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id

박경작展 / BAHKGYEONGJAK / 朴耕作 / painting   2019_0920 ▶︎ 2019_1002 / 월요일 휴관

박경작_Void_캔버스에 유채_130×162cm_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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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작 홈페이지_www.bahkgyeongjak.com

초대일시 / 2019_0920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그리다 GALLERY GRIDA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12길 21(창성동 108-12번지) B1 Tel. +82.(0)2.720.6167 www.gallerygrida.com

세속으로의 은둔, 회화로의 망명 ● 주지하듯이 '회화'는 낡고 늙은 것의 위용이나 한계, 심지어 그것의 '급진성'을 함축하기에 복잡하게 말하게 되는 대상, 쟁점이다. 지금의 변화나 새로움을 반영할 매체로 보기엔 회화는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현대적이고, 아우라 유령을 소환하면서 자본과 결탁하고, (미술)제도의 보수성을 방증하는 범례로 추대된다. 대학의 모더니즘 수업에 볼모인 캔버스는 학교 안 화방에 쌓여 있고 수업 후에는 페인트를 뒤집어쓴 채로 학교 후미진 곳에 버려지고, 극소수의 회화만이 고가에 팔리고, 예술가의 환영적 이미지를 선망하는 사람들이 회화를 흉내 내고, 화가란 이름은 떠올리자마자 흑백 영화 속 죽어지지 않는 명배우들처럼 그리워진다. 그리움은 되돌릴 수도 대면할 수도 없는 진실을 대하는 한 가지 방식에 불과하고, 어쩌면 악취와 오해와 왜곡을 은폐하는 싸구려 향수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을 보고야 말겠다는 용기나 진실을 감당할 수 있다는 호언이 없다면 그리움이 우리를 용서할 것이다. 그럼에도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의 주기적 대체나 변전(變轉)이 회화를 되살리고, 막다른 곳에서 회화는 또 돌아오는데, 새로움은 이미 항상 낡고 늙은 것이 쓰는 가면이고, 예술은 진보의 환영과 나란히 그것의 기만과 불가능을 증언하는 삶의 진실로서 기능한다. 인간의 죽음과 더불어 그 역사성을 종료한 듯 보이는 예술은 '비인간'―동물이나 좀비나 사이보그나 기계 같은―에게서 인간의 흔적을 뒤지거나 인간성을 모색하는 포스트-휴머니즘과 연동하면서 계속 의심과 질문을 던지는 성찰성을 고수하지 않는가? 그렇기에 작가성, 질, 해석학과 같은 현대적 전제를 지우고 예술로서의 회화를 유지할 수 있다면 회화를 단지 현대적 매체로 한정 짓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누가 왜 어떻게 회화를 보존·유지·반복하는가를 말하면서 어떤 하나의 회화의 구체성이나 맥락을 드러낸다면, 어쩌면 회화는 기존의 내재적, 자율적 구조 바깥에서 여전히 유효한 매체이자 동시대적 텍스트로서 전유될 수 있을 것이다. 그 회화(The)가 아니라 어떤 하나의 회화(a)를 정당화할 수 있다면, 차이의 회화, 회화의 환원 불가능한 단수성을 말할 수 있다면, 회화는 내파되면서, 그 환영적 위용을 잃으면서도 자신의 최소한의, 희미한 가능성을 드러낼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한 작가의 삶, 일상을 담지한 회화, 평범하고 사소하면서도 회화인 그런 회화를 이제 이야기하려고 한다.

