿌리처럼 줄줄이 이어지는 사고와 상상의 이미지이다. 초상이 포함된 가운데를 중심으로 좌우로 뻗어 나가며, 때로 아래쪽의 반영 상이 같은 방식으로 확장된다. 하지만 복잡하기 그지없는 가지/뿌리는 질서와 체계보다는 얽히고설킨 착종(錯綜)의 이미지가 강하다. 김조은의 작품에서 나무의 가지/뿌리라는 이미지는 인간의 사고나 계보와 연결되면서 캔버스라는 유한한 공간에 무한의 이미지로 제시된다. 재현할 수 없는 무한한 자연의 시공을 제시하는 방식은 계열로 나타난다. 하나의 틀에서 나온 작은 조각상들은 배치 방식을 통해 사유가 복제되고 확장되는 방식을 보여준다. 그림처럼 위아래로 배치하기도 하고, 하나만 있는 것 마주해 있는 것 등 여러 가지 방식이며, 그때마다 서사의 방점은 달라진다. 조각상들은 조합의 방식을 통해 말한다. 그림 또한 설치적인 방식으로 운용된다. 출발점의 인물상들은 눈을 감은 채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지만,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성장(또는 변신)이란 고통을 전제로 한다. 작가의 말대로 작업이란 '고통스러운 내면을 끄집어내는 과정'이다. 특히 조각작품에서 잎새가 하나도 없는 날카로운 가시나무의 이미지는 나무에 얽힌 따스한 이미지를 걷어낸다. 정수리에서 자라나는 나무는 머리통을 양분 삼아 자라며, 성장하는 만큼 그 씨앗이 되는 주체는 쪼그라들 것이다. 생활인이자 작가로서 수없이 중단되고 다시 시작되었던 작업과정은 죽음과 부활을 거듭하는 식물계의 이미지와 닮았다. ■ 이선영

박예지나_마음 풍경_종이에 콜라주_21×29.7cm_2019

박예지나_채온展 / 2019_1106 ▶︎ 2019_1110 한지 재료를 이용한 심상풍경의 표현-박예지나의 최근 작품세계 ● 박예지나는 닥을 이용하여 '한지'를 직접 만들며 그 한지를 바탕으로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 한지는 우리 조상들의 생활에 있어서 일부분을 차지하여 왔는데 생활 속에서 책이나 그림을 그리는 재료만이 아니라 종이 옷장, 종이 지갑, 창호지, 종이 그릇, ... 등 생활용품을 만드는데 재료로 역할을 하였다. ● 미술작품 제작에 있어서도 한지는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다. 그림을 그리는데 있어서 색을 칠하거나 선을 그을 수 있는 바탕 재료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미술재료에 있어서 한지의 개념은 바탕 재료를 넘어 한지 자체가 오브제로 이해되기도 한다. 이는 한지가 전달매체로서 독자적인 개념을 확보하는 것으로 한지 그 자체를 작품으로 보는 것이다. 즉 재료의 개념과 작품의 개념이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재료 자체가 작품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지는 미술 표현에 있어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담아내는 '바탕재료'적인 측면과 한지 그 자체가 작품화되는 '오브제'적인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이 오늘날 한지표현의 경향이다. ● 이와 같은 한지의 이용이 박예지나의 작품에서도 나타나는데 크게 두 가지의 경향을 볼 수 있다. 하나는 마치 붓으로 드로잉을 하듯이 순간적이고 우연적인 풍경화 이미지들을 나타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지 위에 다른 한지나 주변의 재료들을 인위적으로 찢어 붙인 콜라주 오브제의 표현이다. 두 가지의 표현은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심상풍경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아 보인다. ● 박예지나 작품의 주된 주제는 심상풍경이다. 풍경 속에 사물들이 단순화되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산, 강,.. 폭포 등의 자연 풍경이 표현되어 있는데 단순화된 심상의 풍경으로 조각을 이루면서 표현되어 있다. 이와 같은 심상풍경 표현들을 자세히 보면 먼저 한지 위에 물감으로 드로잉을 하였거나 수묵으로 칠해진 것들을 이용하여 산의 형상을 자연스럽게 찢어 바탕 한지 위에 붙였다. 이 때 바탕 한지와 찢어낸 오브제 한지와의 경계에서는 찢어진 흔적의 하얀 면이 마치 선과 같이 표현되어 경계가 형성되어 있으며 바탕 한지와 오브제 한지가 어울러져 한 폭의 심상풍경으로 구성되어 있다. ● 그리고 물감으로 처리된 면을 보면 붓으로 칠하여 마르기 전에 색상이 서로 침범하기도 하고 경계를 나타내기도 하면서 우연스러운 형상들을 나타내는데 그 우연스러운 물감의 형태는 산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때로는 수묵화의 농담과 같은 단색으로 이루어진 풍경화를 볼 수 있다. 또 하나의 표현은 오일스틱으로 거칠게 드로잉하여 풍경과 같은 이미지를 그려내는 작품들이다. 이 때 이미지들은 거칠게 표현되어 추상화처럼 이미지가 뚜렷하지는 않지만 자연 풍경을 나타내고 있다. ● 이상과 같이 박예지나의 작품세계는 자신이 만든 한지 위에 드로잉과 색채를 더하여 에너지가 교차하게 만들고 이를 찢어 바탕 한지 위에 붙이는 과정을 통하여 풍경을 나타내고 있다. 그 풍경은 자신의 마음속에 담고 있는 풍경으로 심상풍경이라 할 수 있다. ■ 오세권

