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벽수행 面壁修行

정소연展 / JEONGSOYOUN / 鄭素姸 / painting   2019_0410 ▶︎ 2019_0430 / 일,공휴일 휴관

정소연_벽지 그림 Wallpaper Painting_ 캔버스에 유채, 나무 액자, 벽지, 우드스테인, 집성목_200×120cm_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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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연 홈페이지_www.soyounjeong.com

초대일시 / 2019_0410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공휴일 휴관

이화익 갤러리 LEEHWAIK GALLERY 서울 종로구 율곡로3길 67(송현동 1-1번지) Tel. +82.(0)2.730.7814 www.leehwaikgallery.com

정소연의 '면벽수행' ● "나는 갱년기 여성작가다. 육체도 정신도 예전 같지 않다. 체력이 딸리고 우울하다. 하염없이 벽을 보고 앉아있다. 벽을 보고 있자니... 웬만한 그림보다 벽지가 낫다. 벽지를 그리고 싶어진다. 면벽공심(面壁功深)은 아직 멀었다... ㅎㅎ" - 정소연의 '작가노트' 중에서 ● 머시라? 이화익 갤러리가 벽지가게로 업종을 변경한 것 같다고요? 당 필자,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기위해 이화익 갤러리를 찾았다. 필자가 갤러리 문을 밀고 들어서니 작품은 온데간데없고 백색의 백면에 다양한 벽지들로 '도배'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실크벽지에서부터 패브릭벽지 그리고 뮤럴벽지에 이르기까지 럭셔리 벽지들이 즐비했다. 물론 고급 벽지들은 마치 벽면에 포인트를 주듯 포인트 벽지처럼 '도배(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벽면에는 타원형 액자 거울들도 몇 개 눈에 띄었다. ● 오잉? 그런데 타원형 액자 거울에 비친 벽지가 이상하다. 왜냐하면 거울이 비추는 벽지가 맞은 편 벽면은 고사하고 1층 공간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필자는 궁금한 나머지 거울로 한 걸음 들어갔다. 헉!!! 타원형 액자 안에 있는 것은 '거울'이 아니라 '벽지'가 아닌가! 어니다! 그것은 '벽지'가 아닌 벽지를 보고 그린 '벽지 그림'이다. 그렇다! 그것은 캔버스에 유화로 그린 벽지보다 더 벽지 같은 정소연의 '벽지화(壁紙畵)'이다. 그렇다면 이화익 갤러리가 벽지가게로 업종을 변경한 것 같다는 '소문(所聞)'은 정소연의 '벽지화' 때문에 기인된 것이 아닌가?

정소연_벽지 그림 Wallpaper Painting 2_캔버스에 유채_60×50cm_2017
정소연_벽지 그림 Wallpaper Painting 18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0×50cm_2019

정소연의 '면벽구년(面壁九年)' ● 이화익 갤러리의 정소연 개인전 타이틀은 『면벽수행』이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면벽수행(面壁修行)'은 문자 그대로 벽을 마주 대하고 좌선하는 수행을 뜻한다. 문득 중국 선종(禪宗)의 창시자인 달마(達磨) 대사의 '면벽구년(面壁九年)'이 떠오른다. 면벽구년? 그것은 달마가 쑹산(嵩山) 소림사(少林寺)에서 9년간 면벽(面壁) 수행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고 보니 정소연 역시 9년간 '면벽' 수행했다. 말하자면 그녀는 '면벽구년'만에 '벽지화'로 돌아왔다고 말이다. ● 네? 무슨 뚱딴지같은 말이냐고요? 설치와 비디오 설치 작업을 주로 하던 정소연은 2010년 미국 뉴욕에 소재하는 텐리 갤러리(Tenri Gallery)에서 『홀마크 프로젝트(The Hallmark Project)』라는 타이틀로 오랜만에 회화작품들로 개인전을 개최한 후 한국으로 귀국해, 2011년 이화익 갤러리에서 같은 타이틀로 오픈했다. 2014년 이화익 갤러리에서 개인전 『네버랜드(Neverland)』를, 2016년 이화익 갤러리에서 개인전 『어떤 풍경(Some Landscape)』을 개최했다. 그리고 올해 이화익 갤러리에서 열릴 개인전 『면벽수행』을 앞두고 있다. ● 이제 필자가 정소연이 '면벽구년'만에 벽지화로 돌아왔다고 말한 이유를 아시겠죠? 물론 그녀의 '화업'은 1997년 미술계 데뷔작으로 간주되는 『인형의 집』에서부터 시작된다. 2008년 그녀는 『오프닝 프로젝트(The Opening Project)』를 개최한 후 돌연 10년간 지속했던 오브제와 영상 등 설치작품을 '물류창고(Warehouse)'에 유보시킨 채 마치 '억압된 것의 회귀(the return of the repressed)'처럼 회화로 귀환했다. 그녀의 억압된 것의 회귀에 관해서는 지난 2014년 이화익 갤러리에서 열린 정소연 개인전 『네버랜드(Neverland)』 도록에 실린 필자의 졸고 『정소연의 네버랜드』를 참조 바란다.

