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사-625

신학철展 / SHINHAKCHUL / 申鶴澈 / painting   2019_0412 ▶︎ 2019_0606 / 월요일 휴관

신학철_한국현대사-6.25(통곡)_캔버스에 유채_220×130.5cm_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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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9_0412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30am~06:30pm / 월요일 휴관

인디프레스_서울 INDIPRESS 서울 종로구 효자로 31(통의동 7-25번지) Tel. 070.7686.1125 www.facebook.com/INDIPRESS

한국 현대사의 악몽과 소원 성취의 이중주: "신학철 – 한국현대사 625"에 부쳐 ● "꿈을 꾼다는 것은 꿈 꾼 사람의 아득한 과거 상황으로 돌아가는 일종의 퇴행이고, 어린 시절과 어린 시절을 지배했던 충동과 당시 사용했던 표현 방식의 재생이다. 이러한 개인적인 유년기의 배후에서 계통발생학적인 유년기, 즉 인류의 발전에 대한 인식 가능성이 열린다. 실제로 개인의 발전은 우연한 생활 환경에 영향 받고 축약된 인류 발전의 반복이다."1)

신학철_한국현대사-6.25(고난의 대장정)_캔버스에 유채_220×122cm_2018

1. 신학철 회화의 비판적 성격과 놀이적 성격의 이중 구조 ● 신학철의 이번 개인전은 어떤 면에서 프로이트가 규명했던 꿈의 기이하고 상반된 특성들을 모두 그대로 실현하고 있는 것 같다. 「한국현대사 - 6.25」 등 다수의 흑백의 역사화들이 공포스럽고 불쾌한 내용을 담은 <불안-꿈>처럼 보인다면, 「여명」 같이 강렬한 키스씬을 담은 유채색 그림들은 밝고 환한 <소원-꿈>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 프로이트는 저 유명한 『꿈의 해석』(1900년)에서 꿈은 <꿈-사고>, <꿈-작업>, <꿈-내용>이라는 3 가지 상이한 수준이 연결된 특수한 절차를 통해 만들어진다고 말한다. 어떤 무의식적 소원을 가진 <꿈-사고>는, 전위-응축-동일시-혼합의 방법을 이용한 <꿈-작업>에 의해 변형되어, 기이한 형상(사물-표상)들의 복합체인 <꿈-내용>으로 표현됨으로써 그 소원을 성취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프로이트는 모든 꿈의 <내용은 소원 성취이고 동기는 소원이다>(160쪽)라고 요약한다. 물론 실제 꿈들 중에는 소원 성취보다는 오히려 공포스럽고 불쾌한 내용이 많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불쾌한 꿈, 불안-꿈 역시 해석 후에는 얼마든지 소원 성취로 드러날 수 있다"(178쪽)고 말한다. 그 이유는 심리 장치의 두 심급 중 첫 번째(무의식의) 심급에서는 꿈을 통해 표현되는 소원을 형성하고, 두 번째(전의식의) 심급에서는 불쾌하지만 동시에 첫 번째 심급의 편에서는 소원을 성취시켜 주는 무언가를 포함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67~169쪽). 심지어는 소원이 거부되는 꿈을 통해서도 현실에서 못다 이룬 소원을 표현한다고 한다(193쪽). 이 경우 <꿈은 (억압되고 억제된) 소원의 (위장된) 성취이다>(206쪽). ● 신학철의 그림에 프로이트의 꿈 이론을 일 대 일로 들이대려는 것은 억지스러워 보일 수 있다. 그림과 꿈 양자 모두 어떤 무의식적인 소원을 심층적인 동기로 한다고 해도, 단적으로 신학철의 그림은 고도로 비판적이고 의식적인 데 반해 꿈-작업은 무의식적이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별 그림을 그리는 작업 전체가 의식적인 주의 집중의 산물이 아니라는 점, 나아가 여러 그림들 간의 상관관계로 시야를 넓혀 보면 한편의 시나리오나 소설처럼 의식적으로 일관된 플롯에 의해 구성되기 어렵다는 점에서 회화적 작업은 얼핏 보기와는 달리 의식보다는 무의식적인 요소에 의해 더 많이 지배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그런데 프로이트는 「창조적인 작가와 몽상」(1908년)이라는 글에서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2) 소설과 희곡처럼 고도로 의식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를 요구하는 문학의 창작자조차도 "결국 놀이를 하는 아이와 동일한 것" 즉, "몽상적 세계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고", "현실과 자신의 몽상적 세계를 선명하게 구분하면서도 창조 행위에 엄청난 양의 정서적 움직임을 쏟고 있다"(83쪽)는 것이다. 그 증거 중 하나로 그는 "놀이라든지 행위Spiele라는 단어는 희극Lustspiel, 비극Trauerspiel이라는 말들 속에 들어 있고, 또 이러한 극들을 공연하는 사람, 즉 배우를 지칭하는 샤우스필러Schauspieler라는 말 속에도 모습을 나타내고"(83쪽) 있다는 사실을 들고 있다. ● "인간의 정신적 삶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는 한 번(필자: 어린 시절의 놀이를 통해) 경험한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없다는 사실 또한 알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우리는 그 어느 것도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대상을 바꿀 뿐이다……이제 그는 <놀이>를 하는 대신 자신의 몽상을 따라가는 것이다……흔히 <비몽사몽>이라고 하는 꿈을 꾸는 것이다……이 사실을 사람들은 오랫동안 모르고 있었고 따라서 그 중요성을 낮게 평가해 왔을 뿐이다."(84~85쪽) ● "요컨대 문학 창조는 백일몽과 마찬가지로 그 옛날 어린 시절의 유희의 연장이면서 동시에 대체물"(93쪽)이라는 것이다. 