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규선의 風•景

차규선展 / CHAKYUSUN / 車奎善 / painting   2019_1010 ▶︎ 2019_1110 / 월요일 휴관

차규선_行脚-매화_캔버스에 혼합재료_116.8×91cm_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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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9_1010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30am~07:00pm / 주말_11:00am~05:00pm / 월요일 휴관

소울아트스페이스 SOUL ART SPACE 부산시 해운대구 해운대 해변로 30 Tel. +82.(0)51.731.5878 www.soulartspace.com blog.naver.com/soulartspace www.instagram.com/soulartspace www.facebook.com/soulartspace

차규선의 『마인드 스케이프』 ● 차규선은 우리에게 아직 남겨진 작가이다. 아직 남아있는 카드이다. 우리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발견을 뜻하는 영어 단어 '디스커버'는 'dis-cover'로 이루어져있다. 반대를 뜻하는 'dis-'와 라틴어 'cooperire'가 어원이다. 'cooperire'는 '감싸다'라는 뜻을 지닌다. 따라서 '디스커버'는 무언가를 감싼 겉포장이나 이불, 덮개, 가리개 등을 들춰낸다는 뜻이다. 발견의 순간에 무언가 본질이 드러난다. 그런데 무언가 본질이 드러난다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것이다. 익숙한 것, 편안한 것이 그렇지 못한 상황으로 전환된다. 익숙했던 것이 그렇지 못한 상황으로 전환되는 순간에 시적인 것이 있다. 따라서 시란 불가사의하고 낯선 세계에 대한 우리의 가장 원초적인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회화란 세계에 대한 시적 반응을 화폭에 옮긴 시각적인 시이다. ●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가치는 물질주의 · 과학적 환원주의 · 산업주의 · 상업주의 · 사회적 원자주의 등이다. 이것은 "정신의 죽음"을 의미한다. 가령 하이데거나 엠마뉴엘 레비나스, 사르트르 등의 저서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단어가 죽음, 불안, 구토, 허무, 부끄러움과 같은 것들이다. 현대사회가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광기와 모순으로 가득하고 불안과 허무주의적 성향으로 치닫고 있음에도 누구도 대안을 물색할 뿐 근본적인 희망을 말하지 않는다. 앞에서 말했던 사상가들은 현대의 위기를 서구 철학의 결과라고 진단했다. ● 서구 철학은 인간을 주체로 전제하고, 타자를 주체에 대한 객체 대상으로 평가 절하한다. 따라서 타인인 객체에 대한 주체의 지배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자연을 지배하는 것은 물론이고 타인을 지배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에서도 마스터-슬레이브라는 관계 도식을 당연시했다. 그림에서도 전대의 형식 논리를 전복시키거나 지배하는 새 형식만을 미술사에 새롭게 안착시켰다. 새로움(novelty)의 신선도가 어느 정도인가 묻거나 주제가 지닌 편벽함이 각종 사조나 단체, 국가를 대변하는가라는 물음으로부터 작가의 불멸성을 보장해주곤 했다. 근대를 벗어나 서구 철학의 결과를 더욱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우리의 현대 미술사도 비슷한 양상으로 발전해왔다. 서구의 미술사조에 기민한 반응을 선취하거나 기민하게 안착된 미술사조를 다시 뒤집는 시도들이 판도를 주도하게 되었다. 정작 예술의 본연이라고 할 수 있는, 세계에 대한 시적 반응을 다루는 작가에 관심의 초점이 다가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차규선_行脚-가을_캔버스에 혼합재료_140.8×70cm_2019

