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_파초(芭蕉)_Permanent Blue Part Ⅰ: Plantain(芭蕉)_ Permanent Blue / 2부_드로잉 Part Ⅱ: Drawing

권기수展 / KWONKISOO / 權奇秀 / painting   2019_0906 ▶︎ 2019_1019 / 일요일 휴관

권기수_My favorites-the Permanent Blue World_ 보드, 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1×130.3cm_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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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수 홈페이지_www.kwonkisoo.com

초대일시 / 2019_0906_금요일_06:30pm

1부_파초(芭蕉)_Permanent Blue / 2019_0906 ▶︎ 2019_0928 2부_드로잉 / 2019_0930 ▶︎ 2019_1019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일요일 휴관

아뜰리에 아키 atelier aki 서울 성동구 서울숲2길 32-14 갤러리아 포레 1층 Tel. +82.(0)2.464.7710 www.atelieraki.com

권기수: 파초에 대한 단상 ● 예술가에게 있어 가장 오래된 주제들 가운데 하나는 유토피아에 대한 꿈일 것이다. 초기 인류가 꿈꾼 유토피아는 수많은 사냥감들을 포획하고 있는 자신과 동료들이 담긴 풍경 이었을 것이며, 고대 문명들이 세운 건축물들과 수많은 토템들, 무덤의 부장품들에는 당대를 살던 사람들의 열망과 내밀한 사고 속의 이상적 세계에 대한 의식이 담겨 있다. 중국을 비롯한 동양의 예술 역시 이러한 유토피아의 구조를 독특하게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연과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 사이에 존재하는 일종의 거울과도 같은 형식이다. 즉 이상적으로 정형화되어 있는 수묵의 풍경과 그 안에 작게 그려져 있는 인물의 관계를 통해 두 주체가 상호-지시 상태에 놓여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물은 주로 산이나 그 사이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으며, 그가 있는 곳은 강기슭, 근처에 세워져 있는 정자 혹은 물 위에 띄워져 있는 조각배 위이다. 자연은 이러한 인물의 눈에 비친 존재로서 관객인 우리에게 제시되며 반면에 그림 속의 인물과 우리는 자연을 바라보는 일치된 항으로서 풍경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상적 풍경과 주체 사이의 되먹임(feedback) 구조는 실은 르네상스 이후의 서구의 풍경회화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특히 17세기 플랑드르 회화에서 정형화된 이상적 자연의 모습 안에는 그것을 관조하는 극도로 작게 그려진 인물의 '기호'가 항상 표시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권기수_My favorites-expanded reflection_보드, 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81.8×227.3cm_2019

권기수의 작품 속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동구리'는 극도로 단순하게 그려진, 마치 어린이가 그린 듯한 인물이다. 이미 매우 오랜 기간 동안 작가의 고정적인 시그니처처럼 모든 작품에서 등장해온 이 인물은 그의 페르소나이자 어떤 의미에서는 그 자신의 등가적 존재와도 같다고 할 수 있다. 권기수가 다루는 높은 채도의 현란한 팔레트로 그려진 평면적 풍경 속에서 흑백의 완전히 분리된 모습으로 그려진 이 주인공은 풍경에 뒤섞이지 못한 채, 혹은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온 것처럼 풍경 안에 몰입하고 있는 존재로 다루어져 있다. 많은 관객들이 예감하고 있는 것처럼, 동구리는 매우 심리적으로 복합적이고 복잡한, 임상적 정신분석의 대상이 될 만한 주제인 셈이다. 항상 웃고 있는 그의 커다란 얼굴과 자연 안에서 환희에 휩싸여 있는 듯한 한층 더 단순화된 그의 신체는 종종 그의 주변을 흐르는 물에 비쳐 보이곤 하는데, 그로 인해 기술되는 반전과 흐릿함을 통해 독특한 양가적 상태가 함축적으로 제시된다. 권기수가 그리는 풍경은 동구리의 시선을 통해 투사된 오래된 유토피아의 전형이다. 아름다운 나무들과 수면, 그리고 반짝이는 빛과 파문의 교차하는 패턴들은 여러 겹의 레이어들을 통해 깊이를 알 수 없는 영롱함 속으로 관객을 몰입시킨다. 등위적(isometric) 원근을 통해 화면 전체에 고르게 펼쳐진 초점은 시선의 중심을 계속 이동시킴으로써 몰입을 한층 더 가속화한다. 시선의 미끄러짐과 반영으로 인해 파생되는 화면의 이중구조로 인해 이러한 몰입은 시각적 사태에서 심리적 파동으로 번져나간다.