물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프로이트가 말한 이 점을 낮게 평가하면서, 문학이 진지한 작업이 아니라 어린 시절의 유희의 연장이나 백일몽과 같은 것이라고 하면 화를 낼 지 모른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논지를 잘 따라가 보면 그의 주장에 공명하게 된다. 성인들은 유치한 놀이나 몽상에 거부감을 느끼거나 냉담하게 대하지만 이것이 창조적인 작가의 손에 들어가 변형되면 외려 즐거움을 주게 된다는 점을 부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94쪽). ● "한 개인과 다른 사람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수 많은 장벽들과 관련된 이러한 거부감을 넘어서서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이 기교 속에 아마도 진정한 시학이 존재할 것이다. 이 기교는 두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문학 창조자는 낮에 꾸는 꿈을 변형시키거나 베일로 가림으로써 자아 예찬이 주조를 이루는 꿈의 성격을 약화시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몽상을 통해 순수하게 형식적인, 다시 말해 미학적인 즐거움을 제공하여 독자들을 유희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다……이것을 우리는 흔히 <상여 유혹>이라거나 혹은 <사전 쾌락>이라고 불러 왔다."(95쪽) ● <상여 유혹>이란 마치 실제 일인 것처럼 상상의 상황 속으로 들어갈 때 덤으로 얻어지는 즐거움이며, <사전 쾌락>이란 육체의 움직임이 수반되지 않는, 행동 이전에도 가능한 즐거움을 뜻한다(95쪽). 이렇듯 문학은 <상여 유혹>과 <사전 쾌락>을 제공함으로써 어린 시절의 놀이가 주었던 즐거움을 대신한다. 그런데 그림은 <언어-표상>에 의한 관념의 가공과 변형이 특징인 2차과정(고차의식)보다는 <사물-표상>의 지각과 표현이 지배하는 1차 과정(1차의식)의 주도 하에 창작되고 수용되기 때문에 문학보다 더 직접적으로 어린 시절의 놀이나 낮에 꾸는 꿈에 근접한다고 할 수 있다. 신학철의 그림을 프로이트의 꿈 이론에 입각해서 해석해 보는 것이 억지가 아니라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신학철의 작업의 주된 부분을 이루는 흑백 역사화들은 캄캄한 배경 속에서 크고 작은 사람들의 산 모습과 죽은 모습이 서로 얽혀 만들어내는 커다란 리바이어턴 같은 괴물 형상이 전경화되는 방식으로 그려져 있어 처음 보는 순간 고통스러운 <악몽>과 생생하게 대면하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하지만 고통스러운 감정들을 불러일으키는 내용들은 다른 한편으로는 통쾌한 현실비판을 통한 카타르시스 효과와 더불어, 정교한 회화적 묘사와 이질적 이미지들의 압축과 전위에 바탕을 둔 강렬한 몽타쥬 형식을 통해 관객들에게 거부감을 넘어서 시각적 표상들의 자유로운 유희를 즐기게 해준다. 또 이 악몽의 세부 내용들에는 화가가 살면서 겪었던 다양한 개인적 경험들에 "흔히 <시대의 각인>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자국들을 덧붙인"(88쪽) 역사적 내용들이 중첩되어 있다. 이렇게 개인사와 사회사가 겹쳐져 있기 때문에 이 악몽 같은 형상들의 비판적 재현은 프로이트가 "재현 행위의 세 순간 사이를 부유한다"고 말했던 몽상의 시간적 특성을 잘 보여준다. ● "정신 활동은 현재의 인상에 밀착되어 있는데, 이 현재의 인상이란 개인이 품고 있는 어떤 큰 욕망을 일깨우는 한 계기이기도 하다. 이 계기에서 시작해 우리의 정신 활동은……대부분은 현재의 인상으로 인해 일깨워진 욕망이 충족되었던 어린 시절의 경험으로 되돌아간다. 정신 활동은 이때 미래와 연관된 상황을 창조해내는데, 이 상황이 욕망이 충족되는 상황, 더 정확히 말해 낮에 꾸는 꿈 혹은 몽상인 것이다……시간을 가로지르는 욕망의 도화선이 요컨대 과거-현재-미래라는 세 시간대를 꿰뚫고 있는 것이다……이제 우리는.…..욕망이 어떻게 현재의 계기를 이용해 과거의 모델에 바탕을 두고 미래의 그림을 그리는지 알게 된다"(88~89쪽) ● 세 시간대를 부유하는 몽상을 가동시키는 이 욕망이 끔찍한 형태로 좌절될 경우 문제가 발생한다. 이때 몽상은 악몽으로 변한다. "몽상은 이성적인 정신 활동의 마지막 단계이면서 또한 환자들이 종종 호소해 오는 고통스러운 증후들의 전 단계이기도 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병으로 이어지는 넓은 측면도로가 갈라지게 된다."(89쪽) 이런 맥락에서 보면 개인적-역사적 악몽의 재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신학철의 「한국현대사」 연작들은 일종의 개인적-집단적 <신경증적 불안>의 증후군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2014년 신학철의 회고전 서문 「역사적 트라우마를 가로지르는 휘파람 소리」에서 그의 작품의 이런 측면을 한국 근현대사의 역사적 트라우마와 끈질기게 대결하는 치열한 <회화적 정신분석>이라고 해석한 바 있다.3) ● 당시에는 주로 <비판적 대결>의 측면에 초점을 두었기에 그의 작업의 내적 동기를 이루는 <신경증적 불안>의 요소를 포함한 몽상의 <소원 성취적> 측면을 깊이 헤아리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번 전시에서는 바로 신경증적인 불안의 측면과 더불어 어린 시절의 소원 성취적인 성격의 꿈과 같은 내용들이 전경화되고 있기 때문에, 그의 비판적 회화의 주조를 이루어온 <역사적 트라우마에 대한 비판>과 그 이면에 내재한 <창조적 몽상의 놀이>라는 측면, 양자의 관계를 새롭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신학철_한국현대사-6.25_캔버스에 유채_194×113cm_2019

