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셔나타 변주곡 Appassionata Variation

홍기원展 / HONGKIWON / 洪起元 / installation.video   2019_0907 ▶︎ 2019_1007

홍기원_Appassionata Variations 아파셔나타 변주곡_ 단채널 영상, 사운드_00:19:11_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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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원 홈페이지_www.kiwonhong.net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 / 경기문화재단_경기도_한국문화예술위원회_아트센터 화이트블럭

관람료 / 3,000원(카페 음료 주문 시 무료)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주말,공휴일_11:00am~06:30pm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Art Center White Block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헤이리마을길 72 Tel. +82.(0)31.992.4400 whiteblock.modoo.at

내적인 모순의 최대치를 향한 요구는 철학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담론에도 적용되었다. 그 최초의 사례 중 하나로 1908년 러시아의 사회민주주의 좌익 진영에서 격렬하게 폭발했던 유명한 논쟁을 들 수 있다. 논쟁의 주제는 좌파가 차르 체제의 법률에 따라 그 관할하에 치러질 선거에 참여하여 두마(의회)에 대표자를 내보낼 것인지, 아니면 차르 체제는 더 이상 정당성이 없으므로 지하에서 체제를 향한 투쟁을 벌이는 것이 더 나은지에 관한 것이었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당은 심각한 분열 상태에 빠졌다. 지하 투쟁을 단념하고 사회민주주의 당을 완전한 합법 정당으로 재조직하기를 바라는 '청산파Liquidators'와 두마를 떠나 당 전체가 지하로 내려갈 것을 요구하는 '소환파Otzovists'로 나뉜 것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레닌은 향후 기준으로 채택될 다음과 같은 해결 방안을 내놓게 된다. 두마에 대표단을 보내고, 지하에서는 그 두마를 포함한 체제 전체와의 투쟁을 실시한다. 1) ● 베조족은 사칼라바 왕국과 인접해 있었지만 치미헤티족처럼 독립을 유지했다.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베조족은 왕국 사절들이 마을에 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릴 때마다 몽땅 카누에 올라 그들이 헛걸음을 하고 돌아갈 때까지 연안에 숨어 있었다고 한다. 왕국에 굴복해버린 어촌 마을 사람은 더 이상 베조라 불리지 않고 사칼라바라 불렸다...베조족이나 치미헤티족처럼 권력을 간단히 피해갈 수 없는 사람들의 경우, 권력을 말 그대로 화석화시키는 것이다...탈주 이론은 우리는 직접 대결이 아니라 파올로 비르노가 '참여적 철수'라 부른 수단을 통해 자본주의와 자유주의 국가에 가장 효과적으로 대항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참여적 철수'란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는 이들의 집단 이탈을 일컫는다. 