채온_청둥오리_캔버스에 유채_18×14cm_2019

화가 채온의 그림 속 대상에는 어릴 적 기억의 순간, 추억의 잔여물, 부재의 대상에 대한 그리움과 살아가는 자들의 삶 등이 혼재되어 있다. 우리가 화폭 속에서 마주한 대상은 그의 과거이자 현재의 일상이며, 하나의 객관적 대상으로서 그림의 소재들은 주관적인 그의 내면의 두려움과 불안한 감정을 반영한다. 특히 오랜 기간 다수 등장한 유령과 같은 비현실적 존재의 형상은 그 자체로 현실의 '존재'이다. 이러한 모순 관계는 현재-어린 시절의 과거, 살아 있는 자-유령, 삶-죽음의 관계 등을 통해 자아의 실존을 드러낸다. 유령과 같은 인물들은 한계를 모르는 정념이자 과잉된 공허로, 결핍의 정서로 채워져 있다. 비록 비현실적이지만 정체불명의 이 형상들은 매순간 경계를 배회하는 삶을 살아가는 인간 존재를 상징하는 실존의 기호이다. 죽음의 타자가 삶이 듯, 자신과 살아 있는 자들의 타자는 유령이며, 서로는 경계적 삶 속에서 하나의 몸체를 이룬다. ● 채온은 이러한 감정의 반응을 화폭에 지속적으로 표출하지만, 그의 그림이 감정의 회오리 외부의 관조적 위치에 머무르지는 않는다. 가족과 지인, 자신을 포함한 대상, 냉랭함과 우울함, 공포와 불안 등이 펼쳐진 평면 위의 그림은 슬픈 또는 절망적인 눈망울의 흔적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의사」, 「행복한 누나」, 「여행」, 「강한 사람」, 「내가 그린 꽃」 등의 주제의 연작이 다양한 방식으로 지속적으로 나오는 데는 이러한 연유에서이다. 즉, 절망은 화폭에 갇히지 않고, 어릴 적 꿈꿨던 이야기와 살아가야할 시간들에 대한 여건들을 구현한다. 이는 여러 색채의 흔들림, 형상의 불완전성, 단순한 색의 사용을 통한 색채의 층위, 어릴 적 접한 대상들의 연계 등을 통해 경계 너머의 경계, 경계 안팎의 감정의 선을 표현하는 것이다. ● 이번 전시에서 그는 깊은 고민 끝에 붓을 잡고, 그의 시적인 제목이 붓을 통해 그림의 완성도를 점차 높여간다. 현실 속 그에게 끝없이 연결되는 물음, 마침표와 쉼표, 그리고 해답 없는 의미 하나가 화폭위에 떨어진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실존의 문제에 직면해 그는 끝없이 그려나가는 행위를 통해 해답 없이 미끄러지는 삶의 의미를 포착한다. 그는 버릴 것 다 버리고 홀가분하게 일상의 공간을 마치 낱말을 맞추듯 관찰하고, 이젤 폭에 누워 화폭 밑, 색채의 층위로 침잠한다. 화폭 위 바람은 방향을 잃고, 산은 침묵하며, 더 깊이 더 낮게 내려간다. 그러나 인간 스스로 삶의 법칙을 세우고 서로를 변화시키듯, 채온은 의도적이며 자발적 행동에 의해 대상을 고유한 존재로 변화시킴으로써 삶과 작품의 관계를 통해 스스로의 세계를 창조한다. 거친 붓터치를 통해 채워진 연못은 여러 번의 연작을 통해 한층 부드러워지며, 연못 위에 '불안하게 하는 오리 한 마리'가 그 자체로 자유로움을 얻는다. 따라서 그의 그림은 회화의 과정뿐만 아니라, 그가 지나온 단계를 보여준다. 이는 나타나고 사라지는 대상들, 추억과 기억의 순간들, 과거와 현재의 관계에서 채온이 현실 속에서 지탱하고 나아가는 과정이다. ● 채온은 일상 속 대상이 순간적으로 감지하는 존재의 주름을 그린다. 동시에 그는 여러 차례의 연작 과정을 통해 대상의 관찰, 감각적인 습득, 기억의 환기, 무의식적인 감정 등의 복잡한 상황을 구현한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모호하지만 구체적이고, 흔들리지만 명확하고, 불안하지만 희망적이다. 즉, 채온은 대상 속에 자신의 이야기를 함축함(implique)과 동시에 그림의 한 가운데서 이를 펼친다(explique). (채온 전시 비평, 『존재의 주름』 중에서) ■ 양초롱