권기수_Oar-Black_보드, 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2×130.3cm_2019

유토피아와 주체의 상관관계에 대한 회화의 중의적 구조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유토피아에 대한 열망과 그것의 부재로 인한 좌절이라는 상반된 현실에 기인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권기수의 회화 속에서 중의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단순한 대립항의 제시가 아닌 좀 더 섬세한 이원적 구조를 상정해야만 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그의 회화 속에서 유토피아를 응시하는 주체는 욕망-좌절의 기호가 아닌 세계의 이면으로 이어지는 일종의 통로처럼 이해될 수 있다. 동구리의 얼굴은 평면적인 얼굴과 두 개의 점, 그리고 웃는 입으로 그려져 있다. 그의 머리에 나있는 열 개의 머리털은 마치 송수신기의 안테나처럼 보인다. 동구리의 '얼굴성'은 그가 바라보고 있는 회화적 이상향의 이면에 그를 만족시키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전달한다. 그는 자신의 표정을 통해 그것에 대해 '단정적으로' 확인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의 모든 감각을 동원해 그것에 대해 그가 '감지하고' 있는 바를 거듭 전하고 있다.

권기수_My favorites-a yellow boat-Silver_보드, 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3×130.3cm_2018

검은 선으로 그려진 흰색의 동구리가 보이는 '흥분' 상태는 일견 그가 비롯된 세계 -색채가 부재하는 세계-와 온갖 감각적 계기들로 가득 차 있는 회화-내-세계 간의 극적인 차이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동구리의 시선은 우리의 세계, 즉 관객이 서있는 세계를 응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동구리의 '얼굴성'은 바로 그 얼굴에 찍힌 두 개의 점이 동시에 회화-내-세계와 회화-밖-세계를 동시에 응시하고 있다는 사실과 깊이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베네치아의 르네상스 화가인 카르파치오(Carpaccio)의 그림 속 군중들 속에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인물들이 당대의 역사적 사건 속으로 관객들을 이끌고 들어가는 것처럼 권기수의 회화 속에 그려진 인물 역시 자신이 응시하고 있는 것 속으로 관객들을 '직접' 이끌고 들어간다.

권기수_Untitled_한지에 먹, 아크릴채색_210×450cm_2019

2018년부터 그의 풍경화 속에는 'My Favorite'라는 제목과 함께 '파초(芭蕉)'가 등장한다. 남방식물인 파초는 한반도에서는 다소 이국적인 수종으로 화가나 시인들의 작품 속에서 향수 혹은 외로움과 함께 나타난다. 예컨대, 1936년에 김동명이 쓴 시 '파초'는 일제 치하에서 타지를 방랑하면서 고국을 그리워하며 쓴 시이다. 즉 파초가 가리키는 것은 장소의 이격, 부재, 그로부터의 소외인 셈이다. 아마도 그것은 전면에 부각된 파초의 등장으로 함축하고 있는 독특한 '낯설음', 혹은 동경이나 묘한 이질-동질의 교차 같은 감정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 한다. 'My Favorite'라는 주제를 통해 '나는 너에 대해 거리감과 함께 깊은 공감을 느낀다'라는 태도는 친숙한 것 대신 낯선 대상을 선택하려는 기로에 서있는 양가적 주체의 상태를 보여준다. 이는 불안함이나 두려움이라기보다는 양가적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깊은 이해와 관용, 혹은 기다림과 지연의 선택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양가성이 실제로 주체의 더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더욱 근원적인 불안, 두려움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려는 의식적 노력의 결과일수도 있다. 바로 그러한 점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 권기수의 최근 드로잉 연작이다.

