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룡, 해남을 여행하다.

조성훈展 / CHOSUNGHOON / 趙城焄 / painting   2019_0803 ▶︎ 2019_0901

조성훈_Their favorite habitat is in the tropical and subtropical forests._ 리넨에 유채_60×60cm_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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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최 / 해남공룡박물관_행촌문화재단

관람시간 / 09:00am~06:00pm

해남공룡박물관 전라남도 해남군 황산면 공룡박물관길 234 기획전시실 Tel. +82.(0)61.530.5324 haengchon.or.kr

공허한 시대를 넘는 초연한 게임 ● 조성훈 작가는 1986년 태어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나라의 국운의 기세가 한여름처럼 뜨거웠던 때다. 작가의 유년기와 청년기는 이전 선배들의 삶과 비교할 수도 없이 원만했을 것이다. 하지만 원만한 시대를 보낸 사람일수록 근원을 알 수 없는 문제로 점철된 사람들이 있다. 당사자가 예술가일 때 더욱 그렇다. 딱히 신상에 문제가 없는데도 예술가의 내면은 방향을 알 수 없는 무형의 길로 이끌리곤 한다. 보통 예술가는 무언가 문제점을 안고 태어날 때가 많다. 시선의 초점이나 예민한 촉수가 사회를 향해 발달해있는 작가들이 많다. (우리의 선배들이 그랬다.) 아니면 내면의 내밀한 취향을 작업의 근간으로 삼는 작가들도 많다. (요즘 젊은 작가들이 그런 경향을 보인다.) 정체성을 물고 늘어지는 작가들도 있다. (수는 적지만 언제나 있었다.) 형식 자체에 매달리는 작가도 많다. (어느 시대나 이런 유형의 작가가 가장 많다.) 그런데 조성훈 작가는 유독 우리가 사는 시대 자체에 의문을 품었다. 그래서 조성훈을 유형화해서 분류하는 일은 무모해 보인다. 조성훈 작가는 진리가 소멸된 것처럼 보이는 이 시대 자체에 의문을 품었다. 이제부터 작가의 의문을 하나씩 짚어 가보자. ● 철학이나 사회학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첫 번째 질문은 '사유냐 존재냐'라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인간 주체는 사유를 통해 객관적인 외부 세계를 정확히 파악하는 능력을 지녔다는 믿음이 있다. 이렇게 믿는 사람들을 인식론자라고 한다. 반면 인간은 사회적 · 환경적 조건들에 의해서 특정되며 규정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사람들을 존재론자라고 한다. 전자는 사유 자체가 진리라고 생각하며, 후자는 인간의 사유란 것도 특정 시대의 특정 조건에 의해 결정되기에 우리는 사회적 존재라는 것이다. 조성훈 작가는 우리가 사회적 존재라는 사실을 미디어를 통해 드러낸다.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서 지구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과 소식들을 실시간으로 접한다. 놀라운 일이다. 동시에 미디어를 통해 접했던 사건과 소식들에 놀라우리만큼 객관적으로 아주 덤덤하게 반응한다. 작가가 이야기하고 문제점으로 생각해 둔 포석은 여러 가지이며 매우 정교하다. 몇 가지 지점을 우선적으로 파헤쳐 보자.

조성훈_Once upon a time, there lived three baby pig brothers._ 리넨에 아크릴채색, 유채_38×38cm_2019

행동 경제학에서 가격의 탄력성이라는 말이 있다. 어느 날 태풍이 와서 커피 농사가 망하고 커피가격이 두 배로 오르면 우리는 홍차나 녹차로 눈을 돌리거나 아예 마시지 않는다. 이때 가격 탄력성은 매우 높은 것이다. 반면 어느 날 메뚜기 떼가 습격해 담배가 두 배로 올랐는데도 사람들은 대체품을 찾지 않고 여전히 담배를 사서 피운다. 이때 가격 탄력성이 매우 낮은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감정의 탄력성이라는 말을 생각해볼 수 있다. 어떤 현상을 보고 느끼는 감정 동요의 폭이라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인터넷에서 떠다니는 뉴스나 이미지 등의 보도를 보고 우리는 매우 냉담하게 반응한다. 옆집 동네에 도둑이 들었거나 지인이 변고를 당하면 감정이 매우 큰데, 미디어를 통해서 접한 플로리다 연안의 태풍 소식에는 반응이 미흡하다. 가공할만한 폭풍의 피해 소식에 어째서 덤덤할 수가 있는가? ● 역사의 외부자와 내부자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현재를 산다. 과거는 기억으로만 남는다. 미래는 예상하고 기대할 뿐이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를 총체적 색채의 생생함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현재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반면 우리에게 과거는 무채색의 관념으로만 느낄 수 있다. 다만 우리는 과거를, 그리고 그것의 역사적 의미를 안다. 현재를 사는 우리는 역사의 내부자이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가 지니는 의미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현재의 역사에서 강한 감정의 탄력성을 갖는다. 우리의 감각과 감정이 생생하게 미친다. 반면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성찰하고 분석하면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다만 그 의미는 기억의 형태와 기록이라는 수단으로 보존할 수 있다. 우리는 조선시대의 외부자이다. 우리는 조선시대의 의미를 안다. 다만 생생한 생명력은 결여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 시대의 내부자이다. 우리 시대의 의미는 후세대들이 부여할 수 있을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미디어를 통해서 얻는 모든 정보들은 외부자로서 얻은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감정이나 정서가 직접적으로 탄력 받을 수가 없다. 말하자면 우리가 미디어를 아무리 들여다보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부자로서의 인상일 뿐이다.