김민지_비 오는 139km의 풍경 19_한지에 먹_162.2×112.1cm_2019

김민지_윤현미展 / 2019_1120 ▶︎ 2019_1124 내 안의 풍경 ●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풍경을 접한다. 일상 속에서, 도심 속에서, 자연 속에서, 그러나 그 풍경은 삶의 내적 외적 요소들로 얽히고설켜 실제 어떤 풍경을 이루고 있는지, 그 아름다움을 느끼지도 못한 채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이다. 그런데 오랜만에 자연풍경의 아름다움을, 우리 주변이 아름답다는 것을 다시금 상기시켜준 젊고 앳된 작가를 만났다. 수묵이라는 전통적 매체를 통해 창밖 풍경을 담아내는 김민지 작가는 단순히 자연스러운 풍경만을 담아내지는 않았다. 창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그 순간을 포착하고, 심리적 상태 혹은 심정이 자연의 환경적 요소에 더해져 작가의 차 창밖의 풍경화는 실제 풍경이면서 은유적인 풍경으로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 어린 시절부터 고향을 떠나 학업을 해야 했고, 그로 인해 작가에게 버스 여행은 일상이 되어버렸지만, 고향을 오가며 접하게 된 고향의 모습은 어느 순간 가까운 듯, 멀게 느껴졌다고 한다. 9년이란 세월을 통해 너무나 익숙했던 고향이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주말에 한번, 때론 한 달에 한두 번 찾게 되는 고향은 차츰 자신을 품어주었던 곳이기보다는 주변인들의 공간으로 변했을 것이고, 그 안에서 자신의 역할과 영역은 축소되어 고향은 가까운 듯 먼 곳이 된 것이다. 또한, 고향을 향하는 버스는 누구에게나 즐거움과 설렘을 안겨준다. 이어 고향을 뒤로하고 서울로 향하는 버스에 오르는 상황은 아쉬움으로 슬픔과 허전함이 따를 것이다. 그런 작가의 현 상황 혹은 그 느낌을 바로 버스 창문이 대신해 준다. 고향을 오가는 버스에 오르면 묘하게 비가 많이 왔다고 했다. 그래서 창밖 비 오는 풍경을 자주 접할 수 있었고, 창에 맺힌 물방울과 창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는 작가의 마음을 반영하듯 자연적인 풍경과 섞여 작가 내면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온 것만으로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컸을 텐데... 이렇게 창을 통한 풍경은 작가의 내적 요소와 외부 풍경이 더해져 화폭에 담아낼 수 있었고, 매력적인 풍경화로 완성될 수 있었다. ● 수묵이 가진 특징 중 가장 매력적인 것은 담백함이 아닐까 싶다. 검은색 하나로 다양한 느낌을 담아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텐데, 표현하기에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수묵 기법으로 대상의 의미를 담아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 문인 화가들이 수묵을 통해 그토록 외형보다는 내재적인 정신이나 의취(意趣)을 강조한 사의(寫意)적 표현에 매진했는지 모르겠다. 김민지 작가가 대학에서 한국화를 전공했지만, 이론적 배경을 통해 옛 문인 화가들이 추구했던 사의적 표현에 집중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수묵의 담묵과 농묵을 적절히 이용해 창에 맺힌 물줄기와 그 너머 풍경을 그려내고 있으며, 이는 하나로 보이기도 하고, 분리되어 보이기도 하는데 유리창과 풍경 이미지는 서로 적절하게 섞여 다양한 풍경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인간의 미묘한 감정과 자연이 만들어 준 표정 속에서 형태는 갖추고 있으면서도 각각의 의미를 달리 담아내고자 한 작가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림 중에서 2017년 작품 「비 오는 우이동의 풍경」은 거센 빗줄기로 차 창밖 풍경은 흐려지고 꼭 물이 번져 아주 뿌연 풍경이 되었지만 너무나 강렬하게 현상을 담고 있어, 구상화이면서도 추상화처럼 보인다. 그 외 2018년 작품 「비 오는 139km의 풍경」들은 그때그때, 차의 속도와 대상과의 거리감으로 창밖 풍경은 멀리 있다가도 가까이 다가오고, 차창에 맺힌 빗 방물의 크기와 형태로 풍경은 뿌옇게 보이기도 하고, 때론 선명하게도 보인다. 풍경화는 전체적으로 차 창밖의 비오는 날의 풍경을 담고 있지만 각기 다르게 연출되어 작가의 풍경화는 지루하지가 않다. 애틋하고 고요하며 약간은 멜랑꼴리하다. 그래서 가슴 한구석에 울려 퍼지는데, 이러한 간절한 느낌을 간직한 채 작가가 끊임없이 전진하길 바란다. 아직은 작가가 젊어서 꾸준히 작업에 매진할 수 있을지 약간의 의문을 갖게 되지만 지금까지 보여준 결과는 작가의 타고난 재능과 노력이 더해진 것으로,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해줄 것을 기대해 본다. ■ 강효연