2. 비극적 악몽과 끝날 수 없는 애도의 우울증 ● 신학철의 이번 전시 주제는 <6.25>다. 6.25전쟁은 분단한국 최대의 비극이자 20세기 동서 냉전의 기원이 된 세계사적 비극이었다. 그런데 동서냉전은 1990년대 초에 해소되었지만 한국전쟁은 아직까지도 휴전 중일 뿐 종전되지 않고 있다. 지난 70여년 간 이 엇갈린 이중의 리듬이 휴전 후 한국현대사의 궤적을 비극적으로 왜곡시킨 원천으로 작용하면서 아직도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1990년 이전까지 한국현대사가 휴전과 냉전의 이중족쇄에 묶여 있었다면, 1990년 이후에는 휴전과 북미 간 전쟁위험이라는 새로운 이중족쇄에 묶여 시달려 왔기 때문이다. 물론 최근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종전협정과 평화협정 체결이 논의되고 있지만, 2019년 2월 제2차 북미정상회담 결렬에서 드러났듯이 이 문제가 해결되려면 많은 난항이 예상된다. 그러나 이 문제의 대외적 해결만큼 중요한 과제는 70여년 간 이중족쇄의 구속으로 발생한 대내적 문제의 해결이다. 이 후자의 문제는 – 마치 해방이 되었다고 해서 친일문제가 해결되지 못했던 것처럼 - 전자가 해결된다고 자동으로 해소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신학철의 이번 전시는 바로 이중구속에 의해 대내적으로 누적된 사회구조적 적폐를 공시적인 틀 속에 전체적으로 압축해 내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신학철_한국현대사-6.25_캔버스에 유채_194×135cm_2019

이런 방식으로 구조적 적폐를 공시적으로 형상화하는 작업이 그의 화력에서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1980년대 이래 그의 「한국현대사 연작」은 역사적 사건들의 연대기를 그리는 일반적인 역사화의 방법과는 달리, 서로 다른 시간대의 주요 사건들을 하나의 공시적인 구조 속에 몽타주 하는 방식을 취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출품작 중에서 한 가지 새로운 지점은 <연기>를 몽타주의 기본 형식으로 삼는 일련의 작품들이다. 작가에 의하면 이 연기 형상은 담배 연기가 위로 솟아오르는 형태에서 차용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형상이 죽은 자들의 이미지와 연결되면 장례의식에서 피우는 향의 부정형적인 움직임을 연상시킨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런 연상작용을 매개로 한 여러 작품들이 여순반란 사건과 6.25 전쟁의 희생자들 및 피란민들의 형상을 구비구비 휘감아 승천시키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말하자면 이 연기 형상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선택한 <애도>의 형식인 것이다. ● 신학철이 북미간 종전협상이나 남북 평화협상이 거론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이런 작품을 선보이는 것은 지난 70년 간 분단과 한국전쟁으로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애도>가 온전히 이루어진 적이 없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휴전과 냉전의 이중족쇄가 짓누르는 동안 상당수의 희생자들(특히 전쟁 직전에 시작하여 전후까지 지속된 제주4.3학살의 희생자들이나 4.3학살을 반대하여 일어난 여순반란 사건의 희생자들)은 무소불위의 반공주의의 잣대에 의해 지워져 공식적인 애도의 대상에서 배제되어 왔었다. 애도를 통해 슬픔을 극복하는 과정이 배제되거나 억제되면 슬픔은 깊은 우울증으로 전환되어, 외부로 향해져야 할 공격성이 내부로 향해져 자기 고문이 심화되고 자아는 빈곤해진다. 이들의 유가족들은 말하자면 살아 있지만 살아 있는 것이 아닌 삶을 살아 왔던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분단과 전쟁을 통해서 (친일에서 친미로 배를 갈아타면서) 지배권력을 독점해 온 세력들은 억압과 착취와 수탈로 배를 불리며 무소불위의 폭력을 행사해 왔다.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전두환, 노태우 등이 공식 처벌의 대상이 되었지만 이들은 곧 풀려났고, 최근 <5.18 망언>에서 드러나듯이 이들은 아직까지도 희생자들과 지난 역사의 고통을 우롱하고 있다. ● 물론 이들이 이런 만행을 버젓이 저지르는 이유는 70년간 대자본과 결탁하여 권력을 휘둘러 온 반공/냉전/친일 수구세력들이 이들의 배경을 든든히 받쳐주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2016~17년 촛불혁명과 문재인 정권의 등장으로 기세가 상당히 꺾이기는 했지만, 수구세력들은 여전히 <태극기 부대>를 앞세워 발악을 하며 기득권 방어에 열중하고 있어 정세의 변화가 무색하게도 과거의 악몽을 새롭게 일깨우고 있다. 실제로 "이데올로기에는 역사가 없다"는 알튀세르의 말처럼 이들 수구세력(과 태극기 부대)의 정신적 뿌리인 반공/냉전/친일 이데올로기는 스스로 변화할(반성할) 줄 모른 채 영원한 지배를 추구하기 때문에, 희생자들과 역사의 깊은 상처에 매번 새로운 상처를 덧입힌다.

신학철_한국현대사-6.25(망령들)_캔버스에 유채_220×130.5cm_2018

신학철의 이번 흑백의 역사화들은 이들의 시대착오적 발악에 대한 비판적 조명과 희생자들에 대한 깊은 애도를 마치 새끼줄을 꼬듯이 결합했다가 분리시키는 방식으로 재현하고 있다. 양자가 결합된 작품들에서 수구세력들의 뻔뻔한 작태는 희생자들의 슬픔을 짓누른다. 그러나 「한국현대사 – 질곡의 종말」에서는 이승만에서 박정희, 전두환과 노태우를 거쳐 김영삼, 이명박, 박근혜, 홍준표, 김진태, 나경원 등에 이르는 수구 정치 세력들과 이들의 이데올로그들(조갑제, 지만원 등)의 희화적 계보학이 제시된다. 이를 통해 역사적 지식이 부족한 관객들도 한국 현대사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 깊은 우울증과 비극을 야기한 장본인들의 권력의 계보 전체가 청산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알아볼 수 있게 된다.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계승되어 온 권력의 뿌리와 줄기와 잎새의 연결망을 하나의 형상으로 재현한 이 사진 콜라주는 6.25 전쟁을 전후로 70년간 누적되어온 구조적 적폐의 청산 없이는 역사적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는 진정한 애도가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운다.