조성훈_I racked my brains but could not remember the girl's name._ 리넨에 유채_20×20cm_2019

우리 시대를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다. 외부자로서의 삶을 강요 받는다는 것이다. 미디어를 생활화한다. 미디어는 외부자의 관찰 속에서만 존립할 수 있다. 그래서 텔레비전이나 인터넷 영상을 차가운 매체(cool media)라고 한다. 반면 회화는 가장 뜨거운 매체(hottest media)이다. 조성훈 작가는 차가운 매체 속의 이미지를 뜨거운 매체로 변환하는 마술사이다. 신문 사진 이미지와 인터넷 속을 떠도는 이미지를 보고 맥락을 잡는 것은 쉽다. 언어가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문 사진을 스크랩하거나 인터넷 사진을 언어와 분리시켰을 때, 이 이미지들은 전혀 알 수 없는 맥락으로 의미가 전도되거나 퇴락한다. 여기서부터 조성훈 작가의 게임이 펼쳐진다. 신문 기사나 인터넷에 유영하는 이미지들을 커팅해서 채색을 변형하거나 전혀 다른 이미지와 혼합하는 게임에 돌입한다. 커팅(cutting)과 믹싱(mixing), 즉 절취와 혼합의 이미지 게임은 차가움에서 뜨거움으로 이동하려는 작가의 초연(超然)한 의지이다. 어째서 초연한가? 그것은 치밀한 의도이면서도 생활로 다져진 습기(習氣)이기 때문이다. 작가 세대는 이미지를 주무르며 자란 이미지 조련사 세대이다. 그러면서도 디지털 시대의 이미지가 주는 차가움을 뜨거운 메타포로 바꾸려는 승부수를 던졌다. 조성훈 작가는 조련사인 동시에 승부사다. 어째서 그런가 짚어보자. ● 인류는 태초에 자연과 하나였다. 자연과 의식이 분리되지 않았다. 자연과 의식이 하나였을 때의 삶을 파라다이스라고 부른다. 이를 자연 안에 서서 존재한다고 해서 인시스트(in-sist)라고 말한다. 자연과 하나인 삶 속에서는 실재와 이미지를 구별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지는 마법이었다. 이미지는 주술 자체였다. 이미지라는 환영을 실재와 동등시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없었다. 자신이 유한하며 죽음으로 내몰린다는 의식도 없었다. 이러한 삶은 파라다이스 자체였다. 이미지는 삶을 뜨겁게 달궜다. 그런데 문자가 생겼다. 문자는 이미지를 비판하기 위해서 개발된 매체이다. 이미지로 주술을 거는 마술의 시대에 지도층은 주술사였다. 이미지를 비판하고 구술을 문자로 기록하면서 역사적 의식이 생겼다. 역사 의식은 시간 의식을 낳았고 시간 차이에서 비롯되는 인과관계를 인식하게 했다. 차츰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분리되었다. 실재와 이미지를 구분할 줄 알면서부터 밖으로 한 걸음 나아가 존재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를 자연 밖에서 존재한다고 하여 탈존(ek-sist)한다고 부른다. 이 시대의 지도층은 사가(史家)였으며 자연과 분리되어 탈존한 인간은 파라다이스를 잃게 된다. 그래서 문자의 다른 이름은 '실락원(Paradise Lost)'이다.

조성훈_Empty pattern (쥬시오렌지)_면직물에 아크릴채색_181.8×259cm_2019

탈존의 시기부터 자연의 시간적 인과관계를 인식했다. 그 후부터 이미지보다 문자가 더 강한 힘을 발휘했다. 문자는 이성과 같은 말이다. 이성적 사고는 말로 한다. 대화로 한다. 이성적 사고는 세계를 문자로 코드화시키는 작업이다. 특히, 숫자와 알파벳 코드로 세계의 현상을 풀었다. 이것이 공식과 방정식이다. 각종 공식과 방정식은 테크놀로지를 발전시킨 원동력이다. 테크놀로지는 발전하여 급기야 세계를 0과 1이라는 이진법으로 풀이하는 컴퓨터의 세계를 탄생시켰다. 컴퓨터와 테크놀로지는 따라서 언어, 즉 문자의 산물이다. 문자는 이미지를 비판하는 도구이다. 그런데 문자가 만든 테크놀로지가 또 다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이미지를 비판하는 도구가 이미지를 만든 것이다. 우리는 이를 디지털이라고 부른다. 이성은 차가운 것이다. 신문 이미지나 인터넷 이미지가 차가운 이유는 그것이 이성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원래 인간이 손으로 그린 회화나 양탄자의 문양은 뜨거운 것이다. 그것은 현실을 신의 세계로 바꾸는 마술 자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디지털 이미지는 본질적으로 모순 그 자체이다. 인간의 이성으로 신의 세계를 억지로 나타낸 현상이 디지털 문화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조성훈_Empty pattern (필로덴드론)_면직물에 아크릴채색_97×193.9cm_2019