정소연_벽지 그림 Wallpaper Painting 2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00×180cm_2018
정소연_벽지 그림 Wallpaper Painting 20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00×180cm_2018

정소연의 「포스트-네버랜드(Post-Neverland)」 시리즈 ● 도대체 '네버랜드'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정소연은 '벽지화'를 작업한 것일까? 아니다! 그녀는 '네버랜드' 시리즈에서 곧바로 '벽지화'를 작업한 것은 아니다. 필자가 그녀의 '벽지화'를 언급하기 위해서라도 그녀의 '네버랜드' 시리즈 이후의 작품들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그녀는 '네버랜드' 시리즈 이후인 2015년 원형 캔버스에 각종 도감서적들에서 차용한 동·식물을 표현한 「포스트-네버랜드(Post-Neverland)」 시리즈를 작업했다. 그것은 일명 '크리스탈 볼-페인팅(Cristal Ball-Painting)'으로 불린다. ● 크리스탈 볼-페인팅? 그것은 마치 마법구슬에 담긴 이미지처럼 보이도록 표현해 놓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를테면 그것은 원형 캔버스를 마치 마법구슬처럼 표현해 놓아 관객을 착각에 빠트린다고 말이다. 그러나 관객이 그녀의 '마법구슬-그림'으로 한 걸음 다가가면 '민낯(평평한 평면)'을 만나게 된다. 와이? 왜 그녀는 뻔히 탄로(綻露) 날 것을 알면서도 적잖은 시간을 들여 정교하게 표현한 것일까? 혹 그녀는 그것을 '함정'으로 사용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녀가 진짜 감추고 있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 정소연의 「포스트-네버랜드」 시리즈에는 원형 캔버스뿐만 아니라 쉐이프드 캔버스(Shaped Canvas)를 사용한 작품들도 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낙하산에 마치 만발한 꽃들을 인쇄한 듯 보이는 작품, 공중에서 떨어뜨리는 보자기에 마치 화려한 꽃들을 수놓은 듯 보이는 작품, 구겨진 잡지에 각종 식물들을 인쇄된 듯 보이는 작품이 그것이다. 하지만 관객이 그녀의 「포스트-네버랜드」 시리즈로 한걸음 들어간다면 낙하산과 보자기 그리고 구겨진 잡지의 '민낯(평평한 평면)'을 곧 보게 된다. ● 와이? 왜 정소연은 작품으로 한걸음만 다가서면 뻔히 탄로 날 것을 알면서도 힘든 노동을 한 것일까? 혹자는 그녀의 「포스트-네버랜드」 시리즈를 "실재와 가상 사이의 틈을 화면에 펼쳐 놓은 것"으로 해석한다. 그런데 말이다. 만약 관객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낙하산이나 공중에서 떨어뜨리는 보자기 그리고 구겨진 잡지로 한걸음 들어서기만 한다면, 그것들이 시각적 착각을 일으키도록 세심하게 표현한 것임을 단방에 알아차릴 수 있다는 점에서 허망하기까지 하다. 혹 그녀는 '실재와 가상의 틈'을 '미끼'로 던져놓은 것은 아닐까? ● 원모아, 그렇다면 정소연이 진정 은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필자가 생각하기에 그녀의 「포스트-네버랜드」 시리즈는 제목 그대로 「네버랜드」 시리즈 2탄이다. 따라서 그녀의 「포스트-네버랜드」 시리즈는 자신의 「네버랜드」 시리즈를 업그레이드한 버전인 셈이다. 무엇을 그녀는 업그레이드한 것일까? 필자가 생각하기에 바로 '프레임(Frame)'이다. 이를테면 마법구슬 같은 '크리스탈 볼'과 하늘에서 떨어지는 낙하산이나 공중에서 떨어뜨리는 보자기 그리고 구겨진 잡지의 변형된 캔버스인 '쉐이프드 캔버스' 말이다. ● 정소연은 '크리스탈 볼'과 '쉐이프드 캔버스'로 관객에게 '실재와 가상의 틈'을 메우도록 유혹한다. 하지만 그녀는 정작 '크리스탈 볼'과 '쉐이프드 캔버스'에 각종 도감서적들에서 차용하여 그려놓은 식물들을 은폐시킨다. 아니다! '크리스탈 볼'과 '쉐이프드 캔버스'에 그려진 다양한 식물들은 마치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의 「도둑맞은 편지(The Purloined Letter)」처럼 은폐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버젓이 관객 앞에 놓여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그것을 보면서도 보지 못한다. ● 그렇다면 관객이 보면서도 보지 못한 것은 무엇인가? 정소연은 '크리스탈 볼'과 '쉐이프드 캔버스'에 다양한 식물들을 마치 디지털로 인쇄한 것처럼 착각할 정도로 정교하게 그려놓았다. 그 다양한 식물들은 각종 식물도감에 사진과 그림으로 실린 다양한 식물들을 스캔 받아 잘라내어 컴퓨터의 포토샵 프로그램에서 하나의 화면에 재구성한 디지털이미지를 유화물감과 팬 브러시로 정교하게 그린 것이다. 물론 정소연은 그려진 그림 위에 팬 브러시로 글로스 바니쉬(Gloss Varnish)를 5-6회 부드럽게 발라 도자기 같은 윤광 피부로 만들어 놓았다. ● 머시라? 정소연의 '크리스탈 볼-페인팅' 표면은 반짝인다고요? 그렇다! 그녀는 '크리스탈 볼'에는 유리구슬의 효과를 위해 크리스탈 글로스 바니쉬(Cristal Gloss vanish)로 표면을 처리해 놓았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녀가 '크리스탈 볼'과 '쉐이프드 캔버스'에 그려놓은 다양한 식물들 면면을 보면 서로 다른 지역의 식물들이 마치 순간이동을 통해 한 화폭 안에서 서로 만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기후에 공존할 수 없는 식물들이 한 화면에 그려져 있다. 이를테면 그녀의 그림에는 열대기후와 온대기후 그리고 고산기후 또한 냉대기후의 식물들이 동거한다고 말이다. ● 한 술 더 떠 '정소연의 식물나라'에 있는 식물들은 기후에만 제약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중력의 법칙도 따르지 않는다. 무슨 말이냐고요? 어느 식물은 지면에서 하늘로 자연스럽게 자라나 있는가 하면, 어느 식물은 하늘에서 지면을 향해 거꾸로 자라나 있기도 하다. 그리고 어느 식물은 측면에서 자라난 것처럼 보인다. 더욱이 만개한 꽃은 허공에 떠있기도 하다. 그녀는 회화를 가지고 재기발랄하게 놀 줄 아는 화가이다. 그래서 필자는 5년 전 정소연을 '초능력자'로 불렀다. 왜냐하면 그녀에게 임파셔블한 미션은 없기 때문이다.

