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미술, 탐(貪) ATTACHMENT

이인성_정승원_최요안展   2019_1210 ▶︎ 2019_1228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9_1210_화요일_06:00pm

부대행사 / 비평가&작가와의 대담

이 전시는 광주광역시, 광주문화재단의 2019년도 지역문화예술특성화지원사업으로 지원받아 제작되었습니다.

큐레이터 / 양혜진 비평가 / 양초롱(미술사 박사, 미술비평)

관람시간 / 11:00am~05:00pm / 월요일 휴관 12월 25일 정상운영

산수미술관 SANSU MUSEUM OF ART 광주광역시 동구 밤실로 64-1(산수동 26-4번지)

문학과 미술 간의 창조적 대화는 서구 예술사에서 오랜 전통을 지닌다. 텍스트와 이미지로 드러나는 문학인과 미술가의 다양한 시도는 당대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했다. 문학의 영감을 받은 미술, 미술로부터 영감을 받은 문학이 서로 부딪히며 서구의 예술을 꽃피웠듯, 이 두 예술가 집단이 느끼고 체험하고 인식을 같이 했던 예술의 정신은 상상력과 새로운 창작의 원동력으로 예술가에게 작용한다. ● 문학이 미술을 탐하고, 미술이 문학을 탐했든지 간에 상상력의 문화(예술)는 현시대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드러날까? 각기 다른 두 예술 분야가 현실에 대한 어떤 공통된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을까? 혹은 서로에게 어떠한 영감을 줄 수 있을까? 이러한 관계는 어떠한 새로운 창작의 시도를 보여줄 수 있을까? ●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실험으로 문학과 미술의 관계 속에서 꽃피웠던 프랑스 문학작품으로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 조르주 페렉의 『사물들』을 선정했다. 그리고 제시된 프랑스 문학 작품의 성향과 매칭이 잘 이루어지는 작업을 해왔던 지역 미술가로 이인성, 정승원, 최요안을 선정했다. 문학 작품의 당대 현실을 경험하지 않은 미술가들은 새롭게 접한 프랑스 문학 작품들을 통해 서로 다른 시대와 국가의 사회적 상황을 경험하며 자신의 시대와 회화적 매체를 어떠한 방식으로 교차시킬까. ● 이 세권의 책을 읽고, 미술가 스스로 자신의 시대(현실)를 엮어내고자 하는 과정에서 문학인(비평가)과의 만남은 서로 다른 영역을 교차시킨다. 양초롱 비평가는 3인의 신작 비평을 통해 텍스토로서 새로운 창작활동을 생성한다. 텍스트와 이미지, 이 관계에서 관람객은 새로운 세계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큐레이터와 미술가, 비평가를 통해 시작된 문학과 미술의 관계를 가로지는 탐독 행위는 관람객이 이들의 이미지와 조우하면서 깊고 넓은 행위로 확장될 것이다. ■ 양혜진