조성훈 작가는 이미지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 이미지는 두 가지 종류밖에 없다는 사실을 꿰뚫고 있다. 작가는 뜨거운 이미지와 차가운 이미지의 차이를 생래적으로 인식한다. 전자는 태곳적부터 있었던 이미지고 후자는 역사가 짧다. 이러한 사실이 던지는 문제가 얼마나 절실한 것인지도 잘 알고 있다. 작가는 우리가 이 시대로부터 공허를 느끼는 이유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도 잘 안다. 첫째, 우리가 모순 자체에 속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둘째, 차가움에 익숙해져 감정의 탄력성을 잃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작가는 마지막 게임을 벌인다. ● 형태적 관점에서 이미지는 두 가지 밖에 없다. 하나는 수평적 이미지고, 또 하나는 수직적 이미지다. 수평적 이미지는 일상적 이미지다. 수평적 이미지는 2차원적이다. 우리가 발로 밟는 지면이 2차원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발로 디디어 서있는 지면은 2차원적이다. 우리의 발은 2차원의 평면에 맞닿아 살기에 수평적이다. 우리의 손은 시간과 공간을 관통하면서 움직인다. 4차원적이다. 그러나 4차원적인 손의 움직임도 여전히 2차원의 발의 지면에 근거를 두고 펼쳐진다. 그래서 우리는 수직적 이미지를 꿈꾼다. 우리는 하늘 저 높은 곳을 꿈꾼다. 지면에 구속된 운명은 지면과 반대되는 곳을 이상이라고 여긴다.

조성훈_Empty pattern (단델리아)_면직물에 아크릴채색_162×97cm_2019

독수리를 숭상하는 부족이 있다. 나무를 숭배하는 부족도 있다. 종교적 제식에는 어김없이 촛불이 등장한다. 동양의 오랜 노랫말인 '연비어약(鳶飛魚躍)'도 모두 수직적 이미지다. 솔개가 날며 물고기는 뛴다. 수직적 이미지는 수직적 시간을 상상하게 한다. 수직적 시간은 고양된 시간이다. 그것은 일상의 시간과 상궤를 달리 한다. 예술적 시간이며 시적 시간이다. 종교적 시간이며 에고가 불식된 나를 만나는 시간이다. 조성훈 작가의 거의 모든 작품은 수평적 이미지의 배경에 수직적 이미지가 극적으로 대비되어 중앙에서 세력을 이룬다. 차가운 이미지, 익숙한 이미지는 뜨거운 이미지, 생경한 이미지로 변환되어 수직적으로 상승한다. 조성훈 작가의 이미지들은 우리의 지면을 벗어난다. 현실적 지면을 벗어나 창공의 대기 속으로 상승하지만 동시에 지면에 재차 포섭된다. 흡사 날아오르면서 심지에 발목을 잡히는 양초의 화염을 닮았다. 양초는 우리의 몸이며 화염은 우리의 정신이다. ● 조성훈의 거의 모든 작품은 육체의 인력과 정신적 해탈이 벌이는 암투를 변증적으로 묘사한다. 작가의 그림들은 거의 모두 차가움과 뜨거움 사이에서 무한히 진동한다. 지면과 창공의 두 세계에서 비행과 추락을 거듭한다. 육체의 에너지와 정신적 균제 사이에서 치열하게 방랑한다. 카메라의 시간 의식과 회화의 주술적 힘 사이에서 모험을 지속한다. 그래서 나는 작가의 미래가 몹시도 궁금하다. ■ 이진명

조성훈_Empty pattern (비잔틴그레이)_면직물에 아크릴채색_130.3×162cm_2019

공룡박물관을 리서치하면서 공룡발자국부터 인간의 두개골, 현존하는 동물들까지 진화의과 지구의 역사가 전시되어있는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때문에 박물관을 방문할 때면 자연스럽게 시간여행을 떠올렸다. 한 번도 실제로 본 적 없는 공룡을 나는 어떻게 알고 기억하고 있을까.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매일 보는 모니터의 화면과 주변의 모든 것들이 정보의 축적으로 보였다. 현 시대의 테크놀로지와 무한한 네트워크 환경은 우리들을 시공간을 초월한 여행길에 올려놓았다.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이번 여행에서는 고생대부터 공룡이 살던 중생대, 신생대를 거쳐 그 다음까지도 엿볼 기회를 가져보고자 한다. ■ 조성훈

Vol.20190806d | 조성훈展 / CHOSUNGHOON / 趙城焄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