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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9_0620_목요일_05:00pm
2019 OCI YOUNG CREATIVES
작가와의 대화 / 2019_0703_수요일_07: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수요일_10:00am~09:00pm / 일,월,공휴일 휴관
OCI 미술관 OCI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45-14(수송동 46-15번지) Tel. +82.(0)2.734.0440~1 www.ocimuseum.org
빈 땅에 말 걸기 ● 우리는 도시에 살고 있습니다. 도시는 너무 익숙해져서 보이지 않는 것들과 너무 낯설어서 지워진 것들 사이에서 결여되었습니다. 도시의 욕망을 더듬으며 누군가는 너무 익숙해져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다시 불러보기도 하고 누군가는 너무 낯설어서 지워진 것들을 상상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상실에 대한 우울증적 숭배를 앞세워서 때로는 시대의 우울을 선언하면서 말입니다. 현재의 이미지는 그렇게 다시 한번 더 숭배와 선언 사이에서 결여되었습니다 . 그렇다고 실상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시선이 그렇게 냉철하지도 회의적이지도 않습니다. 어떠한 정치적 올바름도 우리의 삶을 위로할 수 없듯이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찌꺼기는 가장 안락하고 가장 은밀한 앙금으로 가라앉아있습니다. 발터 벤야민은 사물의 아우라가 상실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의 시선은 모든 사물의 이미지에 남겨진 찌꺼기라는 말을 했지요. 주어진 이름을 배반하고, 통속적인 연상에 반항하며, 집단적 맹목을 거부하는, 시선은 인간의 찌꺼기이다 . 인간에게 남겨진 마지막 한 방울이 조금은 그대로 내버려질 수 있도록 행여 벌거벗겨져 있더라도. 그 사고의 여백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시작합니다. 으산한 가을이었던 것 같습니다 . 모래가 많아서 물이 늘 모래 밑으로 스며 내려간다고 해서 불렸던 모래내. 이제 막 들어선 아파트의 시멘트 냄새를 뚫고 다다른 곳은 아직은 다세대 촌으로 남아있는 남가좌동 시장 골목 지하의 작은 전시장이었습니다. 눅눅한 기운이 낯설지 만은 않았으나 조금 일찍 도착한 터라 가까운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던 작가에게 저는 어딘가 이방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작가는 공사장 펜스를 화폭으로 옮겨왔습니다. 그녀의 몸도 야밤의 도시 한복판으로 잠입했습니다. 한쪽에는 공사장 펜스가 (실제 용도는 옆으로 미뤄놓은 채) 그 프레임만 남아 무성한 인공 섬을 다소곳이 감싸고 있었습니다. 다른 한쪽에서 작가는 두 팔을 쭉 뻗어 도시의 미래를 지지하는 간판들에 써늘한 개입을 시도합니다. PARADO× HOTEL . SANGDO DOOSAN WE’VE NOTHING . 문득 간판을 수집하고 있던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작업실의 한 구석이 떠오릅니다. 그 곳에서 학생이었던 김라연은 무언가를 소중히 담고 있었고 반면에 무언가를 소심하게 탓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그 학생의 행위를 수집이라고 하고 그 학생의 태도를 저항이라고 한다면 수집과 저항은 과연 함께 할 수 있을까요? 그 사이에 무엇이 잠식하고 있는 것일까요? 대단한 스펙타클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학생이었던 김라연의 수집과 저항 사이에서 일어나는 고요한 소요 를 비로소 만난 곳은 양재동의 한 아파트 상가의 지하 주차장이었습니다.
