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BORDER

안성규展 / AHNSUNGKYU / 安盛圭 / painting   2019_0816 ▶︎ 2019_1029

안성규_경계(Border)19-41 이스탄불_캔버스에 유채_90×90cm_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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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상시가능

서울대학교 호암교수회관 HOAM FACULTY HOUSE 서울 관악구 낙성대동 239-1번지 Tel. +82.(0)2.880.8589 www.hoam.ac.kr

非일상으로의…, 여행!그리는 자, 안성규 ● 안성규의 작품을 보는 관객들 가운데 사진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을 자주 발견한다. ● 유화로 그린 그림이라고 하면, 바로 놀라움을 표시하면서 그림에서 물러섰던 한 발을 자동적으로 그 그림을 향해 다시 내디딘다. ● 그에게는 그리려는 풍경을 포착하고, 선정하고, 그리는 정확한 '눈' 같은 '손'이 있다. 그린다는 행위에 얼마나 성실한 지 그의 작품을 보면 바로 읽힌다. 그의 그림에 대한 성실함에는 시간의 축적이 있고, 그 축적의 겹겹에는 외로움도 있다. 안성규의 이러한 작업 세계가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해지면서 관객들은 작가의 정서에 공감하고 나아가 자신의 내면에 묻어둔 동일한 정서를 끌어내 스스로를 위로하는 선물 같은 시간을 가지는 것 같다. ● 먼 옛날 사진기가 없던 시절, 그리는 것에 충실했던 화가들의 후예 답게 능숙한 '손'의 소유자로서 작품 곳곳에 자신감을 뽐내고 있는 것 같아 미소가 입술을 비집고 나오기도 하고, 오랜만에 만나는 전통적인 회화를 보는 호사를 누리기도 한다. ● 그런데, 최근의 작품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붓의 터치가 무심하다. 어떤 부분은 따로 떼어 확대해보면 추상화라고 해도 될 만큼 무심하고 때론 거칠게 물감을 올려 화면이 두텁다. ● 그림을 그리는 가장 오래 된 재료, 유화 물감을 사용하는 그는 성실하고 능숙하게 그림 그리는 자 답게 선택한 풍경 특히 하늘에서 미묘하게 변하는 색들을 자연보다 더 자연스럽게 채색한다. ● 빛과 그 빛을 반사하는 대상을 얼마나 많이 바라보면 그런 색을 빚어 낼 수 있을까?

안성규_경계(Border)19-51 베니스_캔버스에 유채_100×100cm_2019
안성규_경계(Border)19-84 톨레도_캔버스에 유채_120×120cm_2019

첫 시선, 안성규의 하늘 ● 그의 작품에서 첫 시선이 머무는 곳은 역시 '하늘'이다. 아마도 마지막 시선을 거두는 곳도 '하늘'일 것이다. 또한 관객이 갤러리를 나서면서 자신의 기억을 저장하는 창고에 보관하려는 대상도 그의 '하늘'일 것이다. ● 안성규의 1997년 첫 개인전부터 하늘의 흔적이 보인다, 회갈색의… 하늘이기 보다는 공기의 밀도가 높아 숨쉬기 곤란한 대기가 거칠게 요동치고 있는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 이후 좀 긴 공백 기간이 지난 후 2005년 두 번째 개인전에서의 하늘은 아파트촌의 공허가 전이된 하늘, 도시의 우울이 번진 하늘 그리고 일어서다 현기증으로 어지러운 눈에 들어온 하늘에 자신의 정서를 반영하는 것 같았다. 그리려는 대상(사물 혹은 건물)을 시선 가까이에 둔 채, 하늘을 멀리 바라보던 그는 2006년 세 번째 전시부터 대상도 하늘도 멀리 거리를 두고 바라보며 관조하는 것 같은 화면 구도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안성규 특유의 화면 구도, 띠 모양의 얇은 도시 풍경과 화면을 다 삼켜버린 하늘을 비로서 만난 것이다. ● 그가 그리는 하늘의 시간은 다양했지만, 2013년부터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하늘의 표정이 달라진다. 밝아졌고 공허함이 사라졌다. 도시의 분주한 소리도 대가족이 북적대는 어느 가정의 저녁 식사 준비하는 시간처럼 따뜻하게 들린다. ● 그리고, 드디어 2019년 그의 작업실에서 만난 하늘은 서늘하고 단순했다. 싸늘한 느낌이 아니고, 차가운 느낌도 아닌 우리의 감성을 심연으로 가라앉게 만드는 기분 좋은 서늘한 공기를, 향기를 뿜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안성규_경계(Border)19-101 바라나시_캔버스에 유채_130×162cm_2019
안성규_경계(Border)19-102 그라나다_캔버스에 유채_130×162cm_2019

