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본질을 찾아서: 벽경 송계일의 작품세계

벽경 송계일展 / SONGKYEIL / 碧耕 宋桂一 / painting   2019_0418 ▶︎ 2019_0630 / 월요일 휴관

벽경 송계일_군청빛 산영_종이에 수묵채색_49×134cm_2006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60506c | 송계일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9_0418_목요일_03:00pm

관람료 / 성인 2,000원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입장마감_05:30pm / 월요일 휴관

이천시립월전미술관 WOLJEON MUSEUM OF ART ICHEON 경기도 이천시 경충대로2709번길 185 Tel. +82.(0)31.637.0033 www.iwoljeon.org

마음의 눈으로 그린 자연: 碧耕 宋桂一의 작품세계 ● 20세기가 시작된 이래 한국의 미술은 급격한 서구화의 흐름 속에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조선시대의 오랜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는 수묵채색화도 예외일 수 없었다. 수묵채색화의 경우 지켜야 할 중요한 자산으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타파되어야 할, 개량되어야 할 구태舊態로 여겨지는 경향이 강했다. 회화에 있어서 서구적시각과 조형성을 우월한 것으로 여기는 이러한 시각은 20세기 후반 이래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하나의 흐름으로 지속되어왔다. 점차 수묵채색화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었고, 수묵채색화를 그리는 작가들도 재료 외에는 서구 미술의 주제, 시각, 표현방식을 따르는 것이 흔해졌다. ● 송계일이 회화 수련을 쌓고 화가로 성장, 활동하였던 것은 바로 이러한 분위기가 만한 시기였다. 그러나 송계일은 이러한 상황 속에도 시류에 휩쓸리지 않았다. 전통에의 끈을 놓지 않고, 이를 현대와 접목시키려는 다각도의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를 통해 신구新舊가 조화를 이룬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했다. 이 글에서는 이번 이천시립월전미술관 회고전의 출품작을 통해 송계일 작품세계의 흐름과 특징을 되짚어보고자 한다. ● 1950년대 말부터 1970년대에 이르는 시기는 그의 전체 화력畵歷에 있어서 모색기에 해당된다. 1959년 작 「모무暮霧」(도1)는 당시 20세였던 그에게 국전國展 입선의 영예를 안겨준, 회화 세계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그림으로, 서예적 필법과 사실적 구도를 적절히 융합한 견실한 화면을 보여준다. 당시 실경산수화의 일반적 경향을 따른 작품이긴 하지만 갓 성인이 된, 신인 중에 신인이었던 작가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구도와 경물의 배치, 선線의 강약 및 먹의 농담 조절 등에서 탄탄한 기량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묘사력은 이후 작품세계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벽경 송계일_모무暮霧_종이에 수묵채색_85×130cm_1959_전주 신흥고등학교 소장
벽경 송계일_생활_종이에 수묵채색_259.1×193.9cm_1964

몇 해 뒤에 그린 1963년 작 「생활」(도2)은 제12회 국전 특선작으로 송계일이 기존의 틀을 벗어나 새로운 조형성을 지향하였음을 보여준다. 아파트 건물을 기하학적인 직선 위주로 단순화, 변형시켜 그린 뒤, 다양한 톤의 먹과 담채를 칠했다. 전통적인 필법과 채색에 근거하되 당시로서 현대적인 아파트를 제재로 다루고, 이를 변형적인 구성으로 표현해냈다. 이는 장차 송계일의 작풍이 결코 전통에만 머무르지 않을 것임을 알려주는 신호탄과도 같았다. ● 그렇지만 이후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는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보다 「모무」에서 볼 수 있었던 산수화풍을 발전시켜갔다. 1976년 작 「여름산」(도3)에서 볼 수 있듯이 시각적 사실성에 근거한 풍경을 그리되, 이를 활달한 필치를 이용하여 역동적인 구성 속에 담아냈다. 다양한 농담의 변화를 보여주는 가운데에서도 조화로운 푸른 채색과 화면의 숨통을 트여주는 자연스러운 안개가 화면의 완성도를 높여주었다. 사실 이는 같은 산수화라고는 하지만, 초기작인 「모무」의 표현력과 성과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이처럼 그가 짧지 않은 기간 실경산수화에 매진하였던 것은 섣부른 변화는 설익은 결과를 낳을 뿐이며, 내 것에 대한 착실한 기반이 닦인 연후에야 새로움을 모색할 수 있다는 법고창신法古創新적 태도에 따른 것이라 생각된다.

벽경 송계일_추산영봉秋山靈峰_종이에 수묵채색_112×145cm_1984
벽경 송계일_산의 노을_종이에 수묵채색_130×194cm_1989_전북도립미술관 소장

이처럼 1970년대를 거치며 산수화를 통해 사실적 묘사력과 회화적 표현력을 두루 갖춘 송계일은 1980년대부터 본격적인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갔다. 1989년 작인 전북도립미술관 소장 「산의 노을」(도4)은 이러한 당시의 경향을 보여준다. 노을이 진, 붉은나무숲을 앞에 두고 구불구불 산의 능선이 펼쳐진 풍경을 그렸다. 풍경을 다루었다는점에서는 이전의 경향이 연결되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표현방식은 전혀 다르다. 산의경우 변형, 단순화시킨 선으로 능선을 그린 뒤, 준법은 배제하고, 진한 채색으로 표면을 칠했다. 전경에 있는 나무는 몇 차례 수직의 붓질로 그려냈다. 이전 작품들과 달리 시각적 사실성과는 거리가 먼 화면이다. 그렇지만 역설적이게도 잠시 그림을 응시하게 되면 이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노을 진 풍광의 '인상印象'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느끼게된다. 즉 이는 송계일이 대상의 눈에 보이는 현상을 넘어서 대상에게서 포착되는 느낌의 표현에 보다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화면이 조화로운 것은 작가의 구성력 덕분이다.

