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렁이는 세계 Swaying World

박문희展 / MUNHEEPARK / 朴文熙 / mixed media   2019_0829 ▶︎ 2019_0913

박문희_일렁이는 세계展_탈영역 우정국 1층_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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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9_0829_목요일_05:00pm

후원 / 서울문화재단

관람시간 / 01:00pm~07:00pm

탈영역 우정국 POST TERRITORY UJEONGGUK 서울 마포구 독막로20길 42(구 창전동 우체국) Tel. +82.(0)2.336.8553 www.ujeongguk.com www.facebook.com/ujeongguk

2019년 8월 29일부터 9월 13일까지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탈영역 우정국에서 박문희 작가의 개인전 『일렁이는 세계 Swaying World』가 개최된다. 박문희 작가는 사물이 가지는 사회, 문화, 역사적 의미들을 생명의 개념과 연계하며 인문학적인 해석지점을 만들어 내는 작업을 진행해왔다. 일상의 모습들을 관찰과 발견을 통해 서로 관계 맺고 의미를 탐색해가는 그의 작업은 추상적 개념의 현실적 인지와 탐구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생활공간의 요소들을 삶의 태도적 부분으로 확장하는 구성과 연출을 선보이며, 일상을 감각적으로 사유하는 경험을 공유하고자 한다. ■ 탈영역 우정국

박문희_일렁이는 세계展_탈영역 우정국 1층_2019

박문희의 『일렁이는 세계』에서 - 1. 진지한 미술의 양자 국면 ● 아티스트가 먼저 나서서 관람자에게 '창작자의 권리'나 '작품의 본질' 대신 '해석의 자유' 또는 '다양한 관점'을 촉구하는 예술의 시대다. 1960년대 말 푸코(Michel Foucault)의 「저자란 무엇인가」, 바르트(Roland Barthes)의 『텍스트의 즐거움』같은 후기구조주의 연구가 그런 관점을 논쟁적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미술계에서는 1990년대가 되어서야 그런 성향을 띤 전시와 작품이 두드러진 흐름으로 나타났다. 철학적 주장과 미술 실천이 시간차를 가지고 전개된 셈이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원인은 미술이 오랫동안 담보해온 물질성과 조형성에 있을 것이다. 사물과 질료를 써서 형태를 그리거나 빚는 그 미술의 속성 말이다. 덕분에 작가는 미적 피조물(creature)을 낳는 예술 주체(creator)로서 꿋꿋이 버틸 수 있었고, 힘의 저울추가 감상자 쪽으로 크게 기울지 않았었다. 그러던 것이 1990년대~2000년대 현대미술이 점점 더 비물질적이고 개념적인 형질을 표방하고 그런 관념적 특성을 확장해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관객의 적극적 개입과 능동적 참여가 미술의 동시대적 요소로서 등극하기 시작한 것이다. 계획적이지 않고 취향이 제각각인 감상자에게 작품은 언제든 열려있는 개방성과, 어떤 입장과 생각으로 접근하든 성공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유연성을 갖출수록 좋은 것이 되었다. 또 전시는 그런 작품들이 임의적이고 가변적이며 유동적인 상황들을 부추기고 스스로 다변화되는 수행의 장(場)이 되었다. ● 이렇게 동시대의 미술이 한창 패러다임을 바꿔나가고 있을 때는 '범례(凡例, legend)'와 '규범(規範, criteria)' 같은 미학의 요소는 환영받지 못한다. 절대적인 미의 전범이라든가 유일무이한 미적 기준 같은 것을 따를 입장이 아닌 것이다. 그것들은 작가에게나 감상자에게나 유연하고 가벼운 행보 대신 역사적 정통성과 분과적(disciplinary) 진정성을 무겁게 요구한다. 반면 최근 십여 년 동안 '불확실성', '다원성', '미결정성', '모호성', '확장성', '부정근(the radicant)' 같은 말들이 작가의 작업노트부터 기획전의 전시공간과 미학 서적의 페이지들을 떠돌고 있다. 그런 용어들은 대체로 각각의 논리적 담론을 수반하며 개별적 의미의 차이를 내세우기는 한다. 그래도 권위적인 미술을 인정하지 않고 일방향의 창작과 수용 관계를 적극 지양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예컨대 범례를 따르기보다는 기꺼이 애매모호하고 잡종적인 작업(production)과 분열적이고 확산적인 수용(reproduction)을 지향한다. 마찬가지로 규범과 규율에 종속되기 보다는 변칙적이고 다양하게 움직이는 마인드와 방식이 곧 현대미술에 적합한 생산자와 사용자의 멘털리티로 간주된다.