윤현미_GRID_GB_혼합재료_90×115cm_2019_부분

윤현미의 그리드- 이미지의 숲으로 번지는 울림 ● 윤현미의 작업은 직물을 짜는 행위를 바탕에 둔다. 직조는 씨실과 날실을 교차시켜 나감으로써 직물이라는 또 다른 형태의 사물을 만들어내는 행위이다. 동시에 그것은 씨실과 날실이라는 두 선을 이용하여 다양한 이미지를 만드는 과정이기도 하다. 짜는 행위의 결과물인 패턴을 씨앗으로 삼아 컴퓨터 작업을 통해 산종 된 이미지는 무한히 확장되어 나간다. 컴퓨터가 0과 1이라는 이진수를 이용하여 세계를 표현하듯이 직물을 짜는 행위는 씨실과 날실의 교차를 통해 얻은 패턴으로 표현된다. 그러기에 직물을 짜는 수공예적인 행위와 직물에 인쇄할 이미지를 얻는 컴퓨터 작업은 동어반복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같은 것이 다른 것으로, 다른 것이 또 다른 것으로, 그 다른 것이 같은 것으로 변형되는 흔적의 흔적"으로 있는 이미지를 천에 인쇄함으로써 사물이 이미지가 되고 다시 이미지를 담은 사물인 실이 마련된다. 여기서 작업은 시작점과 끝점이 맞물리듯 미끄러져 가며 진행된다. 윤현미의 그리드 시리즈는 직물이 가진 사물성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직물의 탄성에 의해 자연스럽게 말려 들어간 실은 천의 부드러운 촉감이 주는 느슨함을 직선 형태가 만들어내는 팽팽함으로 치환하며 긴장과 이완의 중간지대를 형성한다. 천을 가늘게 잘라 만든 실로 선을 긋듯이 또는 직조기에 실을 걸듯이 한줄 한줄 실을 올려놓음으로써 화면은 부피를 지니게 되고 평면이 아닌 입체가 된다. 그러나 윤현미의 작업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촉각적 감성을 간직한 작품인 그리드 시리즈는 씨실과 날실이 교차하면서 확장되는 열린 공간이다. 윤현미에게 그리드는 화면을 구성하기 위해 질서 잡는 기준점인 동시에 탈주를 감행하는 공간이다. 직물로 만든 실은 반복된 행위를 통해 패턴을 만든 몸의 흔적을 안고 있는 동시에 무한히 복제되며 수정된 이미지가 인쇄된 시뮬라크르의 공간이다. 그리고 직조기에서 만들어진 패턴은 하나의 이미지가 되어 원본 없는 시뮬라크르의 세계의 무한 반복과 차이가 낳는 화면으로 증식되어 간다. 그 과정에서 직조의 짜임이 가진 구체성은 사라진다. 그로 인해 원본을 가늠할 수 없게 된 이미지는 반복하고 중첩하는 가운데 복잡성을 더하게 된다. 씨실과 날실이 교차하며 만들어낸 선들의 변주는 이렇게 무한히 확산 된다. ● 이러한 작용은 화면 위에서도 일어난다. 선은 화면으로부터 도드라져 분리되는가 하면 어느새 이미지의 세계로 물러나 화면 전체가 하나의 이미지를 이룬다. 그리드 시리즈에서 윤현미는 무엇을 재현하려고 하지 않는다. 사물과 이미지, 실제와 환영이 끊임없이 자리바꿈하는 중간지대에 있는 윤현미의 그리드 시리즈는 촉각적인 동시에 시각적이다. 그리고 나무 판넬은 철 성분의 페인트가 부식되는 과정이 펼지는 장이다. 그 미세한 변화의 과정은 사각의 틀이 가진 단정한 이미지를 거스르는 흐름 속에 있다. 그것은 우연적인 요소들에 무질서와 복잡성을 더해가는 미세한 흐름이다. 그 위에 질서 정연하게 천을 잘라 만든 선을 올린다. 부피를 지닌 선들이 더해진 화면은 또 하나의 사물이다. 선이라는 가장 단순하고 기본적인 조형 요소와 반복적 행위로 얻어진 사물은 화면을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에 의해 다시 이미지로 뒤바뀐다. 관계 들로 인해 복잡성이 증대되어가는 구조 속에서 사물은 이미지가 되고 이미지는 다시 사물이 된다. ● 윤현미의 그리드는 씨실과 날실을 교차시키는 반복된 행위의 과정과 결과로 만들어진 패턴. 그리고 그 패턴을 복사하여 만든 또 다른 이미지. 그것은 실체 없이 무한히 증식하는 시뮬라크르의 공간이다. 그리고 그 이미지를 인쇄한 천으로 만든 실로 화면을 구성함으로써 사물성을 불러낸다. 하지만 화면은 다시 관객이 화면을 바라보는 시선과 거리에 의해 부피를 잃고 더 큰 이미지 속으로 잠겨간다. 윤현미의 그리드는 마치 복잡성과 다양성이 하나의 생명으로 피어나는 깊은 숲의 반짝임 속으로 잠기듯이 잠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순환의 틀을 다시 한번 비틀어 이미지는 이미지로만 머물지 않고 실제는 실제로만 머물지 않는 지점을 돌아 무언가로 솟구치는 울림이 된다. 윤현미의 그리드는 고정된 틀이 아니다. (2019.11.02.) ■ 배태주

