벡터의 합은 0 (The sum of vectors is zero)

민혜기展 / MINHYEKI / 閔慧基 / installation   2019_1121 ▶︎ 2019_1205 / 월요일 휴관

민혜기_벡터의 합은 0 (The sum of vectors is zero)展_스페이스 나인_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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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혜기 홈페이지_http://reblank.net/

초대일시 / 2019_1122_금요일_06:00pm

후원 / 서울문화재단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스페이스 나인 SPACE 9 서울 영등포구 경인로 739(문래동2가 4-2번지) 2층 Tel. +82.(0)2.6398.7253 www.facebook.com/space9mullae

스티븐 호킹 작 『시간은 항상 미래로 흐르는가』는 제목만으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시간은 늘상 하나의 방향으로 수렴되는 것처럼 보이나, 많은 경우 브라운 운동처럼 무규칙하게 움직인다. 어떤 시간은 달리의 그림처럼 축 늘어져 있고, 어떤 시간은 과거에 응어리져 끈적거린다. 오래된 미래를 실현하는 현명한 누군가도 있겠지만 생로병(生路病)의 시간이 항상 미래로 흐른다고 자신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 민혜기 작가의 작품 「비자발적 여행」은 시간의 브라운 운동 중 호명되는 한 지점[공간]을 '신발'이라는 형태로 호출한다. 신발이 무엇인가.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예비 부모들은 작디작은 신발을 구입하며 즐거워한다. 태어난 아이에게는 덧신을 신겨 여린 발을 보호한다. 비로소 걷게 되었을 때 아이가 만나는 세상은 더욱 크고 넓어지며 그에 따라 신발의 종류도 다양해진다. 다양한 가치들 중 자신의 선택한 대로 걸어가는 과정을 '길'이라고 표현한다면, 몇십년 간의 삶이란 곧 길을 걷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길을 마치면 발을 곱게 싸서 또 다른 길로 떠나는 이를 배웅한다.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 길을 걷는 동안 우리는 늘 신발을 신고 있다. 신발은 시간인 동시에 공간이다. 삶이라는 시공간을 걷는 동안 어디든 디폴트처럼 동행한다. 물론 시간은 항상 미래로 흐르지 않고 공간은 언제나 호의를 보이지 않는다. 시간은 때로 나를 부수고 미끄러뜨리고 돌아서게 하고 남루하게 만들고, 공간은 때로 나를 구속하고 거절하고 밀어내고 불편하게 만든다.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모를 시간의 브라운 운동과 어떤 공간의 속사정도 알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 길 위에서, 신발은 나의 가장 낮은 곳을 자처한 채 모든 경험을 함께 치러 낸다. 신발장 안이라는, 신발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가장 수치스러울지도 모를 공간에 밀어 넣어진 채 잊혀가는 동안에도 그는 그 시공간을 묵묵히 견딘다. 단 한 번도 자발적으로 걸을 수 없었던 신발의 운명은 거기서 다한 것처럼 보인다.

민혜기_비자발적 여행_기증 받은 신발들, 나무, 모터, 기어 장치등_가변설치_2019
민혜기_비자발적 여행_기증 받은 신발들, 나무, 모터, 기어 장치등_가변설치_2019
민혜기_비자발적 여행_기증 받은 신발들, 나무, 모터, 기어 장치등_가변설치_2019

작가는 비자발적으로 은둔하고 있는 신발에게 말을 건넨다. 호명 받은 신발은 주인의 입을 통해 자신의 역사를 말하고 듣는다. 우리 모두 그런 신발이 하나쯤 현관 신발장에 들어 있다. 이제는 돌아보지 않지만, 어쩌다 신발장을 들여다보면 늘 그 자리에 있는 신발. 자리만 차지하고 다시는 신을 것 같지 않은데도 어쩐지 쉽게 버릴 수는 없는 그것. 그것을 신고 다니는 동안 다양한 시공간에서 발생한 일들을 가장 직접적이고 물리적으로 경험한 신발의 무의식을 작가는 깊이 탐침한다. ● 작품에 신발을 기증한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초록색 가죽 단화는 색깔부터 인상적이었다.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외모에 신경을 썼던 시기, 신발은 평소의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행동의 알리바이가 되었다. 작가는 그의 신발로부터 인생의 단 한 번뿐이었던 시간을 재현했다. 삶의 화양연화의 순간을 기록한 은색 구두도 비슷한 맥락이다. 무거운 악기를 짊어진 채 합주하다가 마침내 무대에 오를 때까지 신었던, 한 사람의 반짝반짝한 시기가 그대로 담긴 신발이다. 마치 무기처럼, 중요한 클라이언트를 만날 때마다 자신감을 고양하는 데 도움을 준 신발도 있고, 무려 고등학교 때 구입하여 굽과 깔창을 여러 번 바꾸며 신다가 이제는 발이 아파 못 신어도 계속 간직해온 신발도 있다. 홍콩 출장에서 발이 아파 구입한, 중요한 시기마다 함께 했던 갈색 구두는 세월이 흐를수록 에이징되는 느낌이 좋아 오래 동행했다. 16년간 유용하게 신어 바로 전날 진행한 신발 정리에서도 버리지 못하고 있던, 이제는 거의 육화(肉化)된 신발은 이미 삶 그 자체였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십 년 이상 된 오래된 신발이다. 그 오래됨에 주목하자. 오랜 시간이 지나도 굳이 신발장 한 켠을 차지한 채 머물고 있는 실존 그 자체. 자신을 쉽게 버릴 수 없도록 유도해온 신발의 무의식. 이제는 기억 저편으로 넘어갈 뻔했던 시공간을 작가는 작품을 통해 되살려낸다.