정소연의 「토비아스의 카페(Tobias' Cafe)」 시리즈 ● 2015년 정소연은 「포스트-네버랜드」 시리즈 작업을 한 다음 해인 2016년 「토비아스의 카페(Tobias' Cafe)」 시리즈 작업을 한다. 그녀의 「토비아스의 카페」 시리즈는 노골적으로 '디지털 세계'를 드러낸다. 그것은 제목 그대로 토비아스 레베르거(Tobias Rehberger)가 베니스에 만든 카페의 한 부분을 차용하여 작업한 작품이다. 토비아스의 카페는 '위장무늬(camouflage patterns)'를 이용하여 새로운 건축적 공간을 만든 것이다. 정소연은 그 '토비아스 카페' 중앙에 사각의 창을 만들어 창 너머로 독특한 풍경들을 그려놓았다. ● 「토비아스의 카페 I」은 창 너머에 하늘에 부유하고 있는 거대한 미로를 그려놓은 반면, 「토비아스의 카페 II」는 창 너머에 언덕 아래로 펼쳐진 도시 풍경을 표현해 놓았다. 그런데 하늘에 거대한 미로가 부유한다는 것도 황당하지만, 뒤죽박죽으로 그려진 언덕 아래의 집들은 더 가관(可觀)이다. 머시라? 더 어이없고 터무니없는 이미지도 있다고요? 그렇다! 창문의 왼쪽 프레임에 마치 인쇄물처럼 부착되어 있는 듯 그려진 건축 이미지나 하늘 이미지를 보면 폭소를 터뜨리지 않을 수 엄따! ● 왜 필자가 지나가면서 정소연의 「토비아스의 카페」 시리즈에 대해 "노골적으로 '디지털 세계'를 드러낸" 작품으로 중얼거렸는지 감 잡으셨죠? 5년 전 필자는 그녀의 「네버랜드」 시리즈를 보고 정소연을 '디지털 아티스트'로 상상했다. 말하자면 그녀는 기발하고 독창적인 상상력을 지닌 아티스트로 일명 '점퍼(Jumper)'처럼 그녀는 원하는 곳이 있으면 순식간에 그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와 닮았다고 말이다. 따라서 그녀는 마치 꿈의 세계를 창조하는 설계자 아리아드네(Ariadne)처럼 또 다른 현실을 화폭에 설계해 놓을 것으로 예언(豫言)했다.