신학철_한국현대사-6.25(이태골의 총살형)_캔버스에 유채_130×162cm_2019

3.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변증법 ● 사회구조적인 적폐와 그 문제의 역사적 연원을 함께 시각화하는 점에만 집중했다면 이번 전시에 그다지 새로운 점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 신학철은 6.25 당시 자신의 유년 시절의 경험에서 시작하여 미래의 소원 성취로 나아가는, "현재의 계기를 이용해 과거의 모델에 바탕을 두고 미래의 그림을 그리는"(프로이트) 화가 자신의 욕망의 형상을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다. 유화 「한국현대사 – 6.25 이태골의 총살형」(2019년)에서 – 6.25 때 화가의 고향 마을(김천시 감문면)에서 인민군 부역자로서는 유일하게 처형 당했다는 – 아버지의 죽은 모습을 보고 울고 있는 소녀는 바로 화가의 동네 친구였다고 한다. 소녀의 시선을 화가의 시선과 겹쳐 보게 되면, 관객은 흑백의 사진과 문자로만 이해하던 한국전쟁의 추상적인 기억에서 벗어나 공식적 애도에서 배제되어 온 희생자 유가족들의 험난했던 삶의 궤적을 구체적으로 가늠해 보게 된다. 그러나 시선을 돌려 「갑돌이와 갑순이」(2019년)의 화면을 보면, 나물 캐는 젊고 예쁜 갑순이가 누군가 뒤따라 오는 인기척을 눈치 채고 옆을 흘기자 급히 나무 뒤로 숨어 엿보는 갑돌이의 움츠린 시선과 마주치게 된다. 이 두 그림을 연결해 보면 관객은 마치 소년 화가를 들뜨게 했던 에로스가 앳된 소녀 친구를 덮친 무시무시한 타나토스와 마주쳐 꽁꽁 얼어 붙어 버린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이렇게 해서 숲과 마을을 오가며 자유롭게 뛰어 놀던 화가의 소년 시절의 에로스는 이후 한국 현대사를 뒤덮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던 것이다. ● 오십 년 가까이 지속된 흑백의 역사화의 긴 우회로를 거쳐 불현듯 화면에 다시 등장한 이 대조적 장면을 휴전선의 굵은 철조망에 매달려 애틋한 입맞춤을 하는 남녀와 백두산 천지를 배경으로 상반신을 벗은 채 열정적 키스를 하는 남녀의 모습을 그린 다른 두 그림, 「여명」(2018년)과 「소원 높이 치솟다」(2018년)와 연결해 보면 이 네 개의 그림들은 일련의 영화적 시퀀스와 유사한 이야기 구조를 이루게 된다. 시대의 폭력 앞에서 얼어 붙었던 에로스가 타나토스의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상대를 찾아내서 사랑의 결합에 도달함으로써 자신의 오랜 소원을 성취한다는 꿈 같은 이야기 구조가 그것이다. ● 이런 이야기 구조는 유치한 신파조와 같아 세련된 이들에게는 거부감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여기서 다시 예술 창작은 미학적인 기교를 통해서유치함에 대한 거부감을 넘어서게 하면서, 모든 사람의 어린 시절의 못다 이룬 무의식적 소원을 성취시켜주는 역할을 한다는 프로이트의 날카로운 통찰을 환기해 보자.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이 유치한 에로스의 꿈 이야기야말로 역사적 트라우마와 끈질기게 대결해온 신학철의 <회화적 정신분석>을 떠받쳐온 근원적인 무의식적 동력이라고 볼 수 있다. 또 끔찍한 폭력을 휘둘러 민중을 착취하고 수탈해온 지배권력의 갖은 악행을 흑백의 이미지로 재현해온 「한국현대사」 연작은 이 무의식적인 동기의 성취를 억압하고 왜곡시켜온 역사적 악몽의 재현이 된다. <악몽은 (억압되고 억제된) 소원의 (위장된) 성취>라는 프로이트의 해석에 따르자면, 무시무시한 흑백의 악몽과 같은 「한국현대사」 연작의 이미지들은 <억압되고 억제된 에로스>가 타나토스에 의해 참혹하게 수탈당하고 학살당하는 역사적 과정이라는 겉모습에도 불구하고 결코 소멸되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남아 자신의 소원(권선징악)을 마침내 성취하고 마는 <불안-꿈>의 전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실제로 겉으로는 타나토스에 의해 얻어터지면서도 속에서는 소진되지 않는 에로스의 끈질긴 모습의 <부분적> 재현을 이전의 「한국현대사」 연작들, 특히 「한국현대사 - 갑돌이와 갑순이」 (1998~2008년)의 세부에서 찾아내기는 어렵지 않다. 그런데 이번 전시에 출품된, 촛불이 가득 찬 광화문 광장의 한 가운데에서 어깨를 마주잡은 남녀의 누드 형상이 불쑥 솟아오른 배치 구조를 보여주는 「한국현대사 - 광장」에서는 타나토스에 대한 에로스의 승리가 <전면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 여기서 한 가지 일반적인 오해, 즉 프로이트의 에로스 개념을 오해하여 그를 <범성욕주의자>로 간주하는 그릇된 관점을 넘어설 필요가 있다. 프로이트는 초기에는 자기보존본능과 종족보존본능의 대립, 자기애와 대상애의 대립만을 고려했지만 후기에는 이 대립 모두를 에로스(생명 본능) 내에서 벌어지는 대립으로 간주하고, 에로스와 대립하는 다른 본능으로 타나토스(죽음 본능)을 내세웠다. 이 과정에서 에로스 개념은 성적 충동에 제한되었던 초기의 리비도 개념의 좁은 틀을 넘어서 "언제나 더 큰 통일을 이루고 이를 유지하는 것, 즉 애착"(즉 인력)이라는 개념으로 일반화되며, 타나토스 개념은 "연관을 해체하여 사물을 파괴하는 것"(즉 척력)으로 일반화되었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 개요』(1938년~미완성)에서 모든 행위는 에로스(인력)와 타나토스(척력)의 조화와 대립 작용으로 나타나기에, "먹는 행위는 섭취하려는 최종 목적에서의 대상 파괴이고, 성행위는 내밀한 통일의 의도를 지닌 공격"(419쪽)이라고 말한다.