예술, 현실을 탐(貪, attachment)하다. - 1. 문학과 미술 ● 산수미술관에서 『문학과 미술, 탐(貪, attachment)』(2019.12.10~12.28) 전시가 개최된다. 양혜진 독립큐레이터는 서구 미술사에서 문학(시, 소설, 비평)과 미술의 영역이 서로 교차하며, 논쟁하고, 영향을 미쳐왔던 관계에 주목하며 실험적인 전시를 기획했다. 이 전시에 참여한 세 명의 예술가들 – 이인성, 정승원, 최요안 – 은 지나간 시대의 문학책을 다시 펼치며, 현 시대와의 교차점을 생산해낸다. 더불어 이 전시는 미술이 비평과의 관계를 통해 또 다른 내러티브를 형성하도록 구성되었다. ● 이 기획은 두 예술가 집단이 느끼고 체험하고 인식을 같이했던 현실과 예술을 바라보는 정신적 동질감에 기반한 예술의 정신에 주목함으로써 현대 문학 발전에 기여한 작가들의 치열한 성찰과 현재의 미술가들이 현실을 바라보는 시선을 포착하는 데 있다. 또한 서구의 미술가와 시인들이 당대 문명과 현실에 대항하여 공통된 문제의식을 가지면서 시와 그림이라는 각각의 예술을 구체화시킨 맥락과 달리, 화가들이 서로 다른 문화적·사회적 문맥을 형성한 다른 나라의 문학작품을 접하면서 자신의 시대와 회화적 매체를 어떻게 교차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이다. 이 과정에서 비평가가 참여한다. 현대에서 문학과 미술의 만남은 미술비평이란 장르를 통하여 점차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전시는 동시대의 문학과 예술을 교차하는 것보다 시간이 지난 문학을 동시대의 작가들에게 전하며, 이를 통해 현 시대의 문제를 교차시킨다. ● 서구 예술사에서 문학과 미술의 만남은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시인(소설가)과 화가의 친교는 널리 알려져 있다. 마네는 「튈르리 공원의 음악회」(1862)에서 보들레르를 등장시켰고, 『악의 꽃』에 묘사된 관능적인 여인, 쟌느 뒤발(J. Duval)의 초상화 「비스듬히 누운 보들레르의 정부」(1862)를 작업했다. 그에 상응하여 보들레르는 스페인 무용수를 그린 마네의 「롤라 드 발랑스」(1862)에 착상을 얻은 동명의 시를 썼다. 또한 보들레르는 「버찌를 든 소년」(1859)에 등장하는 모델이 마네의 화실에서 밧줄로 목을 매어 자살한 이야기에 영감을 받아 산문시 「밧줄」(1864)을 썼다. 보들레르의 사망(1867) 이후, 에밀 졸라와 말라르메 역시 마네와 인상주의에 많은 영감을 받았다. 물론, 졸라와 화가 세잔과의 관계가 소설 『작품』(1886)을 계기로 소원해졌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만, 기질, 진리, 개성, 삶이란 측면에서 볼 때 미술과 문학은 예술작품으로 맞닿아 있다. ● 상징주의 시인 말라르메와 마네의 관계 역시 조르주 바타이유가 "두 위대한 정신의 우정으로 광채를 발하는" 그림이라고 평가한 마네의 「스테판 말라르메」(1876)에서도 나타난다. 프랑스의 현대시인들 중 이브 본느프와, 끌로드 에스떼방, 앙드레 뒤 부셰, 베르나르 노엘 등이 회화에 대한 글쓰기를 추구했다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시인과 화가와의 관계가 지속적으로 발전되었다. 이는 색채와 데생의 힘을 시적 문체 속에 재-위치시키고자 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이처럼, 문학인들은 화가의 창조 행위를 의식하면서 미술작품을 접했을 때 느끼는 충격을 자신의 시적 글쓰기로 변화시켜 표현했다. ● 문학과 미술의 관련성은 기법 혹은 매체의 표현을 넘어서는 정신사적인 문제이다. 그런데 오늘날 이 두 관계는 어떠할까? 문학이 미술을 탐하든 미술이 문학을 탐하든지 간에 다음과 같은 많은 미학적 질문들이 제기된다. 각기 다른 예술 분야가 현실에 대한 어떤 공통된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을까? 혹은 서로에게 어떠한 영감을 줄 수 있을까? 이러한 관계는 어떠한 새로운 창작 행위로 발전시킬 수 있을까? 이 전시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모색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2. 세 명의 예술가, 그리고 현 시대 ● 우리는 수많은 책을 읽으면서 다양한 지식을 창조적으로 종합하는 사유의 길을 끝없이 걸어간다. 이 길 위에 1)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2)에밀 졸라의 『목로주점』 3)조르주 페렉의 『사물들』의 저서를 접한다. 이 책을 접한 이인성(회화), 정승원(판화), 최요안(회화)은 스스로 자신의 시대(현실)를 엮어내고자 하는 과정에서 각기 다른 매체를 가진 예술 작품의 상호 관련성 위에 자신이 속한 시대(현실)를 교차시킨다. 이는 단순히 서로 반영하는 수준을 넘어, 발췌된 몇 문장들 사이의 영감을 통해 자신의 삶 언저리에로 되돌아가 자신의 시대를 새롭게 엮어낸다. 관람객 또한 자신의 공간에서 이 작품들을 다시 탐독함으로써 이러한 과정에 참여할 것이다.

