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강한회화

김찬송_왕선정_이국현展   2019_1108 ▶︎ 2019_1126

초대일시 / 2019_1108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02:00pm~06:00pm / 이외시간 예약

아터테인 ARTERTAIN 서울 서대문구 홍연길 63-4(연희동 717-14번지) Tel. +82.(0)2.6160.8445 www.artertain.com

회화는, 청년처럼 강해지고 싶다. ● 타 장르의 예술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요 근래 미술현장에서는, 청년 작가들의 자생력 증진과 그것을 기반해줄 수 있는 활동력 향상에 엄청난 관심과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다. 청년은 말처럼, 어딘지 모르게 새로운 것들을 진취적으로 끌어내고, 문제를 제기하고, 낡은 것들을 뒤집어 버릴 수 있을 것만 같은 힘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 기질만을 놓고 봤을 때, 청년을 나이로 계측하고, 그것을 기준하게 되는 것에 상당한 위화감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오히려, 청년으로 측정되는 나이를 훌쩍 넘어 선, 청년도 아니고, 그렇다고 중년, 장년이라는 말로, 딱히 불려지고 싶지도, 부를 말도 없는 연배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더 많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시대를 상대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미술현장에 있어서 청년의 정의와 범위를 좀 더 찬찬히 이야기 해 보고 싶을 정도로, 너무나 빨리 청년을 벗어나 너무나 빨리, 은퇴를 준비해야만 할 것 같은 묘한 서러움이 감도는 것은 사실이다. 아직, 우리가 정리해야 할 숙제가 뭔지도 모른 채, 치열하고, 생동감이 넘쳐나는 곳을 떠나야 한다는 것. 박수칠 때, 떠나야 하고, 떠날 때를 알고 떠나야 아름답다고는 하지만. 일이 이 정도면, 뭐 쫌 질척거리더라도, 쫌 더 버텨봐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청년이고 싶은 마음으로 우리는, 나이로, 활동근거로 정해진 청년들과 어떻게 만나야 될까. 만나서 같이 밍글해 봐야 우리가 정말 질척거리고 있는지, 아니면 정말 떠나도 되는 건지, 아니면 떠날 때가 된 건지를 알 수 있지 않을까.

김찬송_오후, 침묵_캔버스에 유채_91×65cm_2019
김찬송_windy memory_캔버스에 유채_72.7×53cm_2019

'청년, 강한회화'는, 대놓고, 청년작가들을 만나고 싶어서 기획한, 3명의 전혀 다른 감성을 가진 회화 작가들의 그룹전시다. 물론, 전시는 서로 성격이 다른 그들의 회화 작품들로 구성된다. 회화의 성격이 다르다고는 하지만, 회화라고 하는 클래식하고 넓은 사고의 틀로 접근하자면, 그냥 회화 작가들의 그룹전시로, 일반화 시켜버릴 수 있는, 해서 갤러리에서 늘, 소소하게 해 오던 전시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회화는 그렇게 여전히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듯, 없는 듯,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미술에 대한 고민의 흔적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는 식으로, 너무나 당연한 미술임으로, 회화만으로 구성된 전시를 기획하는 것이 얼마나 식상한지, 반문을 받게 되는 것 역시 회화다. 그러나 그렇게 식상해 보이던 회화가 왜 그렸는지, 흡사 내 이야기인 듯, 소통하게 되면.. 세상, 그보다 강한 감동을 줄 수 있는 예술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찬가지로 회화 역시, 그렇게 강해지는 순간을 위해 2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끊임없이 갈고 닦고 있었음을. 또한,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이 순간에도, 그 강한 감동을 위해 면면이 내려 오고 있는 내공들을 더욱 더 강하게 끌어 올리기 위해 수련을 게을리 해서는 안될 듯…

김찬송_a broken branch_캔버스에 유채_53×72.7cm_2019
김찬송_garden of mistrust_캔버스에 유채_45.5×45.5cm_2019

재현적 회화에 대해 궁극의 손맛을 보여줘 왔던, 이국현작가는, 동시대를 살고 있는 청년 노동자(태안화력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의 죽음을 통해, 회화의 표현 범위를 확장하는 작업을 보여 줄 예정이다. 이는, 단지 회화의 표현 범위에 대한 청년 작가의 고민만이 아니라 동시대의 여러 사회적 문제에 대해 작가로서, 어떻게 바라보고 판단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충분히 담보해야 하는 회화의 중요한 과제임을 보여주고 있다.