가장 성공한 민중 저항이 바로 이런 형태였다는 사실은 역사 기록을 한번만 살펴봐도 알 수 있다. 2) ● 우리는 두 남녀의 몸을 밀착시킨 다음 양쪽에서 눌러보기도 했고, 서로 살갗이 닿게 한 다음 서서히 몸을 달구어주기도 했고, 알코올로 몸을 마사지해주기도 했고, 계란을 탄 붉은 포도주를 먹여보기도 했고, 고기를 먹이고 샴페인도 마시게 했고, 조명을 바꿔주기도 했다. 그런데 어떻게 해도 두 사람은 도무지 흥분하지 않았다...이 실험은 불행이 일정한 도를 넘으면 더 이상 사랑을 작동시킬 수 없다는 걸 말해주는 것일까? 3)

아파시오나도는 몬토야 호텔에 머문다 ● 홍기원 작가에 대해 글쓰기로 마음을 먹은 건 말(馬) 때문이다. 말에 대해 다루는 작가가 궁금했다. 이어 다음 들어온 어휘는 열정, 아파셔나타(Appasionata)다. 흔히 「열정소나타」로 불리는 베토벤의 「열정 Appasionata」이 빛 고운 털, 쇠 박차, 질주 곁에 붙었다. 말과 열정이 만든 각도가 하염없이 벌어지려고 요동칠 때 그는 여기에 성난 황소를 놓아 벌어지던 선분의 각을 가로막았다. 말, 열정, 황소의 유사 삼각형이 그려졌다. 어느 날부터 일상에서 읽는 글이 말, 열정, 황소와 엮여 제각기 불쑥 솟아오르곤 다시 하강했다. 예를 들면 이런 구절 말이다."그는 사람들을 억지로 자극해―말위에 앉혀놓고 말을 놀라게 해 갑작스레 질주케 한다든지, 급히 달려가던 사람을 느리고 게으른 말 위에 앉힌다든지, 혹은 타고 가던 마차에 서로 다른 속도를 가진 두 마리의 말을 매단다든지―그가 말하고자 하는 실존의 '정열'을 이해할 수 있게 하고 싶다고 적었다." 4) 정열을 이해하게끔 자극하기 위해 요동치는 말에 대해 적고 있는 이는 철학자 키르케고르(Kierkegaard)이다. 『살구 칵테일을 마시는 철학자들』의 저자 사라 베이크웰(Sarah Bakewell)은 키르케고르에 대해 그는 '대단히 성가신 사람이었다...일반적으로 무슨 일이나 어렵게 만들었다'고 쓴다. 무슨 일이나 어렵게 만드는 이들이라면, 철학자에 덧붙여 내가 아는 예술가들의 이름이 떠오른다. ● 뚜렷한 이유보다 먼저 굴러 들어오는 생각들이 있다. 말하자면 홍기원 작가에 대해, 전작들과 이번 전시에 대해 읽고 보고 듣는 시간들에 내 주위를 서성이다가 자리를 차지한 세 개의 선택과 같은 이야기들이다. 혁명가 레닌(Lenin)의 선택은 그 뜨겁고 냉철함에서 드라이아이스를 손에 꼭 움켜쥘 때의 화상 같은 동상의 통각을 전한다. 마다가스카르 베조족의 선택은 분연히 피함으로 맞서는 무림 고수의 전설이 구술에서 기록으로 옮겨진 듯하다. 히틀러 치하의 강제수용소의 생체실험의 한 단면은 실험의 진술이 감히 넘나들지 못하는 사랑과 존엄의 마지막 선택이다. 모순이, 회피가, 절망에서 온 낙담이 선택이 되어 영역을 구축한다. 세 개의 선택은 제각기 지분을 주장하며 요동쳤지만 어느 정도 시간을 묵혔더니 서로의 영역을 수긍한듯하다. 이제 홍기원 작가에 대한 글에 시대를 달리한 세 개의 선택이 어떻게 연루되었나 헤아리는 게 몫일까 싶지만 사실 자신은 별로 없다. 다만 그가 선택한 기억과 지형을 더듬으면서 매끈하지 못할 글을 잇는다. 그가 『아파셔나타 변주곡 Appassionata variations』에 이르기까지의 포석이 내게 엉뚱한 선택들을 떠올리고 서성이게 만들었다. ● 그는 내게 팜플로나(Panplona)의 산 페르민(San Fermin) 축제를 촬영한 「아파셔나타 변주곡」 편집전의 영상을 보여주며 일주일간의 축제를 묘사했다. 