정소연의 「어떤 풍경」 시리즈 ● 정소연은 필자의 예언에 「어떤 풍경」 시리즈로 답변했다. 그녀는 관객들에게 그녀의 '회화나라'인 「어떤 풍경」으로 뛰어들어 놀랍고 마법 같은 모험을 떠나자고 제안한다. 만약 그녀의 '네버랜드'가 꿈과 현실이 해체된 또 다른 현실이라면, 그녀의 '어떤 풍경'은 현실과 가상이 해체된 또 다른 현실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필자는 그녀의 「어떤 풍경」 시리즈를 간략하게나마 언급하기위해 2016년 이화익 갤러리에서 발행한 정소연의 개인전 「어떤 풍경」 도록에 실린 서문을 인용해 보도록 하겠다. ● "이번 개인전에서 선보이는 「어떤 풍경(Some Landscape)」 시리즈는 「홀마크 프로젝트」와 「네버랜드」 시리즈에 뒤이어 작가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즉 주관적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 「어떤 풍경」에 등장하는 것은 푸른 창공 아래 펼쳐진 적막한 도시 풍경이다. 눈부시도록 사실적으로 묘사된 구름 사이로 쏟아지는 부드럽고도 강렬한 빛이 그림 속의 백색 도시를 환상의 세계로 이끌고 있다. 도시의 건물은 석고 조형물처럼 하얗고 언덕이나 산들 역시 정밀한 등고선의 곡선으로 묘사되어 인위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사실적으로 그려진 하늘과는 대조적으로 건물들은 의도된 모형물임을 강조함으로써 실재와 가상이라는 두 개의 층위가 그림에 작동하며 관객의 시선을 낯설게 만들어 낸다."(김영호의 「실재와 가상의 틈에서 : 정소연의 '어떤 풍경(some Landscape)'」 중에서. 2006) ● 흥미롭게도 정소연의 「어떤 풍경」 시리즈에 사람이 부재한다. 따라서 그녀의 「어떤 풍경」 시리즈는 마치 유령도시(Ghost town)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당신이 그녀의 「어떤 풍경」으로 한걸음 들어간다면, 그 유령도시가 모형(模型)을 차용하여 그린 '회화도시'라는 것을 한방에 알 수 있다. 흔히 '모형'은 실물을 본떠서 만든 물건으로 이해한다. 이를테면 모형은 실물의 특성을 잘 보이도록 하거나 쉽게 설명하기 위해 실물을 본떠 만든 본보기를 가리킨다고 말이다. 따라서 그것은 '모델(model)'로 불리기도 한다. ● 물론 모형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실물보다 크게 만든 모형을 확대 모형, 실물과 똑같은 크기로 만든 모형을 실물 크기 모형, 그리고 실물보다 작게 만든 축소 모형이 그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재료나 장치를 만들기 위하여 미리 가상의 모형을 만들기도 한다. 말하자면 모형은 이미 있는 것을 모델로 상정해 만들기도 하지만 아직 없는 것을 상상해 만들기도 한다고 말이다. 정소연의 「어떤 풍경」 시리즈는 이 두 가지를 모델로 작업한 것이다. 김영호의 말을 더 들어보자. ● "정소연은 「어떤 풍경」 시리즈에서 건축모형 풍경을 두 개의 범주로 나누어 놓았다. 하나는 도시 풍경을 특정지역의 건축 모형에 의존하지 않고 작가가 컴퓨터 모니터 상에서 자유롭게 구상해 낸 것이며, 다른 하나는 경주의 '안압지'라는 특정지역의 모형을 사진으로 촬영해 화면위에 그대로 옮겨 그린 것이다. 전자는 세상 어디에도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 풍경(Virtual Landscape)이며 후자는 실제로 존재하는 특정지역의 원본 모형을 본뜬 의사 풍경(Pseudo Landscape)이다. 이 모든 경우에 작가가 의도하는 것은 실재와 가상의 접목된 세계에 대한 다층적인 해석의 가능성에 주목하도록 하는 것이다. 전자가 원본 없는 실재와 그 모형 사이에 대한 물음이라면 후자는 안압지라는 실재하는 정원과 그 모형 사이에 대한 물음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작가는 건축모형을 빌어 현실과 비현실의 세계가 서로 얽혀진 세계로 관객들을 안내한다. 