박문희_가까운 성스러움_강화플라스틱, 조각품, 가구, 책, 도자기, 자연물_181×217×123cm_2018

서론이 좀 길었다. 그런데 이 글에서 논할 박문희의 개인전 『일렁이는 세계』는 나로 하여금 위와 같은 진중한 주제, 요컨대 미술 창작과 수용의 조건 변화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보게 한다. 작가는 본인의 미술을 "사물과 상황들이 가질 수 있는 다양한 맥락들을 형성시켜주는 작업"으로 판단하기에 관람자에게 "그 의미와 해석은 열려있는 상태이기를"1) 바란다고 했다. 그런데 그의 작업 과정과 작품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나는 다음과 같은 의문이 내내 떠나지 않았다. 자기의 창작 의도를 물질과 감각을 동원해 정교하게 구축한 이 작가는 왜 감상자를 통한 확장 가능성과 유동성을 저리 원하는가? 이에 대해 누군가는 간단히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 작가가 당신이 서두에 말한 현대미술의 흐름을 잘 알고 있고, 그것이 이 시대의 미술이라고 생각하기에 편승하고자 하는 것 아니겠는가' 하고.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만 보기에는 이 작가와 작품은 매우 진지하고 자기 집중성이 강하다. 이를테면 한편으로, 박문희는 자기 작품의 의미부여 및 전달에 신중을 기한다. 다른 한편, 실제 작품을 제작하는 데서부터 공간 설치 및 전시에 이르기까지 물리적 과정에서도 완벽을 추구한다. 이는 분명 열린 해석, 의미의 확장, 관점의 유연성 등과는 꽤 거리가 있다. 심지어 창작과 수용 면에서 서로 모순된다. ● 이런 점에 근거해 내가 내린 잠정적 결론은 박문희에게는 '진지한 미술'이라는 목표가 대타자처럼 자리 잡고서 그 모순을 오히려 일종의 작업 엔진처럼 돌리고 있다는 것이다. 작품을 사이에 두고 작가의 완벽한 창작과 감상자의 완벽한 수용이 서로 들어맞는 수준의 미적 가치(aesthetic quality)를 구현하면 그 목표에 닿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 목표는 상상적으로 말하면 '나는 이 정도로 아름답고 가치 있고 조형적으로도 수준 높은 작품을 만들 테니, 감상자는 모든 지적 능력과 감각을 동원해서 가장 적절하고 의미 있는 향유를 실행하라. 그것이 내 작품의 진정한 확장이고 당신에게는 자유롭고 능동적인 해석이다' 정도로 풀어 쓸 수 있는 종류의 것이다.