차규선 작가는 눈 내리는 산 속의 풍경을 그리거나 화창한 봄날에 핀 꽃나무를 그린다. 현대 미술사의 전거들이나 전례들을 의식해서 그린 것이 아니다. 작가는 행각(行脚)을 통해서 마음 속 풍경을 만난다. '행각'은 '어떤 목적도 없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다.'라는 뜻이다. 승려가 지나가는 구름이나 흐르는 물처럼, 특정 대상과 장소에 집착하지 않고, 의도 없이 자연스럽게 진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수행의 자세를 가리킨다. 예기치 않은 인연과 사건이 발생할 때, 이불로 따뜻하게 감쌌던 온화한 익숙함은 들춰진다. 다시 말해 디스커버(dis-cover)의 순간이 다가온다. 시적 시간이 몰려든다. 승려의 행각은, 따라서 초월의 느낌을 잉태하기 위한 적극적 삶의 자세이다. 그 초월은 불변의 절대자를 만나는 초월이 아니라, 새로운 나를 깨우치는 자각의 초월이다. 차규선의 행각은 불교 용어에서 차용한 것이지만, 오히려 선비들의 일신사상(日新思想)에 가깝다. 삶에 대한 발견, 세계에 대한 발견의 순간을 소중히 마음 속에 품고, 심상에 새겨진 풍경과 세계를 화폭에 옮기는 것이 차규선 작가의 예술이다. 그런데 차규선의 예술 속으로 다가갈 때, 우리는 좀더 차분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세 편이 시가 있다. ● 하나는 17세기 독일에 살았던 신비주의 사상가 안겔루스 질레지우스(Angelus Silesius)의 시 「장미(The Rose)」가 그것이다. 또 하나의 시는 11세기 북송 메이산(眉山)에서 태어나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성장한 동파 소식(東坡 蘇軾)의 「여산진면목(廬山眞面目)」이다. 마지막으로 괴테의 시 「나그네의 밤노래」가 그것이다. 우선 질레지우스는 "장미는 왜 없이 핀다. 그것이 피는 것은, 그것이 피기 때문이다. 그것은 스스로 돌보려 애쓰지 않는다. 그것은 누군가 자기를 바라보는지 묻지도 않는다." 고 노래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시어가 바로 '왜 없이(without why)'이다. 『노자』에 나오는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다." 는 문장과도 뜻이 통한다. '왜 없이'는 '스스로 그러함, 즉 자연(自然)'과 같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다하는 것이 스스로 그러함, 바로 자연이다. 이 자연은 네이쳐를 뜻하는 자연이 아니다.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스스로 그러한 모습을 뜻한다. 장미가 자기를 드러내고 남에게 호소하는 일 없이 꽃피우듯이, 스스로 그러함은 묻지도 않고 모든 것을 이룬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 바로 스스로 그러함이다. 차규선이 그리는 붉은 매화꽃도 노란 산수유꽃도 자기 존재에 '왜'라는 질문을 달지 않는다. 차규선의 그림 속 대상들은 스스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그렇게 있을 뿐이다. 어떤 의도에서 그렇게 그려졌는지 호소하지 않는다. 마치 스스로 그렇게 그려진 것처럼 말없이 우리를 불러모은다.

차규선_行脚-매화_캔버스에 혼합재료_70×200cm_2019

사실 「장미」라는 시 하나에 엄청난 논쟁들이 오간 역사가 있다. 우선 질레지우스의 '왜 없이'라는 시어는 그보다 300년 앞서 살다간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dt)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의 세계 설명에 대한 시적 반응이다. 우선 토마스 아퀴나스는 세계의 모든 현상을 '지복직관(至福直觀, the Beatific Vision)으로 설명했다. 피는 꽃도 흐르는 강물도, 산등성이의 고요함도 모두 하느님이 마음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며, 계시의 빛을 받은 사람은 그 마음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에크하르트는 반대했다. 오히려 그는 "그 사람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며 구하지도 않는다. 그는 왜라는 말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는 하느님이 그러한 것처럼 왜 없이 행동한다." 차규선 작가 역시 자신의 창작을 위해서 '왜'라는 단서를 달지 않는다. 자신의 예술을 위해서 이전에 존재했던 사조나 미술사의 맥락을 자기 편으로 끌어오지도 않는다. 오로지 행각 속에서 만난 새로운 순간의 시적 반응을, 총체적 감수성으로 몰려온 어떤 진실한 느낌을, 마음 속으로 느껴서 화면에 옮길 뿐이다. 화면에 옮길 때조차도 의식하거나 의도하지 않는다. 오로지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다하는 그것을, 닮고자 할 뿐이다. 그래서 '나날이 덜어내고 또 덜어내어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 다가가고자 한다.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 차규선 작가의 작품을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또 다른 한편 시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여산진면목」의 시구는 다음과 같다. ● "앞에서 보면 산줄기 옆에서 보면 봉우리(橫看成嶺側成峰), / 멀리서 가까이서 높은 데서 낮은 데서 그 모습 제각각일세(遠近高低各不同). / 여산의 참모습을 알지 못함은(不識廬山眞面目), / 단지 이 몸이 산속에 있기 때문이라네(只緣身在此山中)."

