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 오고, 오며 가며 d'une promenade sans destination

김건일展 / KIMGEONIL / 金建一 / painting   2019_1114 ▶ 2019_1201 / 월,공휴일 휴관

김건일_가고 오며_캔버스에 유채_91×116.8cm_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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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9_1114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화,수요일_03:00pm~09:00pm(06:00pm~09:00pm예약) 목~토요일_01:00pm~06:00pm / 일요일_01:00pm~05:00pm / 월,공휴일 휴관

도로시살롱 圖路時 dorossy salon 서울 종로구 삼청로 75-1(팔판동 61-1번지) 3층 Tel. +82.(0)2.720.7230 blog.naver.com/dorossy_art www.instagram.com/dorossysalon

가고 오고 오고 가며 ● 이번 도로시 살롱 전시는 그간 꾸준히 생각해 오던 기억과 마음의 연장선에 있다. 조각난 기억들과 그 기억들의 확장으로 마음에 집중하게 되었다. 마음은 자신의 상태이며 상황이다. 마음에 따라 대상과 현상은 다르게 해석될 수 있고 이 마음이 모든 것의 결정체라고 생각한다. 이 알 수 없는 마음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형상도 없으며 미지의 세계와도 같아서 회화와 연결될 때 과연 어떤 형상으로 표현될지 궁금해졌다. 숲을 비롯한 온갖 자연물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 변화의 속도는 인지할 수 없을 정도로 미미하게 혹은 과감하게 변화한다. 나는 이런 변화의 속도와 마음의 변화가 서로 상호작용한다고 생각한다. 즉, 자연의 물리적 변화와 자연을 바라보는 심리적 변화가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상의 변화를 바라보는 관찰자의 마음에 따라 이 변화도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 '가고 오고 오며 가며'는 대상과 마음에 관한 것이다. 자신이 바라보는 대상과 바라보는 대상의 상태에 관한 내용이다. 대상이 변하는 것인지 그 대상을 바라보는 자신이 변화하는 것인지 그 풀리지 않는 부분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하고자 한다. ● 여러 공간을 이동하며 눈으로 흘려 보았던 풍경들은 늘 다르게 다가온다. 그 풍경들이 나에게 던지는 여러 질문들에 대해 생각하며 답을 구했던 것 같다. 그러나 요즈음 그 질문들에 굳이 답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예전에 보듯이 흘려 보지는 않는다. 보고 느끼지만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구체적인 것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다시 질문을 던지곤 한다. 자신이 가야 할 곳, 찾아야 할 것에 대해서 스스로 질문을 한다. 예전 풍경을 해석하려 했던 태도에서 이제는 자신에 대해 반성의 의미로 질문을 던지는 자세로 변화하고 있다. 그러므로 숲은 마음을 보는 다른 창이며 시간을 대하는 태도가 되고 있다. ● 이제는 전시를 하는 마음도 달라지고 있다. 예전에는 전시 준비하는 기간을 스스로 힘든 여정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현재 작품을 준비하는 이 시간이 행복으로 다가오고 있다. 다시 못 올 몇 번의 시간에 감사함과 즐거움을 서서히 알아 가고 있는 중이다. 이번 전시는 전시라는 물리적 결과보다 준비하는 기간과 과정이 본인에게 작가로 살아가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 시간이었다. - 2019. 10. ■ 김건일

김건일_오고 가며_캔버스에 유채_91×116.8cm_2019
김건일_비 그친 여름_캔버스에 유채_97×145.5cm_2019
김건일_마음_정원_캔버스에 유채_65×91cm_2019
김건일_마음의 흔적_캔버스에 유채_65×91cm_2019
김건일_우연_캔버스에 유채_72×91cm_2019