이미성

이미성_황해연展 / 2019_1204 ▶︎ 2019_1208 작가는 인간과 자연을 통합적으로 바라보는 것에 관심이 있다. 인간 스스로를 포함하여 우리를 둘러싼 세상에 대한 알지 못함에서 느끼게 되는 신비로움과 모호함을 시각작품으로 재현하고 관객에게 인간과 자연에 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 다루고자 하는 영역이 넓기 때문에 다양한 주제들을 각기 다른 프로젝트로 풀어나가는 방식으로 긴 호흡을 갖고 작업을 하고 있다. ● "How it feels" 프로젝트는 인간을 비롯한 다양한 존재들의 REM수면 모습을 담은 연작으로서, "정신"과 "육체"에 관한 작업이다. REM 수면은 빠른안구운동을 보이는 독특한 수면단계이다. REM의 기능과 원인이 완전히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안구의 움직임은 잠자는 뇌의 활발한 신경활동과 연관이 있으며, 안구가 움직일 때마다 뇌 속에서 떠오르는 내용이 바뀌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REM은 다양한 생물들에게서 발견된다. 포유류는 모두 REM 수면을 하며, 파충류는 일부가 REM 수면을 한다고 보고되어 있다. 인간과 생물계통상 거리가 가까울수록 인간과 비슷한 형태의 수면을 하는 경향이 있는데, 작가는 생물이 아닌 존재도 인간과 육체적인 연관성이 있다면 REM 수면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 작품에는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과 개를 비롯하여 비 생물적 존재인 부처와 영화 프로메테우스의 외계인 캐릭터(엔지니어)가 등장한다. 부처는 성불하기 전에 인간의 몸으로 삶을 살았던 분이기에 인간과 육체적인 연관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영화 프로메테우스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라는 창세기 구절을 모티브로 창작된 영화로서, 엔지니어라고 불리는 외계인들은 자신의 DNA를 사용하여 인간을 창조한 종족으로 등장한다. 육체적인 닮음은 곧 정신적인 영역에서의 닮음과 연결된다. 창세기 구절처럼 하나님과 나에게 육체적인 연관성이 있다면, 정신적인 영역에 있어서 신이 세상을 바라보고 스스로를 느끼는 방식과 내가 느끼는 방식에 어느 부분이 닮아있을까 상상해 본다. ■ 이미성

황해연_Cockscomb glacier-변형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2×130.3cm_2019