신학철_쇠뿔이_캔버스에 유채_116.5×90.5cm_2018

"두 가지 본능의 조화와 대립 작용으로 인해 삶의 다양한 현상이 일어난다. 생명체의 영역을 넘어서 우리의 이 두 가지 기본 본능의 비유는 비유기체에서 지배적인 인력과 척력이라는 대립쌍에 이른다. 본능들의 혼합 비례의 변화는 가장 확실한 결과들을 가져온다. 성적 공격이 더 강하게 추가되면 애인은 강간 살인범이 되고, 공격적 요소가 아주 감소하면 그는 소심해지거나 불능이 된다."4) ● 인력과 척력의 적절한 비율은 개체들이 각기 자율성을 유지하면서도 사랑과 협력을 발전시킬 수 있는 공존의 열쇠인 셈이다. 이 비율이 깨지면 한편에서는 도착적인 파괴가 다른 한편에서는 과도한 위축이 발생한다.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함께 변화하는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관계들의 역동성 때문에 인력과 척력의 비율은 고정될 수 없다. 마치 낮과 밤의 주기나 계절의 주기, 경기순환의 주기와 유사하게 에로스의 비율이 상승하고 타나토스의 비율이 하락하거나 그 반대 방향으로 비율이 상승하고 하락하는 시기가 주기적으로 교차하는 리듬이 발생한다. 삶의 주기가 낮과 밤, 계절의 주기와 대체로 일치했던 전-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 주기의 진폭이 크지 않았기에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교차 리듬은 주기가 길고 진폭은 작은 안정적 형태를 취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잉여가치의 빠른 축적을 위해 인간 역량과 자연 자원을 빠르게 소진시키며 사회적 삶의 모든 영역에서 경쟁 압력을 높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평균적으로 에로스의 비율은 급격히 낮아지고 타나토스의 비율은 급격히 상승하게 된다. 지난 50여년 동안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속도로 초고속 압축성장을 이룬 한국 자본주의에서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비율은 기형적인 형태를 취할 수 밖에 없었다. 신학철의 「한국현대사」 연작의 그로테스크하고 공포스러운 형상들은 바로 이렇게 미쳐 날뛰는 타나토스에 의해 파괴되어 온 에로스의 고통과 분노와 한이 얼룩진 일종의 정신적 지도라고도 할 수 있다.

신학철_한국현대사-DNA_캔버스에 유채_90.5×116.5cm_2018

압축성장을 하게 되면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긴 교차주기가 짧은 주기로 변화하기 때문에 <타나토스의 폭거>에 대한 <에로스의 항거> 주기도 잦아지게 마련이다. 분단 이후 거의 10년 단위마다 반복되었던 –세계사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민중항쟁의 주기(4.19혁명, 삼선개헌 반대 시위, 1979부마항쟁, 1980서울의 봄, 518광주민중항쟁, 610항쟁, 2002촛불시위, 2008촛불항쟁, 2016~17촛불혁명 등)가 이를 입증한다. 이 기간 동안 한국자본주의는 발전주의 시대를 거쳐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통해 1인당국민소득 3만불 시대에 도달했지만 그만큼 계급적, 젠더적, 생태적 모순과 위기도 증폭되어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변증법도 첨예한 형태를 취해 왔다. 하지만 세계자본주의의 위기와 전지구적 환경위기가 겹쳐지고 있는 오늘의 상황에서 타나토스의 위력도 정점을 치고 빠르게 약화되고 있다. 그에 따라 에로스의 힘이 새롭게 부상하기 시작하는 문명사적인 이행기가 도래하고 있다. 최근 1, 2차 북미회담의 개최도 이 같은 이행기의 도래를 알리는 징후의 하나인 셈이다. 물론 이행의 과정은 매끄럽지 않고 낡은 세력과 제도의 붕괴에 따라 다양한 고통을 동반하는 지그재그의 과정이 될 것이다. 그러나 밤이 물러가면 새벽이 올 수밖에 없듯이 <억압되었던 에로스의 회귀>는 필연적이다. ● 이렇게 역사적 파도의 교체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보자면, 신학철의 이번 전시는 <전-자본주의적 에로스>에서 시작하여 <자본주의적 타나토스의 상승과 하락>을 거쳐 <억압되었던 에로스가 회귀하는 여명>의 개시로 이어지는 일련의 시퀀스를 보여줌으로써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변증법적 전개과정을 형상화하는 데 역점을 둔 것이라고 해석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이 바로 프로이트가 말했던, "현재의 계기를 이용해 과거의 모델에 바탕을 두고 미래의 그림을 그리는" 욕망의 소원 성취를 보여주는 창조적 몽상의 전형적 범례가 아니고 다른 무엇이겠는가!

