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회 종근당 예술지상

유창창_전현선_최선展   2019_0919 ▶︎ 2019_0930

초대일시 / 2019_0919_목요일_06:00pm

주최 / (사)한국메세나협회 주관 / 아트스페이스 휴 후원 / 종근당

관람시간 / 10:30am~07:00pm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SEJONG CENTER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175(세종로 81-3번지) 1관 Tel. +82.(0)2.399.1000 www.sejongpac.or.kr

세속과 탈속 그리고 세 개의 시선 ; 유창창, 전현선, 최 선세속과 탈속 사이에서 모든 것이 세속화되는 시대다. 이런 시대에 예술은, 회화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회화의 본질적인 문제를 함께 나눌 수 있는 '회화'란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고 어떤 회화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그것에 대해 대화를 나눠야 하는가? ● 예술이 특정 개인이나 계급, 또는 특정 국가나 이념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예술은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세속화와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며 이상적인 균형을 잡으려는 힘이다. 이러한 활동은 존재의 내부로 깊이 또는 외부로 높이 시선을 던진다. 사람들은 예술을 통해 현실의 한계와 제약을 벗어나거나 현재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초월하려 한다. 예술은 표현과 형식이 역동하며 교차하는 세계이다. 그것을 통해 고도로 초월적인 영역과 가장 일상적인 생활과 현실의 문제를 결합하려 한다. 예술은 현실감각과 생동감을 잃지 않고 인간의 보편적 문제를 다루는 가장 탁월한 도구이다. 세속(世俗)과 탈속(脫俗) 사이에서 무수한 실패와 오류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완전한 이미지를 표상하려는 사람들의 존재의 방식이다. 한 개인, 한 존재는 결코 계량될 수 없고 우리의 문화에서 객관화의 한계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영역이다. 모든 것이 관리와 예측이 가능해지는 빅데이터화하는 세계, 자본화와 상품화가 영혼의 영역까지 치밀해지는 세계 속에서 예술은 인간의 본질, 삶의 궁극적 의미, 좋은 삶, 충만한 순간을 감각하고 지시하려 한다. 예술가들은 부표처럼 떠다니는 것이 사람의 감정과 마음과 영혼이라면 그것을 하나의 이미지로 표상하려 한다. ● 미술사를 통해 그리고 미술 현장에서 우리는 예술과 문화도 혁신, 새로운 운동과 변화가 없다면 반드시 퇴보한다는 것을 보아 왔다. 뛰어난 젊은 세대가 등장하지 않는다면 더더욱 퇴보한다. 오랜 시간 속에 예술은 마치 예측불가능하고 비합리적인 인간의 본성을 따르듯 한없이 느리다가도 한없이 빠른 운동을 하며 나선운동을 하듯 앞으로 나아갔다가도 거꾸로 후퇴하기도하고 갑자기 툭 튀어 오르기도 하는 등 다양한 형태의 비가역적 운동을 보여준다. 이러한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종잡을 수 없는 과정과 유려한 발전의 과정이 뒤섞여 있는 일상을 만나게 된다. 새로운 예술, 창조와 혁신, 놀라운 상상과 표현은 결코 세월이 흐르며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 유창창, 전현선, 최 선 세 작가의 작업은 각자 자신의 시선과 노선을 따라서 20세기 미술가들이 도전해온 현대 예술의 모험과 조우한다. 미술사적 의미와 형식을 이해하고, 동시에 전통적인 형식의 수용과 변용을 통해 현대 회화의 본질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독자적인 미학에 기반 하는 개별자의 세계라는 점에서 철저하게 탈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어떻게 철저하게 탈역사적인 세계가 의미심장한 역사적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가? ● 현대회화는 전통적인 정의(定意)와 규정을 벗어나려 한다. 새로움의 연속, 벗어남의 무한반복은 현재에도 창작의 의미있는 태도이자 형식이다. 하나의 세계이자 비전으로서의 현대 회화의 이미지는 도상적 기호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하나의 목적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그 목적을 부정하는 이중의 태도, 긍정과 부정이 동시에 발화(發話)하며 학습된 진위 판단을 전복하는 힘을 지닌다. 우리는 종근당예술지상 초대 작가들의 작업에서 모든 것이 와해된 세계의 맨 밑층에서 기초를 하나하나 놓으려는 의지를 찾을 수 있다.