지질학적 풍경으로 표현되는 생의 단면들 ● 황해연 작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 환경과 우주의 질서 등을 자신만의 색채나 패턴으로 발전시켜 독특한 질서를 구축한다. 자신이 골몰하는 세계와 현세, 나와 타인, 문명과 자연 등의 대비되는 여러 요소들 사이에서 흥미로운 줄다리기를 하는 그녀의 작품은 굵은 외곽선, 강한 원색 등 관객을 유도하는 시각적 구성 속에서 '자연의 질서'라는 보편적 주제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보여준다. 명랑한 듯 우울한, 두려우면서도 흥분되는 묘한 색채와 형태의 조합은 다양한 감정과 철학을 환기시킬 수 있는 시각적 형식의 힘에 대해 새삼 깨닫게 한다. ● 그녀의 두번째 개인전 'Rest In Peace'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과 이후의 40일간의 꿈을 회화, 설치, 영상으로 나타낸 것이다. 전시장 한 가운데에 나무로 만든 배가 놓여 있고 벽면에는 작은 그림 40점이 나란히 걸려 있다. 한 켠에 설치된 나무 상자에는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구멍이 있으며 그 속에서 영상이 재생된다. 무거운 느낌의 제목과는 달리 반들거리는 유선형의 나무배는 어딘가 떠나고픈 낭만적인 느낌을 갖게 만든다. 그런가 하면 배의 몸체에 꼼꼼하게 동여맨 하얀 삼베 천은 죽음의 그림자를 강하게 드리운다. 굵은 윤곽선, 강한 원색으로 된 물방울, 수초, 물고기 등은 죽음의 어떤 면을 이야기하고자 함일까? ● 독일의 사진작가 월터 쉘츠(Walter Schels)는 'Life Before Death'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죽음을 앞둔 환자들의 죽기 직전과 죽고 난 직후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그들이 가졌던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사진과 함께 글로 기록하였다. 작가는 오히려 죽음을 앞둔 사람들보다 남겨지는 사람들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을 더욱 힘들어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우리는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고 그로 인해 종교를 찾기도 한다. 죽음에 대해 사색하는 것은 실은 종교의 핵심이다. 불교의 내세, 그리스도교의 천국 등 시각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모든 종교는 잘 죽기 위해 잘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황해연 작가는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슬픔을 자신의 작업을 통해 극복하고자 하였다. 관이 화장되는 순간을 지켜보는 일, 이후의 40일 등은 분명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더욱 작업에 몰두했다. 그녀의 꿈 속에 나타난 것들, 그림으로 기록된 것들은 놀랍게도 삶과 죽음에 대한 엄청난 교훈을 전해준다. 