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영 없으리 Nevermore

박광수展 / PARKGWANGSOO / 朴光洙 / painting   2019_1211 ▶︎ 2020_0112 / 월요일 휴관

박광수_검은 숲 속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35.5×27.5cm_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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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학고재 신관 Hakgojae Gallery, Space 2 서울 종로구 삼청로 48-4 Tel. +82.(0)2.739.4937~8 www.hakgojae.com www.instagram.com/hakgojaegallery www.facebook.com/hakgojaegallery

'형상과 배경' (혹은 켄트리지) 이후의 드로잉: 박광수의 모험과 디지털 시대 드로잉의 변형 ● 미세한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박광수의 작업에 대한 기존의 논의들은 어떤 공통점을 갖는다. 한 편에서 이들은 그의 작업이 '드로잉'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일종의 '상징주의'를 지적하는데, 그의 작업에서 반복되는 새나 (검은) 숲의 이미지를 예술가 개인의 불안이나 초현실주의적인 모티프의 연장으로 여기고 해석하는 식이다. (이번 전시의 제목이 된 『영영 없으리 Nevermore』 역시 에드거 앨런 포의 유명한 시인 「갈가마귀 The Raven」(1845)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독해 방식은, 암묵적으로 그의 그래픽 이미지를 '형식'으로 간주하고 그것이 취사선택하고 변형하는 '내용' 또는 '주제'를 명확히 구분 짓는 것으로, 이는 '형상과 배경 figure and ground'이라는 관습적인 이분법 도식을 그대로 받아들일 때만 가능한 것이다. 작가는 드로잉이라는 형식, 또는 '기술'로 그러한 '내용'을 표현한다는 식이다. ● 하지만 이토록 태평스런 이분법의 부재, 혹은 말 그대로의 파괴야말로, 박광수의 드로잉 작업이 놀라운 방식으로 변주해온 가장 내밀한 핵심이자 원천이다. 박광수는 상징을 '내용'으로 가져다 '드로잉'으로 '표현'한 적이 없다. 그의 드로잉 자체가 상징의 '발생과 소멸' 자체를 가능하고 불가능하게 하는 장(field)이며, '형상과 배경'의 구분이 재규정되는 원장면(primal scene)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럴듯한 수사(修辭)가 아니다. 이 차이를 놓치면 안 된다. 박광수는 상징이 아니라 상징의 발생, 형상이 아니라 형상의 출현, 그리고 그들의 소멸 자체를 형상화와 탈 형상화의 내재적 문제로 삼는다. 이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포착하지 않으면, '내용'은 내용대로 논의하고 그의 드로잉은 '형식'의 차원에서 상찬하며 꼬리를 무는, 지루한 논의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

