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미완

박석호展 / PARKSOUKHO / 朴錫浩 / painting.drawing   2019_0821 ▶︎ 2019_0915 / 월요일,추석연휴 휴관

박석호

초대일시 / 2019_0822_목요일_05:00pm

寒園 박석호 탄생 100주년 기념展

후원 / 충북문화재단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주말_10:00am~06:00pm / 월요일,추석연휴 휴관

충북문화관 숲속갤러리 CHUNGBUK CULTURAL FOUNDATION 충북 청주시 상당구 대성로122번길 67 Tel. +82.(0)43.223.4100 www.cbcc.or.kr

충북문화관은 2013년부터 활동무대가 달랐어도 충북 미술인이 지니고 있는 기질과 특징이 드러나는 작업세계를 찾아 소개하는 '충북연고 작고작가 예술과 정신' 전시를 기획하고 있다. 이런 시도는 그동안 화단이나 대중들에게 제대로 각인되지 못하고 잊힌 작품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폭넓은 관점에서 미술사적 가치를 발견해 보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함이다. ●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충북연고 작고작가는 옥천 출신의 한원(寒園) 1) 박석호(朴錫浩) 이다. 박석호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유가족의 적극적인 협조로 기존에 발표되지 않은 미발표 유작품을 가지고 '완전한 미완'(完全한 未完)이라는 주제로 진행된다. ● 박석호는 1994년 작고 후 1996년 서울예술의전당이 야심차게 기획한 생존 시 조명 받지 못한 역량 있는 작가를 재평가하는「재조명작가전 시리즈」의 첫 작가로 선정되었다. 작품의 역량과 자기 시대의 정체성이 뚜렷했던 작가였지만 화단의 제도권 밖에 있었기에 생전에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던 만큼 일반인들에게 낯익은 작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화단 내부에서의 그의 존재감은 뚜렷했고 선비 같은 품성을 지니면서도 대쪽 같은 성정을 지닌 바른말 잘하는 사람으로 모두들 인정하고 있었다. ● 화가로서 박석호의 예술 활동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박석호는 당시 유행하던 국전 중심의 아카데믹한 그림을 추구하거나, 서구 추상표현주의 미술에 적극적으로 편승하지 않았다. 게다가 정치적 혼란 속에서 태동했던 80년대 민중미술이 표방하는 예술세계와는 다른 화풍으로 서민의 진실한 삶을 그려내며 중앙 화단에서 한발 물러나 자유롭게 독자적인 활동을 펼쳤다. 그런 그의 행보가 혹자로부터 진부하고 의식이 없다고 과소평가된 원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담담함이 박석호가 화폭 위에 구체적이면서도 형태가 해체되는 듯한 내적 표현이 강한 기법으로 여러 미술의 양상들을 녹여내며 한국적인 토속적 색채를 구사해 낼 수 있었던 원천이었다. ● 예술의전당 재조명전 이후 박석호는 2010년과 2015년에 충북에서 '어제의 작가전'(현청주시립대청호미술관)과 '충북연고 작고작가 예술과 정신조명' 전시를 통해 대표작품 등이 소개되었다. 지난 전시에서 박석호의 주요 작품을 보여주었다면 이번 '완전한 미완'전에서는 작품을 완성해가는 집요한 작가 정신과 작업의 '과정'을 보여주는 전시로 이뤄진다. 현장사생과 대상을 즉흥적으로 그린 드로잉부터 채색작업과 유화작업으로 옮기는 과정 하나하나가 완성된 작품으로 손색이 없지만 작가가 마지막까지 사인을 하지 않은 '미완'의 작품들이다. 그 중 미완성 유화 작품 60점과 완성작 10여 점, 인물 데생과 수채작품 등 90여 점의 드로잉을 선보인다. 작품을 완성해가는 과정 속에서 어디서 작업을 멈춰야 하는지 작가의 고민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미완의 작품들은 세월에 덧칠하듯이 중첩되어 우러나는 오묘한 색상들을 발산하며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그동안 어둠 속에 봉인돼 있던 박석호의 미완의 작품에서 보류된 시간성은 당대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을 연결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작가 의식의 흐름을 느끼게 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작가의 모든 역량이 작업의 과정에 함축돼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아마도 완성된 작품보다는 완성하지 못한 작품들에 더 많은 애착과 비중을 두고 평생 노력하는 태도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번 전시는 작가의 사인이 기입되지 않은 미완성 작품들이기 때문에 연대순으로 작업의 궤적을 따라가거나 특정 카테고리로 엮어내지는 않았다. 작가가 순간순간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파생되는 정신적 흐름과 미적 고뇌를 찾아보는데 의의가 있고 이는 작가의 삶과 예술 태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지점이 되리라 생각한다.