차규선_行脚-매화_캔버스에 혼합재료_248.5×333.3cm_2019

우리는 풍경에 대해서 어떠한 사실도 특정할 수 없다. 그것은 과학적 수치로 산출될 수 없다. 앞에서 보면 산줄기고 옆에서 보면 봉우리로 변한다. 제각각으로 모습을 바꾼다. 내가 산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산속을 벗어나면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지 모르나 벗어나는 순간 산의 의미는 퇴색되어 버린다. 산(세계)을 벗어난다는 것은 내가 죽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바로 그러하다. 우리가 짓고 있는 모든 인연, 우리가 맺은 모든 관계는 고정되어서 객관적인 것이 아니다. 매 순간 유동적으로 흐르며, 변환자재(變換自在)로 의미가 생멸한다. 어떤 인연에 집착할 때가 있다. 그것은 모든 것으로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보면 아무것도 아닐 때가 있다. 하찮은 인연이 중대해짐을 우리는 수도 없이 확인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산속을 벗어나 홀로 '지복직관'을 지닐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진정으로 인연들로부터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다. 세계의 인연 고리들로 착종(錯綜)되어 살아갈 따름이다. 우리의 삶은 그 산속에 있을 때만 의미가 형성된다. 그러나 또한 그렇게 형성된 삶과 인연의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 차규선 작가의 '행각'은, 행각으로부터 얻은 「행각」 연작은 우리가 삶과 세계에 대한 진면목을 영구히 알 수 없기에, 새롭게 형성된 의미들로 충만하다는 사실을 현시해준다. 새로운 의미들을 우리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시어로, 화폭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차규선은 우리에게 남겨진 땅이다. 그 땅은 불모지라서 사람의 발길 닿지 않은 살풍경이 아니다. 괴테의 시어를 빌려 "산정상에 있는 쉼"이다. 괴테의 「나그네의 밤노래(Wanderers Nachtlied)」에 나오는 풍경은 남겨진 땅의 의미를 극화시킨다.

차규선_行脚-설악_캔버스에 혼합재료_162.2×130.3cm_2019

모든 산들의 정상에는 / 쉼이 있고 / 모든 나무 우듬지에서 / 그대는 느끼지 못하네. / 한줄기 미풍조차도 / 작은 새들도 숲 속에서 잠잠하다. / 기다려라. 머지않아 / 그대 또한 쉬게 되리니. ● 이 시는 괴테가 31세인 1780년도 가을에 튜링겐 숲 속의 어느 산장 벽에 쓴 시이다. 이로부터 33년이 지나 64세가 되던 1813년 늦여름에 같은 산장을 찾았고 거의 다 지워져 버린 시 위에 다시 진하게 덧썼다. 20여 년이 지난 1831년 82세가 되어 여기를 다시 찾았다. 60년간 매달린 『파우스트』를 드디어 완성했고 쇠잔한 육체와 충만한 정신을 이끌고 자기의 옛 시를 만나러 산장을 다시 찾는다. 이 시의 마지막 부분을 읽고 괴테는 눈물을 흘린다. 괴테 역시 이 마지막 부분의 감동을 받기 위해서 지난한 행각을 했다. 정상에 올라 안식을 얻기 전까지 미풍도, 작은 새들의 지저귐도 들리지 않는다. 모든 과업을 성취했을 때, 그래서 세상의 미련을 내려놓았을 때, 모든 것이 보이고 들리는 쉼이 다가온다. 쉴 때서야 비로소 삶의 의미를 알게 된다. 차규선의 작품 세계가 아직은 우리에게 쉼의 의미는 아니다. 작가가 자신의 거의 마지막 행각의 의미를 보여줄 때, 우리는 도저히 알 수 없었던 인연과 삶의 고리가 지닌 의미를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끝에 느껴지도록 해주는 총체적 감수성으로 맞이하게 될 것이다. ■ 이진명

Vol.20191013a | 차규선展 / CHAKYUSUN / 車奎善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