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oated Documentary

박인성展 / PARKINSEONG / 朴仁聖 / video.installation   2019_0917 ▶︎ 2019_1019 / 일요일 휴관

박인성_Film30_알루미늄 프레임, 디아섹_174×120cm_2019

초대일시 / 2019_0917_화요일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요일 휴관

을갤러리 EUL GALLERY 대구시 남구 이천로 134 Tel. +82.(0)53.474.4888 www.eul-gallery.com

(중략) 박인성 작가는 사진기 필름 자체를 오리고 붙여서 일차적 조형 세계를 만든다. 이 필름은 아날로그 시대의 산물이다. 이 조합된 필름의 형상은 흡사 현대 회화를 연상시킨다. 회화는 현대라는 시간 축으로 이행했음에도 여전히 낭만주의적 요소를 지닌다. 원본성(originality)이 그것이다. 아니면 자서적 속성(autographic property)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박인성 작가가 사진 필름을 분절시키고 해체해서 다시 조합하고 구성해낸 1차적 결과물은 사진을 통한 낭만주의 세계관의 재구축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를 다시 촬영해서 디지털 화면으로 인화시킨다. 이때 자서적 성격의 1차적 매체는 대서적 속성(allographic property)으로 탈바꿈한다. 작가는 낭만주의에서 모더니즘까지 유지되었던 회화의 원본성의 가치를 사진 매체에 투영한 다음 다시금 디지털 시대의 무한 복제 가능성의 세계로 유영(游泳)시킨 것이다. 그런데 박인성 작가의 진취성은 더 깊은 곳에서 확립된다. 앞에서 회화의 역사가 거울에 비춘 이미지(재현)에서 거울 자체(매체의 본질주의)로 가는 이행 과정이었다는 사실을 이미 말했다. 작가는 회화의 역사 과정을 추적하면서 사진이라는 매체도 역사적 내러티브나 본질주의 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해보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사진의 미래가 어떠한 모습으로 진보할 것인가 궁금했을 것이다. 사진은 사진 찍는 사람의 지성과 상상력, 그리고 감수성과 무관하게 사진기에 귀속된 프로그램의 지배를 받게 된다. 사진기에 내재된 프로그램의 한계에 매몰될 수밖에 없다. 형상이 심하게 왜곡되어 추상적으로 보이는 사진이 있다고 해도, 사물의 경계가 지워져 반추상으로 보이는 사진이 있다 해도, 모두 재현의 영역에서 변형된 것이다. 근본적으로 사진은 모두 재현이라는 범주에 묶여있다. 박인성 작가는 모더니즘 회화가들이 벌였던 거대한 관념의 모험을 사진 매체에 투영시킨다. 사진이라는 매체 자체를 사유한 것이다. 재현이라는 한계를 넘기 위해서는 사진 매체의 본질이 무엇인지 따져봐야 했다. 사진은 렌즈에 들어온 광원의 미묘한 분산을 감광물질이 처리된 필름에 가두는 것이다. 따라서 사진의 근본은 필름 자체에 있다. 작가가 필름에 맺힌 형상에 주목하지 않고 필름 자체를 문제 삼은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더욱이 필름을 스캔하고 오리고 붙이고 조합하는 과정으로 탄생한 원형의 틀은 모더니즘의 형식주의와 상궤를 함께 한다. 그것은 의도된 것이다. 매우 진보적인 사고 방법은 내용이야 훌륭하지만 형식을 간과하게 된다. 사고 자체에 치우치다 자칫 미적 카테고리를 놓쳐버리기 십상이다. 박인성 작가는 전환적인 사고에 엄격하게 정제된 형식주의를 대입시켰는데, 탁월한 기상(奇想)이라고 할만하다.

박인성_Floated Box_ 아크릴 박스, 앱손 인핸스드 매트 용지에 프린트_각 15×80×15cm_2019
박인성_Floated Documentary展_드로잉룸_을갤러리_2019
박인성_Floated Documentary展_을갤러리_2019

나아가 박인성 작가가 사진의 본질을 필름 자체로 파악한 근저에는 무언가 더 깊은 뜻이 자리하고 있다. 매체에 대한 세계관은 수도 없이 많지만, 크게 두 가지 시각으로 양분된다. 하나는 마샬 매클루언(Marshall McLuhan)이 매체를 가리켜 "인간 감각의 연장"이라고 정의했던 시각이다. 이 시각이 옳다면, 지렛대는 인간의 손이 연장된 것이며 망원경이나 현미경은 인간의 눈이 연장된 것이다. 인간이 자기 감각의 확장을 꾀하기 위해서 자기 이성으로 끊임없이 매체를 진화시키고 개발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로 상반된 프리드리히 키틀러의 시각이 있다. 키틀러는 악명 높은 명제를 우리에게 내던졌다. "매체가 우리의 상황을 결정한다." 키틀러에 의하면, 매체는 인간의 숭고한 노력이나 의지로 창조한 것이 아니라 사회, 역사적 조건에 맞추어 스스로 발전한다. 그리고 인간은 매체 덕분에 세계관을 나은 쪽으로 재정립해왔다. '기술결정론'이라는 뜻이 바로 그것이다. 예를 들면, 축음기가 등장하고 나서야 소리에 대한 진정한 사유를 꾀할 수 있게 되었다. 타자기가 나오고 나서야 현대적 글쓰기가 가능해졌다. 사진기가 나오고 나서야 시각 문화의 본질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박인성 작가는 아무래도 키틀러의 후예에 가깝다고 본다. 작가 역시 사진이라는 매체를 연구하면서, 그 매체 덕분에 인간이 창출한 시각문화의 거대한 흐름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박인성_Floated Red_풀 HD, 무음_00:02:40 loop_2019
박인성_Floated RGB_3채널 영상, LED 조명, 무음_가변크기_2019

그렇다면 박인성 작가가 추구하려는 완전한 장면(complete scene)이란 과연 어떤 것일 까? 낭만주의 시대의 신화(독창성)와 모더니즘의 엄격함(형식주의)을 여전히 살리면서도 동시에 미래의 입구를 조금이라도 넓히려는 모험심이 활발발(活潑潑) 샘솟는다. 급기야 디지털 시대가 창출해낸 대서적 범람(汎濫)이 몰고 오는 공포 속에도 기꺼이 몸을 맡길 수 있는 자신감을 작가는 우리에게 보여준다. 쉽게 이야기하면 박인성 작가가 보여주는 일련의 화면 속에는, 서구 문화사의 간단(間斷) 없었던 투쟁과 화해의 담론이 응축되어있다. 작가의 촘촘한 의도대로 작품 속에는 낭만주의, 모더니즘, 아날로그, 디지털이라는 상반된 요소가 긴장 상태를 유지하면서 서로를 떠받쳐준다. 작가가 추구한 완전한 장면이란 바로 시각문화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동시에 성찰하고 예견할 수 있도록 현시시켜주는 시각 사유(visual thinking)를 가리킨다. 작가의 시각 사유는 이제 물꼬가 트였다. 그래서 작가가 곧 지류를 넘고 장대한 본류에 안착하여 멋진 흐름타기에 성공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그 흐름은 멀지 않은 시간 안에 도달할 것이라 내다본다. ■ 이진명

Vol.20190925g | 박인성展 / PARKINSEONG / 朴仁聖 / video.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