그에게서 허밍웨이(Hemingway)―그는 활자로 찍혀 돌아다니는 어니스트 헤밍웨이란 이름 대신 허밍웨이라 말했다―의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를 소개받고 읽다보니 그가 들려준 황소가 질주하는 축제는 헤밍웨이의 소설과 섞여 수 세기에 걸쳐 팜플로나를 찾았을 아주 많고 오랜 이들과 뒤섞이고는 분별없는 상태가 되었다. 「아파셔나타 #3. 마이테민두」의 말이 쓰러지고 사람과 뒤섞여 요동치는 스페인 북부 사부세도(Sabucedo) 야생마 축제의 광경도 용소에 빨려 들어가서 어느새 몸집을 키웠고 그의 기억, 나의 연상, 소설, 작품, 그리고 그보다 더 오랜 이야기는 육중한 덩이가 되어 박(剝)으로는 도무지 펼쳐 전하지 못할 하나가 되었다. 그의 작품들을 잘 도축해서 부위별로 이름표를 붙이는 친절함을 내어놓는 데 성공하지 못할 것이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뒤따르며 정리정돈하면 퍽 친절한 글이 되겠지만 그보다 더 얘기하고 싶은 건 내가 느낀 어떤 고혹에 대해서다. ● 나는 그에게 이번 전시에 40여개 정도가 설치된다는 주물글자 솔라노이드 작업 「untitled」의 시작에 대해 물었다. 돈, 사회적 지위, 미워하는 마음, 사랑.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가끔, 고통, 실패, 상상, 불확실한, 미래, 마이테민두 등 점차 어휘는 늘어갔다고 한다. '현대적 신화'같은 조어처럼 오늘에 정박해서도 연원은 오래이니, 글자 하나하나의 시대 읽기에는 늘 확신보다 의문이 동반되곤 한다. 그중 마이테민두(Maitemindu)가 바스크의 고어로 '사랑과고통'이 떨어짐 없이 한 몸임을 의미한다고 들려줄 때 마이테민두, 바람결 같은 말이라 곱씹게 되었다. 『향연』을 읽으며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가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었던 에로스의 시대를 읊을 때 연상한 둥근 공의 이미지가 마이테민두와 포개어진다. 분별없는 시절이 마냥 옛 것이 아닐텐데 오늘 우리는 정념을 솎아내고 무모함을 거세한다. 사랑과고통이 한 몸이자 삶의 혜안이였을 옛 바스크인들의 지혜가 언제 내 것이 될 수 있을까. 이번 전시 『아파셔나타 변주곡』이 고혹적인 건 오늘에 새겨지는 옛 이야기로 짙은 호수가 되었기 때문이고 하나를 향해가는 집중 대신 서사가 요동치며 울기 때문이고 이 참기 어려울 산란을 그가 감내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라고 짐작해 본다. 그가 글랜 굴드(Glenn Gould)가 연주한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Goldberg Variations BWV 988」을 소개할 때의 확신―성공의 확신보다 이제 앞으로 벌어질 행위에 대한 확신―이 퍽 마음에 들었다. ● 전시실에는 기어이 경마장의 경주마 출발대를 실물대에 가깝게 만들고 조여 오는 출발음의 찰라 와락 열리는 출발대가 여기에 있다. '있다'는 표현만으로는 모자라다. 있고 말았다라고 고쳐 쓴다. 사실 나는 실물대 작품이 별로다. 실물대보다 작아도 별로고 커도 별로다. 거기에다가 움직이는 것 또한 진부하다고 생각하곤 한다. 비톨드 곰브로비치(Witold Gombrowicz)의 『페르디 두르케』에서 누가 더 인상을 잘 쓰나 결투할 때 웃는 입에 두 손가락을 넣어 찢는 시늉을 하며 가장 흉측한 얼굴을 드러내는 아이들이 떠오른다. 묘사한 것 마냥 상상으로 잠시 건너뛰었다가 이내 현실로 돌아와 반성하지만 고개를 가로 젓는다. 