그리고, 다채로운 삶을 이야기하는 풍경들 ● 마치 관객을 호객하는 것처럼, 관객을 그림으로 끌어당겨 그림과 관객 사이의 공간을 좁히고 들여다보고 싶은 충동을 유발시키는 그의 작품 하단에 위치한 '미니어쳐' 같은 건물들과 도시들이 있다. ● 그는 갤러리를 마치 키가 6인치도 되지 않는 소인들이 사는 나라, '릴리퍼트'로 만들어버린다. 관객들은 소인국의 걸리버가 된 것 마냥 작은 도시 곳곳을 들여다보며 숨어 있는 소인들을 찾는 것처럼 작은 건물의 창이며, 문이며, 나무들이며, 숲을 시선으로 헤집는다. ● 관객들은 익숙한 거리의 간판을 읽어가며 그 장소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여행에서 지나쳤던 파리, 이태리, 인도에서의 추억을 소환하기도 한다. 그러다 마침내 그의 화면에 자리잡은 단색의 블루에 화룡점정처럼 찍힌 달에 대해 수다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안성규_경계(Border)19-104 프라하_캔버스에 유채_130.3×162cm_2019

마지막 시선이 멈추는 곳, 경계 ● 화가 안성규는 왜 '경계'라는 제목을 자신의 작품에 명명한 것일까? 그의 '경계'는 어떤 의미일까? ● 경계의 사전적 의미는 '사물이 어떠한 기준에 의하여 분간되는 한계' 혹은 '지역이 구분되는 한계'이다. 즉, 사물이든 지역이든 사상이든 두 개로 가르고 구분하고 한계 짓는 것이 경계이다. 그런데 화가 안성규의 '경계'도 사전이 내린 정의와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까? ● 하늘과 도시(건축물을 포함한), 자연과 인공, 과거와 현재 등 어떻게 표현하더라도 대비 혹은 대치하고 있는 두 성질의 것들이 그의 '경계'에서 만난다. 그의 경계는 가르는 '곳'이 아니라 만나는 '곳'이다. 한계 짓는 공간이 아니라 한계를 넘나들며 접촉하고 교류하고 변화가 생기는 아주 역동적인 그러나 작아서 숨겨진 공간이다. ● 그의 작품에서 읽히는 하늘과 도시의 시공간은 사실적인 묘사에도 불구하고 정확하게 규정할 수 없어 모호하다. 관객의 일부는 저녁 해가 지는 시간이라고 하고, 나머지는 새벽으로 읽는다. 헷갈린다. 낮인 것도 같고, 밤인 것도 같다. 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 모두 실재하는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시간의 모호성 때문인지 화면의 구도 혹은 대상을 보는 각도의 차이 때문인지 아니면 빛을 사용하는 화가 안성규의 선택 때문인지 동화 속 공간 같기도 하고, 게임 속 상상의 공간 같기도 하고, 과거의 잔상과 현재의 경험이 뒤섞여 스스로의 기억을 불신하게 만드는 몽환적 공간으로 변하기도 한다. ● 그의 풍경은 대상을 가장 사실적으로 묘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동화적이고 몽환적이다. 그래서인지 관객들은 그의 그림에 쉽게 이야기를 덧붙이게 되고 결국 화가 안성규 작품을 자신들의 기억과 추억으로 완성시킨다.

안성규_경계(Border)19-202 보광동_캔버스에 유채_194×259cm_2019

그리고, 화가 안성규는 여행을 한다. 일상을 벗어나 이질적인 두 대상이 만나는 새로운 '경계'를 찾아서… ■ 이소연

Vol.20190816e | 안성규展 / AHNSUNGKYU / 安盛圭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