거기서 만나는 것은 가상 풍경 또는 의사 풍경이라 부를 수 있는 낯설면서도 낯익은 풍경의 세계이다." ● 김영호는 정소연의 「어떤 풍경」 시리즈를 두 개의 범주로 나누어 설명했다. 하나는 '어떤 풍경'을 특정지역의 건축 모형에 의존하지 않고 작가가 컴퓨터 모니터 상에서 자유롭게 구상해 낸 것을 화폭에 표현한 것이다. 머시라? 정소연의 '어떤 풍경'이 컴퓨터 모니터 상에서 '무에서 유'를 자유롭게 구상해 낸 것이냐고요? 김영호가 말한 '특정지역의 건축 모형에 의존하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의 특정지역의 건축 모형에 의존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정소연의 '어떤 풍경'은 그녀가 국내외를 방문하여 보았던 건축가들의 건축 모형들을 사진에 담은 것을 컴퓨터에 다운받아 모니터 상에서 자유롭게 편집(재구성)한 것을 화폭에 표현한 것이다. ● 자, 이번에는 이미 있는 것을 모델로 상정해 만들었다는 경주의 '안압지 모형에' 대해 말해보자. 정소연은 경주의 '안압지'라는 특정지역의 모형을 사진으로 촬영해 화면위에 그대로 옮겨 그린 것이다. 이를테면 그녀는 경주의 안압지를 직접 찍은 사진이 아니라 경주의 '안압지 모형을 찍은 사진'을 보고 '어떤 풍경'을 그렸다고 말이다. 그것은 그녀가 자연의 하늘이나 동식물을 직접 보고 그리지 않고 홀마크사 카드나 도감들에 인쇄된 이미지를 보고 그린 것과 같은 셈이다. 따라서 정소연의 「어떤 풍경」 시리즈는 그것이 특정지역의 건축모형을 모델로 삼아 찍은 사진을 통해 작업을 했건 가상의 건축 모형을 모델로 삼아 찍은 사진들을 편집해 작업을 했건 모두 세상 어디에도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어떤 풍경'인 셈이다. ● 그렇다! 정소연의 「어떤 풍경」 시리즈는 그녀의 유일무이한 '회화 세계'에만 있다. 그녀는 '어떤 풍경'을 "가장 현실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비현실적인 건축모형을 이용한 '유사(類似)풍경(pseudo-landscape)'으로서 풍경(화)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싶었다"면서 "실재하는 풍경 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기존의 풍경화를 감상하는 방식과 달리 '전지적 관찰자 시점'을 제안하는 그림"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그녀의 「어떤 풍경」은 일종의 '내적 풍경'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점에 관해 김영호는 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 "정소연의 캔버스 회화가 가상과 실재의 틈이 확장되고 모순과 역설이 일상이 되어가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정소연의 회화작업에는 불교에서 갈구하는 이상향으로써 '니르바나(Nirvana)'의 세계가 숨 쉬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현실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존재의 실체를 깨닫는 것이 니르바나의 세계다. 그것은 가상과 실재의 틈을 직시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를 자연의 상태에 두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자유의지를 의미하며 정소연의 작품에서 그러한 자유의지를 발견하는 것은 분명 의미 있고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정소연_벽지 그림 Wallpaper Painting 24_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우드_200×197cm_2019