화창한 가을의 아직 지하 주차장이 들어서지 않은 비교적 오래된 아파트였던 것 같습니다 . 지상주차장이 꽤 넉넉하게 동과 동 사이에 펼쳐져 격자를 그리고 있었으니까요. 아파트 상가에서 전시장으로 내려가는 입구를 찾아 헤매다가 발견한 것은 화물용 대형 엘리베이터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자동차용 엘리베이터였나 봅니다. 화창한 가을 햇살에 비해 썰렁한 지하의 기운에 숨기운이 싸해졌고 정면 어디선가 넘쳐 흘러내릴 듯 고여있는 물 웅덩이가 곧게 서있었습니다. 녹는 땅 . 그린 것과 보여지는 것의 오차를 경험할 때 그 간극에는 일종의 시적 여백이 만들어집니다. 그 여백에서 보는 이는 낯선 시각으로 다른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시각적으로 공간적으로 감각적으로 낯선 이미지와 이야기들의 파편들은 (상반된 것이 아니라) 불일치 되면서 결여됩니다. 마치 공사장 흙더미에 묻혀져 사라져버렸을 이름 모를 식물들의 이름을 조사하고 학명을 부르기 대신에 자신만의 문장으로 이름 부르듯이. 혹은 독일의 한 시골 길에 피는 꽃 이름을 조사하고 둥근 덩어리에 새겨 물감을 칠하고 낯선 친구들의 손을 빌어 흰 캔버스에 굴리듯이 . 침전된 도시 경험은 언어의 파편이 만들어내는 여백으로 은폐됩니다. 어쩌면 도시 경험은 은폐될 운명에 처해있는 우리 현재의 이미지일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작가는 이름 모으기와 이름 부르지 않기를 동시에 작동시킵니다. 수집(이름 모으기)과 저항(이름 부르지 않기) 사이에 일어나는 고요한 소요란 어쩌면 작가로부터 일어나는 것이 아닌 보는 이에게 출현하는 사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2018년 봄 신한갤러리 광화문에서 김라연은 양재동 스페이스 엠의 전시장을 다시 불러옵니다. 어느 미술가가 점점 쌓여가고 있던 쓰레기를 치우고 생활오물과 무관심 속에 묻혀있던 곳을 전시장으로 개조했고 작가는 그 곳에서 『사라진 것들의 이름을 부르다』를 보여줬습니다. 안타깝게도 스페이스 엠이 건물주인의 요구로 더 이상 전시장으로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작가는 그 공간에서 전시했던 장면을 그림으로 남기고 신한갤러리 광화문에 재배치하는 『하나 그리고 두 개의 전시』를 준비했습니다. 포크레인으로 밀어버린 빈 땅에 도시 기표를 위한 무덤을 만들어가듯이 도심 한복판에 사라질 운명의 공간을 다시 불러오고. 대지를 절단하는 펜스를 열어 봉긋한 봉우리를 만들고 무한한 지평선을 열어가듯이 생명을 다한 공간들 사이로 숨결을 불어넣습니다. 명명된(naming) 파라다이스를 접어 희망의 소명(calling)을 다 하듯이 김라연은 스스로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떠도는 이미지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019년 봄 흐드러지게 만개했던 배꽃이 거의 떨어져가던 이화여자대학교 교정을 지나 김라연의 작업실에서 저는 빈약한 흰 봉우리를 만났습니다. 어쩌면 누군가의 에베레스트 산일 수도 있고 누군가의 알프스 산일 수도 있겠습니다. 잔털이 많은 낙타 등처럼 휜 빈 땅을 뚫고 올라오는 날이 선 봉우리는 밝고 희망찬 내일을 숭배하지도 그렇다고 희망찬 내일을 선언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흰 봉우리는 꽃이 다 떨어진 배나무의 앙상한 가지처럼 벌거벗었습니다. 동시에 흰 봉우리는 불려진 이름과 결별(disconnected)하면서 자신의 소명을 찾습니다. 그러고 보니 사고의 여백을 준비하는 제 마음은 벌거벗은 흰 봉우리에서 시작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김라연의 빈 땅은 벌거벗은 이미지들과 언어들을 위한 공간인 모양입니다. 그 빈 땅에 출현하는 이미지와 언어는 그렇게 냉철하지도 회의적이지도 않습니다. 다만 가장 안락하고 가장 은밀하게 가라앉은 앙금을 위한 작은 우주를 만들어냅니다. 그 작은 우주는 빈 땅에 말 걸기로 시작됩니다. ■ 배은아
Vol.20190623c | 김라연展 / KIMRAYEON / 金羅緣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