박문희_빛나는 아침_디아섹_150×189cm_2019

2. 비의적 또는 비유적 ● 박문희의 개인전 『일렁이는 세계』는 2019년 8월 29일부터 9월 13일까지 탈영역우정국에서 열렸다. 이 전시에 주목할 중요한 이유가 있다. 위의 논의에서 느꼈을지 모르겠지만 내게 박문희는 생각이 많고, 그 생각을 기반으로 작업을 하며, 모든 점에서 완벽한 작품과 전시를 추구하는 작가로 여겨진다. 그래서인지 실제 전시로 완결된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성과가 작가의 잠재력과 창작 욕망에 비해 크지 않았다.2) 그런 배경을 고려하면 『일렁이는 세계』는 여태까지 박문희가 구상하고 작업해온 아주 많은 것들이 종합되어 가시화된 장(場)으로서 의의가 있다. ● 박문희는 탈영역우정국 전시장의 1층과 2층에 총 6점의 작품을 설치했다. 굳이 숫자를 따지자면 그렇다. 하지만 『일렁이는 세계』전은 장소의 물리적 조건과 작품의 미학적 배치(constellation)가 조응하도록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하나의 집합체이자 다수(多數)의 종합이다.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관객의 주의를 집중시키는 중앙의 작품은 「가까운 성스러움」이다. 그것은 애초 현장바닥에 설치돼있는 다각형 단상 위에 디스플레이 되어 제의적 분위기와 기하학적 형태미를 과시한다. 작품의 주 형상인 양초들과 흘러내린 촛농이 감상자에게는 삼각형 산을 연상시키면서 더욱 그렇다. 관람자 시점에서 전시장 왼쪽 가벽에는 「빛나는 아침」이라는 제목의 대형 디아섹 사진 한 점이 걸려있다. 투명하게 반짝이는 크리스털 그릇들이 수없이 많이 흰 바닥에 늘어서 있는 틈 사이로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앞발을 모은 채 고요하고 예민하게 서 있는 순간을 포착한 사진이다. 그 동물의 정적인 태도, 유리 용기의 반짝임, 안쪽까지 깊숙이 밀고 들어온 아침 햇살의 투명함이 한데 어우러져 '빛나는 아침'이라는 작품명에 걸맞은 느낌을 자아낸다. 그와 동시에 종교적인 이유로 집안에 반짝이는 물건들을 배치해두는 유대인들의 신비주의를 좀 아는 사람이라면 바로 옆의 「가까운 성스러움」과 연관시켜 불현듯 어떤 비의적(esoteric) 메시지를 떠올릴 수도 있다. 박문희에 따르면 그 사진을 찍기 위해 오랜 시간 세팅을 했고, 그보다 더 오랜 시간 빛과 그림자, 고양이의 움직임을 관찰해 결정적 장면을 담아냈다고 한다. 그와 같은 미학적 의도와 정교한 시각화를 거쳐서인지 「빛나는 아침」에는 말로는 잡아내기 힘든 서정성과 인공적 아름다움이 있다. 게다가 상당한 양의 유리그릇들과 고양이의 네 발 그림자가 겹쳐지고 길게 늘어지며 만들어낸 바닥의 반투명 그림자는 그 사진이 매우 재현적임에도 불구하고 기하학적 추상 미학에 근접하는 수준으로 보인다. 1층 전시의 세 번째 작품은 「가까운 성스러움」의 오른쪽 앞쪽에 위치하고 있다. 「그녀의 침묵」이 제목이지만, 그것은 르네 마그리트의 「수태고지(The Annunciation)」(1930)만큼이나 이미지와 메시지의 연관성을 찾기 힘든 조각설치작품이다. 거기에는 '그녀'라 부를만한 유사 형상도 없거니와 '침묵' 대신 깨진 찻주전자와 찻잔, 부러진 탁자가 모래에 어지럽게 파묻혀 일종의 '시각적 소란스러움'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또 야트막한 산 형태를 이루고 있는 그 모래들은 계속 흘러내리는 듯 느껴지지만 사실은 실제 모래알갱이를 굳혀서 만든 조각으로서, 말하자면 '너무나 인공적이어서 진짜인' 혹은 '진짜여서 인공적인' 기이한 촉각을 불러일으킨다.