박경작_Black Landscape_캔버스에 유채_91×116cm_2019

박경작은 나와 13년 정도를 알고 지내는 화가이다. 대학에서 선생과 학생으로 만난 뒤 그가 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외곽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그림을 그리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는 그의 작업의 '사적' 동기나 문제의식을 그의 지인들만큼은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관계이다. 낡고 늙은 매체인바 회화를 고수·고집하면서 자신이 어떻게 미술계에서 고립되는지, 지배적 회화가 어떻게 보수화·경전화되었는지, 어떻게 서구의 회화와 이곳의 회화가 다른 맥락, 메커니즘 안에서 작동하는지를 알고 있는 박경작은 그렇기에 자신의 회화를 단지 예술가의 나르시스트적 자의식에 부착시킨 채 형식적 실험을 하는 것으로 규정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의 고립이나 고독의 맥락과 그것의 사회성(?!)을 이미 항상 성찰하면서, 자신의 반사회성이 어떻게 사회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내부자의 입장으로서 정당화될 수 있는지를 안다. 사회에의 개입이나 변혁으로서의 예술로부터 거리를 둔 채 박경작은 사회로부터의 거리나 은둔을 통해 이 단단한 사회의 구조를 관한다. 그는 바꾸기 위해 공모하거나 설파하기 위해 지배하는 태도를 경계하면서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있음'이 맡을 수 있는 사회적 책임을 자처한다. 회화는 그와 같이 자의로 고립된 자, 세속으로 은둔한 자, 비타협적인 태도로 자신의 삶과 주제를 끌고 가는 자에게는 적절한 전략이자 장치이다. 21세기에 회화를 그린다는 것은 인간의 자유나 지고함이나 절대성을 냉소적이거나 비관적이거나 희극적인 세계 안에서 지속한다는 것일 텐데, 그렇기에 그의 반사회적이고 반시대적인 태도는 그의 근근하고 근면한 삶과 연동하면서 물러선 자들, 대열에 끼어 시대의 질주에 동참하길 거부한 자들의 다양한 태세나 전략의 일환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는 최소한의 경제활동으로 작가적 삶의 일상성을 유지하고, 레지던시와 같은 예술가 지원 프로그램이 작가의 작업을 얼마나 단속적으로 만들게 되는지를 알기에 기웃거리지 않으면서, 자신의 회화의 '상황'을 오직 자신의 조건에 밀착시킨 채 작업 중이다. 기이한 것은 지난 13년간 그의 회화는 비약적 발전이나 급진적 변화를 일궈내지 않은 채 계속 같은 주제, 소재에 밀착, 매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구름과 건물의 대비를 축으로 붓질의 이중성, 즉 색을 올리고 입히기와 뭉개기라는 이중성을 수행 중이다. 그 결과 가시적 이미지는 올려지면서 희미해지고, 부수적으로 화면에 광택이 드러나고, 그것이 일종의 '빛', '숨', '삶', '공(空)', 나타남과 사라짐의 동시성을 현시하게 된다. 여기에는 어떤 외압에 의한 변화도 내적 갈등에 의한 변절도 없는데, 화가로서의 근근한 삶을 묵묵히 13년이나 영위하고 있다는 것과 그 근근한 13년의 삶이 오롯이 같은 기법, 작업과 조응한다는 데는 오직 한 인간의 삶의 태도를 계속 엿보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 같은 것이 들어 있다. 그는 형식적 다양성, 실험을 통해 변화, 발전하는 작가, 라는 표본을 거스르면서, 게으르고 무료하고 치밀하고 징그럽게 작업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세속으로부터 망명한 자가 아니라 세속으로 은둔한 자인데, 도심 한가운데서 건물과 구름이라는 너무나 선명한 상징을 통해 변화와 발전이라는 허울 속 암시나 진동, 숨이나 빛을 증거하는 것이다. 불행한 작가들이나 불운한 작가들은 너무나 많으며 그중에 하나가 지금 바로 나인들 그것이 뭐 그리 큰 대수이며 문제이겠는가, 라고 그는 자신의 세월을 이미 하나의 불가능한 임무, 계속 그곳에 머무름이라는 임무로 채웠다. 그러므로 그가 동시대 예술계로부터 등을 돌리고 회화를 고수하면서 붓질이 증거할 세계의 매혹이나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 낡고 늙게 살면서 느리고 게으르게 움직이는 자의 감각을 현시하고 있다면 이 회화는 작고 적게 사는 사람의 세속에서의 유랑에 적절한 기술, 전략이 아니겠는가. 구름과 건물의 대비나 공존으로 압축되는 현세를 위해 다른 시각적 알리바이들, 다양성들을 지운 채, 사라지는 것과 세워지는 것, 흰 것과 검은 것이라는 그 자체 회화의 전제이자 정체성인 것을 유지하는 것.

미니멀한 삶과 미니멀한 회화의 조응. 오직 한 사람이 능동이건 수동이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을 오직 하나의 형식과 잇는 것.

