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인칭시점

김민주_김태연_이다솜_진영展   2019_0802 ▶︎ 2019_0830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기획 / 나형민

정부서울청사 입주기관 공무원 및 청사 방문객 대상 전시로 관람대상이 한정되어있습니다.

정부서울청사 문화갤러리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209(세종로 77-6번지) Tel. +82.(0)2.2100.4711 www.chungsa.go.kr

인간은 항상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한다. 그러나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단순히 자기 내면만의 자각을 통해서 고민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자아에게 주어진 공간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 자아는 온전한 독립된 개체로서의 1인칭이 될 수도 있지만, 외부의 영향 아래에서 나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내가 아닌 타자와 같이 3인칭의 모습이 되기도 한다. 공간(空間)이란 '아무것도 채워져 있지 않은 빈 곳'이라는 의미이지만, 우리 주변의 공간은 개개인의 흔적, 추억, 애증으로 켜켜이 메워져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 빈 곳에 자아의 주체성으로 채워져 가고 있다기보다 주어진 공간에 자신의 모습을 짜 맞추어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현대문명의 진화가 우리에게 매우 수월한 공간의 편의성과 접근성을 부여했지만, 언제인지 모르게 모두 동일한 핸드폰을 쓰고, 같은 커피를 마시고, 비슷한 기사를 보며, 유사한 패션으로 공간을 배회하게 한다. 예전에는 각 지역마다 독특한 색깔이 있었고 고유한 문화가 있었는데, 오늘날 개개의 공간들은 공동화(共同化)되고 있는 듯하다. 공간 속에서 인칭이란 '어떤 행동이나 행위의 주체가 누구인가'의 문제이다. 소위 1인칭이란 그 행위의 주체가 '나'임을 스스로 지칭하는 말이지만, 오늘날 자아는 1인칭이기보다 마치 앵무새와 같이 누군가의 행동을 따라 하고 복제하는 모습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진영 작가는 제기하고 있다. 진영 작가는 앵무새 머리를 한 형상을 통해서 현대인들의 반복과 모방심리를 표현한다. 따라서 앵무새 탈은 시시각각 매체를 통해 전달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남들이 하는 그대로 따라 하고 행동하는 현대인을 상징한다. 그래서 세태비판적이지만 역설적이게도 표현된 앵무새의 탈을 쓴 인간들은 매우 유희(遊戲)스럽다. 공원에서 달빛을 즐기며 누워있거나 험난한 세파와 같은 파도 중에서도 튜브를 타고 즐기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 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느덧 스스로 1인칭임을 망각하게 만드는 외적 자극에 무던해진 현대인의 초상을 연상시킨다. 마치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의 『멋진 신세계』와 같이 조작된 유토피아에 이미 적응해 버린 타자화된 자아의 모습은 즐거운 듯하면서도 매우 세기말적이다.

진영_the middle of the night_장지에 채색_162.2×130.3cm_2018
진영_tornado effect 2_장지에 채색_140.3×140.3cm_2013
진영_tornado effect 3_장지에 채색_140.3×140.3cm_2013

김태연 작가는 이러한 현대문명과 자아와의 이질감 또는 초과학문명 속의 인간성 상실 등을 신체를 통해 표현한다. 한지(韓紙)에 한의학의 인체도와 같이 혈의 자리를 잡아가듯이 연결된 점과 선들은 디지털 문명의 관계를 '연결 혈자리'라는 정체성으로 드러내고 있다. 동양의학에서는 기(氣)의 원활한 흐름이 건강한 신체를 상징하듯이 오늘날에는 SNS와 같은 온라인 속에서의 활발한 관계성이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시켜 준다. 가상공간 속에 과잉 생산된 자아의 모습에 만족하고 기쁨을 느끼지만, 결국은 포샵된 얼굴이 실제의 얼굴이 아니듯이 신체라는 몸을 담고 있는 현실세계와 가상세계 간의 간격을 자각하게 된다. 그래서 김태연 작가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헐벗었고, 마치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몸을 해부하듯이 관계성을 위해 껍데기를 들추어내고 있다. 그러나 한지에 전통적인 방식으로 쌓아 올린 채색법과 수묵의 필치는 적나라한 해부도를 관찰하는 듯한 징그러움보다 상당히 은유적이며 정화된 방식으로 오늘날의 세태를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그림 자체가 매우 아날로그적이면서도 디지털적인 주제를 다루는 이질적인 분위기를 잘 형성하고 있다.

