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된 말들 Pictured Words

홍인숙展 / HONGINSOOK / 洪仁淑 / painting.printing   2019_0919 ▶︎ 2019_1024 / 일,월요일 휴관

홍인숙_글자풍경-사라아앙 Letter landscape-Saraang_한지에 먹지드로잉, 채색, 종이판화_130×100cm_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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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9_0919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토요일_11:00am~06:00pm / 일,월요일 휴관

비트리 갤러리 B-tree gallery 서울 마포구 와우산로 94 홍익대학교 홍문관 1층 Tel. +82.(0)2.6951.0008 www.b-treegallery.com

홍인숙-잃어버린 구술성을 불러내는 문자그림 ● 장지(미표백 삼합지) 위에 예민하고 정확한 선으로 그린 그림이다. 먹지 위에 손으로 일일이 베껴 그리고 채색 후 지판화로 찍어 만든 윤곽선들 안에는 유성잉크로 인쇄된 색채들이 평면적이고 반듯하게 밀착되었다. 지판화 기법을 거쳐 만든 그림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패턴처럼 자리한다. 그것들의 윤곽선은 마음의 압력을 고스란히 전이하는 힘의 누수로 의해 긴장감 있게, 약간의 차이를 동반하면서 '꾸욱' 눌려있다. 그려진 도상과 문자에 대한 주술성을 주문처럼 전이하는 기운이 종이의 저 안쪽으로 밀려가는 것이다. 극진한 정성, 단호한 주문을 압인한다. 그러니 판화라는 매체는 이 작가에게 있어서 여러 면에서 불가피한 의미를 지닌 방법론으로 적극 작동한다.

홍인숙_글자풍경-뿅 Letter landscape-Ppyong_한지에 먹지드로잉, 채색, 종이판화_130×96cm_2019
홍인숙_글자풍경-러브 Letter landscape-LOVE_한지에 채색, 연필 드로잉_120×93cm_2019

작가가 선호하는 장지의 색감은 어떤 특정한 색채라고 부르기 어렵다. 밝고 환하고 부드럽고 차분하다. 고아하고 품위가 있는 색을 거느린 한지는 질기며 발묵이 좋은 종이다. 특유의 도침 과정(다듬이질)을 거쳤기 때문이다. 온화한 색과 딴딴한 물성을 전면적으로 거느리고 표면은 그것 자체로 이미 맑고 충만한 얼굴을 깨끗하게 드러낸다. ● 그래서 본래 소색의 무명천이나 순백자의 소색과도 유사한 한지의 색은 부드럽고 은은한 빛을 힘껏 방사한다. 소색이란 특별히 염색을 한 색이 아닌 무명이나 삼베의 고유색을 말한다. 본래의 바탕에서 시작된 색이라고 할까. 그러니 작가가 한국인에게 가장 익숙한 질감, 색채를 원초적으로 안겨준 물질인 무명의 질박하고 무기교하며 소백하고, 불규칙한 굵기로 인해 표면에 무수한 변화를 동반하는 질감과 유사한 미표백 삼합지를 그림의 바탕으로 적극 사용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위에 민화에서 흔히 접하는 소재들이 낙관처럼 찍혀있다. ● 작은 연못, 화분, 기와집과 담장, 구름, 수양버들, 장미, 향나무, 새, 소녀, 리본, 구름, 반짝임 등은 그림 안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작은 도상들이다. 하늘의 시선에서 보았기에 바닥에 납작하게 누운 이 도상들은 초기작부터 거의 변함없이 출현하고 있다. 하늘님에게 기원하는 도상/문자이기에 그럴 것이다. 그것들은 유년의 기억을 상기시키거나 자신의 마음을 불현듯 토로하는 문자 꼴로 튀어나온다. 삶의 정서를 소박하게 담아내며 절실한 생의 욕망을 스스럼없이 분출하는, 가장 인간적인 기원으로 가득한 민화가 보여주는 주술성의 내음 과 기운도 상서롭게 서려 있다. 무병장수하고 부귀영화를 누리고 부부금슬(사랑)이 좋고 다손 하길 갈망하는 한편 지상의 현실계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고대하는 마음들이 도상을 빌어 절박하게 수놓아져 그려진 조선 민화는 홍인숙의 기호들과 동일 선상에서 교호한다. 가족과의 단란하고 즐거웠던 한때, 튼실한 담장과 집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 안에서의 안락한 유거, 그리고 사랑으로 충만한 '뽕'의 순간과 삿되고 천한 것들에 대한 저주나 욕설에 가까운 '썅'도 마구 들락거린다.