민혜기_7인의 인터뷰(비자발적 여행의 신발 기증자들)_단채널 영상_00:22:17_2019
민혜기_문_문, 나무, 유압 장치 실린더, 타이머 등_가변설치_2019

작품 속 신발을 장착한 장치 앞쪽에는 아주 작은 불빛이 매달려 있다. 빛은 너무 작고 여려서 민첩하게 걸을 수 있도록 인도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작품 속 신발들은 사람의 몸을 담고 있을 때보다 느린 속도로 걷는다. 신발은 난생 처음으로 인간의 몸을 싣지 않은 채 걷고 있지만, 아쉽게도 이번 역시 장치에 태워진 채 비자발적 걷기 중이다. 어쩌면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을 태우든 기계에 장착되든 묵묵히 걷기만 한다. 걷고 또 걷는다. 그렇게 걷고 있는 신발과 인간의 삶은 놀랍도록 닮아있지 않은가. 자발적으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구나 인생이라는 길을 비자발적으로 여행한다. 그 여행 중 희로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欲)을 겪으며 때로 내 인생을 신발장 안에 처넣기도 한다. 다시는 꺼내기 싫지만 그렇다고 쉽게 버릴 수 없는 모호한 것. 갖다버릴까 망설이지만 더 이상 간직할 이유도 없어 애매한 것. 이런 고민과 갈등이 싫어 깊숙이 묻어두기만 한 채 묵묵히 견디는 어두운 시공간. 누구나 인생에 그런 시기가 있다. 그럴 때 누군가 내 삶을 다시 호명해주고 새롭게 걷는 기회를 만들어 준다면 어떨까. 어두운 시공간에 갇힌 채 무의식의 세계로 넘어간 당시의 시공간과 자아를 현재진행형으로 불러낸 작가의 시선은, 그래서 따뜻하다. 그러나, 염화시중의 미소는 어린 아기의 미소처럼 단순히 천진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도저하고도 치열한 과정을 겪고 깨달음을 얻은 후에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미소인 것처럼, 작가의 시선 역시 그러하다. 따뜻한 시선을 가지기까지의 치열함을 보여주는 지점이 작가의 또 다른 작품인 「문」이다. ● 우리는 화가 나면 문부터 닫는다. 사춘기 시절에는 방문을 소리 나게 쾅 닫고, 그것이 머쓱해지는 나이가 되면 소리 없이 마음의 문을 닫는다. 그래서 문은 담이 되기도 하고 길이 되기도 한다. 작품 「길」에 등장하는 문은 어쩐지 길보다는 완고한 담처럼 느껴진다. 키르케고르의 표현을 빌리면 '문 앞에 선 단독자', 사르트르 식이라면 문 앞에 '내던져진 존재'처럼 보인다. 작품 「문」에 사용된 실제 문과 작가 자신의 모습을 3d 프린터로 구현한 이 작은 작품 속, 소매를 걷어붙인 채 문을 직시하고 있는 작가의 몸에는 결기가 가득하다. 호전적이다. 나처럼, 당신처럼, 무너지지 않는 담으로서의 문을 너무 자주 만난 까닭일까. 의외로 작가는 이 작품에 담 대신 「길」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담으로서의 문을 길로 전화(轉化)하기 위해 작가는 작품을 통해 오랜 시간 노력해왔다. 똘레랑스의 위대함을 내세우는 동안 세상은 본격적으로 소통 불가에 이르렀다. 갈수록 말이 통하지 않는 세상, 상징을 읽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작가는 문 앞에서 숨을 고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깊은 심호흡을 하는 동안 그의 결기와 호전성은 조금씩 감쇄되고, 조금은 더 부드러운 방식으로의 전화를 경험할지도 모른다.

