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일展 / KIMSUNGIL / ??? / painting   2019_0920 ▶︎ 2019_1013 / 월요일 휴관

김성일_평온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0.9×72.7cm_2019

초대일시 / 2019_0920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30am~06:30pm / 월요일 휴관

인디프레스_서울 INDIPRESS 서울 종로구 효자로 31(통의동 7-25번지) Tel. 070.7686.1125 www.facebook.com/INDIPRESS

얼굴을 거세당한 사내의 질주 ● 근육질의 사내가 어딘가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 아니, 질주하던 사내가 엉거주춤 멈춰서 뭔가를 응시하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것 같다. 그가 어딜 향해 질주하는 지, 그리고 무엇을 응시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 질주나 응시가 향하는 지점은 대개 화면의 가장자리에서 급격하게 단절돼 있어서 마치 사각의 프레임에 의해 제약 받고 있는 스톱모현을 보는 듯하다. 이렇듯 사내를 제약하는 사각의 프레임은 마치 사각의 링이 그런 것처럼 넘어서는 안될 경계의, 억압의 지표이다. 마치 부조리극이 그런 것처럼 상황만 있고 정작 지향점이 주어지지 않은 화면에는 팽팽한 극적 긴장감 마저 감돈다. ● 사내가 어디로 질주하는지 혹은 무엇을 응시하는지가 분명하지 않은 것은 무엇보다도 사내의 얼굴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얼굴은 있지만 검은 실루엣의 평면으로 약화돼 있어서 그로부터는 표정도, 생각도, 감정도, 방향도 가늠할 수가 없다. 실루엣의 평면은 그림자가 만든 자연스런 음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음영과는 다른 무엇도 아니다. 아마도 자연의 음영을 개념화하면 이런 실루엣의 평면을 얻을 수 있지 않을가 싶다. 이렇듯 사내는 자연의 음영과 추상의 평면이 결합된, 실제와 개념이 중첩된 그 신원을 확인 할 길 없는 정체불명의 얼굴을 하고 있다. ● 이런 추상적인 얼굴이 사실적인 몸과 대비되는데, 이때의 얼굴은 엄밀하게는 얼굴로 보기 어렵다. 흔히 얼굴이란 표정을 말하며, 사내는 이런 표정의 통로인 얼굴을 거세 당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자신의 인격을 말해 줄 수 있는 표정을 거세당한 사내는 실명과 익명과의, 실제와 비실제와의 모호한 경계 위에 위치한다. 그는 얼굴, 표정, 인격, 정체를 거세 당한 자 이다. 얼굴을 거세 당한 사내의 건강한 근육질의 몸이 사회와 시대, 그리고 삶의 실제와 대비된다. 사내의 얼굴 없는 얼굴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세계 속에 내던져진 부조리한 삶의 조건을 표출하며, 더불어 세계와 화합할 수 없음을 증명해 보인다. ● 또한 무중력의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사람이나 섬, 텅 빈 들판을 가로질러 황급히 화면 뒤로 몸을 숨기는 들개가 사내가 맞딱드린 비현실감이나 비실제감을 극대화한다. 이때 무중력의 하늘을 날아다니는 사람은 비현실감을, 섬은 상실한 자연과 이상향을, 그리고 들개는 세상과 화합할 수 없는 사내의 야성과 함께 거세의 위협이란 이중성을, 또한 화면 내의 또 다른 화면은 사내가 맞딱드린 벽을 각각 상징한다. 이로써 사내에게는 자신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한 초현실이 따로 필요치 않다. 지금 여기 곧 현실이야말로 비현실이고 초현실이기 때문이다. 부조리와 불합리, 그리고 비논리는 더 이상 악몽이나 초현실의 전유물이 아닌, 현실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현실에서 현실이 아닌 초현실을 본다.