홍인숙_나무가 옆에 있으면 그 어떤것도 외롭지 않다 While near a tree, there is no loneliness_ 드로잉, 판화_57×48cm_2009

그림들이 스스로 글을 쓴다. 소리를 내지른다. 자신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가족, 집, 밥, 쌀, 사랑과 함께 뿅, 썅 등이 그려져/쓰여 있다. 한지 바탕 위에 가지런히, 정성껏 그린 그림들이 이내 문자가 되었다가 흩어져 본래 그림으로 되돌아가기를 반복한다. 특정 소리가 물질적 형태를 지니다 말다를 왕복한다. 문자문화가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이곳의 공간에서 홍인숙의 보여주는 문자도는 형상과 문자, 소리가 얽혀서 보면서 읽게 만든다. 그림에 가린 문자를 찾기도 하고 문자와 이미지 간의 낙차를 실감하기도 한다. ● 장미꽃다발이나 벼이삭 등이 모여 '밥'이나 '사랑'을 지시하는 경우도 있지만 동시에 그것들이 '썅'이나 '뿅'을 그려 보이는 것처럼 깔끔하고 미적인 도상과는 사뭇 다른 의미를 지닌 문자를 보고, 읽게 만든다. 그림이 된 말들, 문자가 된 그림들이 기존의 완강한 문자, 이미지간의 위계나 질서를 교란시키는 한편 화려하고 예쁘게 장식된 꽃 그림들이 실은 그것과는 대조적인 내용을 지시하는 문자가 되었을 때 접하는 심리적 낯설음, 파열음을 발생시킨다.

홍인숙_점점 동그래지는 얼굴 The face becoming more and more round_ 한지에 드로잉, 연필, 종이판화_120×145cm_2008

충분한 여백을 거느리고 다소 적조하게 배치된 이미지들이 모여 특정 문자를 발화하는데 그것을 보고, 읽어나가다 보면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더없이 좋은 '뿅'의 순간을 갈구하는가 하면 현실에 '엿' 먹이는 '썅'과 같은 욕은 일상에서 억압된 표현, 모종의 트라우마가 시각화되어 나온 것이리다. 상처를 지닌 이들에 의해 그 상처를 품은 채 전진하는 말들이자 법이 통제하지 못하는 말, 자유롭게 풀린 말들이기도 하다. 하여간 작가 자신이 부조리하고 더러운 세상과 타자에게 던지는 말, 그러나 더없이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되어 은밀히 감추어 애써 찾게 만드는 그런 말이다. '썅' 과 같은 욕을 한다는 것은 인간간의 관계가 흡사 야생적인 관계가 되는 순간이다. 그것은 어쩌면 미하일 바흐친이 "생성하는 몸"이라고 했던 그 카니발적 신체를 연상시킨다. 이때 서로의 신체는 상호작용하면서 욕을 주고받는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은 분노와 욕이 사실상 조절, 억압당한다. 법에 의해 통제되기도 한다. 특정한 장소,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용인되고 제한되는 편이다. 혹은 혼잣말로 내뱉어야만 한다. 홍인숙은 그림의 장을 빌어 우리를 기꺼이 그러한 카니발적 장소로 초대하는 것도 같다. 일상의 억압을 풀도록, 야생의 관계로 순간 들어가도록 유인한다. 보는 이들도 저 소리를 따라 크게 읽어나간다. 그러자 미술의 자리에 들어선 이 소리들은 또 다른 삶의 발언으로 울린다.

홍인숙_그림이 된 말들 Pictured Words展_비트리 갤러리_2019
홍인숙_그림이 된 말들 Pictured Words展_비트리 갤러리_2019
홍인숙_그림이 된 말들 Pictured Words展_비트리 갤러리_2019

그것은 그림이 잃어버린 구술성을 새삼 불러내기도 한다. 읽기가 지닌 독특한 감각을 전해주기에 봄과 동시에 읽게 되고 이는 보는 이의 신체성에 보다 깊게 스민다. 보는 것과 읽는 것이 한꺼번에 밀려든다. 정지된 그림의 한계를 뛰어넘는 문자의 활용이자 동시에 그 문자를 통해 시각이미지에 국한된 형상의 틀에 제한되기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보는 사람들이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만드는 것이다. ● 보는 이들은 여백이 숭숭 드러난 화면 위에 흩어진, 이미지들이 각기 제멋대로 군집된 몇 개로 분할된 영역으로 나누어 작가의 그림을 볼 것이다. 동시에 망막에 들어온 이미지들이 정돈되면서 특정 단어가 순간 눈에 들어옴을 느낄 것이다. 이 신체적 반응이 그림 감상의 주요한 특징이다. 그것은 또한 시간의 차이를 동반하면서 사후적으로 인지된다. 뒤늦은 깨달음과 예기치 못한 파열음, 문자와 이미지의 이율배반적인 조우다. 그러니 홍인숙의 그림은 보는 이들의 이러한 차이 속에서 만들어지는 인식 과정 속에서 비로소 그 존재가 의미를 부여받는 편이다. 그리고 이러한 체험은 기존 작품들과는 다소 다른 경험을 통해 다가오고 인지된다. 내 생각에는, 홍인숙의 그림은 그려진 것 자체가 목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특정 문자가 주제인 것만도 아닌 듯하다. 어쩌면 이 둘의 이상한 연루, 접속으로 인해 발생하는 새로운 느낌, 새로운 보기, 새로운 읽기가 결정적인 것도 같다. 그것은 기존의 그림과는 무척 이질적인 편이다. ■ 박영택

Vol.20190922i | 홍인숙展 / HONGINSOOK / 洪仁淑 / painting.pr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