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아저씨의 사랑 이야기

유영주展 / YOOYOUNGJOO / 劉鈴珠 / mixed media   2019_1105 ▶︎ 2019_1114 / 월요일 휴관

유영주_라면 아저씨의 사랑 이야기_2채널 영상, 사운드_00:14:11_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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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이응노의 집 창작스튜디오 제3기 입주작가展

주최 / 홍성군 주관 / 고암이응노생가기념관 이응노의집

관람료 / 성인 1,000원 / 청소년,군인 500원 장애인,유공자,65세 이상,5세 미만 무료

관람시간 / 09:00am~05:00pm / 입장마감_04:30pm / 월요일 휴관 단,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화요일 휴관

이응노의 집 Maison d' Ungno Lee 충남 홍성군 홍북읍 이응노로 61-7 고암이응노생가기념관 기획전시실 Tel. +82.(0)41.630.9220 leeungno.hongseong.go.kr

유영주의 작업에 대하여-미술의 개념을 실험하는 작업-유영주 작가의 옛 작품을 중심으로 ● 시각예술가들에게 "현대"라는 시공간의 의미는 작품의 내용적 측면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주제어이다. "현대"를 예술가들은 스스로 규정하면서 자기 자신의 작업을 수행한다. 작품은 절대적으로 수행(修行:닦고 가다듬는 행위)의 결과이지, 제작의 산물이 아니다. 제작은 필요와 그에 따른 효용의 목적을 전제하고 맞추어 내는 일을 일컫는다. 하지만 예술 행위는 일찍이 서구 근대철학자와 미학자들이 지적했듯이 "목적 없는 합목적성"의 산물이다. 물론 이 개념적 정의에 맞추어진 예술이해는 "현대"에서 충분히 의심스러운 비판적 사고를 유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은 제작의 유용성과 그 목적으로부터 자유롭다는 본질적 이해에 따른다. 이런 전승된 예술에 대한 개념적 이해에 대해 유영주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다. "비물질적 결과가 물질적 한정 안에 갇혀버리는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고 해결할 수 있을까?" 물론 이 말은 유영주가 한 말을 다듬어 문장으로 정리한 것이다. 이 질문을 풀어 설명해 보자면, 유영주의 예술이해를 쫓아가기 위해서, 예술가는 물질로 한정될 수 없는 근원적인 물음을 자기 자신에게 던지면서 그에 대한 다양한 실험을 수행하는 사람이다. 사람이란 여기서 생명을 담지하고 있는 자(者)이기에, 생명의 보존과 유지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거둬들이지 않는 자(者)이다. 물질과 비물질의 구분이 왜 예술가의 사유에서 그토록 중요한 것일까? 과연 그 구분은 기준으로 적절한 것인가? 우리는 이런 두 가지 질문을 가질 수 있다. 우선 물질과 비물질의 구분이 중요한 이유에 대해 해명하자면, 예술은 물질적 요소로 구성될 때, 마치 물건처럼 오감에 직접 자극을 줄 때 우리에게 알려진다. 그림은 그린 물질요소가 최소한의 시각적 여건에 온전하게 갖추어져야 그림이라는 물건처럼 보여지고, 우리가 그것에 반응한다. 음악은 청각에 자극을 주는 파동으로 물질적 요소를 전달해야만 우리가 듣고-알 수 있다. 하지만 음악은 악보에서 이미 그리고 악상(樂想)에서 이미 소리가 아니라 음악으로 존재한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그린 결과 이전에 예술가의 정신과 마음(이것을 내면이라고 부른다면) 즉, 내면에서 이미 그림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음악과 그림은 감각 대상 이전에 예술가에게 그 내면으로부터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물음으로부터 "현대"가 규정된다. 두 번째 질문, 물질과 비물질을 구분하는 것이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를 공고하게 만드는 기준이 되는가 하는 것이다. 우선 답해 본다면, '아니다!'.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의미는 에술가의 작품이 언제나 물질로 제시되면서도 언제나 그 제한되어 있는 사태를 초월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면 기준의 의미는 무엇일까? 경계를 넘어서기 위해선 경계가 앞서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영주의 작업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실험적 비판을 가하고 있다. ● 그녀의 작업을 두고 실험적 비판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 때문에"로써 주어진 삶의 자리로부터 "그 한계를 이겨낼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작품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작업이 몰두하는 것은 생활과 동떨어진 사태가 아니다. 오히려 그녀가 감당해내야만 했던 생활의 소소함에서 발견된 무지에 가까운 선입견이나 오해로부터 제 자리를 물어보는 작업이 나온다. 그것은 늘 주어진 경계로부터 경계를 뛰어넘거나 지우는 일로 판단된다. 그래서 실험적이라는 부사가 유영주의 작품을 이해하는 중요한 사태를 제시한다. 그녀는 작업을 통해 그녀와 그녀의 '우리들'의 실생활 속에서 발견된 무질서에 대해 자기 정렬(整列; 가지런히 줄을 주어 벼리다.)의 방식으로 자기를 정리(整理: 어수선한 상태에 질서를 주거 체계를 만든다.)하면서 자기를 검열(檢閱:잘못의 유무를 살펴 단속한다.)하는 과정을 작업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녀의 실험은 이렇게 세 가지 개념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렬-정리-검열은 유영주의 작업이자, 작업에 내재 된 조형요소라고 말할 수 있다. 또 다른 말로 꾸며보면, 그녀의 작업은 세 가지 중요 요소를 통해 발견되는 실생활의 은폐된 진실이다. 두 문장이 모두 하나를 지시한다. 지시하는 '하나'란 바로 유영주의 작업이자 작품이다. 그녀는 작업과 작품을 일치시킨다. 그녀의 옛 작업에 대해 작품론이란 방법론을 활용하여 '발견하고 있는 은폐된 진실'과 '조형요소로서 정렬-정리-검열'을 살펴보자.

