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메시지 II

송정임_채선미_이주희_하소영_연규혜展   2019_1009 ▶︎ 2019_1015

송정임_에나벨리_캔버스에 유채_45×53cm_2018

초대일시 / 2019_1009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갤러리 H GALLERY H 서울 종로구 인사동9길 10 Tel. +82.(0)2.735.3367 blog.naver.com/gallh hongikgalleryh.modoo.at

이번엔 공간에 관해 해보자, 지난번엔 시간에 대해 했으니. 라는 것이 애초에 합의했던 다섯이 모인 이번 전시의 주제였다. 그리고 우리는 한국인이면 '공간내기(spacing)'에 관해 누구나 가질 법한 건축 이미지를 갖고 시작하면 어떨까 했다. 그래서 우선 대략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보았을 법한 공간과 관련된 영화를 하나 같이 보기로 했고 "건축학 개론"이 선정되었다.(부러 대중 영화를 택했고 그 영화여야만 할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같이 봐야 할 영화는, 우리에게는 독특한 작가주의 영화보다는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고 공감하는 대중 영화여야만 했다) 영화는 지난 겨울 어느 추운날 나지막한 산꼭대기에 갓 새로 지은, 8번 마을버스 종점이 있는 혜화동 주민센터에서 모여 보았다. 갓 지은 주민센터는 단열 효과가 좋지 않아 추웠을뿐더러(항상 그렇듯 공사중 공무원 반대로 애초 건축가의 계획에서 플랜이 변경되었다고 했다) 영화보기에는 지나치게 환해서, 창에 커텐부터 달아야 했고, 그날 관람에 앞서 마을위원으로 일하고 있는 이주희 작가가 그날을 위해 동대문시장서 해온 커텐부터 달았다. ● 그리고 두어 차례 작가 회의를 진행했고 다들 열심히 했지만 좀처럼 공간에 관한 무엇이 보여지진 않았다. 다들 끈질기게 기억을, 상실된 기억의 실마리를 찾고, 그 방식은 각기 다르게, 붙들고자 하고 있었다. 좀처럼 붙들 수 없는 사라진 무엇의, 기억의 공간화, 곧 기억의 표상이 공통된 점이라고는 없는 듯한 다섯 작가의 "공간화"이다. 그리고 제목 중간의 쉼표가 상징하듯 그 메시지는 어떤 단절, 불연속 이후 스스로가 보내고 받는 "메시지"이다. ● 사실 내밀한 자기 내부 세계와 감각 방식, 기억 방식의 전개에 다름아닌 이 다섯 작가들의 공간화는 내게는 일단은 굳이 분류하자면 한국의 대표적 페미니즘적 작가로 분류되는 윤석남 의 작년 설치 「핑크룸」의 칼끝으로 서있는 의자라거나 김수자의 「바늘 여인」과 유사한 계보에서 이해된다. 어머니가 아니라 해도 대부분의 여성에게 세계는 바늘 한 땀 꽂을 자리 없는 곳이다. 공간은 그 실체를 붙들 수 없는 기억이 아니고서는 쉽사리 조형될 수 없다. 그것은 이 다섯 작가들이 삶 그 자체로 여겨온 그림그리기, 그것과의 아픈 단절, 각자 다른 상황에서 오랜 시간 건너온 블랙홀과 같은 심연을 가늠해보지 않고서는 결코 이해될 수 없는 무엇이다. 단지 그렇게 환원해 버릴 수는 없겠지만.

송정임_나무_캔버스에 유채_117×91cm_2019
채선미_기억-변이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6×72.7cm_2019
채선미_기억-변이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5×53cm_2019
이주희_풍경-밤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5×27cm_2019
이주희_풍경-토요일 6시반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30cm_2019
하소영_레드 레이스 1 (Red lace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6.8×91cm_2019
하소영_레드 레이스 2 (Red lace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5.5×53cm_2019
연규혜_마더 시리즈: 봉화 어머니_코튼종이에 아크릴채색_70×54cm
연규혜_보문산 가는 길_코튼종이에 아크릴채색_100×73cm

칼끝으로 불편하게 서 있는 비단 소파나 군중 가운데 던져진 바늘처럼 가늘게 서 있는 여인처럼 이들의 공간내기는 부재와 유폐로부터 필사적으로 벗어나고자 하며, 아직 어떤 지나가지 않는 시간에 붙들려 있고, 그러면서도 그것이 환상임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다. 이제까지 혹은 한순간 자신이었던 것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순간 어쩌면 그것이 그들의 공통된 공간 인식이다. 어떤 암흑을 보거나 직면했고 환상을 가졌고 막 벗어나려는 참에만 일견되는 차원이 다른 각자의 실재이다. 그것은 요사이 젊은 작가들의 능동도 수동도 아닌, 하는 듯 하지 않거나 끝없이 망설이는 중간태적 세계와도 다르다. ● 나이브하게 보일 수도 있는 다섯 작가의 평범한 일상과 재현에 바치는 경의는 내 생각에는 아이의 최초의 순수한 발음, 색채 없는 그러나 확고한 모음의 빛을 닮았다. 다섯이 너무나 다르지만 뭔가 비슷한. 마치 '아, 에, 이, 오, 우' 같은. (물론 그림은 언어가 아니다) 이를테면 모음으로 인해, 말의 가능성이 비로소 생겨나듯이. 또한 시간의 역설. 언제나 두 번째는 첫 번째에 앞선다. 그래서 결과의 결과가 원인이 되버리고 우리는 과거를 다시 겪으며 비로소 공간화한다. 두 번째가 첫 번째의 원인이 된다. 마치 바늘끝 같은 어떤 설 자리도 없는 점이나 영(0)보다도 작은 불균질하고 흔들리는 비결정적 공간으로부터 작은 간격이 생겨난다.(spacing) 하여 나는 말하련다, 이들의 그림은 그 방식이 모두 다르지만, 아주 단순하고 순수한 자음과 모음의 결합 가능성 자체, 공허를 가리는 환상에서 벗어나는 방식들, 그 순간을 그린 듯 하다고. 아이로부터 최초의 말이 발음되려면 모음에 대한, 어머니에 대한 어떤 상실된 감각이 필요하듯이. 말하자면 반복하며 내적 표면을 외부로 전개하고 있지만 여전히 좀처럼 "건축학 개론"에 내러티브라는 프레임을 통해 형상화된 것과 같은 구체적 공간내기를 못하고 있는(혹은 중층화되는 기억에만 머무르고 있는 듯한), 정말 좋은 엄마이기도 한 이 다섯 작가의 그림은 어머니 품의 기억, 모음과 같은 시선을 보여준다고. 그것은 소박하지만 모음과 같이 중요하며, 한 우주를 개시하는 시선일 수 있다. ■ 최정은

Vol.20191008d | 어느날, 메시지 II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