박석호_금강역사_종이에 목탄_65×49cm_연도미상
박석호_금강역사_캔버스에 유채_72.5×60.5cm_연도미상

근현대 한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박석호는 1919년 2) 충북 옥천에서 가난하지만 전통적인 선비적 기질을 간직한 손이 귀한 집안의 둘째로 태어났다. 어떻게 박석호가 미술에 입문했는지는 정확히 밝혀진 바 없으나 1944년에 철마(鐵馬) 김중현의 화실에 다니며 구상주의 화풍을 익히고 1946년 8월에는 유화작품 2점을 출품하여 앙데팡당 미술협회전에서 최고상인 협회장상을 수상하며 주목을 받았다. 이후 1948년부터 흑석동에 있는 남관 화실에 나가면서 여러 화우들 3) 과 조우하며 현대적 조형공간에 대한 미의식을 익히면서 자신만의 개성을 담는 길을 모색했다. 당시 살림 형편이 좋지 않았던 박석호는 1949년에 미군부대 PX에 다니는 동네부인의 소개로 부대에 크리스마스카드를 납품하면서 좋은 반응으로 경제적으로 형편이 나아져 그 덕택에 집까지 마련했다고 한다. 4) ● 이후 조금의 여유가 생긴 박석호는 예술가로서 꿈을 이루기 위해 1949년 만학도로 홍익대 미술학부 1기생으로 들어갔다. 대학 생활은 이듬해 한국전쟁으로 인해 중단되었고, 부산의 피난시절을 거쳐 다시 서울로 복귀하며 1953년에 대학을 졸업했다. 졸업과 동시에 조교를 시작으로 1961년 조교수로 임명된 후 안정되게 화업을 이어가다가 1966년 부당한 학교 인사에 항의하며 5명의 교수들 5) 과 함께 교수직을 사퇴하면서 화가로서 인생의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 박석호는 교수직을 사직한 후 종이와 재료를 살 돈이 없을 정도로 어려운 생활고를 겪기도 했으나 한눈 팔지 않고 더욱더 삶과 예술이 일치되게 일관된 태도로 작업을 이어갔다.

박석호_누드_캔버스에 유채_33×24cm_연도미상
박석호_누드_캔버스에 유채_53×41cm_연도미상

결과적으로 어떠한 당대 시류에도 영합하거나 치우치지 않는 자세로 독자적인 회화성 6) 을 획득했다. 작가가 추구하고자 했던 것은 단순히 자연의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통해 무엇을 담을 것인가'에 대한 실재의 문제로 당대 서민의 삶과 공감하는 감정을 회화적 대상으로 담아 한 시대를 명증하는 작품을 남겼다. 즉 화면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리얼리티가 아니라 내적 리얼리티를 추구하기 위해 작가는 무수히 반복된 마티에르로 당시 도식화된 조형요소들을 제거해 나가며 행위의 리얼리티와 대상의 리얼리티를 접목한 것으로 본다. ● 시기별 화풍 7) 을 보면 1950년대 작품이 소실돼 거의 알 수는 없으나 초기의 작품은 인물을 주로 그렸으며 생략된 윤곽선의 구상화 작업을 시도했다. 1960~70년대에는 한국적 조형요소를 탐색하는 시기로 부처, 석불, 탑, 부조 등 불교적 색채가 짙은 한국적 정체성을 보여주는 탐구의 시기를 갖는다. 1970년 중반부터 1980년대는 서민 생활상을 단순 대상의 재현이 아닌 삶의 애환을 증언하는 방법으로써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대변했다고 볼 수 있다. 화면을 장악하고 있는 청회색의 어두운 색깔은 밤도, 새벽도, 비오는 날을 재현한 것이 아닌 서민 사회상을 반영 8) 하는 것으로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박석호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실한 색이었다. 말년에는 '배의 작가'라고 불릴 만큼 박석호식의 독특한 마티에르를 표현하며 어두움이 강조된 배, 어촌, 포구, 바닷가 풍경을 소재로 주로 그리되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화풍으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했다.

박석호_포구_종이에 수채_38×46cm_연도미상
박석호_포구_캔버스에 유채_60.5×72.5cm_연도미상

평생 일관된 작업태도에서 무뚝뚝하고 반골적인 기질을 가진 작가의 유일한 낙(樂)이라면 늘 '바다'라는 그리움을 희망삼아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곳을 찾아 장기간 현장사생을 나가는 때였을 것이다. 그 때를 제외하고는 20여 년간 역촌동의 허름한 화실에서 항상 자리를 지켰다고 한다. 그림을 그릴 곳만 있다면 쉬지 않고 그린 드로잉 작업 량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화실에서 작업에 몰두하는 일 외에는 과욕을 모르는 외골수적 화가의 성품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 또한 작가는 한국적 미의식에 대한 관찰과 진지한 탐구를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실천하였고 후학들에게는 데생을 통한 기초의 중요성과 고전연구의 필요성을 누차 강조하며 맹목적 서양식 미술교육에 일침을 놓기도 하였다. 1970년대 박석호의 개인전에 주로 데생 전시가 많았던 점을 보면 데생에 대한 중요성을 얼마나 강조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그가 견고한 데생력을 지닌 화가임에도 불구하고 작품에서는 그 실력을 드러내는 대신 자유롭고 날카로운 해체된 선을 구사했다.