김성일_현실이탈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116.8cm_2019
김성일_현실이탈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7×90.9cm_2019
김성일_현실이탈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7×90.9cm_2019
김성일_평온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5.1×90.9cm_2019
김성일_평온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5.1×90.9cm_2019
김성일_현실이탈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7×90.9cm_2019
김성일_현실이탈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7×90.9cm_2019
김성일_평온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0.9×72.7cm_2019

대개는 등을 내 보이고 있는, 잔뜩 긴장한 듯 뒤틀린 근육의 폼으로 보아 사내는 어떤 예기치 못한 돌발적인 사태를 맞딱드린 듯도 하고, 그 돌발적인 사태로 부터 달아나려는 듯도 하다. 그런가 하면 그로부터 달아 날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하고 절망하는 무용(無用)한 헛몸짓을 보는 듯도 하다. 이런 헛몸짓에서 비극적인 파토스가 느껴진다. ● 마치 황무지와도 같은 텅 빈 들판이나 악몽과도 같은 초현실의 풍경, 그리고 이따금씩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리만큼 파랗고 청명한 하늘에서는 마치 무슨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어떤 전조나 전운, 불길한 예감이나 전면적인 파국이 느껴진다. 화면에 던져진 그림자가, 그리고 마치 시간이 정지한 듯 정적인 화면이 이런 파국의 예감을 증폭시킨다. 이런 정적인 화면을 배경으로 한, 사각의 프레임 밖으로 달아나기를 꿈꾸는 얼굴 엇는 근육질의 사내는 작가 김성일의 초상이며 우리 모든 익명인의 자화상이다. ● 그는 완전한 신체로 제시되는 법이 없다. 대신 그는 언제나 파편화된 채로 부분으로만 보여진다. 사각의 프레임이 이렇듯 신체를 단절 시킨다. 작가의 화면에서 프레임은 한눈에도 세계를 조망하는 주체의 우호적인 시각을 반영하기보다는, 파편화된 주체와 적대적인 세계화의 급격하게 단절된 소통불능의 부조리한 상황을 담아내는 용기(容器)로서 주어진다. 이따금씩 남루한 옷차림의 소녀나 가로를 지나치는 익명의 군중을 제시한 것에서 보듯 일말의 사회적인 문제의식을 엿볼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김성일의 작업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전면적인 회의나 불안, 그리고 부조리한 상황 인식에 기초해 있는 자기 반성적 과정의 산물이다. ● 근작에서 작가는 소를 자주 그린다. 아마도 소는 전작에서의 사내와 함게 작가의 또 다른 자화상일 것이다. 작가의 작업에서 소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진다. 소는 부조리한 삶의 조건에 순응하는 수동적인 존재인 동시에 부조리한 삶의 조건에 대한 거부를 내재화 한다. 수동성이 소의 표면이라면, 수동성에 대한 거부가 그 이면인 셈이다. 이는 수동성이 소의 본능에 속한 것이 아닌, 외부로 부터 요구되고 강요된 것임을 말해준다. 결국 삶의 근성이란 이런 강요된 수동성으로 부터 달아나고자 하는, 강요된 익명으로 부터 자기를 되찾으려는 의지가 아닌가 싶다. 작가는 사내와 소의 이런 이중적 존재를 빌어 삶의 부조리를 대변케 한 것이다. ● 이로써 김성일의 작업은 형상미술에 대한 한 전형을 제시한다. 여기서 형상미술이 여타의 구상미술과 다른 것은 형상미술이 어떤 특징의 상황 속에 인물을 배치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상황을 세계관이나 자연관, 시대정신 같은 주체의 관념이 전개되는 기층(basic)으로 삼는다는 점이다. 이로써 형상미술에 등장하는 인물이란 언제나 어떤 상황 속에 놓여진, 어떤 상황을 겪는 형태로 주어진다. 작가의 작업에서 이런 상황은 현실을 현실이 아닌 초현실로 인식하리만큼 자기와는 소외되고 단절된 낯선 세계와 사내가 대면하는 형태로 주어진다. 그리고 그 사내가 대면한 낯선 세계는 우리 모두가 마주한 세계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작가의 작업은 보편성을 획득한다. ■ 고충환

Vol.20190921f | 김성일展 / KIMSUNGIL / ???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