유영주_Kitchen Manifesto_공동 부엌 청소 프로젝트_ZK/U, 베를린, 독일_2015
유영주_Beautiful is some moments_생루이, 세네갈_ 공원(자르뎅 두 퐁 페데르베) 청소 프로젝트_2013

베를린 키친 프로젝트(Kitchen Manifesto Berlin)와 세네갈 공원 청소 프로젝트(Beautiful is some momnets) ● 이 작품의 공통점은 프로젝트(project)라는 형식에서 우선 찾을 수 있다. 프로젝트란 사업단위를 지시하지 않으며, 말뜻에 따라 '앞으로 던져지는 환한 비춤'이다. 그래서 프로젝트는 예술가의 "현대"에서 작업(work)이나 작품(art-work)와 달리 예술가의 행위(act)를 의미로 지켜내는 개념어이자 낱말로 간주할 수 있다. 유영주의 예술은 프로젝트로 지각되며, 그녀의 작품은 프로젝트-아트 라는 신조어로 훨씬 실감 나게 정의될 수 있다. 프로젝트로서 행위란 다음과 같은 정의를 통해 좀 더 진지하게 성찰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에게 유의미한 행위란, 자기 자신에게 그 뜻이 우선 맞추어져 있는 행위이어야 한다. 그런 행위는 사회적 관계 안에서 타자와 적절한 '사이'를 두면서 '사이'를 좁힌다. '사이'가 이런 행위를 통해 사라지지 않으며, 다만 좁혀지고 멀어질 뿐이다. '사이'란 타자에게 여전히 낯설고 자기 자신에게 명확할수록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사이'는 '사이'로 그저 존재할 뿐, 좁혀져야 마땅하지도 않거니와, 멀어지는 것이 당연하지도 않다. 그 '사이'를 어떻게 사유하는가에 따라 '나와 너'의 관계가, '서로-관계'로써 근원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 관계의 이해로부터, 파악되는 인간관계의 아름다움은 근본적인 좋음의 의미로 드러난다. 이렇게 드러난 좋음(good)은 무엇을 좋아함(likeness, enjoying)과 거리가 멀다. 유영주의 자기 검열의 방식으로 작업은 이 '좋음의 좋아함'과 '좋아함의 좋음'을 변환시키면서 혼용된다. 이 변환(變換:바꿔 고치다.)은 작가가 멈추게 하는 '때와 곳'으로부터 생동감을 가진다.

유영주_Kitchen Manifesto_공동 부엌 청소 프로젝트_ZK/U, 베를린, 독일_2015
유영주_Kitchen Manifesto_공동 부엌 청소 프로젝트_ZK/U, 베를린, 독일_2015

「베를린 키친 프로젝트」에서는 공용 부엌 사용에 대한 "어떻게"(How to do in public)를 '사이'의 벌어짐으로부터 사유하고 행동으로 옮긴 내용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녀의 이 작품은 결코 착한 사람의 선한 행동이 아니며, 도덕적인 일침도 아니다. 그것은 그녀의 작업이면서 동시에 그녀의 '사이-관계'에 대한 이해다. 이 작품으로부터 우린 유영주의 "현대"가 '지금-여기'를 강조한 일상생활에서 확연하게 드러나 있음을 알아볼 수 있다. 그녀는 행동으로 욕구하면서, 공동체적 삶 안에 자기 자신이 숨겨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주변에 알린다. 그런 이유로 변환은 늘 생생하게 바뀜을 만들어 버린다. '같이 있는 장소'에서 벌이는 그런 행동은 분명히 관계 안에서 말을 주고-받음의 형식이 분명한데, 그녀는 오히려 묵묵히 감당하는 방법을 선택한다. 마치 침묵처럼 느낄 수 있는 그녀의 작업은 무위(無爲:하는 행동의 없음)의 능동으로써 적음(寂音:소리가 고요함을 알린다)이다.