김찬송_unknown hands_캔버스에 유채_45.5×45.5cm_2019

카메라가 발명되어 모두가 사용이 가능한 즈음, 재현 작업을 회화의 제1 덕목으로 여기고 있던 당시, 회화는 이제 곧 모든 권위를 카메라에 내 주어야 할 판국이었다. 그러나, 역시, 상대방의 기분을 맞추거나 자신의 합리성을 공고히 하기 위한 감정의 호소, 일종의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기계는, 우리의 감정을 색으로, 작가적 기질로 그리고 그들의 손으로, 대차게 표현해 낼 수 있는 회화를 대체하기에는 너무나 정직했고, 철저한 기계였다. 물론, 지금 사진예술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장르가 활발하게 활동을 하게 되기 전 이야기다. 마찬가지로, 조각에서는, 3D 프린터의 발명으로, 카메라가 발명될 즈음의 회화와 같은 분위기를 맞이한 듯 하다. 조각 역시, 우리의 손으로, 자유로운 정신으로 창작 될 수 밖에 없다는 것. 마찬가지로, 3D 프린터가 우리의 생활에 다양한 변화와 편리함을 위해 적극적으로 더 개발되고, 발전하는 것에는 엄청난 기대감을 가질 수는 있겠지만, 조각작품을 대체하기란 아직 역부족일 거란 전망이다. 물론, 3D 프린터를 재료나 방법으로 작품에 적극 활용하는 거야 뭐, 모든 시대가 그랬듯이, 그 시대를 대표하는 과학적 발견과 발명을 작품에 활용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미술사의 축이라고 이야기한 사람이 있을 만큼, 적극 권장할 수 있는 내용이다.

왕선정_헤브어파티_캔버스에 유채_65×100cm_2019
왕선정_Her_캔버스에 유채_100×65cm_2019

이국현 작가는, 이렇게 회화의 재현과 대치하고 있었던, 카메라의 뷰파인더와 3D 프린터의 입체적 재현을 교묘하게 섞음으로써 청년 노동자의 죽음을 보다 더 동시대의 일반적 상황으로 확장시키게 된다. 신문이나 방송의 한 켠에 자리하고 있는 슬프고 안타까운 뉴스로부터, 우리의 감정을 이입시킬 수 있는 회화적 상상력으로, 극적인 장면으로 전환시켰다.

왕선정_마미_캔버스에 유채_각 22×27cm_2017
왕선정_그 남자 연작 (The beast)_캔버스에 유채_53×45cm_2016

김찬송 작가는, 너무나 확실하게 두 개의 주제를 다룬다. 하나는 자신의 신체 그리고 하나는 인위적으로 구성된 정원이다. 둘 사이의 연관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듯 하지만, 거기에는 바라봄의 대상, 즉 원하든 원하지 않든, 누군가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대상이라고 하는 공통점이 있다. 물론, 움직일 수 있는 신체와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과는 상당한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누군가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식물의 핸디캡 못지 않게, 신체는 늘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는 정신이 있다. 해서 둘의 정도 차이에 있어 어느 쪽이 더 심할 수 있겠다. 가늠하는 것은 의미 없을 듯 하다.