유창창_야.왜 Hey.Why 04_캔버스에 혼합재료_145.5×97cm_2019

유창창 ; 명랑의 역설, 명랑 회화 ● 작가는 말한다. "나는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그린다. 가장 피하고 싶은 것, 마주치고 싶지 않은 것, 사라지거나 멀어져 다시는 볼 수 없는 것을 그린다. 그러면 다소 안도감이 들고 살기가 편해진다. 마치 대사를 미처 완성하지 못한 채 죽은 만화가의 비어 있는 말 칸을 완성하는 기분으로 그린다....선악을 초월한 아름다움, 성욕과 불안, 세포분열, 우주의 팽창처럼 무한에 대한 공포, 깊고 어두운 바다 속, 육체적 고통, 로맨스의 어떤 찰나, 옥상에서 애인과 함께 바람을 맞는 상상. 나에게 그림은 어차피 다 상상이고 상상화다. 상상은 언제나 시끌벅적하고 무질서하다. 그것이 좋다. 추가로 억울하고 분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과 적의를 갖지 않았는데도 적의를 만드는 멍청한 시스템에 대한 분노도 그림을 그리는데 한몫한다."

유창창_야.왜 Hey.Why 05_캔버스에 혼합재료_97×145.5cm_2019

유창창 작가의 작품 '야,왜' 시리즈는 사람인지 아니면 무엇인지 모를 것들이 나를 반복해서 호출하고 있다. 그냥 '야', '너' 등으로 부르며 결코 나의 정체성을 표상하는 고유한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그것은 예고 없이 나를 부르는 결코 환영하지 않는 어떤 존재를 떠올린다. 불편하고 갑작스런 순간을 표현한다. 그림에는 정체불명의 인물(존재)이 등장한다. 눈 코 입이 없는 얼굴이거나 마치 외계인 같은 얼굴, 초현실적이며 기형적인 표정과 함께 '시끌벅적하고 무질서한' 구성을 보여준다. 또 다른 작품은 꼬물꼬물 화면을 가득 메운 정체불명의 생명체를 그리지만 몇 년째 미완성이다. 이러한 작업이 암시하는 뉘앙스는 '웃픈' 또는 '희비극'적인 것이다. 작품은 한 점 한 점이 모두 개별적이며 독자적인 사건과 이야기를 표현하고 있어서 작품들 간의 표면적 연결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작가가 일관되게 제시하는 것은 우리의 인생 또는 세상살이란 부조리하다는 것이다. 너무도 부조리하여 하나의 가치나 논리로 엮을 수 없다. 작가가 회화작가로 주목받기 전에 우리나라의 몇 안 되는 명랑만화의 대표 작가라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그의 회화가 보여주는 세계는 명랑만화의 세계와 다르지 않다. 명랑만화의 세계란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우연과 우연의 연속, 황당한 사건과 이야기전개를 반복한다. 이 세계의 주민은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과거, 현재, 미래가 아무 연관관계가 없다. 인간은 이러한 세계에 던져져 있다. 이 세계의 주민은 순간을 살아간다. 실수와 오류가 넘쳐나고 어떠한 골칫거리도 아무리 복잡하고 거대하더라도 갑자기 해결된다. 또는 해결되었다고 스스로를 기만한다. 그리고 마치 아무 문제도 없었다는 듯 오늘이 시작된다. 명랑한 세계는 역설적으로 전혀 명랑하지 않은 인간의 본질, 사회의 본질을 노출한다. 밝은 미소로 표정관리를 해도 공공연히 회의적이며 냉소적인 비관적 세계관을 보여준다. 이러한 태도는 현대예술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유창창 작가에게도 이러한 면을 찾아 볼 수 있다. '아! 인간이란 또 인간이 이루어낸 사회란 어쩌면 이리도 부조리하고 황당무계한가!' 인간은 신에 가까운 히어로이거나 악마에 가까운 빌런, 또는 터무니없이 무능력한 겁쟁이이거나 소심한 중산층의 세계이다. 차분하고 합리적인 토론과 담론이 실종된 지 오래된 명랑한 세계이다. 유창창 작가의 세계는 한없이 우연적이며 가벼운 사건과 이야기의 세계에서 한없이 중력이 무거운 인간의 내면과 심리가 꿈처럼 만화처럼 아무 문제없이 동거하는 세계이다.

