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밝을 것을 알고 있다 I know the day will come

양유연展 / YANGYOOYUN / 楊裕然 / painting   2019_0906 ▶︎ 2019_0929 / 월요일,추석연휴(12,13,14) 휴관

양유연_휘광_장지에 아크릴채색_150×210cm_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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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유연 홈페이지_yyy1228.egloos.com

초대일시 / 2019_0906_금요일_06:00pm

후원 / 서울문화재단

관람시간 / 12:00pm~07:00pm / 월요일,추석연휴(12,13,14) 휴관

아마도예술공간 AMADO ART SPACE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54길 8(한남동 683-31번지) Tel. +82.(0)2.790.1178 amadoart.org

인간을 그리는 법 ● 내가 가장 최근에 본 양유연의 작업은 「기도하는 사람」(2018)이라는 그림이다.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사람의 상반신이 바닥부터 천장까지 벽을 덮을 만큼 큰 화면을 가득 채웠다. 눈을 내리깔고 묵상에 잠긴 얼굴은 반쯤 어둠에 잠겨 뒤로 물러나고, 기도하는 두 손이 서로를 떠받치며 빛을 받고 있다. 그것은 특정한 인물의 묘사나 시각적 구성, 한 점의 회화 또는 이미지이기 이전에, 그 모든 것에 앞서서 인간의 초상으로 제출되었다. 여자 같지만 남자라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는, 성별이나 인종을 특정할 수 없도록 아무 기호도 두르지 않은 인간의 형상은, 오로지 인간의 눈앞에 인간을 보이기 위해 거기 있었다. ● 회화에 접근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무엇을 그리는가 하는 회화의 내용이 아니라 그린다는 행위 또는 그려진 평면, 다시 말해 회화라는 사실에 천착하는 것은 전통적인 회화와 구별되는 현대 회화의 주요 특징이다. 하지만 자신이 회화로 성립한다는 것 외에 다른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으려는, 그런 심술궂은 회화는 의외로 많지 않다. 최초의 추상 회화로 근래에 재조명되는 힐마 아프 클린트(Hilma af Klint)의 작업 역시 신비적으로 전달되는 신성한 지식을 정확하게 기록하려는 시도였지 회화에서 내용을 삭제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설령 화가 스스로 무엇을 그리는가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더라도, 매번 화면에 그려지는 것이 선택되고, 그 선택이 누적되면서 드러나 보이는 세계가 있다.

양유연_손에 담은 빛_장지에 아크릴채색_150×210cm_2019 양유연_Scene_장지에 아크릴채색_150×210cm_2019

돌이켜 보면 양유연은 언제나 인간을 그리는 법을 연구해 왔다. 이는 인간이 다른 모든 존재들과 구별되는 특별하고 고귀한 존재라는 관념에 기대어, 회화를 가치 있게 하는 유의미한 주제로 인간을 택했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회화는 인간을 어떻게 봐야 할지 알 수 없다는 근본적인 불가해함과 비결정성에 의해 견인되었다. 인간을 묘사하거나 인간성을 설명하는 관습적인 말과 이미지들이 별로 만족스럽지 않았기 때문에, 또는 적어도 그런 것들이 스스로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데 딱히 도움이 되지 못했기에, 작가는 시행착오를 거치며 이 문제를 스스로 풀어가는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 초기 양유연의 작업은 넓은 의미에서 자화상 또는 자기의 풍경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얼굴을 중심으로 인간의 외면을 그 내면의 상징적 표현으로 승화시킨다는 초상화의 전형적 접근을 따르지 않았다. 내면과 외면을 구별하고 매개해야 할 피부는 짓무르거나 딱딱하게 굳어서 부서졌고, 그 틈새로 정체불명의 공간이 새어 나왔다. 얼굴은 가려지거나 훼손되어 초현실적인 풍경을 이루었고, 그 속에서 신체는 다시 절단되고 물화되기를 반복했다. 화면은 나를 무대화하는 가상의 극장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절개되어 하나의 극장처럼 펼쳐졌다. 작가는 그 극장을 구성하고 관조하는 외부자의 위치에서, 자기 자신과 얼마간 분리되어 자기 안의 이질적인 것을 발견하거나 자기 아닌 것을 자기 안에 담아볼 수 있는 공간을 확보했다. ● 이러한 자기의 풍경은 사진을 참조하면서 점차 자기 바깥의 풍경으로 확장되었으며, 그와 함께 외부 세계에 대한 투쟁이나 타인들과의 관계가 화면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에 대한 관심은 자기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대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더욱 복잡한 문제로 만들었다. 내가 나를 그리는 것과 남을 그리는 것은 똑같을 수도 없지만 완전히 달라질 수도 없다. 애초에 양유연은 자기에 동화되어 자기를 그렸던 것이 아니라 타자화된 자기를 더욱 바깥으로 밀어내듯이 그려 왔는데, 그와 같은 시선으로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고 그에 자신을 투영하는 것은 연대의 생산이 될 수도 있지만 소외의 재생산이 될 수도 있었다. 결국 자기를 긍정하지 못한다면 자기가 그리는 그림 속에서 타인을 긍정하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양유연_시선의 몫_장지에 아크릴채색_150×210cm_2019 양유연_손에 담은 빛_장지에 아크릴채색_150×210cm_2019