나무 배, 40개의 그림들, 상자 안에서 보게 되는 영상 이미지 등이 전달되는 은밀한 방식에 있어서 말이다. ● 그녀의 작품은 예술이 갖는 특유의 주술적 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사랑하는 이가 더 좋은 곳으로 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된 그녀의 작업은 아마도 자신의 삶에 대한 태도 또한 바꾸는 계기가 되어 주었을 것이다. 작은 유리창 너머로 타들어가기 시작하는 관을 차마 볼 수 없어서 눈을 질끈 감으며 그녀는 다른 상상을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본 이미지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와 같은 형식으로 나무 상자를 만들어 관객에게 끔찍한 죽음의 이미지가 아니라 친숙한, 우리 모두가 태어나고 결국은 돌아가게 되는 곳으로서의, 어머니와 같은 대자연의 이미지들의 단면들을 펼쳐 놓는다. 결국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며 죽음이란 끔찍한 사건이 아니라 생명의 순환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빙하, 습곡, 화산 등 대자연의 이미지는 자신을 떠나 불어오는 바람으로, 흐르는 강물로, 영원히 함께 호흡하고픈 자연의 일부가 된 망자에 대한, 우리의 인류가 결국은 그렇게 지속되어 온 것임을 말해주는 상징물이다. 또한 에너지, 생명 등을 표현하는 주황색, 모든 에너지가 소진된 후의 고통, 위안의 상징인 빨강색, 유토피아인 빙하, 그 전체를 이루는 하나의 개체로서의 생명, 그 핵을 이야기하는 매개체로서의 물방울의 설정은 생명과 자연의 숭고함의 표현이다. 유기적인 패턴, 미묘하고 조심스러운 색상 선택이 돋보이는 최근작들은 관객들을 더욱 집중하게 만든다. 그녀는 그림의 곳곳에 자연의 교훈에 대한 암시를 은밀하게 드러낸다. ● 일상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늘 스케치를 하고 화면을 정리하듯 꼼꼼하게 붓질하는 그녀의 성실함은 17세기 바니타스(Vanitas) 화가들을 떠올리게 한다. 청교도적 삶을 살았던 그들이 그린 것은 해골이나 말라 빠진 낙엽이 아니라 인생의 소중함, 하루하루에 대한 감사였다. 바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황해연 작가의 그림은 인생의 의미를 되짚어보라 이야기한다. 수창청춘맨숀 테라스에 그린 그림이나 가창, 영천 등지의 산책길에 그려 놓은 그림들, 바삐 어딘가를 가다 만나게 되는 맨홀 뚜껑 위의 그것은 무겁기도 하고 유쾌하기도 한 방식으로 삶의 지표를 이야기하는 타로 카드 같다. 그녀의 화법은 하나의 예술 작품이 결국은 예술가 자신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며 예술 작품이 어떻게 타인의 공감을 이끌어내는지, 그것이 사회를 반영하기 위해 어떤 어조를 취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다. ■ 김윤경

Vol.20190326d | 영천예술창작스튜디오 11기 입주작가 릴레이展 & 오픈스튜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