박문희_그녀의 침묵_강화플라스틱에 모래채색, 가구, 유리식기, 도자기, 책, 은식기_52×147×275cm_2015

여기서 우리는 새삼 오래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즉 박문희가 만든 조각 이미지는 허상인가? 아니면 그 자체의 내적 질(quality)을 지녔으되 외부 감상자에게 보이고, 전달되고, 해석되는 가운데 그 내적 질의 변화를 피할 수 없는 존재인가? 두 질문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 다른 질문이다. 이를테면 그의 작품들은 진짜와 가짜, 실재와 허상의 이분법 중 어느 한 쪽의 입장을 취하는 주제의식 아래 있지 않다. 그렇다고 이미 철 지난 담론의 수사학인 이분법의 경계에 있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도 흥미롭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내가 던진 질문은 다음과 같은 두 사실이 서로 연관됐지만 별개의 문제라는 전제 하에서만 제대로 답을 찾을 수 있다. ● 먼저, 박문희의 작품들은 미술로서 '허상'의 존재를 숨기지 않고 오히려 객관화/물질화 한다. 다음, 작품을 보는 타인들은 그것의 원래 의미라든가 본질적 존재를 고스란히 수용하는 대신 매개와 즐김의 과정에서 변화된 미학적 가치를 경험한다. 요컨대 미술작품으로서 물질적으로 구현된 허상이되, 감상자의 미적 수용 차원에서 그것은 질적 변화에 열려 있는 미결정성의 실체인 것이다. 그러니 이 작가가 강하게 희망하는 열린 해석과 확장적 이해는 관객의 자율성과 자유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완전한 작품을 위해 작가가 감상자에게 일부러 요청하는 모호함이다. 재미있는 점은 이와 같은 일종의 게임이 매우 진지한 미술을 위해 치러지는 것 같다는 데 있다. 그것은 어쩐지 진리가 범례적 이야기를 따르되 비유적 도상의 표현을 통해서 나타난다고 본 기독교의 방법론을 닮았다. 예를 들어 기독교 성상화는 표상할 범례적 이야기가 정해져있고, 표상의 재료부터 기법까지 구체적 규범으로 마련되어 있는 가운데 제작된다. 그것을 보는 이에게도 규율은 엄격하게 요구되는데, 그 성상(icon)의 메시지는 결코 관객 마음대로 지을(作)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그때의 성상은 한갓 이미지이거나 환영이 아니다. 진리의 현현, 기독교 정신의 육화다. 그렇기에 영적인 교화를 위해 완결된 형식과 의미로 전달되어야 한다. 하지만 낭시(Jean-Luc Nancy)가 핵심을 포착했듯 "진리는 여기서[기독교에서] 그 자체가 비유적[rhetoric]"3)인 것이다.

박문희_일렁이는 세계展_탈영역 우정국 2층_2019
박문희_일렁이는 세계展_탈영역 우정국 2층_2019

3. 일렁임 ● 진리가 비유를 통해서 나타나고, 진지한 미술의 창작이 허상의 존재성과 미술의 열린 향유를 통해서 완성된다는 점은 우리로 하여금 새삼 절대적인 주체, 일자(一者), 동일성의 존재란 역시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그래서 앞서 내가 철 지난 담론의 수사학이라고 냉소적으로 말했던 '이분법적 경계의 사이에 존재'한다든가 하는 표현은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그 말의 품새가 진부해졌기에 우리는 새로운 표현 언어, 새로운 형상을 찾아나서야 하는 것이다. 나는 박문희의 전시 명 중 '일렁이는'이라는 용어가 대체로 그 의미를 잘 살린다고 본다. 또 말만 앞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작품들이 그런 힘을 내포한다고 생각한다. ● 탈영역우정국 1층의 작품 세 점에서도 감지할 수 있지만, 특히 2층에 전시된 작품들을 중심으로 분석해보자면 '일렁이는' 상태는 조금 더 선명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먼저, 2층의 한 방에 단독으로 설치된 작품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는 방법」을 보자. 네 개의 어항에서 작은 관상용 물고기가 헤엄치고, 그 주변에는 가짜 꽃이 심어진 화병이 서있는 형태의 설치조각품이다(1층 작품에 등장하는 모티프, 즉 유리그릇, 캐스팅된 양초와 촛농 등이 반복된다). 여기서 우리는 살아있는 생명체와 죽은 사물이 작가가 인공적으로 조성한 환경에서 가시적으로 또한 비가시적으로 상호 기대며 결합된 '존재의 일렁임'을 본다. 다른 방에는 「땅 위에서 일어나는 일」이 전시되었다. 그 작품은 누렇게 바랜 동물의 두개골(?)과 검은 분비물, 말라비틀어진 나무 등걸을 아주 정교하게 묘사한 오브제를 테라리움 안에 설치한 것인데, 감상자로 하여금 얼핏 그런 것들이 실제로 나뒹구는 아프리카 사막, 죽음의 대지를 연상시킨다. 그 맞은편으로는 조각의 정교함과는 전혀 맥락과 국면이 다르게 느껴지는 작은 사물들, 책자들(『광물 ․ 화석』)이 놓인 탁자가 있고, 또한 그 옆 창문 앞에는 아무런 예술적 목적도 없는 일상적 일인 양 작은 화분들이 빛을 받으며 놓여있다. 탁자와 창틀에 놓인 그것들은 테라리움 속 조각과 대비된다. 말하자면 그 잡다한 것들은 박문희(뿐만 아니라 보통의 사람들이 가질만한) 취향의 상징물들이다.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만들어진 조각의 전문성과 취미 활동을 표상하는 것들의 느슨함이 중첩되어 야기하는 강도(intensity)의 일렁임을 주장할 수 있다. ● 이상 나라는 감상자에게 해석의 자유, 비평의 특권이 부여된다면, 2층의 전시작들을 포함해 박문희의 『일렁이는 세계』는 다음과 같이 서술할만한 의미를 잠재한 미적 대상(aesthetic object)이라고 정의할 것이다. 작가가 전시 제목으로 제시한 '일렁이는 세계'와 맥락을 연결시켜 볼 때 그 의미는, 우리가 그간 경계, 사이, 중첩, 주름, 유목, 리좀, 래디컨트, 미결정성, 모호함, 불확실성, 유동성 등등으로 말해온 어떤 존재방식과 상태에 매우 근접한다. 하지만 그것은 철학적 개념어와 달리, 문학적 비유어와도 다르게 물질적으로 지각 가능하고 경험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 이 미술의 특성을 부여해야 한다. ■ 강수미