그러므로 인간으로서 인간을 그리고 보여준다는 기획은 자기 안팎의 것들을 반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직 모르는 세계를 향해 열린 자기 이미지를 구축하기를 요구했다. 이에 작가는 인체를 보이는 대로 재현하되 그 이미지를 부분적으로 잘라내거나 어둠 속에 묻어서 의도적으로 불확실하게 그리기를 시도했다. 누구의 것인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식별하기 어려운 얼굴들, 선명하게 보이지만 어떤 상황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손들이 홀연히 어둠 속에서 떠올랐다. 어둠으로 일부 지워진 것 같기도 하고 그나마 어둠에 의지해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것 같기도 한 그 인물들은 작가 자신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했다. 어쩌면 작가는 너와 나의 구별 자체가 어둠 속에서 녹아내리기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가는 그려지는 사람인 동시에 그리는 사람이다. 적어도 화면 안에서는 어둠을 드리워 대상을 숨기는 것도, 빛을 휘둘러 대상을 색출하는 것도 작가 마음이다. 이것을 미약하나마 하나의 힘으로 의식하게 되면서, 작가는 보고 그리는 행위의 근간이 되는 빛을 탐구하는 일련의 작업을 전개했다. ● 양유연의 화면에서 빛은 오랫동안 어둠의 주변부에 머물렀다. 화면을 지배하는 어둠 사이로, 그것은 연기를 내뿜으며 주변을 불태우는 파괴적인 힘으로 등장하거나, 또는 흐린 달빛처럼 어둠을 걷어내지 못하는 미약한 얼룩으로 남았다. 하지만 빛이 완전히 사라진 적은 없었다. 불투명한 안료를 칠하거나 또는 칠하지 않음으로써 화면에 빛을 형성한다는 것은 공간감을 유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회화적 환영이지만, 아무리 즉물적인 접근으로도 화면에서 제거할 수 없는 회화의 근본 속성이기도 하다. 빛은 색채와 결합되어 모든 가시적인 것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은 안도감을 주기도 하지만, 어둠 속에 조용히 숨은 것들을 무관심하게 폭로하는 빛의 힘은 폭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작가는 이 힘을 어떻게 다스리고 활용할 수 있을지 지난 몇 년간 여러 가지로 모색해 왔다. 화면 내에서 명암의 극적인 효과를 강조하기도 하고, 투명도가 높은 순지를 강한 조명에 노출하여 스크린처럼 설치해 보기도 하면서, 시각적인 것을 매개하는 빛의 작용 자체를 가시화해 볼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고안했다. 하지만 이는 화가로서 자신이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또 보여줘야 하는지 질문했던 것이지 단순한 형식 실험으로 환원되지 않았다.