'벽지'와 '벽화' 그리고 '벽' ● 정소연은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의 작품 구상 '비하인드 스토리'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아들이 어린시절 미키마우스 마니아였어요. 그런데 당시 아들은 정작 쥐를 본적이 없었지요. 아이가 실재보다 이미지를 통해 대상에 접근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죠." 당 필자, 이 진술이 그녀의 '회화세계'로 접근하는데 일종의 '길잡이'를 해준다고 본다. 네? 그녀의 진술이 당신에게 무슨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인지 아직 '접수'되지 못했다고요? ● 사람(소비자)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준다는 슬러건을 내걸었지만 사실상 상업적 관점에서 제작(생산)되는 홀마크사 카드의 이미지나 독자들에게 실물(원본)을 대신하여 그림이나 사진으로 동류(同類)의 차이를 한 눈으로 식별할 수 있도록 교육적 관점에서 제작되었다는 도감 그리고 이미 있는 것이나 아직 없는 것을 상상해 만들었다는 모형은 흔히 원인(실재, 원본)으로 인해 발생된 결과(가상, 복제)로 간주된다. ● 하지만 정소연의 작품들은 원인/결과라는 이분법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녀의 작품들은 원인/결과라는 이분법을 넘어서있다. 왜냐하면 그녀의 작품들이 모델로 삼은 것은 바로 카드 인쇄물이나 도감 그리고 모형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녀 작품들의 '원본(모델)'이 다름아닌 복제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작품들은 선형적인 인과론을 뒤집는 것도 가능한 것이 아닌가? 머시라? 원인 때문에 결과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결과 때문에 원인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요? ● 자, 이제 원점으로 돌아가자. 원점? 정소연의 '벽지화' 말이다. 필자는 지나가면서 그녀가 '면벽구년'만에 '벽지화'로 돌아왔다고 중얼거렸다. 대중매체 시대와 소비사회에서 '실재(the real)'를 대치해버리는 이른바 '모조(simulacrum)'를 모델로 삼아 작업했던 그녀가 '벽지'라는 구체적인 재료를 모델로 작업한 것이 바로 '벽지화'이다. 와이? 왜 그녀는 '벽지'를 모델로 삼은 것일까? 그녀가 9년간 화폭을 바라보면서 터득한 것이 '벽지'란 말인가? 필자는 그녀의 '벽지화'를 언급하기위해서 '벽지'의 역사를 간략하게나마 추적해 보겠다. ● '벽지'를 거슬러 올라가면 '벽화'를 만나게 된다. 우리는 흔히 '벽화'하면 '동굴벽화'를 떠올린다. 필자는 이곳에서 고대부터 중세에 이르는 '벽화사'를 언급하지는 않겠다. 다만 건축물 내부의 벽면에 직접 그려졌던 그림이 '벽지'로 자리바꿈되었다는 점에 주목해 보자. 특히 건물 내부에 그려졌던 '벽화'는 상류층에서만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종이를 벽지로 사용하면서 대중화가 가능하게 되었다. 물론 최초의 벽지로 불리는 것은 종이가 아닌 비단이나 무명천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여전히 상류층의 전유물이었을 것이다. ● 벽지의 대량생산은 인쇄 기술이 발달하기 시작한 르네상스 시대라고 한다. 벽지에 인쇄된 그림이나 문양은 화가의 몫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벽지의 그림이나 문양은 바로 미술에서 영향 받은 것임을 추론할 수 있다. 벽지가 대중화되면서 벽화는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이를테면 집 안에 벽화를 그려놓을 수 있는 재력이 있는 이들조차 벽지를 사용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벽지는 벽화와 달리 교체가 용이하다. 말하자면 집 안의 벽지가 싫증이 나면 다른 벽지로 손쉽게 교체할 수 있다고 말이다. ●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벽지는 어떨까? 조선시대 양반집 벽은 비단으로 도배되었던 반면, 가난한 선비집 벽에는 붓글씨를 연습한 종이를 바르거나 책장을 뜯어 바르기도 하였다고 전해진다. 일제시대 중산층에서는 벽지 대용으로 광목천을 사용했다고 한다. 물론 가난한 집안의 벽에는 신문지로 도배되기도 했다. 이후 벽지는 종이가 아닌 마·견·인조섬유·플라스틱·얇은 목재 판지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오늘날 벽지는 단순히 실내공간을 장식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일명 '아트 벽지'는 하나의 '예술작품'이기를 자처한다. ● 벽지는 실내의 단열과 방음 그리고 방수 등의 기능도 일부 하지만 실내 분위기를 장식하기위한 인테리어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는 무채색의 차가운 콘크리트 벽면을 벽지로 도배해 아늑하거나 쾌적한 혹은 화사한 분위기를 만들고자 한다. 그렇다! 벽지는 벽에 기생한다. 따라서 벽이 몸(알맹이)이라면, 벽지는 일종의 '옷(피부)'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몸'으로 인해 파생한 '옷'이 오히려 '몸'을 결정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벽' 때문에 파생된 '벽지'가 오히려 '벽'을 결정하는 것이 아닌가?