민혜기_길_3D 스캔으로 실물 복제 후 1/9 축소 혼합재료_17×15×16cm_2019

하지만 문을 열어 길을 만드는 과정은 쉽지 않다. 너무 자주 막다른 길을 만난다. 막다른 길이란 기약 없이 언제 열릴지 모르는 문이다. 문 너머로 애타게 말을 걸어도 돌아오는 답이 없어 목소리가 잠기고, 수백 개 열쇠를 번갈아 꽂아 봐도 열리지 않아 손가락이 곱는다. 아무리 해도 열리지 않는 저 문을 향해 최후의 통첩을 보내기로 마음먹는다. 존재의 모든 것을 담은 채 있는 힘을 다해 달려와 문에 몸을 부딪친다. 꽝! 문은 불안하게 흔들린다. 소리를 들은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보지만, 그 소리는 지금 내 눈앞의 문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 이 문 저 문 앞에서 좌절하는 과정을 겪는 동안, 그 역시 목소리가 잠기고 손가락이 곱아갈지도 모른다. 몸을 찧어 내는 소리를 찾아 헤매지만 그 여정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길 위의 삶이다. 이 치열한 시공간 속을 그냥 헤매다 끝내지 않기 위해, 작가는 오늘도 몸과 마음의 힘을 실어 문을 두들긴다. Anybody there? 내 말이, 내 몸이, 내 마음이 들리나요? 전해지고 있나요? 그러다 보면 어느 날은 문이 열리고, 침묵을 지키던 신발 일곱 켤레가 각자의 이야기를 담은 채 그녀를 향해 여행 온 것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는 그들에게 따뜻하게 말을 건넬 것이다. 자, 나와 함께 새로운 여행을 시작해 보자. 그것이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너의 가장 중요한 그것, 걷고 있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여행이 되자. 걸으며 함께 이야기 나누자. 그러다보면 닫혀 있는 문들을 여는 지혜도 나눌 수 있을 거야. ● 영화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오일러 공식 『eπἱ+1=0』은 매우 낭만적으로 해석한다. e도 π도 ἱ도 아무런 연관이 없는 수지만, 한 사람의 인간이 더해짐[+1]으로, 모순되는 것들이 통일[=0]되어 세상은 바뀔 수 있다는 이야기. 민혜기의 작품도 이 공식에 대입해 보자. 시간의 브라운 운동 속 인간의 삶은 eπἱ라는 무질서의 조합이다. 신발장 속에 처박혀 잊혀진 삶, 통하지 않는 상대에게 말 걸다 지쳐 성대를 잃은 삶, 결기와 호전성 없이 서 있기조차 어려운 삶, 1분 40초마다 온 존재가 울리는 피멍의 소리를 내는 사는 삶들은 eπἱ로부터 쉽게 발견된다. 여기에 민혜기라는 작가를 더하면[+1], 그 합은 0이 됨을 알 수 있다[=0]. 신발장으로부터 신발을 소환하고, 성대를 잃고 손가락이 곱더라도 다시 일어나 문을 길로 만들고, 심호흡을 통해 완고한 담 앞에서 부드러운 전화를 이루고, 피멍의 소리의 근원을 찾아낼 때까지 여행을 그만두지 않는 삶. 이 모든 것이 담긴 작가의 세계 앞에서, 어떤 무질서 무규칙한 브라운 운동이라도 방향성(벡터)의 합은 0이 되는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삶이 무의식의 영역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신발이 시공간의 기억을 잃지 않도록, 그는 멈추지 않고 문을 두들기며 멈추어 있는 시공간을 끊임없이 어루만진다. 시간은 항상 미래로 흐르지 않을 것이고 우리 삶의 모든 지점이 언제나 장밋빛은 아니겠지만, 어쩌면 그것이 세상의 디폴트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삶의 디폴트인 신발이 걸어가는 길과 꼭 닮아 있다. 그의 작품 속 신발처럼 여린 불빛에 의지해 남보다 느린 걸음으로 비틀거리며 걷는다 하더라도, 멈추지 않고 그 길을 걷는 동안, 삶 속에서 만들어내는 벡터의 총합이 0이 될 때까지 우리는 조금 더 자발적인 여행을 할 수 있지도 모른다. ■ 최윤경

Vol.20191118i | 민혜기展 / MINHYEKI / 閔慧基 / 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