유영주_Beautiful is some moments_자르뎅 두 퐁 페데르베, 생루이, 세네갈_ 공원에서 청소를 한 날의 날짜가 적힌 36개의 쓰레기 봉지, 묘지에서 주운 나뭇가지들, 시장에 버려진 천 조각들, 부서진 벽돌_가변크기_2013
유영주_Beautiful is some moments_프로젝트 수행 일년 후 세네갈 레지던시의 코디네이터로부터 공원이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고, 주변 상인들 사이에 내가 그 공원을 깨끗하게 만들었다는 소문이 돈다는 내용의 이메일과 함께 사진을 받았다_2014

「세네갈 공원 청소 프로젝트」을 그저 보이는 대로 써 보면, "공원의 쓰레기를 치우다." 그 이상으로 진술할 수 없다. 우리가 이 작품의 다큐멘터리를, 또는 르포 형식의 사진을 볼 때, 착한 사람의 착한 행동거지를 떠 올린다면, 유영주의 작업을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쓰레기가 치워지면서 잘 정돈된 공원이 모습을 되찾아가는 일련의 과정이다. 이것을 한 예술가가 수행하듯 해버린다. 이 작품은 구조적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구조를 파악하지 않은 채 지각된 것만 기술하면, 선행(善行)의 과정과 결과로만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선미(善美)가 일치된다고 여겼던 르네상스 이전의 미에 대한 관념적 이해로 회귀한다는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현대"를 작업에서 지각적 요소로 우리에게 알려준 바 있다. 그러므로 그녀의 작업은 새로운 '선미'의 이해 안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정렬(整列:가지런하게 펼치는 일)-정리(整理:바로잡음)-검열(檢閱;살펴서 돌보는 일)의 세 요소로 해석해 보자. 혼란스러움을 발견하고 질서를 부여하는 일은 창조행위를 설명하는 근간이다. 하지만 예술가는 결코 창조하는 자가 아니다. 예술가는 일(work)하고 제작(work)하며, 행위(act)하는 자이다. 유영주의 작업은 앞서 말한 것처럼 "행위"에 걸려 있다. 행위로서 그녀의 작업과정은 세 단계를 가지고, 이 단계별 구별되는 행위가 작업의 기본 구조를 형성한다. 따라서 세 요소를 풀어 설명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사태(事態:일이 되어가는 여러 조건과 그에 대한 이해/situation)를 가지런하게 펼쳐 마치 전개도를 통해 사물의 입체를 살피듯 일-행위를 한다. 이 행위를 통해 사태는 그녀 앞에서 어떤 내용으로 상황(circumstances)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좀 더 명료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간-공간을 내비친다. 여기서 그녀는 자기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 즉 자기의 어떤 기분을 통해 이 상황을 이해하고 있는지를 가늠한다. 결국, 자기 자신을 더 명료하게 이해하려는 태도를 견지한다. 그리고 그 상황들을 살펴 돌봄으로써 사태를 재구조화 시킨다. 우리가 그녀의 작업을 통해 지각하게 되는 것은 이 전 과정이다. "쓰레기를 치워 공원의 깨끗한 모습을 되살린" 작업은 그녀의 이런 살피고 돌보는 세계-이해의 한 사례이다. 이런 작품에서 우리는 이렇게 물어 볼 수 있다. "도대체 왜 그런 행위가 예술이라고 말해지는가?" 그것은 "현대"에 초대될 때 스스로 풀릴 수 있는 우문(愚問)이기에, 작업으로부터 밝혀진 현답(賢答)에 귀를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