예술에서 닮음은 옛것이라 학습 받아서인지 고전으로 소급해서까지 불경스럽게는 굴지는 않지만 시대를 공유하는 이들에게서만큼은 고약하게 단호해지고 만다. 그런데 출발대가 여기 있고 말았으니 그토록 재현 혐오의 시대에 당신이 이 작품을 위한 자리를 손수 정성들여 마련해야만 했다면 이제 그 얼굴을 마주하고 반응해야하는 건 다시 내 차례다. ● 출발대가 마무리되고 있던 작업실을 찾았을 때 그는 에어 컴프레서의 과한 소음과 진동 속에서 갈래갈래 뽑아져 나온 고무 튜브와 압을 조절하는 나사, 덜컹이며 작동하는 작품을 보여주며 전시장에서는 에어 컴프레서 소음을 낮출 것이고 이 튜브는 푸른색으로 변경 될 거라고 설명했다. 유기체적 구성이어야만 원활히 작동될 출발대가 작동하는 와중에도 푸른색 튜브의 공기줄은 알코올 냄새가 코를 찌를 수술대의 현장으로 생각을 전이시켰다. 마취에 쓰러진 말은 앞다리와 뒷다리가 한 쌍이 되어 갈퀴에 꾀여져 몸통이 뒤집혀 수술대 위로 옮겨 내려진다. 수술실에서 말은, 말 아니라 인간이라도 다를 바 없을 몸뚱이로 거기 있다. 작업실에 가기 전 작가의 「아파셔나타 #2, 오필리아」에서 본 장면이다. 이 영상에는 유능한 기수 클라우디네 Claudine Casal 의 직업 이력과 낙마 사고, 재활 후 복귀에 대한 단편적인 이야기가 담겨있다. 클라우디네는 오른 다리의 수술 자국을 보여주면서도 기어이 다시 경마장으로 돌아왔다. 철심이 박혀 있다는 작가의 허리를 생각하면 욱신거리는 세계에 발을 걸친 기분이지만 그는 이 세계를 피하지 않는다. 말도, 인간도 냉한 금속성 곁에서는 한낱 몸뚱이일 뿐이고, 질주하는 말과 소의 속도에도 인간은 몸을 엉겨 무리가 되었다. 경마, 기수, 수술, 인공수정, 야생마, 축제. 단편이 엉겨 세속적 숭엄이 구체성을 띤다. ● 홍기원 작가에 대한 자전적 소개에는 십여 년 전 낙마 사고와 하반신 불구를 극복하기 위한 재활 기간이 거론되곤 한다.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이 사고 전에 머물었던 중국이어서 그곳 아닌 영국에서의 유학 생활을 택했다고 하는데, 그가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은 중국뿐만 아니라 공백으로 괄호 쳐진 병상 또한 있다. 말이 아니어도 되기에 이제 드디어 말로 발현되는 세계, 이 세계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두 개의 세계를 와락 품었다. 물론 오브제의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유사 디즈니랜드를 구성했던 초기 설치 작업들에서는 장애와 재활에 대한 기억이 삽입되었다. 이후 오브제의 움직임 대신 환경에 반응하는 신체적 요소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퍼포먼스적 작업에서도 체현된 기억이 드러났다. 2016년부터 시도하는 「아파셔나타」 연작은 스치면서도 부러 드러내지는 않던 영역이 구체적으로 선택되었다. 그가 과거에 떠나왔던 세계이자 이제 담담히 마주보기로 마음먹은 세계가 숙제로 다가와서 굳은 살처럼 몸이 되었다. 울렁거렸을 속을 다독이고 변주에 나선 지금, 두려웠을 그의 선택이 부럽고 인간도 동물도 몸뚱이임을 아는 연약함의 강도에 아득하다. ● 경마라는 도박으로 인해 말도, 사람도 피할 수 없는 부조리함이 「아파셔나타」의 주제라고 여긴다면 이는 권리가 주창된 세계에 편입되어 안착된 생각의 귀결일 뿐이다. 13세기부터 지속되어 온 산 페르민 축제를 야생과 겨루는 인간의 무모함으로 한정해서 해석하기에는 설명 불가능한 삶의 표면과 이면, 사회적 압력과 해방의 순간들, 질서와 이 질서를 구동시키는 기제들이 창백하게 흩어질 뿐이다. 