신학철_갑돌이 갑순이_캔버스에 유채_91×53cm_2019

4. 도상-에너지와 지표-물질성의 이중주로 작동하는 민중적 리얼리즘의 미학 ● 물론 신학철의 <악몽-그림>과 <소원-그림>은 단순한 몽상이 아니다. 백일몽의 모호한 성격과 달리 신학철의 욕망은 유화와 콜라주라는 물질적인 이미지화의 작업 과정을 통해 구체적인 <형상-이야기>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비축되었던 심리적 에너지들이 시각적 형상으로 변화하는 무의식적인 과정보다 더 많은 신체적이고 비판적인 의식적 에너지들을 쏟아 붓는 물리적 과정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신학철의 작업에서 프로이트가 <리비도(무의식적 에너지)의 경제학>(A)이라고 불렀던 것과 대응하는 <의식적 에너지의 경제학>(B) 사이에 일종의 이중주가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꿈에서 깬 상태에서 깊이 사고하게 되면 의식의 비판적 기능에 의해 무의식적인 표상의 흐름들이 중단되거나 거부되는 반면, 꿈을 꾸는 상태에서는 그와 반대로 비판적 사고가 중단되고 무의식적 표상들이 활발하게 움직인다. 이와 달리 신학철의 <악몽-그림>과 <소원-그림>은 프로이트가 말했던 "자신을 관찰하는 사람"의 자세와 유사하게 일차적으로는 비판적 사고를 억눌러 평상시에는 의식하지 못했던 표상들을 의식으로 떠올리지만, 이차적으로는 이를 다시 비판적으로 해석하는 이중 과정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 "깊이 사고하는 사람은 자신의 비판적 기능 또한 작동시키고 있다. 그는 떠오르는 생각들을 인지한 후 이러한 생각의 일부를 비판을 통해 거부하거나 즉시 중단시켜, 일단 시작된 사고의 흐름을 따르지 않는다. 또한 전혀 의식하지 않는 사고, 다시 말해 지각하기 전 억눌러 버리는 사고들도 있다. 그와 반대로 자신을 관찰하는 사람은 오로지 비판을 억누르기 위해 노력한다. 이것이 성공하면 평상시 파악할 수 없었던 수 많은 생각들이 의식에 떠오른다. 이와 같이 자기 인식을 위해 새로이 얻은 재료의 도움을 빌어 병적 관념과 꿈의 형성물들을 해석할 수 있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문제는 심리적 에너지(활발한 주의력)의 분배에서 잠들기 전의 상태와 (최면에 걸린 상태도 마찬가지이다) 일종의 유사성을 공유하는 심리적 상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잠이 들면서 표상들의 흐름에 영향을 끼치는 자의적인(물론 비판적이기도 한) 활동이 이완되기 때문에 (의도하지 않은 표상들)이 떠오른다…….그리고 의도하지 않은 상태에서 떠오른 표상들은 시각적, 청각적 형상으로 변화한다."(『꿈의 해석』: 140~141쪽) ● 이런 맥락에서 신학철의 작업은, 평소에는 억눌려 있던 무의식적 표상들을 자유롭게 떠올려 시각적 형상들로 변화하게 만들고, 이런 형상들 간의 복잡한 관계를 비판적으로 해석하는 방식으로 심리적 에너지를 재분배하는 <자기-분석적> 과정이자, 이 분석 과정 전체를 다시 <형상-이야기>로 재구성하는 절차를 거치는 <회화적 정신분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절차들은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에서 보여준 꿈의 형성 과정을 규명하면서 꿈을 해석하는 절차와 그대로 일치한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차이는 이 모든 과정이 신학철에게서는 – <언어-표상> 대신 – 철저하게 <사물-표상>의 물리적 운동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점에 있다. 이때 <사물-표상>의 물리적 운동은 두 가지 유형으로 분기한다. 하나는 흑백의 역사화와 콜라주에서 보이는 매끄러운 사진적 이미지의 연속적인 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유채색의 유화에서 나타나는 붓 터치가 두드러지는 회화적 이미지의 단절적 운동이다. 퍼스의 기호학에 의하면 전자는 <도상적(iconic)>인데 반해 후자는 <지표적(indexical)>인 측면이 더해진 것이다. 도상은 사물-표상의 <형상적 기호>라면, 지표는 사물-표상의 <질료적 기호>이다. 형상에서는 사물의 물질성이 휘발되어 에너지의 자유로운 운동 속에서 사물의 윤곽과 명암이 상대적으로 뚜렷해진다면, 지표에서는 사물의 무거운 물질성이 표상의 휘발성을 끌어당기면서 에너지의 운동이 둔중해지고 윤곽과 명암이 상대적으로 중첩된다. 상대성이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전자에서는 물질에서 에너지로의 전환이, 후자에서는 에너지에서 물질로의 전환이 두드러지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런 물리적 이중성은 어떤 사회심리적인 의미가 있을까? ●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에서 우리의 정신 기관이 마치 망원경의 여러 렌즈 조직들이 차례로 배열되어 있듯이, <지각 조직 기억 조직 기억조직1 기억조직2…..무의식 조직 전의식 조직 운동성 조직>으로 배열되어 있다고 가정하고, 꿈에서는 일종의 병풍과 같이 무의식 조직과 운동성 조직 사이에 서 있는 전의식 조직의 검열이 약화되면서 이 방향이 역전(퇴행)된다고 설명한 바 있다(624-628쪽). 그러나 그는 꿈에서만이 아니라 "의도적인 회상이나 평상시 사고의 부분적 과정들 역시 심리 장치에서, 어떤 복합적인 표상 행위에서 그 근저를 이루는 기억 흔적의 원재료로 거슬러 올라가는 길을 취한다"(630쪽)고 말한다. 이렇게 지각 조직을 향해 역진하는 방향을 따라가는 것이 정신분석이다. 그렇다면 지표 이미지와 도상 이미지의 관계에 대해서도 이런 구분을 적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각 조직이 물리적인 사물에서 시작한다면 무의식 조직은 그로부터 시작된 여러 가지 기억조직들의 표상들의 자유로운 운동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도상-이미지>가 무의식 조직에 가깝다면 <지표-이미지>는 기억 흔적의 원재료에 가깝다고 말이다.