양유연_시선의 몫_장지에 아크릴채색_150×210cm_2019

자기 과시적으로 빛을 내뿜거나 수동적으로 빛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빛을 머금은 듯한 존재들이 화면 상에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연구의 결과이다. 「빛나는 것」(2018)의 깨진 유리 조각에서 발견된 부드러운 빛은 앞서 언급한 「기도하는 사람」에서 잔잔하게 빛나는 온전한 인간의 형상을 얻는다. 이번 전시 『날이 밝을 것을 알고 있다』는 그 연장선에서 다시 인간에게, 누구보다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간다. 얼굴과 손, 마네킹과 창문처럼 작가가 이미 한번 그려본 것들이 새로운 빛으로 충전되어 그간의 작가의 변모를 증언한다. 그려지는 존재들은 모두 얼마간 작가를 닮았지만 그에 쉽사리 동화되거나 지배당하지 않는 존엄을 드러낸다. 빛이 들어오는 창밖은 문자 그대로 백지처럼 펼쳐져 있다. 그림 속 인물들은 커튼을 쳐서 그 빛을 가리기도 하고, 커튼 속으로 들어가서 몸을 숨기기도 하고, 때로는 화면 바깥으로 나가 버리기도 하지만, 예전처럼 무언가 두려워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빛과 어둠을 통제할 수 있는 능동적 역량 속에서 자기를 출현시킨다.

양유연_맑고, 무겁게_장지에 아크릴채색_210×150cm_2019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시선 속에서 스스로 어떻게 바라보고 그릴 것인가, 자기로부터 소외되거나 자기 안에서 질식하지 않고 어떻게 자기의 세계를 바깥으로 열어갈 것인가. 이것은 양유연이 계속 붙들고 있었던 주제였다. 여기서 인간이라는 것은 타고난 조건이나 보장된 지위가 아니라 애써 추구해야 하는 하나의 지향으로서 성립한다. 인간이 못 되는 것들을 경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비인간화의 시선을 극복하기 위해서, 작가는 계속 인간을 그리고 그에 적합한 빛을 찾는다. 어쩌면 그것은 현실에 존재하는 인간이라는 종을 넘어선 이상일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우리를 닮은 이미지를 그려내고 또 보는 가운데 우리 자신을 빚어낸다. 그렇다면 이미지를 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구하는 일로 연결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의 붓은 그런 소망을 차곡차곡 종이에 담아 우리에게 전한다. ■ 윤원화

양유연_착시_장지에 아크릴채색_210×150cm_2019 양유연_빛나는 모든 것으로부터_장지에 아크릴채색_210×150cm_2019 양유연_막후_장지에 아크릴채색_210×150cm_2019

어둠을 밝히는 존재를 그리다 ● 2019년 9월 6일부터 9월 29일까지 아마도예술공간에서는 회화 작가 양유연의 개인전 『날이 밝을 것을 알고 있다』가 진행된다. ● 전시명인 『날이 밝을 것을 알고 있다』는 페르난두 페소아(Fernando Pessoa)의 《불안의 글(Livro do desassassego)》에서 인용한 구절이다. 그러나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만 어린 속삭임과 양유연 작가가 마주하는 박명(薄明)의 시간의 정서는 다르다. 해가 뜨는 것을 바라보며 잠드는 작가의 일상적이며 자연스러운 감정임과 동시에 이중적이기도 하다. 물리적 사실의 배열에서의 상징성으로 인해 진정한 의미에서 작가의 세계가 움직였기 때문이다. 불분명한 대상에게서 느껴지는 불안과 두려움, 감각들에 대한 심의의 공허함에서 기인한 어두움의 정서를 그려왔던 양유연은 신작 11점을 통해 '어둠을 밝히는 존재'를 의식하는 시간을 진동시킨다.