박석호_드로잉_1990년도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작품에서도 보듯이 박석호는 주로 검은 목탄의 굵은 선과 성냥개비를 이용한 묵선으로 짧은 시간에 강하고 예리한 선을 표현하거나 뭉개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화면 위에 선을 긋고 또 긋는 과정에서 형태를 위한 선이 파괴되고 도식화되지 않은 형체와 윤곽이 자유롭게 나타난다. 그 선을 바탕으로 수채나 다른 재료로 옮기고 마지막으로 유화 작품으로 완성시켜 나갔다. 드로잉에 사용된 목탄은 작가의 즉흥적이고 자유로운 감정을 표출하는데 적합한 재료였다. 이렇게 그린 스케치들을 벽면에 쭉 세워놓고 각각 캔버스 위에 그려나가면서 두터운 마티에르 위에 얹고 또 얹었다. 작가는 이렇게 마티에르를 얹어 가는 행위를 파괴하는 과정이라고 했다. 9) '파괴하고 또 파괴하다 보면 똑같은 그림이 절대 나오지 않는다'며 끝이 나지 않은 작업을 이어가며 한 작품을 완성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아들 박래헌씨는 회상한다. 10) ● 이렇게 평생 작업을 하면서 신조라 할 만큼 중요하게 생각한 회화관은 '작가의 모든 지성과 감성을 화면 속에 쏟아 넣는 것이 자신의 모든 것'이라고 강조하였으며 '시간이 가면 갈수록, 작업을 하면 할수록 고통을 느꼈다' 11) 고 언급한 것을 볼 수 있다. ● 그래서 평생을 두고 작업을 했으나 완성하지 못한 작품들이 유보되고 또 유보되어 시간이 지난 지금 더 농익어 의미 있게 다가온다. 아마도 작가는 작품의 '완성'보다는 그 과정에서 작가로서 희열을 느끼며 미완의 현재성에 한없이 다가가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박석호_귀로_캔버스에 유채_연도미상
박석호_어촌사람들_캔버스에 유채_33×45cm_연도미상

이번 전시에서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미완의 작품이 전시되는 순간 그 작품들은 이미 완성된 작품으로서의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새 생명을 얻으리라 생각된다. 많은 창작자들이 그러하듯이, 가난과 외로움 속에서 소신을 가지고 보이지 않는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박석호의 예술태도는 무엇보다 높이 평가 받아야 한다. ● 이번 전시는 세상의 명리와 거리를 두며 화면 앞에서 묵묵히 자기 예술에만 정진한 한 예술가가 치열하게 한 시대를 보낸 인고의 결과에 대한 조명이다. 박석호는 일관된 저항의 삶을 통해 평생 무욕의 기질로 강직하며 자기 성찰로 시류를 뛰어넘는 자유로움을 획득했고 우리의 건강한 토양을 닮은 진정한 색채와 무위한 정신을 남겼다. ■ 충북문화관

* 각주 1) 樹話 김환기가 박석호는 '너무 착하니 차게 좀 살라'고 寒園이라는 호를 지어주었다고 한다. 홍대시절부터 이어진 박석호와 김환기의 친밀한 관계는 김환기가 미국으로 떠난 후에도 서신을 주고받으며 지속되었다. 유족과의 대화 ('18. 12.20., '19. 3. 8., '19. 4.30. 총 3회 진행). 도판 참조 2) 호적으로는 1919년생으로 되어 있으나 출간된 모든 도록에는 1921년생으로 표기했다. 유족에 따르면 樹話 김환기가 미국에 있을 때 박석호를 록펠러 재단에 소개하려고, 이때 미국에서 나이가 많으면 불리하다고 하여 나이를 두 살 줄이게 되었다고 한다. 유족과의 대화 '18.12.20. 3) 강태성, 하인두, 정진국, 문은희, 김익란, 변영원, 조병현, 신금례 등 「흑석동 화실」, 『박석호전』예술의 전당, 1996, p.164 4) 같은 책 p.153. 도판 참조 5) 이봉상, 이종무, 홍순민, 김숙진, 박석호 6) 이경성에 따르면 박석호의 회화를 사실이나 추상의 어디에도 못 박을 수 없는 양식개념으로「구상」을 설정하고 「서두르지도 않고 초조하지도 않으며 꾸준하게 자기에게 충실한 화가」라고 했다. 같은 책 p.147 7) 김인환, 채홍기 글 참조, 『박석호전』예술의 전당, 1996 8) 같은 책 p.159 9) 『문화한국경제』, 1983. 10.13(목) 10) 유족과의 대화 ('18.12.20.) 11) 같은 책 p. 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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