신학철_여명_캔버스에 유채_90.5×116.5cm_2018

무의식적인 꿈의 작업은 무의식적인 시각-표상들을 압축하고, 전위시키고, 동일시하고 혼합하기 때문에 사물-표상의 물질성은 휘발되고 에너지의 자유로운 연상 운동이 부각된다. 악몽의 경우에는 이 연상 운동이 고통스러운 감정-기억의 응축과 함께 그로테스크한 <도상-이미지>로 압축되고 전위된다. 반면 기억 흔적의 원재료(원-형상으)로까지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는 분석 작업에서는 표상들의 휘발적인 연상 운동 이전의 사물-표상의 온전한 물질성이 훼손되지 않은 형태, 즉 <지표-이미지>로 포착될 수 있다. 이와 같은 심리적 장치들의 역진 운동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신학철의 흑백의 역사화/콜라주들이 매끄럽고 휘발성이 강한 <도상-이미지>로 구성된 악몽의 형태를 취하는 반면, 원색조의 소원성취 그림들은 물질성을 드러내는 <지표-이미지>로 그려지는지 그 이유가 좀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이렇게 소원성취를 이발소 그림처럼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원색조의 그림들이란 결국 유치한 놀이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이런 비판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신학철 자신은 오히려 유치한 이발소 그림의 형식을 자신이 앞으로 본격적으로 추구하려는 형식이라고 말한다. ● "실제로 삼각지에서 이발소 그림을 그렸던 사람들은 미술교육을 정식으로 받은 사람들이 아니고 그냥 자기 본능에 따라서 자기가 좋아하는 걸 그려내는 거에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강조했던 대중성에는 이발소 그림이 보여주는 본능적이고 자생적인 측면은 삭제되고, 그 대신 의식적으로 훈련된 측면이 두드러지게 강조된 것이 아닌가 싶어요. 어떻게 보면 이발소 그림에는 서양적인 이상향과 동양적인 이상향이 같이 녹아 들어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한데, 대중가요에서 '저 푸른 초원 위에'라는 가사가 그런 것처럼 개인적인 사소한 꿈 같은 것 말이지요. 물론 이발소 그림이 다 좋기만 하다는 것은 아니지요. 현실에서 너무 벗어난다는 문제가 있긴 하지요. 하지만 거기에는 비록 유치하다고 하더라도 지식인 작가들의 작품 속에는 찾아 보기 어려운 따뜻한 꿈 같은 것이 정성스럽게 녹아 들어 있다고 생각해요. 나중에 어릴 때 마을에서 청년들과 아이들이 야밤에 벅적대면서 동네를 돌아다니며 마음껏 뛰어 놀던 그런 세계를 이발소 그림의 형식으로 그려서, 많은 사람들에게 선물하고 싶다는 작은 소망도 가지고 있습니다."5) ● 프로이트에 의하면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놀이를 숨기지 않는 반면, 어른들은 자신이 빠져 있는 몽상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숨기려고 하면서 그런 몽상을 지극히 개인적인 자신만의 내면적 삶으로 여겨 마음 속에만 품고 있게 된다고 한다(「창조적 작가와 몽상」: 85쪽). 이런 간극을 드러내면서 프로이트는 아이들의 개방적이고 원초적인 놀이와 현실원칙으로 무장된 성인들의 숨겨진 내면 세계를 연결해줄 수 있는 공개적인 통로를 예술에서 찾는다. 예술 창작의 기교, 즉 "한 개인과 다른 사람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수많은 장벽들과 관련된 이러한 거부감을 넘어서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이 기교 속에 아마도 진정한 시학이 존재할 것"(「창조적 작가와 몽상」: 94~95쪽)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예술(적 정신분석)은 수많은 장벽에 막혀 있는 개인들의 무의식적 소원 성취(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의 에로스적 결합이라는 소원)를 정교한 미학적 형식을 통해 연결해주는 사회적 통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 물론 마음껏 뛰어 놀던 아이들의 밝은 놀이와 현실원칙에 매달릴 수밖에 없고 수없이 좌절을 겪은 성인들의 어둠 속에 묻혀 있는 무의식적인 소원 성취를 연결하는 미학적 형식은 이발소 그림의 형식처럼 단순하기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명과 암의 콘트라스트를 연결해야 하기에 이 형식은 원하든 원치 않든, 희망과 절망, 기쁨과 고통의 상반된 측면을 함께 엮어내는 형식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신학철의 이번 전시가 원색의 <지표-이미지>와 흑백의 <도상-이미지>의 이중주로 드러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동시에 그의 개인적 소원 성취의 열망이 유토피아를 꿈꾸어 왔던 사회적 소망의 오랜 전통과 연결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흔히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사회적 관계를 무시하는 개인심리학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프로이트는 「집단 심리학과 자아 분석」(1921년)이라는 글에서 이를 정면으로 거부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 "개인 심리학과 사회 심리학 또는 집단 심리학 사이에는 언뜻 보아 중요한 차이가 있는 듯 싶지만, 좀 더 면밀히 검토해 보면 뚜렷한 차이가 거의 사라진다…….개인 심리학이 개인과 타인 간의 관계를 무시할 수 있는 경우는 드물며, 그것도 예외적인 상황에서나 가능하다. 개인의 정신생활에는 타인이 본보기나 대상이나 조력자나 적대자로 끼어들게 마련이다…….따라서 개인 심리학은 처음부터 사회 심리학이기도 하다. 한 개인이 부모와 형제 자매, 사랑의 대상, 주치의 등과 맺고 있는 관계 – 사실상 지금까지 정신분석적 연구의 주요 대상이었던 모든 관계 –는 사회 현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6) ● 그러므로 한국 근현대사의 폭거와 악몽에 시달리면서도 여기에 위축되지 않은 채 부단히 항거하며 전진해 나가는 <갑돌이와 갑순이의 러브 스토리>라는 장치를 통해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회화적 정신분석을 통해서 실현해 보려는 신학철의 개인 심리학은, 1943년 생인 그가 유년기부터 다양한 가족 관계와 사회적 관계를 통해 마주쳐온 조력자들과 적대자들 간의 사회적 갈등과 투쟁의 역사이기도 한 한국 현대사의 지난했던 과정을 함께 헤쳐 나온 민중적 소원 성취의 궤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회 심리학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개인 심리학과 집단 심리학을 분리시켰던 당대의 학문적 경향을 비판하면서 개인 심리의 무의식적 갈등과 집단 심리의 무의식적 갈등을 내적으로 연결시키고자 노력했던 프로이트와 유사하게, 신학철도 흑백의 휘발성 이미지(도상-이미지)로 압축한 「한국현대사」 연작과 유채색의 터치와 물질성이 두드러지는 이미지(지표-이미지)로 그린 「갑돌이와 갑순이」의 러브 스토리를 이중주의 형식으로 그림으로써 자본-국가-제국주의의 폭력에 맞선 민중의 항거와 희생의 역사를 함께 겪어 왔던 자신의 개인사의 분노와 열망을 내적으로 연결하려고 시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이렇게 개인사와 사회사가 서로를 비추고 있는 이중주의 골격은 이십 여 년 전부터 시작했으나 여전히 완성되지 않은 「한국 현대사-갑돌이와 갑순이」(1998~2008년)의 전개 과정에서 이미 제시된 바 있었다. 그 작품은 들에서 일하다가 헤어지게 된 갑돌이와 갑순이가 서로를 놓치지 않으려고 꽉 부여잡은 두 팔이 엿가락처럼 늘어지는 장면이 도입부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 출품된 「갑돌이와 갑순이」(2018년)에서 노란 저고리를 입은 갑순이는 산나물을 담은 바구니를 한 손에 든 채 예쁜 붉은 치마를 날리며 숲 속을 사뿐히 걷고 있고, 더벅머리 갑돌이는 그 뒤를 좆는 은밀한 사랑 놀이를 하고 있다. 아마도 작가의 어린 시절 소원 성취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을 꿈 같은 이 장면에서 거칠지만 시원스럽게 칠해진 붓 터치들의 지표-이미지가 바람을 일으키듯 그려내고 있는 배경의 나무들과 바닥의 풀들은 은밀한 시선으로 연결된 두 남녀의 고양된 에로스에 생명력을 더해주고 있다. 생명이라고는 모두 지워진 흑백의 역사화의 도상-이미지의 차가움과 대조될 때 거친 붓 터치들은 사라졌던 에로스의 기억-흔적을 더 강렬하면서도 애잔하게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물론 누구나 한 번쯤은 가져 보았을 어린 시절의 그 아름답던 사랑 놀이와 그와 일체를 이루던 살아 숨쉬던 자연적 배경은 모두가 덧없이 사라져 버린 것들이다. 그러나 프로이트가 「덧없음」(1916년)에서 말했듯이 "그런 덧없음만이 오히려 더욱 새로운 매력을 우리 삶에 부여하는 것이 아닌가?"(23쪽) ● "아름답고 완벽한 그 모든 것이 소멸과 쇠퇴의 길로 나아간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우리 마음에 두 가지 서로 다른 충동을 불러 일으킨다. 하나는 그 젊은 시인이 느꼈을 것과 똑 같은 가슴 저미는 낙심이며, 또 하나는 그 명백한 사실에 대한 저항이다……모든 것은 소멸해 버린다는 고통스러운 인식이 진정 진실이 아니겠는가……그러나 나는……그 염세적인 시인의 견해에는 반박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 반대로 그러한 덧없음으로 인해 아름다움의 가치가 더 증대되는 것이 아닌가! 무상함은 한정된 시간 속에서는 바로 희소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닌가! 향유의 가능성에 어떤 한계가 있기 때문에 오히려 향유의 가치가 놓아지는 것이다…….모든 아름다움과 완벽함은 그것이 우리의 정서적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니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절대적인 시간의 길이에 구속되지 않는 것이다."7) ● 한때 존재하던 아름다움에 대한 기억-흔적을 살려내려는 부단한 노력은 단지 과거의 어느 시절에 머물기 위한 것은 아니다. 이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유년기의 사랑의 대상을 더욱 끈질기게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프로이트에 의하면, "현재의 계기를 이용해 과거의 모델에 바탕을 두고 미래의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욕망의 본질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자본과 국가와 제국주의의 광포한 타나토스에 의해 파괴되어온 인간과 자연에 내재한 생명력 넘치는 에로스의 기억 흔적을 온전히 회복할 때라야 온갖 차별과 착취와 수탈의 파괴적 에너지(타나토스)를 적극적으로 통제하여 인간과 자연의 건강한 신진대사를 통해 에로스의 건강한 성장을 촉진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의 밑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분단 70년의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밤이 지나가고 새로운 새벽이 동트고 있는 여명의 시대에 신학철의 이번 전시가 전하려는 역설적인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 심광현