양유연_빛나는 모든 것으로부터_장지에 아크릴채색_210×150cm_2019

아마도예술공간의 노출된 벽과 창으로 스미는 자연광이 작가의 정서가 표현된 장지를 투과한다. 물을 흡수하고 머금는 장지의 성질과 오히려 칠하지 않았을 때 막(幕) 뒤로 머무르는 '어둠을 밝히는 존재'의 잔상으로 인해 작가의 시선 너머에는 단순한 시각적 관조가 아닌 촉각과 시각 사이의 긴장된 공간이 형성된다. 예리하지 않도록 부드러울 수 있도록 희미하게 음영의 공간을 표현한다. 동시에 전작이 지닌 각 파편들의 고유성은 유지시킨 채로 지금까지의 순환과는 다른 새로운 리듬을 만들어 철저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한편, 의식적인 권태를 통해 자신의 세계로 관객을 초대하려 한다. 관객은 지하층과 중층, 1층으로 흐르는 전시공간을 거닐며, 평면적 회화이미지에서 공간을 아우르는 회화를, 응축된 이미지를 투과하여 산란하며 아스라이 번지는 공간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동선에 따라 작성되지 않은 다소 불친절한 캡션은 작가가 찰나의 빛을 찾은 과정이다. 과거-현재에 걸친 '지속되는 시간'과 '정지된 시간' 축에서 관람객은 스스로를 존재하는 상황의 물리적인 현실로부터 떼어냄으로써, 작품의 현실성과 시점 사이를 잔잔하게 흐르며 이론적인 방법이 아니라 경험적인 시각으로 음영을 더듬어 나갈 수 있게 된다. 작가가 이미 결정한 태도를 강요당하는 일은 없다. 어느 한계 안에서 보는 자가 자신의 방향성과 관점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양유연_이 다른 세계의 풍경_장지에 아크릴채색_106×74.5cm_2019

1층의 공간과 지층의 공간은 단순히 물리적인 분리에서가 아닌 주제를 향유하는 주체에서의 차이를 분할하고 있다. 1층 공간의 작품들1)은 개인적 공간이 온화한 빛에 쌓인 인물(작가 본인)의 감성적 영역으로 다가온다. 「맑고, 무겁게」, 「휘광」, 「Scene」, 「손에 담은 빛」, 「시선의 몫」에서 작가 양유연은 관찰자적 입장으로 대상과 그 대상을 감싸 안는 빛을 담아낸다. 우리가 경험하고 우리가 의식하며 살고 있는 세계에 주목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래서일까? 이미 망각된 어둠을 밝히는 존재에 대한 출처들은 작가가 표현하고 있는 객관적이며 쉬이 접근 가능한 세계 안에서 암묵적으로나 명시적으로 현전한다. 이 세계는 사물, 자아, 타자 등등 수많은 종류로 분류될 수 있으나 작가의, 그리고 모두의 경험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며 그렇기에 우리는 독립적 외적 세상이 아닌 공시적 세계 안에서 작품과 더욱 친밀할 수 있다. 지층 공간의 작품들2)이 표현하는 공공적 공간에서의 빛은 차가운 톤의, 어둠으로 예리하게 스미는 현의 울림과 같다. 여기서 작가는 대상과 빛을 관찰하기보다는 받아들이고 감각하는 주체이다. 그렇기에 해체적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빛이 음의 질서를 가르며 공적 세계로부터 주체를 배제시키고 작가의 내면으로 깊이 침잠되어 어둠을 밝히는 존재로서 작동하는 이미지로 수용된다. 작가가 지층의 공간에 펼쳐놓은 세계에 조금 더 주목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빛나는 모든 것으로부터」, 「막후」, 「착시」로 표현된 일상에 넘쳐흐르면서도 이제껏 작가에 의해 해석되지 않았던 빛이 스미는 공간, 그곳은 아주 조용하고 풍요로운 미지의 공간으로 해석되고 있다. 무한히 퍼지는, 경계가 없는 하얀 어둠.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한 표현을 사람이 가지는 감성에 의지하여 가능케 하였다. 현실의 공간이 다양한 공간으로 변용되어가며 단순한 시각정보만으로는 경험할 수 없고 "눈으로 체현되는" 하얀 어둠으로 관객들을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표현이 그것을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작가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갇히는 것을 경계한다. 필자 역시 앞으로의 작가 양유연이 어떤 모습일지, 그것을 상상하는 것조차 어려워하기를 바란다. 방향성은 있지만, 예상되는 모습은 어디에도 없기를 바란다. 비록 당신이 어둠을 보았을지라도 그것은 찰나의 시선의 몫일 뿐, 늘 어두움을 바라보던 작가의 시각이 전환되고 있음에 공감할 수 있기를 바란다. ■ 박성환