유영주_홍천마을, 아는 사람들 이야기_이응노의집 창작스튜디오_2019
유영주_홍천마을, 아는 사람들 이야기_이응노의집 창작스튜디오_2019

대화-conversation작업과 인터뷰-interview 작업에 대하여 ● 유영주의 작업, 대화-conversation은 이 단어가 지시하는 바에 따라, 일 처리방식의 효율적 '대-화'(對-話)이거나, 그저 이야기를 꺼내는 일이다. 대화-dialogue는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는 말의 건넴을 알려준다. 이 사이 관계를 의식하고 있는 말-건넴은 '말함'이 아니기에 마주하고 있는 사태에 이해가 간직된다. 그렇기에 그녀의 conversation 작업은 다른 양상에 빠져버리는 시간의 왜곡이 대-화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포착해 보여준다. 말함은 자신을 마주하고 있는 사람에게 전하는 일에 앞서 그 사이를 가로질러 가야 하는 간절함을 내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작업에서 유영주는 대-화로부터 각자의 존재 상황이 안으로 숨어버리는 '사이'의 거리감을 슬프게 드러낸다. 작업의 형식은 각기 다른 언어가 대-화의 형식으로 드러나고 숨는다. 소통은 이 대-화에서 차선(次善)일 뿐이다. 하지만 이 작업을 통해 '서로-말-통하는' 관계를 실험적 비판의 눈으로 매섭게 탈-은폐시키고 있음을 관객으로서 '우리'는 참여하며 알아본다. 간절함이 더 비장하게 영상물의 공간을 가득 채우고, 흘러넘쳐서 바라보고 있는 관객의 공간까지 전달된다. 우리는 작업을 보고 있는 '우리'보다 더 깊이 이 소통의 부재함 속에서 차라리 안주하고 있다. 이런 삶을 그녀는 작품에서 검열해 보여준다. 그리고 이 비판적 시각은 따뜻한 마음으로 인터뷰(inter-view)의 열린 공간으로 관객을 데리고 나가 버린다.

상호관계에서 질문이 선제할 때, 인터뷰(inter-view)가 일어난다. 인터뷰는 필요에 따르는 말의 채집이다. 작가도 자신은 취재를 하지 않고, 채집을 한다고 말한다. 다만, 인터뷰의 진행에 유연성을 부여하기 위해 공감이 필요하다. 작가는 공감의 대상으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런 계기를 만날 수 있는 '곳'을 찾는다. 이런 작업방식으로부터 그녀는 자신의 작품이 생명을 다룬다고 아직,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녀의 작업은 이미 살아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채집하는데 일정한 수준을 성취하고 있다. 우선 채집하는 방법이 그런 수준을 확보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채집이란 자기 맥락화 과정을 통한 전략적 성취다. 하지만 이 성취는 탈취의 방식으로 살아남기와 같다. 유영주는 맥락을 구성하고 지켜내기 위해 오랜 사유방법을 여과 없이 사용한다. 그것은 바로 관찰을 토대로 하는 대상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관찰하는 일은 일상(日常;불변으로 여기는 신뢰부터 반복을 이해함)의 신뢰가 만들어 낸 '사이'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이 '사이'를 보면서, 보았던 것이거나 보았음직한 것을 다시-신뢰하는 것은 삶이 그만큼 넓혀지고 깊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인터뷰(面談:얼굴을 마주한다는 의미가 강하게 지시되는 이 단어를 깊이 생각해 보자!)는 얼굴을 먼저 보여주어야 형성되는 관계다. 자기를 보여준다는 의미는 보는 사람에게 보여줌으로 관계를 제안하는 일이다. 이 일은 관계가 맺어지기에 맺어진 관계가 무엇으로 변환됨이며, '저리로 되어버림'이다. '저리로 됨'이란 기획되고 예측 가능한 맥락 안으로 들어옴이다. 이 상황은 "inter-"가 지시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관계는 선택과 결정의 진정성 문제라고 말한다. 진정성(眞情性:참된 뜻을 가진바)은 삶 안에서 늘 현실적이고 사회적이며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사단(事端)들과 끊이지 않고 연결되어 자기 앞에 주어져 있다. 인간은 진정성을 가진 인품이나 성품에 대해 곧잘 이야기하지만, 정작 진정성은 늘 자기 자신 앞에서 자신과 마주하고 있는 삶의 모습이다. 인터뷰작업에서 유영주는 이런 삶의 정경(正逕;옳고 바른 길)을 마주하려고 한다. 다만 그것을 기록의 방식으로 남기면서, 온전하게 모두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삶이 발가벗겨져 다 보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의 「인터뷰」 작업은 솔직하고, 미완의 완성도를 가지고 있다고 역설적으로 해명할 수 있다. * 유영주는 인터뷰 작업을 진행하면서, 문득 오페라(opera)를 기획하고 있다. 이 부분은 2장(章)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이섭

Vol.20191105a | 유영주展 / YOOYOUNGJOO / 劉鈴珠 / mixed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