처음 김건일 KIM Geon-Il의 작업을 보았을 때, 아 푸른 풍경을 참 잘 그리는 작가구나, 했다. 그랬다. 몇 해 전 꽤 더웠던 여름날, Y작가 전시 뒷풀이 자리에서 우연히 알게 된 작가는 푸르름으로 가득한 도록을 한 권 들고 도로시로 찾아왔었다. 아마 뒷풀이가 있은지 채 일주일도 안되었을 때였을 것이다. 그날 많은 작가들을 새로 만났고, 그렇게 꽤 많은 작가들에게 명함을 건냈지만, 연락처를 주고 받고 이렇게 빠른 시일 내에 도록을 들고 갤러리로 찾아온 작가는 아마도 그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갤러리 문을 연지 이제 막 일년을 넘긴 초짜 갤러리스트였던 나는, 내가 만들어 가고 있는 공간과 전시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작가가 고마왔다. 그리고 그 고마운 작가 건낸 도록을 가득 채우고 있는 푸르른 숲의 녹색 풍경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나는 김건일을 푸른 녹색 풍경을, 숲을 그리는 작가로 기억 속에 입력해 두었다. ● 김건일은 "조각난 기억들과 그 기억의 확장으로 마음에 집중"하며 이를 숲으로 그려 표현한다. 마냥 아름다운 푸른 숲의 재현인 줄 알았던 그의 풍경에는 사실, 그가 감춰 둔 이야기가 있었다. 작가는 그의 숲과 자연은 "시각적인 청량감이나 정서적인 편안함을 주려고 녹색의 자연물을 그린 것이 아니라, 기억과 욕망에 대한 연상을 자극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멀리서 보면 아름답고 "근사했던" 숲이지만, 우리가 숲 안으로 들어가 그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와 풀, 이파리들을 보다보면 밖에서 보았던 것과는 다른 모습들을 발견하게 된다. 작가의 표현에 의하면, "이질 적인 생명체들이 어지럽게 뒤엉켜 있는" 모습이다. 멀리서, 밖에서 보았을 때에는 결코 인식할 수 없는, 알 수 없는 것들. 기억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어떤 무엇인가를 기억할 때, 구체적인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다들 무엇인가를 기억해내려, 기억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모아 이어 붙여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서술하다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이 과정 또한 '기억'의 조각 모음이다). 그리고 그 기억 조각들의 조합이 완전한 기억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때로 그 기억의 조각을 모아가는 과정에서 조각의 퍼즐이 어긋나면서 자신의 기억이 왜곡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한다. 우리가 밖에서 본 아름다운 숲은 실제로 가까이 가서 보니 병충해로 볼품없고 잡초와 마른 덩쿨만 무성한 생명력을 잃은 초라한 숲일 수도 있고, 또 정말 그 안에서 봐도 싱싱한 나뭇잎으로 상쾌한 아름답고 건강한 나무들로 우거진 녹음일 수도 있다. 혹은 반대의 경우도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떤 것을 기억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숲을 바라 본다. 내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모아 기억하듯이, 내가 보고 싶은 모습으로 숲을 본다. 보는 것은 의외로, 혹은 아주 당연하게 주관적인 것이니까. 그렇게 김건일이 그려내는 숲은 기억의 조각들을 모으고 이를 엮어 잘 짜서 만들어 낸, 그의 마음이 만들어 낸 숲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어떤 마음이 이런 숲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일까.

김건일_비 오던 날_캔버스에 유채_45×53cm_2019
김건일_시간_캔버스에 유채_41×53cm_2019
김건일_아직 남은 사진_캔버스에 유채_45×53cm_2019
김건일_마음에 부는 바람_캔버스에 유채_53×72.7cm_2019