벽경 송계일_공간속의 음과 양_160.5×260cm_1999_전북대학교박물관 소장

1990년대에 작가는 더욱 커다란 진폭의 변화를 보여주게 된다. 전북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되어있는 1999년 작 「공간속의 음과 양」(도5)에서 볼 수 있다시피 화면은 비구상으로 변모했다. 이 작품은 고대 동아시아의 중요한 관념 가운데 하나였던 음양오행론陰陽五行論에 근거한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만물의 생성, 성장, 소멸이 음양과 오행에 따른 것이라는 이 이론을 인생의 진리로 받아들인 작가가 이를 작품을 통해 구현한 것이다. 화면 좌측 상단의 붉은 직사각형은 양을, 우측 상단의 파란 직사각형은 음을 상징한다. 화면 하단에 불규칙하게 자리 잡고 있는 12개의 작은 사각형들은 음양의 움직임에 따라 변화하는 만물을 그린 것이라 볼 수 있다. 마치 기포가 일어나듯 움직이는 것만 같은 연한 먹색의 배경은 이러한 변모가 멈추지 않고 있음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려는 것 같다. 형이상학적 관념을 독특한 구성력을 통해 시각화한 것이다.

벽경 송계일_설악의 장관_종이에 수묵채색_67.5×134.5cm_2006

송계일은 2000년을 기점으로는 앞서 보여주었던 다양한 작풍을 통합, 재구성하며 또 다른 변화를 모색했다. 산의 구체적인 형상성과 함께 산 자체의 본질 묘사를 추구하게 된 것인데, 2006년 작 「군청빛 산영」(도6)에서 이러한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화면은 우리가 먼 곳에 있는 안개 자욱한 산을 바라보았을 때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묘사 자체가 구체적이지도 세밀하지도 않다. 게다가 산의 하단부에는 눈이 시리도록 짙은 청색이 비현실적으로 펼쳐져 있다. 시각적으로는 사실적이지 않지만, 그 뉘앙스는 매우 사실적인 독특한 그림이 된 것이다. 이는 바로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집요하게 본질의 추구에 집착해 온 작가의 노력의 결과이다. 이러한 화면이 만들어진 데에 먹과 채색, 아교 등의 재료에 대한 수많은 탐구와 시행착오가 기반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벽경 송계일_금강산만물상소견_종이에 수묵채색_160×129cm_1999_우석대학교 소장

전주지방법원에 소장되어있는 2017년 작 한글 조형 시리즈는 작가의 새로운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 한글 자음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ㅈ, ㅊ, ㅋ, ㅌ, ㅍ, ㅎ을 주제로 1점씩, 총 14점을 그렸는데, 이전 작품세계의 다양한 표현방식이 수렴되어있어 주목된다. 「조형-ㅅ」(도7)을 보면 'ㅅ'의 형상이 흰 여백에 몇 차례 반복적으로 그려진 구성이다. 화면 상단에 있는 짙은 먹의 'ㅅ' 형상 위로 빨갛고 파란 직사각형이 자리 잡고 있는데, 각각의 뒤쪽으로 파랗고 빨간 띠가 길게 그려져 있어 각각이 'ㅅ'의 획을 긋는 듯 한 모습이다.

벽경 송계일_비취빛 산과 강_종이에 수묵채색_67.5×134.5cm_2006

이 빨갛고 파란 직사각형은 「공간속의 음과 양」에서도 볼 수 있었던 바로 그 양과음의 상징이다. 한글 역시 음양오행의 일부이니만큼 그 움직임에 따라 문자가 만들어지고, 사용된다는 의미를 담은 것으로 생각된다. 화면 하단에서부터 상단으로 뻗어 있는 'ㅅ' 형상은 바림이 있는 옅은 먹을 이용해 그렸는데, 작가가 산수화를 그릴 때 즐겨썼던 운무雲霧의 효과가 적용되어있다. 어찌 보면 이것은 'ㅅ'의 모습이지만 'ㅅ'이 아닌 산이기도 하다. 즉 근래에 작가가 요점적으로 그려온 산의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자연, 좀 더 폭넓게는 우주의 공간에 자리 잡고 있는 'ㅅ'의 형상이 되는 셈이다. 아마도 작가는 이러한 중의성重義性을 일정 부분 의도했을 것이다. ● 이렇듯 송계일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해왔다. 1950년대 말부터 오늘날까지 약 60년간 그가 걸어온 길은 그야말로 수묵채색화의 현대화를 위한 노력이었다. 전통과 현대, 구상과 추상, 동양과 서양, 수묵과 채색이라는 20세기 수묵채색화가 맞닥뜨린 여러 가지 길항적인 문제들을 자신의 방법론으로 헤쳐온 것이다. 이제 원로가 된 송계일이지만 아직도 그는 다양한 시도를 하며, 새로운 변화를 준비하고 있다. ■ 장준구

Vol.20190418e | 벽경 송계일展 / SONGKYEIL / 碧耕 宋桂一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