* 각주 1) 「맑고 무겁게」, 「Scene」, 「시선의 몫」, 「손에 담은 빛」, 「휘광」, 「Light silhouette」 2) 「빛나는 모든 것으로부터」, 「막후」, 「착시」, 「Glimmering」, 「이 다른 세계의 풍경」

양유연_Light silhouette_장지에 아크릴채색_106×74.5cm_2019

How to Paint a Human Being ● One work by Yooyun Yang I have seen the most recently is Prayer(2018). The upper body of a person with hands pressed together in prayer fills the huge, wallsized screen from the ground to the ceiling. Light touches upon the praying hands that support each other, while the contemplative face with the eyes gazing downward retreats to the back, half sunk in darkness. More than anything, Prayer is presented as a human portrait – not a portrayal of a certain individual, nor a visual composition, painted artwork or image. One might say that the depicted person is a woman, but it would not come as a surprise if it were a man instead. Bare of any symbols indicative of gender or race, the human shape exists only to bring a human being in front of the human eyes. ● There are diverse ways to approach painting. As we well know, one key characteristic of modern painting that distinguishes it from the traditional predecessor is the intense engagement with the act of painting, the plane painted onto, or the fact that the act of painting has occurred rather than its subject matter. For all I know, however, few actual works are wicked enough to exist solely for signaling that it is a piece of painting, nothing else. Even the works of Hilma af Klint, an artist undergoing re-discovery for her abstract paintings in the recent times, were more of an attempt to accurately record the sacred knowledge that is passed down in a mysterious way than to blot out content from artwork. While artists themselves may proclaim that what is being portrayed does not matter, selection inevitably occurs every time something is painted on the screen, revealing a whole world as the choices accumulate. ● Looking back, Yooyun Yang has always explored how to depict humans. But her choice of humans as the subject matter is not about singling out humans as special and noble creatures, or as an inherently meaningful subject matter that will add value to the artwork. Rather, her works were driven by the sense of fundamental inscrutability and indeterminacy of the human existence, of not knowing what we should make of it. It seems that the artist had to go about this question on her own by trial and error because the language and images of the convention in describing humans and humanity were unsatisfactory, or at least far from useful in helping the artist understand and express herself. The focus of Yang's early works is on self-portraits or self-landscapes in a wider sense. Unlike in the convention of portrait painting, her works do not render the exterior, especially the face, a symbolic and transcendent expression of the interior. The skin, which should set the interior and the exterior apart and act as an intermediary between the two, is either festered or has hardened to the extent of breaking apart, creating a chasm through which unidentifiable spaces leak out. Damaged and concealed faces form a surreal landscape, where the human body is repeatedly dissected and objectified. The screen is not a fictional theater that stages the self: the self is dissected and spread out as the very theater. Here, the artist keeps a certain distance as an outlying constructor and observer of the theater. The distance grants her some space for discovering unfamiliar elements within herself or embracing things that do originally not belong to her. ● Taking photographs as a reference, the landscape of the self has gradually expanded into a landscape outside of the self, bringing the struggle against the external world or the relationship with others into the screen. But her interest in humans as social beings has far from replaced the artist's interest in herself: instead, it made it even more complex. While the portrayal of the self and the others will never be entirely identical, they will also never be entirely different, either. From the beginning, Yang's portrayals have been the results of the othered, expelled self instead of assimilation with herself. While projecting the same gaze and sense of self in perceiving others can create solidarity, it also runs the risk of reproducing alienation. In other words, it is them if one cannot embrace oneself. Consequently, the project of a human depicting and displaying humans demanded that the artist goes beyond reflecting