* 각주 1) 지그문트 프로이트, 『꿈의 해석』, 김인순 옮김, 열린책들, 2018년 신판 35쇄, 637쪽. 2) 지그문트 프로이트, 「창조적인 작가와 몽상」, 『창조적인 작가와 몽상』, 정장진 옮김, 열린책들, 1996년 초판 1쇄. 3) 심광현, 「‘역사적 트라우마’를 가로지르는 휘파람 소리」, 『한국현대미술의 화제 작가, 신학철 전』 전시 도록, 김해문화의 전당 윤슬미술관, 2014. 5.13~6.29, 4) 지그문트 프로이트, 『정신분석학 개요』, 박성수/한승완 옮김, 열린 책들, 2013 재간 7쇄, 419쪽. 5) 신학철/심광현 대담, 「한국 근현대사의 역사적 트라우마와 회화적 정신분석」, 『민중미술, 역사를 듣는다 1』, 박응주/박진화/이영욱 편, 현실문화연구, 2017, 157쪽 6) 지그문트 프로이트, 「집단 심리학과 자아 분석」, 『문명 속의 불만』, 김석희 옮김, 열린 책들, 2009년 신판 7쇄, 73~74쪽. 7) 지그문트 프로이트, 「덧없음」, 『창조적인 작가와 몽상』, 정장진 옮김, 열린책들, 1996, 22~23쪽.

Vol.20190412e | 신학철展 / SHINHAKCHUL / 申鶴澈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