정소연_벽지 그림 Wallpaper Painting 25_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우드_200×182cm_2019

정소연의 「벽지 그림(Wallpaper Painting)」 시리즈 ● 정소연의 신작 「벽지 그림(Wallpaper Painting)」 시리즈는 기존 '벽지'들을 모델로 작업한 것이다. 그녀의 '벽지화'에는 사각형 이외에 원형과 타원형도 있다. 그녀의 「벽지 그림 1」에서부터 「벽지 그림 8」까지는 타원형 액자 안에 마치 집안의 벽지를 잘라 부착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타원형 캔버스에 다양한 고급 벽지를 보고 유화물감으로 정교하게 그린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녀의 「벽지 그림 9」에서부터 「벽지 그림 18」까지는 원형 캔버스에 각종 럭셔리 벽지를 보고 유화물감과 아크릴물감으로 세심하게 표현한 것이다. ● 정소연의 「벽지 그림 19」에서부터 「벽지 그림 23」까지는 직사각형의 캔버스에 건축적 공간에 줄무늬 벽지를 그려놓은 것이다. 그것은 마치 아직 건축되지 않은 '건축 모형'처럼 아직 인테리어 하지 않은 건축 내부에 일종의 '벽지 모형'을 그림으로 표현해 놓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녀의 「벽지 그림 24」와 「벽지 그림 25」는 직사각형의 캔버스에 아크릴물감으로 줄무늬 벽지를 그려놓은 것과 아크릴물감으로 채색한 기다란 각목을 설치해 놓은 작품이다. ● 왜 정소연은 캔버스에 그려진 벽지와 각목에 아크릴물감으로 채색된 것을 동거시킨 것일까? 그것은 마치 건물의 외부와 내부가 서로 맞물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문득 정소연의 「토비아스의 카페」 시리즈가 떠오른다. 그녀는 그 작품에 관해 '작가노트'에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글을 남겼다. "외부공간을 내부로 끌어들여서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흐리게 하며 내부와 외부를 결합시키고 일상의 공간을 확장시키는 작업." ● 그런데 그녀의 「벽지 그림 26」과 「벽지 그림 27」은 독특하다. 필자는 이곳에서 그녀의 「벽지 그림 26」만 간략하게 살펴보겠다. 왜냐하면 그녀의 「벽지 그림 27」은 「벽지 그림 26」과 같은 방식으로 작업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벽지 그림 26」은 언 듯 보기에 심플해 보이지만 한 걸음 들어가면 꽤 복잡하다. 따라서 한 문장의 호흡이 좀 길다. 미리 양해를 구한다. ● 그녀의 「벽지 그림 26」은 컬러풀한 줄무늬 벽지를 세로의 직사각형 캔버스에 그려놓고, 그 위에 컬러풀한 줄무늬 벽지를 그려놓은 작은 백색 타원형 캔버스를 설치해 놓은 다음, 그 작은 백색 타원형 캔버스 안에 컬러풀한 줄무늬 벽지를 그려놓은 더 작은 타원형 황금 액자를 설치한 것이다. ● 뭬야?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요? 그래서 필자가 미리 양해를 구한 것이다. 조타! 필자가 그것을 마치 양파의 껍질을 까듯이 하나씩 하나씩 벗겨보겠다. 먼저 세로의 직사각형 캔버스에 컬러풀한 줄무늬 벽지를 그려놓은 것을 보자. 오잉? 세로의 직사각형은 캔버스가 아니라 집성목이 아닌가. 그렇다! 그것은 세로의 직사각형 집성목 위에 컬러풀한 줄무늬 벽지를 그려놓은 것이다. 아니다! 그것은 세로의 직사각형 집성목 위에 컬러풀한 줄무늬 벽지를 부착해 놓은 것이다. ● 자, 이번에는 작은 백색 타원형 캔버스에 컬러풀한 줄무늬 벽지를 그려놓은 것을 보도록 하자. 네? 혹 백색 타원형은 캔버스가 아닌 집성목이고, 컬러풀한 줄무늬도 진짜 벽지냐고요? 아니다! 그것은 집성목에 벽지를 바른 것이 아니라 캔버스에 유화물감으로 그린 것이다. 네? 그러면 백색 액자도 유화물감으로 그린 것이냐고요? 아니다! 그것은 진짜 백색 액자이다. 따라서 백색 액자는 줄무늬 벽지를 바른 집성목에 설치해 놓은 것이다. ● 마지막으로 백색 타원형 캔버스 안에 설치된 더 작은 타원형 황금 액자를 보자. 헉!!! 타원형 황금 액자는 진짜 액자가 아닌 백색 타원형 캔버스 안에 유화물감으로 그려진 것이 아닌가. 따라서 타원형 황금 액자는 백색 타원형 캔버스에 설치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네? 그렇다면 유화물감으로 그려진 타원형 황금 액자 안에 있는 줄무늬 벽지는 진짜 벽지냐고요? 아니다! 그 줄무늬 벽지 역시 유화물감으로 그려놓은 것이다. ● 결국 정소연의 「벽지 그림 26」은 인쇄된 벽지와 손으로 그려진 벽지를 동거시킨 셈이다. 와이? 왜 그녀는 인쇄된 벽지와 손으로 그려진 벽지를 동거시킨 것일까? 혹 그녀는 '실재와 가상의 틈'을 표현한 것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녀는 이미 '어떤 풍경'을 통해 현실과 가상을 해체시킨 또 다른 현실을 표현했었다. 그렇다면 인쇄된 벽지와 손으로 그려진 벽지를 동거시킨 것은 일종의 '함정'이란 말인가? 그러면 그녀가 은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정소연_벽지 그림 Wallpaper Painting 6_캔버스에 유채_60×50cm_2018