the insides and the outsides of the artist to build a self-image that is open to the unknown world. In response to this demand, the artist tried partly framing or shrouding the human body in darkness while portraying the human body as it seems. From the darkness abruptly arose the faces of uncertain identity gazing at hardly identifiable objects, the clearly visible hands put in unclear contexts. One the one hand, individuals seem partially erased by the darkness. And yet, they almost seem they need the darkness to be able to reveal themselves. These individuals are herself yet not quite herself. Perhaps the artist had expected the barrier between the self and the other to melt away in the dark. But the artist is both the one who is painting and who is being painted. At least on the screen, it lies at the whims of the artist whether to cast the darkness onto the screen to conceal or wield the force of light to hunt down an object. With an awareness of such power, however trivial it may be, the artist has produced a series of works that explore light, which forms the foundation of seeing and painting. ● In Yang's works, light has long remained at the periphery of darkness on the screen. Coming out through the darkness that dominates the screen, light either appears as a destructive force that burns down the surroundings, or a faint stain, like the dim moonlight, which is still covered with a veil of darkness. But never has light completely disappeared. Creating light by choosing where to paint over with opaque pigments and where to leave unpainted is a painterly illusion, just like the creation of dimensions on the paper. The painterly illusion is a trait inherent in paintings that no materialistic approach will ever be able to eliminate. This is because light combines itself with color to give birth to all that is visible. While a beam of light shining through the darkness may evoke relief, the same light can appear violent as it insensitively exposes all that has been hiding in the dark. In the last several years, the artist has explored multiple ways to control and harness this double-edged force. Yang came up with various ways to visualize how light operates as the medium of the visible by emphasizing the dramatic effect of shade or installing the highly transparent soonji (a type of Korean paper) under strong light. The explorations were more than just experiments with forms – they were questions on how Yang, as a painter, should view and represent the world. ● Perhaps that explains why the subjects in her works seem to gently reflect traces of light, instead of exuding it flauntingly or succumbing to its force. The soft light discovered on the broken glass fragments in Glass fragments(2018) takes on the form of the human with a subtle sheen in the aforementioned Prayer. Based on such development, 「I know the day will come」 is an exhibition that comes back to humans and above all, to the artist herself. Faces, hands, mannequins, windows, and all that Yang has previously portrayed are charged with a new light that speaks for the transformation of the artist. Despite a certain resemblance to the artist, the drawn objects reveal a dignity that refuses easy assimilation or domination. The outside of the window that lets the light in is literally spread out like blank paper. While people in the paintings draw curtains to block light, hide themselves in the curtains, or even go out of the screen, they no longer seem to be as afraid as before. On the contrary, they now present themselves as active agents in control of light and darkness. ● How should one view and depict oneself in her own, and not the others', gaze? How can one open up one's inner side towards the external world without falling into the pits of self-alienation or drowning in self? These are all questions Yooyun Yang has been grappling with. For Yang, "human" stands neither as an innate condition nor a guaranteed status, but an orientation to be striven for. The artist continues to draw humans and look for the appropriate light - not to tramp down on the objects that cannot become human, but to overcome the dehumanizing gaze. The goal may as well be an ideal out of reach for the humans constrained by reality. Nonetheless, we keep painting and beholding images that resemble us, and shape our own selves in doing so. That is why saving images just might save ourselves. The artist's brush fills the paper with hope, addressed to us viewers. ■ Yoon, Won Hwa