박경작_Tunnel_캔버스에 유채_130×162cm_2019

화가 박경작이 이번 전시에 내놓은 신작은 무엇보다 작가가 오가는 거리, 작업실이 들어 있는 건물 옥상에서 본 풍경을 소재로 한다. 그의 화면의 보이는 이미지들은 그를 둘러싼, 그가 보고 느끼는 일상적 풍경, 세속적 삶에 근거한다. 직장인처럼 집과 작업실을 오가는 그가 버스에서 내려 걷다 보면 터널 아래로 밀집한 상가들이 있다. 또 그림을 그리는 사이사이 그가 올라가서 쉬는 옥상에서는 구름, 건물들이 보인다. 그의 눈에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풍경을 그리려는 게 아니다. 그는 의도적으로 인간을 지우고 눈에 보이는 건물들도 시각적 구성을 위해 지운다. 마치 세기말의 풍경처럼 꿈속처럼 아무도 살지 않는 것 같은 침묵과 고요 속 도시가 그의 풍경관이다. 화면의 한 중앙을 소실점으로 한 「터널」에서 우리는 터널 밖에서 이쪽을 향해 몰려오는 빛, 혹은 터널을 걸어서 저쪽으로 나가면 다른 세상이 있을 것 같이 너무 많은 빛을 보게 된다. 이 터널은 일시적으로 바깥의 빛을 차단하는 가림막이면서 압도하는 바깥의 빛을 가리키게 된다. 늘 지나다니는 터널은 아득한 세상 속 구조물처럼 아스라하고 이 세상은 저세상이나 다른 세상을 위한 임시 대피소일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게 만든다. 객관적 눈의 명료한 시각성을 거부하기에 건물의 윤곽이나 형태는 뭉개져 있고 흑과 백의 대조는 상호 간섭과 상호대비를 동시에 성취한다. 빛이 구원이라고 하지만 너무 많은 빛은 인간의 사라짐, 불가능을 요구하기에 이것이 구원을 암시하고 있다면 이 구원, 늘 오가는 터널에서 현시되고 있는 너머는 매혹적이되 두려운 것이다. 밝음과 어둠의 환승 지대, 실내와 외부가 공존하는 과도기적 공간으로서의 터널에서 대비는 중첩되고 모순은 강화되고 상황은 모호해진다. 이러한 구도는 「void」에서도 반복되는 데 도심 한가운데 빽빽이 들어선 마천루 빌딩 사이에서 그는 단단한 건물과 낮게 드리운 하늘, 검은 구조물들과 희뿌연 대기의 대비를 통해 아래와 위, 무거운 것과 단단한 것, 지나가는 것과 올려다본 것, 세워진 것과 펼쳐지는 것의 동시성을 시각화한다. 물론 여기서도 보여주기보다는 가리고 세우기보다는 무너뜨리는 붓질이 가벼움과 단단함, 자연과 인공, 흑과 백의 기계적인 대비를 최소화하고 있다. 단단한 것과 부드러운 것, 사라지는 것과 견고한 것의 차이는 붓질의 저항이나 개입을 통해 무화 된다. 흑과 백의 경계가 뭉개지듯이 윤곽이 뭉개지면 부드러움이나 희미함, 감정이나 건물을 휘감은 대기 같은 시각적 가시성의 아래 있던 것들이 화면을 차지할 것이다. 홀로 보는 사람들은 많이 보는 사람들이고 그들은 결국 하나의 극을 다른 극으로 뒤덮는, 말하자면 지배적 개념을 감각의 포용과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관능의 유연함으로 끌어안는 환각을 일으키게 된다. 이것은 고립을 자처하고 고독을 즐기는 사람이 수없이 많은 사람이 차지한 세상에서 '이기는', 영원히 질 수밖에 없는 채로 동석해 있는 이 단단하고 견고한 세상을 관능화함으로써 분노나 냉소가 아니라 몰입이나 선물로 공격하는, 한낱 숨이나 구름이나 먼지가 일으키는 소란을 타진하는, 누구의 인정도 없는 지는 싸움, 말하자면 긍정이다.

박경작_Study of Mountains_캔버스에 유채_91×116cm_2019
박경작_Study of Mountains_캔버스에 유채_91×116cm_2019
박경작_Study of Mountains_캔버스에 유채_91×116cm_2019