전현선_열매_캔버스에 수채_162.2×130.3cm_2019

전현선 ; 산 또는 불가해한 뿔 ● 만물과 대화할 수 있었던 사냥꾼이 어느 날 세상과 단절된 일종의 공황상태. 평소 속삭이며 길을 알려주던 별도 바람도 흙도 나무도 말을 건네지 않는다. 미궁에서 길(의미)을 잃어버린, 아니 길을 잃어버려 모든 곳이 미궁이 된 세계에서 의미를 어떻게 다시 세울 수 있을까? 그림은 메모라는 작가의 말을 확장하면 그림은 만물이 제자리를 잃어버린 세계의 메모가 된다. 다양성과 복잡성을 담은 그림 속 이미지들에 대한 작가 자신의 진술은 요컨대 그림은 메모이며 사고와 의미의 연속이다. 고도로 관념적이다. 작가의 작업은 일관되게 회화의 관념성 또는 형이상학적 특징을 보여준다. 일상의 풍경을 닮고 있지만 실상은 작가의 의식상에 연상되는 상징의 행렬이 만들어내는 풍경이다. 연극의 무대미술과 같은 연출과 현재의 평범한 풍경과 중세 서양의 성화이미지가 꼴라쥬되기도 한다. 작품 곳곳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원, 삼각형, 원뿔, 삼각뿔, 육각형의 형태로 등장하고, 마치 신의 은총 또는 이성의 빛, 기하학적 도형과 또 그러한 시각으로 모든 것을 알았고 이해했다고 믿었던 세계가 이제 그림 속에서 연명하며 제 생명을 다하고 시체처럼 또는 지난 시대의 유물처럼 남겨진 풍경이다.

전현선_위 아래의 모양_캔버스에 수채_162.2×130.3cm_2019

어떤 주제나 문제, 소통이 용이한 일상의 사건이나 공감을 다루지 않는다. 그림 속 이미지는어떠한 것도 우리의 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 자신에 대해 어떠한 구체적인 정보도 주지 않는다. 전현선 작가에게 회화는 기호와 상징들로 조직되고 채워지는 풍경이다. 어떤 이미지이든 의미심장한 상징이 될 수도 있고 또는 정교하게 그려져 있으나 아무 의미없는 이미지도 있다. 작가의 작업노트를 고려하면 작가가 만든 세계 또는 세계관을 구축하며 오늘날 회화의 존재 이유를 모색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작가는 "세상에는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의 그림은 어떤 흐름을 가지고 흘러간다. 그 속에는 많은 사물들과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원래의 의미를 벗어 던지고 화면 속에서 새로운 관계, 새로운 위치를 잡기 위해 노력한다. 나는 그들을 가지고 장면을 구성하면서 나의 회화 안에서만 기능하는 상징체계를 만들어 나가려고 한다..." '뿔과 대화들'이라는 제목의 노트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뿔이 등장하고 그 정체와 의미를 알 수 없으니까 그림 속 원뿔은 본래 신비한데 자신의 그림에 우연히 등장하기 때문에 더더욱 신비하다고 말한다. 또 이름 없는 산은 애초부터 이름이 없었는지 아니면 너무 다양하게 많은 이름으로 불려서 이름이 없는 건지 모르겠다고 한다. 작가는 그 산의 이름을 찾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의지와 힘은 어디서 유래하는가? 타자와 단절된 철저하게 고립된 개인의 비극에서 벗어나 새로운 기호와 상징의 세계를 구축하는 기이한 역설이다. 이것은 마치 신화 속 뿔이 작가에게 비의적으로 전해준 신비한 비전일까? ● 아이러니하게도 작가는 마치 생명이 고갈된 오래된 회화의 형식과 전통을 그대로 사용해서 새로운 회화의 길을 모색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스 신화에서 유일한 구명줄을 제공하는 아리아드네는 정작 주인공을 함정에 빠뜨린 미노스왕의 딸이듯. 의미의 실종, 기의와 기표가 번지수를 잃어버린 이상한 세계에서 회화란 인간이 마주하는 거대한 문제를 가장 무용하며 가장 내밀한 사적인 세계를 통해 길을 찾아가는 '아리아드네의 실'이 될 수 있다.

최선_오수회화 Wastewater Painting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6×49.9cm×2_2019

최 선, 예술과 사회 사이에서 ● 최선 작가는 살아가면서 미술이 할 수 있는 일, 미술의 사회적 의미와 기능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왔고 미술을 매개로 개인이 사회와 상호수렴하는 작업에 몰두해왔다. 작품마다 그 작품이 제작된 시기의 현실이 반영되고 그것이 표현형식의 실험과 가능한 섬세하게 직결되도록 해왔다. 다양한 프로젝트를 통해 관객이 창작과정에 참여해 작품의 일부를 함께 구성하기도 했다. ● 작가는 2011년 구제역이 발생했을 때 정부가 구제역청정지역 유지를 위해 330만 마리의 돼지를 살처분하자 작가는 돼지 기름으로 화이트페인팅을 그렸다. 관객이 작품에 가까이 다가가면 돼지기름이 녹아내린다. 구미시에서 화학공장이 폭발했을 때에는 공중에 다량의 불산이 퍼지자 거기에 흰 천을 설치해둠으로써 무색무취무형의 질료(불산기체)를 재료로 한 페인팅을 제작했다. 이 '화이트페인팅'은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은 그림이었다. 2014년부터는 남북, 좌우 등 현대 한국인이 평균적으로 경험하는 갈등과 긴장, 공포를 극복하고자 사람들이 입으로 숨을 불어서 그리는 나비 페인팅을 제작하였다.