Painting the existence that Illuminate the Darkness ● The Yooyun Yang's solo exhibition 『I know the day will come』 will be held at Amado Art Space from September 6th to 29th, 2019. ● The title 『I know the day will come』 is a quote from The Book of Disquiet(Livro do Desassossego) by Fernando Pessoa. The sentiment of the hours of twilight faced by the artist, however, is a different one from that of the dissatisfied whisper of Fernando Pessoa. It is a natural, day-to-day sentiment felt by the artist as she finds her way to sleep while looking over at the sunrise. At the same time, the sentiment has a second side to it as the symbolism in the layout of physical facts has moved the artist's world in the truest sense. As an artist who has portrayed sentiments of darkness deriving from anxiety and fear of uncertain objects and a profound emptiness of the human sense, Yooyun Yang creates a tremor across the hours in which the "existence that illuminate the darkness" are perceived with 11 new works. ● A natural light travels alongside the exposed walls and windows of Amado art space, seeping through the sheets of Korean paper where the artist has unraveled her sentiments. The water-absorbing and retaining paper and the afterimage of the veiled beings that can illuminate the darkness precisely because they are not painted over come together, creating not only a visual observation but a tense space between sight and touch at the end of the artist's gaze. Light and shade are portrayed with subtlety to appear soft instead of sharp. While retaining the uniqueness of each fragment in the earlier works, the artist creates a new rhythm of her own that differs from the previous cycles and invite viewers to her world through perceived weariness. Visitors are encouraged to take a stroll along the exhibition halls that flow from the ground to the upper floor, where they will encounter artworks on plane surfaces that incorporate the sense of space, coupled with places where light permeates the condensed images to eventually scatter in a spreading blur. ● The works on display are numbered quite out of line with how a viewer is expected to walk through the exhibition. This intentionally haphazard numbering represents the order in which the artist has found light in fleeting moments. By detaching themselves from the physical reality in which they exist along the axis of the continuing and the frozen time spanning the past and the present, viewers are free to flow between the realities and perspectives in the works, tracing the light and shade from experience rather than theory. Nowhere is the artist's viewpoint forced upon the visitor. Within certain boundaries, it is up to each visitor to choose one's own interpretation and perspective. ● The distinction between the upper and the underground floor is not merely a physical one - it marks the difference in the stances towards the subject matter. The works on the first floor1) feel more like an emotional sphere with tender light embracing the personal space of the artist. In Shade of meaning, blaze, Scene, See the light and Beholder, Yang portrays the subject and the light embracing it from the viewpoint of an observer. It gives the impression that the works are focused on the world we experience and perceive ourselves to be living in. Maybe that is why the forgotten sources of the things that illuminate the dark exist both implicitly and explicitly in the objective and easily accessible world depicted by the artist. While the constituents of this world may well be broken down into multiple categories(object, self, other), experiences, including those of the artist, will not differ much from each other. As a result, we are brought closer to the synchronic world than to an independently existing outer world. ● The light in the public spaces depicted in the works on the underground floor2) is like the chilly tremor of the strings sharply permeating the darkness. Here, the artist accepts and senses the light and the objects instead of simply observing them. Therefore, the light is perceived in the deconstructive perspective as an image that enforces the order of negativity, excludes the subject from the public sphere, and submerges to the artist's inner depths to cast light amidst the darkness. Perhaps that explains why I am a bit more drawn to the world on the underground floor. The space on the underground floor is, as illustrated in Illumination, Curtain and Illusion, interpreted as very quiet, abundant yet unknown. It's where the light common in our lives yet uninterpreted by the artist flows in. It's a white darkness without boundaries in limitless expansion. A physically implausible expression is made possible through human sentiments. Spaces that exist in real life are transformed into various shapes, leading the visitors into a white darkness embodied by the eye which cannot be experienced through mere visual information. What kind of portrayal can tell it "as it is"? ● The artist is cautious of being trapped in a single identity. I also hope that Yooyun Yang stays unpredictable, unimaginable in what form she will take - that she will have a firm orientation but defy the easy predictions. Whatever darkness you might witness belongs solely in the fleeting moment; I hope the viewers will be able to connect and relate to the shift of the artist's perspective as someone the end of whose gaze has always been darkness. ■ Park, Sung Hwan

* footnote 1) 「Shade of meaning」, 「Scene」, 「Beholder」, 「See the light」, 「blaze」, 「Light silhouette」 2) 「Illumination」, 「Curtain」, 「Illusion」, 「Glimmering」, 「Another scenery」

Vol.20190906b | 양유연展 / YANGYOOYUN / 楊裕然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