이인성_다른손으로의 변신_종이에 먹, 영상_가변설치, 00:06:33_2019

이인성과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 그레고르는 벌레가 된 후, 번번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각을 나름의 방식으로 전달한다. 그는 끝까지 인간으로서 존엄을 요구하며, 더럽고 불편한 방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족의 무관심 속에 그레고르는 숨을 거둔다. 인간으로서 존엄을 요구하고자 했던 그레고르는 비록 육체는 잃었지만, 영혼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가족이 그를 대하는 태도는 인간과 인간 아닌 것의 중간, 그 후에는 쓸모없는 잉여적 존재였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그' 자신은 벌레라는 외투를 입고 있더라도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할 실존하는 존재다. ● 좀 더 탐독해보자. 그레고르의 흉측한 외형은 쓸모가 없는 존재로 치부된다. 가족조차도 자신들의 가족임을 부정하며, 인간이 기본적으로 가진 이기심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방인의 뫼르소가 부조리에 저항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레고르는 자신을 인간 아닌 것으로 치부하는 사람들에게 저항한다. 책 어디에서도 벌레로 변한 이유는 없다. 이 책은 벌레지만, 실존적 존재로서의 한 인간의 삶을 보여준다. ● 이인성은 자신의 평범하면서도 반복된 일상에서 카프카의 「변신」을 읽다 새로운 감정을 접한다. 남들은 일을 하는 시간, 그는 집안 홀로 식탁위에 얹혀 있는 조촐한 점심 식사의 상황을 맞이한다. 한두 알의 계란 프라이, 김치, 김, 그리고 밥 한 공기에 피어오르는 온기에 생명력 넘치는 밥풀들이 갑작스레 눈물을 흘리게 한다. 작가는 일상적으로 밥 먹는 행위를 '반복적인 일상성'으로 상정하고, 자연스러운 젓가락질(오른손)을 일반적인 삶의 이치로 상정한다. 이 과정에서 순간의 감정과 처지를 느끼는 감정을 대변하는 상황을 (오른손잡이로서의) 왼손 사용으로 설정한다. 젓가락 끝에 묻힌 먹은 왼손 행위로 인해 위태롭게 나타나는 여러 제스처의 수고스러운 흔적이 표현된다. 허공으로 튕겨나가는 쌀알, 점차적으로 오는 통증, 다시 시도하는 행위, 계속되는 실패로 인한 난감한 상황이 표출된다. 그러나 작가는 다시 시작한다. 가족을 책임지는 입장에서 하루아침에 벌레로 변하고 기대하던 바와 다른 형태로 존재하지만, 그 자체로 벌레로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그레고르의 모습에 대해 작가는 존재 자체로의 다양한 삶의 방식을 표현하고자 한다.

정승원_W.m. 8 Serien_실크스크린_297×420cm_2019

정승원과 에밀졸라의 『목로주점』 ● 이 책은 세탁 공장에서 일하는 주인공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세탁 일을 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고단한 삶을 잘 보여준다. 그의 묘사는 마치 드가나 로트렉의 그림을 그대로 설명하는 듯하지만, 드가의 「다림질하는 여인」과 로트렉의 「세탁부」은 오히려 이 소설에서 영감을 받았다. 노동자 계급의 고된 생활상을 묘사한 졸라의 작품은 특별한 문학적 복선이나 희망적 요소를 도입하지 않고, 예리한 관찰력과 구성력을 통해 사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 야경국가의 상태였던 이 시대의 프랑스의 사회적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삶은 갈수록 처참했다. 졸라의 작품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만으로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힘으로 작용한다. 오늘날 미술은 우아하고 세련된 기술에 갇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고통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는 것이 아닐까? ● 정승원은 이 책을 통해 오래도록 잔상으로 남아 있는 빨래방에 대한 추억을 상기한다. 그의 독일 유학 시절 매주 이케아 장바구니와 여행 캐리어에 빨래를 가득 담아 전철을 타고 빨래방에 드나들었던 기억이 교차되었기 때문이다. 제르베즈의 직장이었던 빨래방은 서민의 삶을 대표하는 장소였다. 빨래를 기다리는 동안 오랜 시간 친구와 대화를 하고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느끼는 분위기와 빨래방만의 특유의 냄새가 상기된다. 또한 세탁기 속의 빨래가 돌아가는 모습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제한된 공간 속에서 뒤엉켜 살아가는 우리 삶의 모습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작가는 색색의 다양한 종류의 세탁물은 사람들 간의 다름을 보여주는 동시에 뒤섞여 계속 돌아가는 인간사의 모습을 빨래방과 세탁기를 통해 투영한다. ● 정승원은 일상의 소소한 행복과 즐거운 기억들에 관한 내용을 판화로 작업해왔다. 그의 특유한 밝은 색채와 표현은 그가 『목로주점』에서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즐거움이나 희망, 사랑이 존재하고 있는 지점을 강조하며, 현 시대의 대중의 삶을 재해석하는 데도 투영된다.

