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dden Passage-Liveliness

전성규展 / JEONSEONGKYOO / 全成圭 / painting   2019_0403 ▶︎ 2019_0409

전성규_Hidden Passage19-vital String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2×130.3cm_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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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9_0403_수요일_05:00pm

2019 광화문아트포럼 선정 올해의 작가展

관람시간 / 10:30am~08:00pm / 9일_10:30am~12:00pm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SEJONG CENTER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175(세종로 81-3번지) 1층 1관 Tel. +82.(0)2.399.1000 www.sejongpac.or.kr

통로의 미학, 생명의 부름에 답하다 - 프뉴마(pneuma)와 사륵스(sarx) ● 전성규는 지난 30여 년 외길을 걸으며 그만의 예술에 전념해 왔다. 세간의 인정이나 세속적 보상을 목적으로 하는 길이 아니었기에 당대 미술의 경향이나 유행에 연연하기를 스스로 경계하면서, 자신의 예술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시대의 조류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키는 것과 관련된 긴 싸움을 유지해 왔다.

전성규_Hidden Passage19-vital String 6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3×162.2cm_2019

예술가가 자신의 관점과 안목을 조련함에 있어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이 자신의 삶의 경험과 마음 깊은 곳의 고백과 분열되는 것이고, 군중의 광장이 출처인 이념적 슬로건이나 서가에 꽂힌 책들에서 차용한 책상머리 담론에 경사되는 것이다. 그 결과는 이미 알려진 대로다. 널리 확산된 유행하는 도그마나 브랜드화된 이론의 관점에 슬쩍 편승해 자신의 것으로 가장하거나 연출함으로써 도리어 자신을 자신으로부터 추방하는 것이다. 존재의 저 깊은 곳의 울림으로부터 올라오는 자신만의 고유한 주파수에 고정하는 법을 알지 못하는 예술가의 귀만큼 비참한 것이 또 있을까. 예술은 자신을 지키는 이 싸움과 별개였던 적이 없었다. 세상이 모독하고 없애고 싶어 하는 것을 그 세상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한 저항과 대가가 지불되지 않아도 되는 예술은 일찍이 없었다. 역사를 관통하는 예술의 힘은 언제나 그런 싸움의 흔적으로서 주어졌다.

전성규_Hidden Passage19-vital String 3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2×130.3cm_2019

예술이 벌여온 이 싸움은 길고 또 지난하기도 한 것이지만 진정으로 값진 것이다. 변화무쌍한 유행이 급류를 이루는 이 시대야 두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시대조류를 역류하는 신념은 무시당하고, 억울한 평가나 냉혹한 무관심을 견디고, 익명으로 나이가 드는 익숙해지지 않는 두려움을 감수하는 것이 이에 포함된다. 전성규가 지난 30여년 외면하거나 도피하지 않으면서 임해온 것이 이 싸움이었다. 이러한 태도는 육체와 감각이 아니라 정신과 영감으로부터의 부름(calling)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전성규와 같은 작가에겐 특별히 중요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알다시피 지난 20세기 조형미술은 사물 자체와 그것을 취급하는 방식인 오브제(object)의 미학에 대한 비상한 관심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전성규에게 중요한 했던 것은 오브제의 물리적 속성이나 외형에 앞서 그것의 비가시적 원천, 곧 그것을 구성하는 원자적 구조였기에, 사물의 속성과 외형, 소비에 매몰된 시대의 조류에 편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전성규_Hidden Passage19-vital String 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2×130.3cm_2019

1990년대 중반 레디메이드 오브제로서 수집한 헌옷가지들이 그의 캔버스를 대신하면서, 비정형성이 강조된 쉐이프트 캔버스(Shaped canvas)로서 등장했다. 전성규는 다양한 색이나 질감에 문양이나 패턴이 프린트된 변형된 옷가지를 캔버스에 부착하고, 그 위에 아크릴 안료나 호분 등을 사용해 함축적이거나 상징적인 도상들을 그려 넣곤 했다. 그것들 가운데는 사람의 얼굴이나 인체처럼 식별 가능한 형상들도 있고, 어떤 불특정한 대상의 재현인지 추상적 도상인지조차 불분명한 다양한 이미지들도 눈에 띤다. 이질적인 텍스춰들 간의 충돌, 거친 터치들과 섬세한 선들의 교차 속에서 조심스럽게 드러나는 형상들의 다층적인 중첩으로 화면은 더할 나위 없이 풍부하면서도 미묘한 것으로 거듭난다. 그렇더라도 이 세계에서 효과는 궁극적이기 보다는 부차적인 의미이다. 전성규에게 옷의 의미는 추위로부터의 보호나 장식, 자기과시 같은 기능적이거나 사회적인 것 이상이다. 옷은 형식적으론 레디메이드 미학의 구현이고, 내용적으론 역사와 문화의 함축이며 지역이나 계급, 계층, 신분, 정치적 노선이나 이데올로기의 표지이기도 하다. '좋은 옷'은 더 많은 소유와 높은 사회적 지위를 의미한다. 인간은 그것의 상징성에 집착한다. 옷은 그것을 걸친 인간의 태도의 반영이자 욕망의 대변이다. 그 디자인이나 색은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 축하와 애도 감정의 중요한 표현수단이기도 하다. 그렇더라도 그것은 언젠가는 벗어야 할 존재의 문명적 허물 또는 종국적으로 껍데기인 것이다.