최선_팬케잌 Pancake_골판지에 팬케잌크림_158×110cm_2019

작가는 표면적으로는 회화의 형식적 관습을 따르면서 다양한 사회적 또는 정치적 메시지를 담으려 했다. 작가는 예술 그 자체의 문제와 긴장을 유지하면서 사람과 사람의 의식이 예술과 관계 맺는 방식과 그 의미를 창작의 방향, 창작의 과정으로 삼고 있다. 미술을 통한 사회비평과 저널리즘의 지평을 만드는 것으로 보인다. 사회적 관계와 의미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작가의 관심으로부터도 멀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예술가가 곧 사회적 존재, 공공적 존재와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인류에 봉사하는 공무원으로서 예술가를 말한 앙드레 말로의 시각과 연결된다. 최선작가는 이러한 관점을 다소 우직하게 견지한다. "철이 들고 보니, 물감으로 환영의 세계를 다루는 작가 중에 본 모습이 때때로 무서울 정도로 위선적인 경우를 종종 보게 되었고, 미술작품이라는 물질 덩어리가 항상 작가 정신의 참된 표상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물감을 가지고 그럴듯한 시각적 환영을 만들 수 있는 소재로 거짓된 감동을 연출하는 경우도 종종 목격했다. 환영을 다루는 작가들을 모함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단지 나 스스로는 그런 작가가 되지 말아야겠다며 주의해 왔다." 이런 작가의 진술은 고전적인 엄격한 자기 성찰적 인간으로서의 예술가 인식을 보여준다. 예술가와 작품의 관계에 대한 작가의 인식은 작품에 보다 분명하고 엄격한 개념화를 통한 작업을 진행한다. 작가의 표현방식과 재료 선택은 결코 우연한 발상이 아니라 다양한 측면을 고려한 전략적 관점에서 이루어진다. 그의 회화는 애매모호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주관주의 미학과 거리를 두고 이미지의 환영을 비판적으로 거부하고 이미지의 정치경제학적 또는 사회적 맥락을 정교하게 제시하려고 한다. 작업과정에 무엇보다 일관성이 더 중요해진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작품과 작가가 별개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연결되며 미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분리할 수 없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작가의 못쓰는 기름이나 오물, 오염된 공기를 예술작품의 재료로 사용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작가는 개인의 가장 내밀하며 사적인 세계에 집중하는 예술과 사회 속의 인간이라는 보편적인 문제 사이의 긴장과 균형을 맞추려 노력한다. 최선 작가는 예술과 정치사회, 정치경제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예술사회학과 예술심리학의 성과를 수용하는 입장을 보여주며 개념미술과 회화의 전통적 재료와 형식이 교묘하게 결합하며 예술의 현실 실천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의 세계에서는 예술이 곧 도덕을 경유하며 펼쳐지는 독특한 사회적 실험이자 실천이 된다. 최선 작가의 창작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재료는 아마도 '한줌의 도덕'일 것이다.

세 개의 시선 ● 한 작가의 창작과정을 유추해보면 창작이란 그것이 공중(公衆)에 알려지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아닌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한마디로 '없음' 또는 '무의미'한 것이다. 정신적으로건 또는 신체적으로건 강렬한 에너지가 작동하면서 표출되는 것을 모든 예술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보편적인 '이해'를 넘어서 바로 그 작가 개인의 내면에서 격렬하게 투쟁하며 표현되는 것을 '느끼는 것'은 수용자들에게도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요구한다. ● 종근당 예술지상의 작가들은 우리 앞에 던져지는 여러 의문과 선택의 기로에 서서 같은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보려고 한다. 유창창, 전현선, 최선 작가 3인은 각자의 시선과 관점을 견지하며 이미지를 연출하고 표현하며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세 작가를 뭉뚱그려 일반화할 수 있는 미적 형식이나 보편성을 찾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혹 어떤 공통점을 직관할 수 있다하더라도 그것이 이들의 작품을 감상하고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요소인 것도 아니다. 작품을 보는 것은 철저하게 개별적이며 특별한 사적 존재와 세계가 만나는 일이다. 전시를 통해 우리는 이러한 내밀하며 정교한 과정을 감각하고 경험하고 인식하는 정신의 운동과 조우한다. ■ 김노암

Vol.20190919a | 제6회 종근당 예술지상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