최요안_색즉시공 공즉시색 色卽是空 空卽是色_사진, 설치_2019

최요안과 조르주 페렉의 『사물들』 ● "누구나 부를 꿈꾸고 부자가 될 수 있는 시대이다. 여기서 불행이 시작된다. (...) 미래 없는 꽉 막힌 삶으로 암울한 세계를 살아가고 있었다. 질식할 것 같았다. 침몰하는 느낌이었다."고 페렉은 이야기한다. 탐(貪)과 욕(欲)은 양날의 검처럼 서로 관련이 있다. 탐은 대상에 들러붙어서 떠나지 못하는 상태이고, 욕은 하고자 하는 바의 상태, 희망, 원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둘의 관계처럼 깊이 빠져 열중해 즐기는 것과 그릇된 몰입으로 들러붙는 집착은 다른 결과를 양산해 낸다. 우리에게 탐과 욕의 이중성은 어떻게 드러날까? ● 이 책은 주인공들(실비와 제롬)이 갈망하는 사물들에 집중한 듯하지만, 결국 현대인이 끊임없이 추구하는 '행복'에 대한 담론으로 귀결된다. "흔히 사람들이 천직이라 부르는 내부의 강력한 이끌림을 느끼며, 그들을 뒤흔들 만한 야망, 충만케 할 열정을 느끼며 자신을 쏟아 붓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란 말인가, 그들은 단 하나만을 알았다. 더 잘살고 싶다, 이 욕망이 그들을 소진했다."고 서술하고 있는 페렉의 문장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도달할 듯하나 끝이 없는 소비에 대한 욕망이 욕망으로 점철된 행복을 더욱 부추긴다는 점이다. 이에 반해 최요안은 SNS의 상황에서 개인과 사회, 욕(欲)에 기반한 탐(貪)의 이중성을 드러낸다. 끊임없이 행복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고단함, '행복'의 대상, 그로 인해 계속해서 시달리는 상대적 빈곤감에서도 우리는 '행복하기를' 멈추지 못한다. 대중이 SNS에서 행복 추구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는 실상에서 그는 현대인이 추구하는 행복의 허상을 드러낸다.

3. 문학과 예술에서 찾은 질문들 ● 예술가들이 시대를 그려낸다는 것은 사회, 국가 등과 같은 거시적인 대상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곧 시대의 인간 존재를 대표하듯이 자신의 이야기에서 출발하든, 자연적·인공적 사물에서 출발하든, 혹은 자신의 심원의 기원이나 욕망에서 출발하든, 예술적 소재와 제재는 그 자체로 영향력이 있다. 예술은 왜 그토록 강력한 영향력이 있었던가? 예술의 풍요로움 속에서, 예술 스스로가 욕망하고 탐하는 대상이 많아질수록, 오히려 예술은 사회에서 시들어져 버린 건 아닌가? ● 발터 벤야민이 "예술은 현실에서 좌초되기 마련인 행복의 요구를 허구의 영역에서 충족시킨다."고 언급했듯이, 예술이 기존현실을 부정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최적의 상황으로 묘사함으로써 사회의 비참함을 은폐하고 부정의를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미화하는 것은 아닐까? 일부 예술의 허위의식은 이렇게 생겨남으로써 스스로 사회·윤리적 책임으로 도피하는 가면을 획득한다. 동시에 예술가들은 여전히 다양한 방식으로 현실의 내러티브를 필요로 하며 탐닉한다. ■ 양초롱

Vol.20191210c | 문학과 미술, 탐(貪) ATTACHMENT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