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프 25! 2019 Seoul

조민숙展 / CHOMINSOOK / 趙敏淑 / painting   2019_1002 ▶ 2019_1007

조민숙_1910(adam smith)_패널, 나무_100×105cm_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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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기간 / 11:00am~08:00pm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Hangaram Art Museum, Seoul Arts Center 서울 서초구 남부순환로 2406(서초동 700번지) Tel. +82.(0)2.580.1300 www.sac.or.kr

조각의 서사, 얼굴의 이야기 ● 낯설게 하기는 문학을 너머 예술의 형식과 기법에서 다양하고 기과하며 또 파격적인 형식들로 끊임없이 구현되고 있다. 러시아 형식주의라는 기원으로 거술러가는대신 연극과 문학 개념에서 우리에게 친숙한 브레히트의 서사극 이론을 떠올려 보자. 그는 일찍이 관객에게 '새로운 자세'를 요구하지 않았는가. 브레히트는 무대 위 사건들을 보는 관객이 흐름과 진행을 마주하며 이른바 주체성을 갖도록하는 것, 그는 특히 감정이입의 상태가 되는 것을 지양했다. ● 무대의 장, 연극이라는 지평에서 그가 말한 기능전환의 핵심은 독자들이 수용하는 과정 속에서 보다 생산적이고 주체적으로 기여할 수 있기를 원했다. 어떻게하면 이 '과학적 자세'를 취할 수 있을까?

조민숙_1911(John Maynard Keynes)_패널, 나무_100×105cm_2019
조민숙_1912(Henrik Ibsen)_패널, 나무_60×78cm_2019
조민숙_1920(Zaha Hadid)_패널, 나무_60×73cm_2019
조민숙_1922(Rem Koolhaas)_패널, 나무_73×60cm_2019

여기 한 조각가가 있다. 그는 브레히트를 보고 있다. 브레히트의 영화를 보고, 브레히트의 시를 읽고, 또다시 브레히트의 소설을 읽는다. 다시 브레히트의 얼굴을 본다. 브레히트의 명명한 얼굴들을 본 조각가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오랜 바람을 견디고 선 동백나무를 기꺼이 물질로 데리와 원료로 삼고 그것을 미세하게 자르고 붙이고, 대나무를 염색하는 이노동의 작업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예술 그리고 전시라는 환경 속에서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다. 더더욱 낯설지도 않다. 우리는 이미 관객으로서 너무 많은 미니멀니즘과 집적단위의 조각들, 단면들, 그리고 그것으로 만들어진 세계를 경험해오지 않았는가? 작가는 오래전그에 대한 탐색의 길을 노고와 수고로움 그리고 반복의 단조로움이라는 쉬이 편치 않은 작업을 통해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곧 10년의 작업이다. 그리고 일련의 장르적 분류 작업들은 그 인물을 실제적으로 파악해가는 도정 속에 고스란히 놓였다. '얼굴'이라는 표상을 통한 조각의 실험은 서사의 어느 즈음에 놓인 걸까?

조민숙_1923(Ludwig Mies van der Rohe)_패널, 나무_73×60cm_2019
조민숙_1915(Johan August Strindberg)_패널, 나무_63×73cm_2019
조민숙_1914(Anton Chekhov)_패널, 나무_73×63cm_2019
조민숙_1924(William Shakespeare)_패널, 나무_105×52cm_2019

낯선 조각들을 그러모으는작업들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생산자로서의 독자, 아니 생산자로서의 조각가를 대입한 이유다.전통적인 예술이 아우라를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복제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 선언같은 명제는 21세기 무수히 쏟아지는 예술 작품을 관조하는 우리에게 자명한 사실이 되었다. 복제품들은 이제 너무나 많은 파생과 불연속이라는 무수한 실험으로 던져져 있다. 그 당시를 포착한 순간의 얼굴은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는가, 생산자로서의 작가, 아니 여기 생산자로서의 조각가가 여러얼굴들 옆에 가만히 머물고 있다. ■ 조수아

Vol.20191007h | 조민숙展 / CHOMINSOOK / 趙敏淑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