몇 해 전 작가가 내게 처음 건네 준 도록으로 다시 돌아와본다. 나로 하여금 김건일을 '푸른 풍경을 잘 그리는 작가'로 기억하게 만든 그 순간으로 돌아와 본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나는 작가의 작업을 다시 찬찬히 차례로 들여다 보기 위해 그가 내게 건넨 도록들을 꺼냈다. 그리고 난 나의 기억의 왜곡에 다시 한 번 놀랐다. 나는 그가 맨 처음 내게 보여 준 도록에 초록빛과 주황빛이 오버랩 되는 대나무 숲이 그려진 작품이 있다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자료를 정리하다 보니, 기억 속 그 작품은 다른 도록에 수록되어 있던 것이었다. 왜 그랬을까. 분명히 그를 푸른 풍경 작가로 기억했으면서, 왜 내 기억 속에 더 강하게 자리 잡은 것은 주황빛이 함께 감도는 다른 시기의 그림이었을까. 내 마음이, 어떤 무엇인가가 나의 기억을 지우고, 다시 채우고, 재구성했다. 사실 도록은 변한 것이 없다. 다만 그 도록을 기억하고 있는 내 마음이 변했고, 아마도 내가 그의 작업을 바라보는 시선이 변했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나는 김건일의 전시를 보고, 또 작업실을 방문하게 되면서 그의 작업을 단지 그 도록이 아닌 실제 작품을 보며 기억하고 이해하게 되었고, 내 기억은 무의식 중에 아마도 그가 녹색 말고 다른 색도 쓴다는 것을 잊지말라고 종용했을런지도 모르겠다. 혹은 그냥, 도록 속의 내용은 아예 잊어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사실 나는 "숲만 보고 나무를 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랬다. 숲을 보느라 – 도록 속 그의 작업이 주는 전반적인 느낌을 보느라, 나무는 스쳐지나갔다 – 도록 속 작품 한 점 한 점은 눈여겨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보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나무들-작품들-은, 다시 도록을 펼치니 기억이 난다. 그래, 내가 그 때 처음 도록으로 접한 김건일의 작품들은 이것들이 맞다. 기억이란 그런 것 같다. 기억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어딘가에 마치 프린트된 것처럼 입력되어 있어서 다시 들여다보면 하나하나 보이는, 찾아낼 수 있는 그런 조각들말이다. 숲을 보느라 나무를 보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나무가 그 자리에 없었던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가 기억해내지 못한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을 기억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김건일의 숲은, 언뜻 보면 "시각적인 청량감과 정서적인 편안함을 주기 위한 것" 같은 그의 푸른 숲은, 그의 푸른 풍경은 작가의 의도대로 나의 기억과 욕망을 자극해냈다. ● 그런데, 이제 김건일은 그렇게 타인에게 자극을 주고, 질문을 던지고 답을 구하는 일에는 더 이상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가고 오고, 오며 가며. 작가가 이번 개인전의 제목으로 제안한 것이다. 청량감과 편안함을 주어야 마땅한 푸른 풍경을 그리며 그 안에서 기억과 욕망과 존재와 인식에 대한 고민으로, 고뇌로 가득했던 작가는 이제 더 이상 작업으로 본인을 괴롭히지 않겠다고 한다. 오히려 그 반대다. 주변을 둘러싼 근사한 숲을 그리고 지우고 또 지우고 그리는 과정을 반복하며1) 작가는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그 시간을 즐기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마음을 이해하고 이를 그려낸다. 우리가 어디로 가든, 어디에서 오든, 또 그래서 다시 어디로 가든, 이는 중요하지 않다. 주변의 풍경이 내게 무슨 말을 건내는지, 숲을 보고 나무를 볼 것인지, 나무를 보고 숲을 볼 것인지, 숲 안에 있기 때문에 숲이 보이지 않는 것인지, 이제 더 이상 그는 그에 대한 답을 구하려 애쓰지 않는다. 그저 이를 기억하고, 간직하고, 함께 흘러갈 뿐이다. 그리고 그 순간을 기억한다. 마음의 상태에 따라 풍경을 바라보고, 즐기고, 그리고 기억할 뿐이다. 나는 이제야 그가 숲 속에 숨겨 놓은 기억과 욕망에 자극받았는데, 그는 이미 벌써 저 멀리 숲 밖으로 나가 즐기고 있다. 목적지가 어디든 상관없다. 가고 오고, 오며 가며 d'une promenade sans destination2), 그렇게 우리는 김건일 KIM Geon-Il이 그려낸 풍경 속에서, 우리의 마음의 숲을 거닐며 산책을 즐긴다. ■ 임은신

* 각주 1) 김건일은 캔버스를 먼저 색으로 채운 후 지워나가는 방법으로 그림을 그린다. 이를 한 번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 반복하기 때문에, 그의 그림은 여러 레이어가 겹겹이 쌓여 만들어지는 오버랩 작업이다. 2) 이번 전시의 외국어 제목은 작가의 요청에 따라 영어가 아닌 불어로 준비했는데, 작가가 제안한 우리말 제목의 철학적 뉘앙스를 살리기 위해 의역한 것으로, "목적지 없는 산책으로부터"라는 뜻이다.

Vol.20191116j | 김건일展 / KIMGEONIL / 金建一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