* 각주 1) 2019년 9월 10일 박문희가 필자에게 보낸 작가노트에서 인용. 2) 강수미, 「생각은 어떻게 미술이 되는가? - 박문희의 작업에 대해」, 『2018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 프로그램』, 인천아트플랫폼, 2019, pp. 82-85 참고. 3) Jean-Luc Nancy, Noli Me Tangere, 이만형 · 정과리 역, 『나를 만지지 마라』, 문학과지성사, 2016, p. 10.

박문희_세 개의 진실_피그먼트 프린트_70×100cm×3_2015
박문희_땅 위에서 일어나는 일_테라리움, 돌, 나무, 혼합재료_55×77×57cm_2016

나는 사물이 가지는 사회, 문화, 역사적 의미들을 생명의 개념과 연계하며 인문학적인 해석지점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일상의 사물들로 구성된 작품은 인위적으로 만들진 형태이기보단 어떠한 현상이나 상황을 포착한 모습으로 보여진다. 이는 작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현실적 요소들을 보여주어 관계에 의한 의미탐색을 이끌어내기 위함이다. 실제로 우리는 무언가의 의미를 찾고자 할 때 그것과 관련된 또 다른 객체와의 관계를 생각한다. 세상에 독립된 존재는 없기에 총체적이고 복합적인 접근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작업은 상호 간의 관계에 의해 생겨나는 의미와 내러티브의 다층적인 해석지점이 만들어지는 것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작품에 중심을 이루며 계속해서 등장하는 생명의 개념은 각기 다른 상황과 사물들로 대체되어 표현된다. 그동안 인류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지며 지식의 토대가 되었던 생명(체)은 불확실한 사물로 남겨진 체 세상을 이해하는 통로로 작업에 자리한다. 나는 이러한 초월적 탐구에 있어 도달 가능 여부를 떠나 무언가를 사유하기 위한 조건과 접근방식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고자 한다.

박문희_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는 방법_강화플라스틱, 조화, 물고기, 물, 꽃병, 어항, 유리식기_66×68×64cm_2019

'추상적 개념의 대상을 이해하고 탐구해갈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선 어떠한 접근을 필요로 하는가?' 나의 작업은 이러한 질문에 기반을 두고 있다. 작업에서 인문학적 내용을 차용하는 이유는 이러한 의문이 불가피하며 계속해서 이어져 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나는 방향성 있는 탐구를 지속하기 위해 밀접한 주제를 상정하여 연구하는 방식을 선택하고 있다. 생명의 불확실하고 범용적인 성질은 현실의 모습들로 변모되며 다각적인 접근을 가능하게 한다. 또한, 관찰과 발견을 통해 의미를 모색해가는 과정은 규정되지 않은 사고와 접근방식을 이끌어내며 세상을 폭넓고 다채롭게 인지하는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 박문희

Vol.20190829e | 박문희展 / MUNHEEPARK / 朴文熙 / mixed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