전성규_Hidden Passage17-Escap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7×145.5cm_2017

육체(flesh)와 영혼(spirit)의 이분법적 맥락에서 옷은 일차적으로 육체를 상징한다. 옷은 영혼의 허물 또는 껍데기로서의 육체의 도상학적 재현일 터다. 이 육체는 영적 추구와 상반되는 것, 곧 선과 진실을 향하는 성향을 의미하는 프뉴마(pneuma)와 상반되는 '죄악으로 향하는 성향'인 사륵스(sarx)와 상대적으로 더 연관되어 있다. 사륵스의 성향으로부터 도모되는 일들의 일관된 특성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다." 1) 성서는 이런 인식과 사유, 실천적 행위에 대해 엄중하게 경고하기를 잊지 않는다.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

전성규_Hidden Passage17-Sublimation 4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2×260.6cm_2017

사람들은 누구나 내적 세계, 프뉴마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지만, 그 열망은 지속적으로 좌절을 겪고, 이로 인해 의식적이건 아니건 그것의 대리물을 사륵스의 차원에서 탐닉하게 된다. 이렇듯, 전성규의 옷이 상징하는 바도 중의적이다. 그것이 설사 사륵스의 악한 지향성에 이끌리고, 무기력하게 육체의 일을 도모하는 경향성과 보다 친밀하더라도, 사람들은 그것을 걸치지 않은 채 살 수 없다. 언젠가 마지막 옷을 벗을 때, 즉 영혼이 되어 그것을 빠져나가야 할 때가 이르겠지만, 그 전까지 인간은 그것이 제공하는 유한한 혜택들에 의존해야만 한다. 옷은 마치 우리가 벗어나야 하는 부조리한 문명이자 어쩔 수 없이 그 한 가운데서 삶을 영위해야만 하는 터전의 이중적 메타포, 즉 벗어나야 할 굴레인 동시에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서의 굴레이기도 한 셈이다.

전성규_Hidden Passage-vitality 3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2×130.3cm_2019

내적 부름과 통로로서의 미학 ● 전성규의 회화는 존재의 내면을 구성하는 정신의 작용에 대한 주석과도 같다. 그 내용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 칸딘스키의 '내면의 필연성'에 이르는 이분법적 언설들, 예컨대 외부세계에 대한 내부세계의 우월성이나 물질에 대한 정신의 우월성을 설명하는 담론들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구체적이라는 점에서 상이하다. 전성규의 세계에서 내면은 궁극으로서 물질세계와 격리된 추상적인 자율적 주체가 거하는 집이 아니며, 오히려 그것을 넘어 초월로 나아가는 통로다. 그렇게 되기 위해 자아는 부정되고 초극되어야만 하는데, 그것은 결코 궁극일 수도 고정된 실체일 수도 없기 때문이다. 1982년부터 84년 사이의 「인간 탐색」연작에서 이미 인간존재에 대한 작가의 이해가 잘 드러나 있다. 거기서 인간들은 하나의 분명한 윤곽선 안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듯 자유분방한 선들에 편승해 함께 흐른다. 1987년, 1988 즈음의 「인간 연작」에서 사람은 훨씬 더 많이 흐른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실험되기 시작한 것이 비정형 캔버스로 이 역시 유동하는 존재로서 인간의 표현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전성규_Hidden Passage19-vital String 4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2×112.1cm_2019