김태연_무간공유_장지에 채색_132×162cm_2019
김태연_무간공유_한지에 채색_110×125cm_2018
김태연_무간공유_한지에 채색_133×170cm_2018

자아의 의식이든 신체이든 이를 한정하고 제약하는 공간은 인간에게 매우 디스토피아적이다. 현대의 도시란 산업화·문명화를 통해 이룩한 유토피아이면서도 빈부의 격차, 계층의 격차, 권력의 격차로 누군가에게는 디스토피아이다. 80, 90년대에는 어려운 현실에도 불구하고 내일에 대한 희망과 추억, 삶의 애환이 깃든 도시의 골목길은 노스탤지어의 공간이었지만, 지금의 젊은 세대들에게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현실 공간이다. 전통적인 동양화에서는 그림자를 표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현상보다 항구적이고 영원한 대상을 추구한 동양예술정신으로 볼 때 그림자는 너무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1인칭인 자아들이 불변의 항구적 가치보다 가변적인 가치를 추구하게 된 것은 '불안' 때문이다. 도시에 드리워진 그림자의 가변성과 같이 진로에 대한, 인생에 대한 불안은 예측불가능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가변적인 도시는 오늘날 대다수의 1인칭이 직면한 현실이며 거주지이다. 더욱이 도시에 거주하는 예술가에게 도시 공간은 중요한 작업 소재이다. 이다솜 작가는 인적이 없는 도시 공간 속에 순간적으로 반영되고 사라지는 그림자를 표현한다. 이내 사라질 환영임에도 불구하고 고정태로서의 흔적을 화폭에 남김으로써 공간의 실재성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그래서 그 공간은 내가 거주하고 있는 낯익은 공간으로서의 정감이 서려 있기도 하고 낯선 타지와 같이 텅 빈 공간으로서 쓸쓸함을 자아내기도 한다.

이다솜_오후_장지에 수묵채색_117×91cm_2019
이다솜_그림자의 시간_장지에 수묵채색_227×292cm_2017

대다수의 현대인은 도시에 기거하면서도 항상 지평 너머 새로운 세계를 갈망한다. 여기(here)가 아니 저기(there)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이상향을 꿈꾸면서 유희하고자 하는 소망은 김민주 작가의 작품 속에 잘 반영되어 있다. 김민주 작가의 작품 「휴가」에 등장하는 건물은 매우 낯익은 전형적인 도시 속 집의 모양새이다. 그러나 그 집의 내부에는 산수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리고 그림 한 켠에 정박하여 있는 조그마한 나룻배는 우리를 태우고 계곡을 거슬러 올라 도원(桃源)으로 안내해 줄 것 같이 대기하고 있다. 이러한 휴가 또는 이상향에 대한 욕망은 도시의 현실을 뚫고 나올 듯이 건물의 한쪽 구멍을 통해 흘러넘친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현실이라는 공간 속에서의 일탈과 자유라는 흐뭇한 상상을 도출하고 있다.

김민주_어락원_장지에 먹, 채색_110×156cm_2008
김민주_휴가(休家)_장지에 먹, 채색_135×230cm_2014

각각의 작가들이 담아내고 있는 화폭이라는 공간 속에 투영된 다 인칭의 모습은 시대 인식과 다르게 다행스럽게도 우울하지 않다. 한편으로는 세기말적이고 세태비판적인 내용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머러스하다. 그것은 아마 예술가만이 가진 고유한 혜택 때문일 것이다. 작가들은 누구도 갖지 못한 자기만의 유일한 공간(화폭)을 소유한 주인이다. 그래서 김민주 작가의 작품 속에 나오는 연못 속에 자유롭게 유영하는 반인반어(半人半魚)와 같이 자기만의 공간 속에서 와유(臥遊)한다. 당(唐) 대의 이백(李白)은 '산중에서 물음에 답하다.'라는「산중문답(山中問答)」이라는 시를 통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 어찌 산중(碧山)에 사는가 묻는다면 (問余何事栖碧山) / 웃으며 대답하지 않으니 스스로 마음이 한가롭다. (笑而不答心自閑) / 흐르는 물에 복사꽃이 떨어져 아득히 흘러가노니 (桃花流水杳然去) / 별천지(別天地)이지 인간 세상은 아니라네. (別有天地非人間) ● 각박한 공간 속에 살아도 자기만의 공간을 가지고 있는 예술가들에게 이토록 다른 세상을 그리워하면서도 왜 여기에 살고 있고 여기를 표현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빙그레 웃음 지을 것이다. 그것은 자아를 상실한 체, 3인칭으로서의 삶이 공간 속에 적응해 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 공간은 만만치 않지만 자기만의 별천지를 각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상자들도 작가들 각자의 별천지에서 같이 유희할 수 있는 또 다른 1인칭이 될 수 있어 예술은 즐겁다. ■ 나형민

Vol.20190803e | 4+1인칭시점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