그의 자화상으로 간주해도 좋을 것 같은 삼부작 「Study of Mountains」은 역시 개념적 대비와 감각적 융합의 혼종적 사태를 도모하면서 작가의 자기-이미지를 드러낸다. 저 산은 산이기에 기존의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산을 연상시키면서도 그것과의 차이를 주장하면서 작가의 산으로 고립된다. 원경의 산들이 흐릿하게 보인다는 점에서 이것은 산맥의 일부 같기도 하고 지구 어딘가에 있을지 모르는 석산일지 모른다는 모호한/막연한 상념(흔한 발화)을 일으키기도 한다. 어쨌든 보이는 것은 본 것이고 그것을 언제 어디서 보았는지는 그도 정녕 알 수 없을 때가 있는 것이다. 저 단단하고 견고한 산, 어딘가 있는 산을 보고 그린 것이거나 오직 작가의 주관적 심상을 가시화했을지 모르는 저 산은 수직으로 솟아오른 산이란 절대성도, 포착 불가능한 크기를 구현한 위용도 자랑하지 않는다. 가까이 있는 듯 멀리 있는 저 산은 우리가 꿈속에서 보는 이상한 산, 논리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존재하는 가까운 산 같기도 하다. 크랙이나 틈을 지운 저 산을 오르거나 생명이 깃들 흙이나 먼지가 내려앉을 여지가 없는 저 산에 타자가 깃들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금이나 균열과 같은 오점이나 실수, 즉 관계성을 위한 자아의 내적 전제를 지운 이 자아-이미지, 탈맥락적이고 상황에서 이탈한/자유로운 자아 이미지는 특수한 시·공간에 부착되길 거부하는 작가의 초연함을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저 산은 흔히 기호가 그렇듯이 내포를 함축한 외연이 아니라 내포가 없는 외연, 그저 하나의 개념, 기호로서의 산이다. 기호는 맥락, 역사, 장소로 미분화되면서 다양한 기저 의미, 내포를 갖는다. 작가의 산은 그런 우연들, 차이들 이전의 산, 아직 삶이 수여되지 않은 산, 처음으로 되돌려진 산이다. 물론 저 단단한, 깨질 것 같지 않은 산은 수없이 올려진 붓질에 의해 출현한 산이기에 산의 기호를 지우면서 산의 가능성, 아직 존재하지 않는 산의 잠재성을 보유하게 된다. 세우기와 지우기의 반복으로서의 붓질은 기호를 만들면서 그 기호를 흐릿하게 만드는 이중성을 보유한다. 상징-기호가 존재하는 산을 개념으로 장악하려는 인간의 욕망에 근거한다면 붓질은 개념을 허물어뜨리고 그 존재를 만나려는 역전을 기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 산은 우리를 멍하게 만드는 데 계속 바라보면서 저 존재하지 않는, 본 것 같은, 있을 것 같지 않은 산을 느끼다 보면 저 산은 어쩌면 부서지기 직전 제 꼭짓점에 도착한 거대한 파도 같기도 하다. 온 힘을 다해 부서지려면 온 힘을 다해 솟아올라야 하는 게 파도의 역설이다. 작가는 이 연작을 그리기 전 많은 유사한 파도들을 보고 참조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의 시각적 잔상이나 심리적 연상으로 작동했을 파도와 중첩된 산을 내가 보고 있었다면 당신들 역시 그렇게 보게 될지 모른다. 산과 파도가 겹쳐 보인다면, 곧 사라질 포말과 영원히 그 자리에 서 있을 것 같은 산의 중첩은 작가가 줄곧 주목해 온 건물과 구름의 동시성을 한 오브제에, 개념에 적용한 것으로 보아도 될까? 단단한 것들이 곧 사라질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다는 느낌이나 감각을 흐릿한 이미지로 반복적으로 그리길 반복하는 이 고립을 자처하고 고독을 즐기는 작가의 삶에 대한 거대한 해석은 죽음에 가까이 가 보았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해석일 것이다. 극단적인 대비가 붕괴되고 선명한 경계가 뭉개진 뒤에 무엇을 보았는가는 그가 선택할 시각적 이미지나 언어적 비유가 '증명할' 것이다. 박경작은 흐릿함, 모호함, 빛의 광택, 앞서 내가 말한 것을 다시 사용한다면 관능, 부드러움 같은 것을 본 듯하다. 그래서 이렇듯 평면에 발라진 색에 불과한 '회화'의 정의에 적절할 듯한 비유나 묘사 때문에 나는 박경작의 회화를 오롯이 회화로서, 회화의 가치로서 받아들이게 된다. 오직 회화에게만 수여된 임무, 방법, 주제, 감각이라는 게 있다.

박경작_Untitled_캔버스에 유채_60×72cm_2019
박경작_Untitled_캔버스에 유채_60×72cm_2019
박경작_Untitled_캔버스에 유채_45×53cm_2019
박경작_Untitled_캔버스에 유채_45×53cm_2019

캔버스에 올려진 물감이 잘 마르지 않아서 자주 옥상으로 올라가는 작가가 이번 신작에서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흑백의 화면에 구름 사이로 보이는 파란색을 집어넣었다. 이것은 모색이고 마침내 그를 지켜봐 온 내게는 어떤 변화에 대한 타진으로 보이는데, 이것이 내딛는 발걸음인지 거둬들일 방향인지는 다음 전시를 본 뒤에 결정할 수 있을 것 같다. ■ 양효실

Vol.20190920e | 박경작展 / BAHKGYEONGJAK / 朴耕作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