2000년대 후반, 그의 회화에 일정한 굵기의 구불거리는 선적 흐름이 중요한 비중으로 등장하는데, 시각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20여 년 전의 「인간탐색」이나 「인간연구」를 맥락적으로 계승한 것이다. 마치 포유류의 내장기관이나 기혈도를 연상시키는 구불거리는 그것은 하나의 질서이자 궤적이며 통로이기도 하다. 그것은 화면 전체에 흩어져 있는 여러 요인들을 이으면서 하나의 유기적 질서 안으로 포섭해 들인다. 예를 들어 2010년의 「Clothing-Passage」나 「Clothing-Gaze」 연작에서 섬세하고 기교적인 무수한 선들로 화면을 가득채운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파동이다. 이 파동은 초끈이론(superstring theory)과 흡사한, 존재의 기초명제가 되는 것으로 이로부터 입자들이 만들어진다. 물질과 영혼, 이데아와 질료 사이의 간극이 이 파장으로 채워져 있어 양자 간의 긴밀한 소통을 주선하면서 세계의 기초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 원초적 파동이야말로 그것을 통해 입자들을 만들어내는 생명 에너지의 실체인 셈이다. 이 파동이 숨겨진 진리의 차원으로 나아가는 통로가 되는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다. ● 이런 맥락에서 전성규에게 회화는 그 생명 파동의 비밀에 대한 시각적 주석의 일환이다. 이 회화가 주장하는 회화론은 생명성의 근원을 향한 나아감과 다가섬의 통로로서의 회화라는 것이다. 그 나아감은 「Clothing-Gaze10-1」(2010) 에서처럼 때때로 욕망으로 미혹되고 길을 잘못 들어서는 시행착오를 겪기도 한다. 「Clothing-Gaze10-2」는 그 나아감의 궁극의 목적지를 하얀 집, 곧 궁극적 진리로 상징해내고 있다. 이 회화론을 주도하는 것은 통로의 미학(Esthetic of Passage)인 동시에 통로로서의 미학(Esthetic as Passage)이다.

전성규_Hidden Passage-String 15080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7×145.4cm_2015

이 나아감은 존재 너머, 궁극적 진리로부터의 부름에 대한 부응이다. 이것은 낯설거나 새삼스러운 담론이 아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부름에 응답하고 부응하는 존재들이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주의자는 칼 마르크스의 사상으로부터 부름을 받아 그 사상의 강령들로 자신의 삶의 원칙을 재건하고자 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삶이 자신의 내적 부름에 부응한다고 생각될 때 존재적 성취감을 느끼는 존재이기에, 어떤 사람은 니체로부터 부름에 부응했고,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샤르트르주의자나 프로이드주의의 신봉자로 선언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 주체가 누구건 인간은 부름을 받는 것에 의해 일상의 일정들을 소화하고, 경력을 쌓고, 승진의 사다리를 오르며, 기껏해야 경제적인 면에서 노후계획을 세우는 데 그치는 그저 그런 존재 이상의 존재, 곧 심오한 존재가 된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삶을 비로소 심오한 것으로 만드는 어떤 부름에 부응하는 존재다. 전성규를 평생 캔버스 앞이라는 도망칠 수 없는 고뇌의 자리로 부른 주체는 정신과 물질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의 산물로서 생명이요, 더 나아가 모든 생명의 주인으로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말한 스스로 계신 그분이다.

전성규_Muan collecting_가변설치_2018

소박하고 활발한 회화적 약동 ● 전성규의 회화는 보이는 세계가 아니라 보이지 않은 '숨겨진 차원'을 시각화하는 것과 관련해 그가 벌여온 어려운 싸움의 산물이자 성과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즉자적인 세계에 현혹되지 않은 힘든 싸움이 불가피하다. 매체로서 회화에 집착하는 모더니즘적 접근도, 시각을 자극하는 요소들의 무절제한 오남용을 허용하는 포스트모던적 접근도 동일하게 경계되어야만 한다. 때론 사적인 사연을 간직한 옷가지들과 그 위에 올려진 안료 층, 구불거리면서 교차하고 중첩하는 분방한 터치들, 그 중심부에 희미한 점선들로 된 드로잉, 인체, 두상, 통로로서의 옷 등의 작은 이미지들, 그리고 정신과 육체, 낙원과 실존의 차원을 결부시키는 파동이 이 모든 것들이 꿈틀거리는 다층적인 하나로 재구성한다. 그 형식과 표현은 밝고 활발한 약동으로 넘쳐나면서도 과하지 않고, 점잖으면서도 아기자기한 측면도 있다. 이 이상으로 감관을 간질이는 드라마나 전위적인 형식실험은 이 세계의 취지에 부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세계는 자극적 이미지를 탐닉하는 것이 주류인 시대와는 분명하게 거리를 두고 있다. 감각적 자극이 임계점에 도달한 오늘날엔 쉽게 동의되기 어렵겠지만, 정신을 위해선 그 미적 온건함이 여전히 크게 유효하다. 정신과 의사이자 인격의학의 주창자이기도 한 폴 트루니에(Paul Tournier)의 말처럼 소박한 음식이 리츠호텔의 음식보다 덜 질리며, 우리의 정신은 그런 음식을 필요로 한다. 3) 전성규는 자신의 고유한 성격을 결코 내려놓지 않는 그것에 힘입어 회화예술의 한 높은 완성도에 다가서고 있다. ■ 심상용

* 각주 1) 개역개정 신약성서 갈라디아서 5/19~21. 2) 위의 책, 5/21. 3) 폴 트루니에,『고독, 윤경남 옮김 (서울: IVP, 1998),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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