왕선정_그 남자 연작 (The beast)_캔버스에 유채_53×45cm_2016

우선, 김찬송 작가의 신체는 스스로 대상화의 과정을 겪으면서, 오히려 객관적인 대상 그 자체가 된다.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는 나. 그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신체가 그 자체 색을 갖게 되고, 독립적인 입체감을 갖게 되면서 신체는 더 이상 나의 그것이 아니게 되는 상황이 만들어 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작가의 신체는 작가의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오히려 다양한 시선들을 즐기고, 당신의 그것과 섞일 수 있는 의식을 넘어 서로의 기억과 일상까지도 소통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되어 버렸다. 그런 의미로, 작가의 화면에 구성 된 정원의 식물들 역시, 그 만의 매개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 화분에 담겨 자라는 식물이든, 깊은 산속의 풍성한 숲에서 자란 식물이든, 그녀의 화면으로 옮겨지게 되면서 식물들은 자라온 환경으로 인해, 서로의 정체성으로 부딪히기 보다는, 그 정원을 위해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될 하나의 부분으로 자리 잡게 된다. 물론, 식물들 하나하나를 재구성하거나 변형시켜 조화를 만들었다는 생각을 떨치기는 어렵다. 그러나 작가가 처음, 정원의 식물들에게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어떠한 상황에서든 주어진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강렬한 삶의 의지가 있다면, 서로를 의심하는 것만큼 소비적인 일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결국, 서로가 견제하던 것들을 조금씩 바꿔나가다 보면, 종래에는 서로의 역할과 모습이 닮아가면서 전체의 조화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 라는 부분에서였다. 이는, 굳이 작가에 의해 식물의 원래 모습이 조금씩 변형이 되었을 것이라는 애꿎은 토에 구구절절 답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국현_SNIP_ 因 緣 生 起_캔버스에 유채_112.1×145.5cm_2014
이국현_소지품 Someones Belongings_캔버스에 유채, PLA_91×116.8cm_2019./dd>

왕선정 작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심리를 그린다. 정확하게는, 진저리 날 정도로 솔직해지는 순간, 혹은 상황들에 처해 있는 사람들의 심리를 그린다. 그리고, 그 심리의 날을 서게 만드는, 그 이면의 욕망들을 거침없이 그리는 작가다. 욕망은, 적당히 컨트롤할 수 있다면 삶의 활기를 더해주는 에너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경우는 욕망의 과도한 분출로 정상적인 삶을 망치거나 너무 과한 억제로, 무기력하고 지루한 삶을 살게 된다. 작가는, 우리 욕망의 그 지점들, 즉 과하게 분출되거나 너무나 억제되어 있는 순간들에 집중한다. 물론, 일부러 그 순간이 어떤 것인가를 골똘하게 연구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자신의 경험들 혹은 기억들에 비춰지는 사람들의 모습들에서 언뜻언뜻 보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때의 감정들. 그게 그들의 감정인지 아니면 작가 자신의 감정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 감정들을 매우 솔직하게 그린다. 오히려 비현실적인 것만 같은 일상의 삶에서는 데면데면하게 자신의 감정을 속이거나 드러내는 일을 꺼리는 반면, 그림을 그릴 때만큼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솔직하고 대범하다. 그 일에 있어서 조차 일상을 살듯이 대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작가의 삶 자체를 부정하게 될 것 만 같은, 그런 열정이다.

이국현_소지품 Someones Belongings_캔버스에 유채, PLA_91×116.8cm_2019_부분
이국현_소지품_캔버스에 유채_45.5×53cm_2019

청년회화, 강해지길 바라는. 회화는 어쩌면 강하지 않음에 대한 반증일 수도 있다. 힘은 늘 약자의 갈망이기 때문이다. 물론, 회화라고 하는 예술적 장르를 두고, 강하고 약하고를 이야기 한다는 것 자체에 피식. 분명 실소를 하게 될 것임을 안다. 그럼에도, 청년들의 회화가 강해지길 바라는 것은, 지금 여기를 명백히 알아야 나의 상황에서 필요한 것들을 찾을 수 있고, 보완하고, 발전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분명, 지금을 살고 있는 회화들이 오히려 더 안주하고, 밴댕이 속만큼이나 가당한 기득권에 기대어 서있는 모습을 보고 어찌 강한 회화를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거침없이 시대를 항변하고, 변화와 발전을 위해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을 것만 같은, 이름, 청년이다. 그들의 회화가 지난한 수련으로, 극 강의 내공으로 강해졌으면 하는 바람. ■ 임대식

Vol.20191108h | 청년, 강한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