꿰뚫기보다 내려놓음이 수순이라 여기게 되는 찰라는, 나는 분별을 포기했는데 그 짓이 박피에 불과하다는 자조 때문이다. 나는 개인과 사회의 심연을 거론하지 않겠는데 그건 추상적이든 구체적이든 이미 내 것인 통념이 한심해서다. 자연과 문명을 적으면서 이 위로 지우려는 선을 거칠게 긋는 이유는 황폐한 자연이자 버려진 문명이 아닌가 반문해서다. 세계는 단도 하나로 쪼개지고 고결한 선택지보다 끝내 몰려버린 모퉁이에서의 눈 깜빡임이 전부가 된다. 눈 깜빡임, 손끝 까딱거림 정도의 운신에서 한갖 자유롭다면 믿을 수 있을까. 믿어야만 할까. ● 헤밍웨이는 투우의 세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는다. '투우에는 흔히 황소 영역과 투우사의 영역이 있다고들 한다. 투우사가 자신의 영역에 머물고 있는 한 비교적 안전하다. 소의 영역으로 들어갈 때마다 그는 큰 위험에 빠진다.' 5) 이 영역을 넘을 때 소가 죽고 투우사가 산다. 투우장에서의 선택은 이미 행위 이전에 있다. 삶과 죽음은 한 번의 빗금 진 자상으로 치명적이게 갈린다. 영역을 넘어, 위험에 빠질 때에야 내가 살고 소가 죽는 선택의 이면을 감내하게 되고 아파셔나타, 열정이 선택의 내용이 된다. 작가는 "나를 조종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되뇌이고 우리의 모습을 묻고 있으나 이 질문이 소강되어 감을 감지했다면 내 큰 오해일까. 그 무엇이라도 감히 나를 엄습할 때 한참을 웅크리고 사위의 축축함을, 혹은 바스러질 정도의 건조함을 피부로 느끼고서 어떤 선택을 하고 만다. 레닌처럼 지략가라면 좋을텐데. 베조족처럼 명분이 근사하면 나을텐데. 가장 슬픈 건 사랑해도 사랑하지 않기로 선택한 실험실 연인의 선택인데 이들은 하지 않음으로 사랑을 선택했다. ● 글을 어떻게 정리해야할까. 아파시오나도(Appasionado)는 투우에 열정을 보이는 사람을 말하며 훌륭한 투우사는 해마다 스페인 팜플로나의 몬토야 호텔에 머문다고 한다. 열정이 없는 투우사들의 사진은 이 호텔 책상 서랍에 처박혀 있다가 쓰레기통에 던져진다. 아파시오나도는 일상이 열정이지는 않다. 그러나 매년 몬토야 호텔을 찾고 이들이 이 호텔에 등재된다. 전시는 순간이다. 일주일의 축제와 참 비슷하다. 철학자만큼 성가신 이들이 호텔에 모여 아파시오나도임을 서로 알아보고 인사 나눈다. 한결같은 열정은 미친 짓이다. 열정이 빛바래지 않도록 변주한다. 글랜 굴드가 사랑받듯이. 하지만 모두가 사랑하지는 않듯이. 그런 일들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 ■ 김현주

* 각주 1) 보리스 그로이스, 『코뮤니스트 후기』, 김수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7, pp. 57-58. 2) 데이비드 그레이버, 『아나키스트 인류학의 조각들』, 나현영 옮김, 포도밭출판사, 2014, pp. 114-117. 3) 알렉산더 크루게, 「어느 사랑의 실험」, 『창비세계문학 독일-어느 사랑의 실험』, 임홍배 엮고 옮김, 창비, 2010, pp. 294-295. 4) 사라 베이크웰, 『살구 칵테일을 마시는 철학자들』, 조영 옮김, 이론과실천, 2017, pp. 34-35. 5) 어니스트 헤밍웨이,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김욱동 옮김, 민음사, 2018, pp. 323-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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