정소연의 '추상게임' ● 정소연은 필자를 유혹한다. 그녀는 필자에게 '추상게임'을 제안한다. 추상게임? 정소연의 '벽지화'는 4차원의 세계를 2차원적 평면으로 추상화 작업을 한 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벽지화'는 일종의 '추상게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를테면 그녀는 실제적인 것에서 시간을 생략하고, 공간에서 깊이를 생략해 '평면'으로 추상한다고 말이다. 그녀는 추상게임을 통해 다양한 '비(非)실제적' 세계들을 표현해 놓았다. ● 정소연이 추상화한 깊이 없는 회화세계는 가능성들로 열려져 있다. 그런데 그녀가 인공적으로 표현한 새로운 평면세계는 '개념들의 피부'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추상게임'은 구체적인 것으로부터 추상화한 전통적인 의미의 회화의 끝에서 구체적인 것을 향하는 움직임이란 말인가? 그녀의 추상게임은 필자를 유혹한다. 그러면 필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위험천만한 '조합게임'이란 말인가? ● 당 필자, 어디로 튈지 도통 알 수 없는 정소연의 신작에 대해 조합해 보겠다. 그녀는 가상공간에 머물지 않고 실재 공간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실재 공간'은 실재/가상이라는 구분을 넘어선 또 다른 실재 공간인 작품을 의미한다. 그런데 관객은 정소연의 실재 공간 속에서 당황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평평한 바닥이라고 생각한 곳을 직접 걸으면 기울기가 있는 바닥이라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두말할 것도 없이 당신은 '헛발'은 내딛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견디어내야만 할 것이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본다'는 것은 시각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온몸의 행위이다. 따라서 정소연의 작품은 관객에게 온몸으로 감각하고 체험하기를 유혹하게 될 것이다. 관객은 그녀의 작품에 '빠지게' 될 것이다. 관객이 작품에 빠진다는 것은 '견딘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면 관객이 작품 속에서 견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 머시라? '면벽공심'은 아직 멀었다고요? ■ 류병학

Vol.20190410d | 정소연展 / JEONGSOYOUN / 鄭素姸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