권기수_Untitled_한지에 먹, 아크릴채색_215×160cm_2019

최근에 권기수는 회화 속의 주체에 대한 매우 놀라운 고백을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바로 장지에 채색으로 그린 대형 '드로잉' 연작이다. 이제까지 알려진 작가의 대부분의 작품들은 캔버스에 정교하게 조정된 아크릴 컬러로 인쇄 하듯 정확하게 그린 것들이었다. 실상 공개된 드로잉이나 밑그림들도 거의 없고 대부분 완성된 최종 작품으로만 전시가 이루어져 왔다. 그런데 이번 '드로잉' 연작은 놀랍게도 커다란 붓으로 거칠고 빠르게 그린 커다란 표현주의적 회화들이다. 사실 이 작품들은 드로잉이라고 부르기에는 크기나 내용이 본격적인 페인팅에 가까워 그 점만으로도 논란의 여지를 제기한다. 작품의 주제는 바로 '동구리'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권기수의 작품에 있어 매우 중요한 논제로 다루어져야 하는 것이 바로 이 동구리라는 이름의 주체라는 사실이 이 드로잉 연작을 통해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이 드로잉들은 작가의 캔버스 작품들 속에서는 결코 밝혀지지 않을 이 인물의 이면을 매우 극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여기서 그는 비극적이고 분열적이며 커다란 고통과 모순에 휩싸여 있는 존재다. 작가는 이 인물화를 그리면서 격렬한 붓질 그리고 화면에 대한 공격적 처치를 통해 폭발적 감정을 가감없이 쏟아내고 있다.

권기수_Untitled_한지에 먹, 아크릴채색_212×160cm_2019

무엇보다도 여기서 동구리라는 순진무구한 캐릭터를 통해 구축해온 세계와의 이상적 관계는 이 폭력적이고 처절한 인물의 내면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드로잉들에서는 그의 아크릴 작품들 속에서 세계의 충만함과 선의를 대변해 온 꽃들을 다루고 있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꽃들은 격동적이고 자폐적인 몸짓들의 흔적처럼 밀집하여 반복적으로 그려져 있다. 관객들은 이러한 극적인 변화를 충격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치 이제까지의 안온한 세계관을 작가 스스로 과격하게 파괴하는 것처럼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시도가 이제까지 권기수의 작업 속에 내재해 있던 잠재적 해석의 폭을 커다랗게 확장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주체는 하나이면서 동시에 여럿이다. 주체가 서있는 곳은 여러 개의 시간이 중첩되어 있는 장소이다. 주체는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장소들을 빠르게 오가면서 그것들을 하나의 플롯으로 통합한다. 그것을 납득하는 것이 나와 세계의 분리를 멈추는 것이다. 권기수의 드로잉들은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권기수_1부_파초(芭蕉)_Permanent Blue展_아뜰리에 아키_2019
권기수_1부_파초(芭蕉)_Permanent Blue展_아뜰리에 아키_2019
권기수_1부_파초(芭蕉)_Permanent Blue展_아뜰리에 아키_2019

권기수의 작품 속에 나타나는 세계와 주체의 관계는 끝없는 열망과 몰입, 그리고 직시의 순간들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그가 자신의 풍경과 그 앞에 서있는 인물을 어떤 방식으로 그리고 있는지를 보는 것은 단순히 아름다운 화면을 바라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작가가 끊임없이 자신의 그림을 통해 이 인물의 모습을 새롭게 정의하고 기술하는 방식이다. 동구리를 통해 응시하는 파초의 모습은 그 이국적 아름다움으로 인해 그가 떠있는 유동적 공간의 불안함과 대비된다. 인물은 자칫 자신을 비추는 수면의 흐릿함 속으로 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내면에서 끓어오르며 분열을 일으키는 폭발적 정체성은 어떤 임계점 뒤에 가려져 있다. 파초는 저 멀리서 이쪽을 바라보는 인물과 관객 사이에 언뜻 공간을 허락하면서 가로막고 서있다. 그와 나는 동시에 파초를 보고 있으면서 동시에 서로를 보고 있다. 파초는 화면의 경계면이자 시선을 가로막는 모든 것들의 메타포이기도 한 것이다. 인물과 나는 새로운 계약을 맺는다. 그것은 유토피아와 현실 사이에서 파초를 키우는 것이다. 친숙하지 않은 이국의 식물. 그것은 향수와 외로움의 대체물이자 동시에 회화의 기호이기도 한 것이다. ■ 유진상

Vol.20190906j | 권기수展 / KWONKISOO / 權奇秀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