박광수_깊이 – 골짜기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6.8×80.3cm_2019

I. 뒤틀린 시간의 '형상과 배경' ● 박광수의 드로잉에서 형상과 배경의 구분이 모호하거나, 주어진 형상이 사라지고 있는 것인지 나타나고 있는 것인지 불분명한 건 이 때문이다. 관객들이 그의 작업에서 종종 발견하는 불안의 정동 역시 이와 내적으로 연동한다. 추락은 상승과 구분되지 않으며, 분해는 조립과, 입장은 퇴장과, 바람은 불과 혼동된다. 이 모호함은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면) '적확한 모호함'이다. 자신에게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어두운 숲을 헤매는 것과 비슷하다"고 고백하면서, 작가는 "힘을 다해 정확히 대상을 포획해보려 하지만 대상은 나에게 명확히 실체를 드러내지 않고 매 순간 진동하며 움직인다"고 덧붙인 바 있는데, 그의 그림이 "어두운 숲을 헤매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대상 자체가 "매 순간 진동하며 움직"이기 때문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그는 "검은 선들은 숲의 윤곽이 되고, 어두움이 되고, 나뭇가지가 된다"고, "이렇게 선들은 계속해서 자신의 역할을 바꿔가며 이 세계를 확장해 나간다"고 쓴다. 다시 말해 숲과 어두움이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대상 자체가 숲이나 어두움과 구분 불가능한 방식으로 "진동"하며 분산되는 것이다. 명확하게 주어진 '숲의 선'이 아니라, 안정적인 선으로 머무르거나 남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의 역할을 바꿔가며 진동하는" '선의 숲', 아니 '숲으로서의 선'이 문제인 것이다. ● 대상이 "매 순간 진동하며 움직인다"는 것은 그의 작업이 '시간적'이라는 것을 뜻한다. 곧 녹아내릴 듯한 수십 개의 얼음조각들로 이뤄진 얼굴을 형상화한 「얼음 인간」(2012)이 다소 직설적으로 응축하듯 그에게 형상은 이미 언제나 시간 속에, 그 과정에서 수반되는 파멸 혹은 변형의 가능성 속에 있다. 『워킹 인 더 다크 Walking in the Dark』(2014) 전시에서 (탈) 형상화한 대상들을 그는 "늙어가는 사람, 불타 없어지는 에너지, 추락해서 부서지는 선들, 이런 사라짐의 사건들을 응시하는 존재들"이라 기술했고, 『부스러진』(2017) 전시를 가득 채운 인물과 풍경들 역시 모두 사라지거나 생겨나는 중이었다. 이러한 '모호함'은 그의 드로잉들이 포착하는 시간성이 일직선적이거나 연대기적이지만은 않다는 것, 혹은 특정한 순간에 '유예'된 것이라는 것을 뜻한다. ● 이러한 시간성의 단초는 『2001 어 스페이스 콜로니 2001 A Space Colony』(2011)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이 첫 전시는 작가가 1982년 자 신문에서 발견한, 2001년에 건설될 우주도시에 대한 기사와 도판에서 출발한 것인데, 그가 그 기사에서 가장 먼저 상상한 것은 "시간의 흐름이 뒤틀려 분열"되는 것이었다. "공간을 베어버리는 회칼, 새로운 우주를 토해내는 블랙커피, 별들을 얼려 떨어뜨리는 냉장고"라는 작가 자신의 기술이 웅변하듯, 이 전시의 드로잉들은 이렇게 뒤틀린 시간성의 상상에서 생겨난 "우주도시의 폭발로 인해 그곳 사람들이 겪는 물리적 질서가 교란된 환상적인 최후의 순간들"을 그린다.

박광수_깊이 – 스티커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6.8×80.3cm_2019

II. 게슈탈트의 변형과 이행의 장으로서의 드로잉 ● 이러한 폭발 또는 변형의 상상은 오토모 카츠히로의 걸작 애니메이션 「아키라 アキラ」(1988)의 그림자 아래에 놓인 것으로 보이지만, 이 전시 때만 해도 '형상'과 '배경'은 섬세하면서도 명확히 구분 가능한 방식으로 그려져 있었다. 이러한 '형상'과 '배경'의 구분은 사실 순수미술보다, 셀로판지에 배경과 인물, 도구를 따로따로 그려 연출하는 셀 애니메이션의 특징에 가까운데, 이는 이듬해의 『맨 온 필로우 Man on Pillow』(2012) 전시에서 유지되는 듯하면서도 어떤 결정적 변화를 동반했다. 예를 들어 자신의 얼굴을 가리는 듯한 제스처로 보이지만 그 어떤 얼굴도 없이 모아진 두 손(「두 손」, 2012)은- 마그리트의 「피레네의 성 Le Château des Pyrénées」(1959)과 이 작품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천공의 성 라퓨타 天空の城ラピュタ」(1986)를 동시에 환기시키는- 뜬 돌(「뜬 돌」, 2012)의 이미지와 비슷하게 보인다. 하지만 이들은 같은 화면 안에 기입되지 않고 공간적으로 구분되며, 핀에 꼽힌 딱정벌레 표본(「표본」, 2012) 역시 제라늄(「제라늄」, 2012)과 비슷하게 보이지만 전시에는 위아래로 병치되어 전시되었다. ● 얼핏 단순해 보이는 이 변화 속에서 반드시 강조되어야 할 것은, 시각적 모티프들 간의 유사성이 '게슈탈트(Gestalt)' 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게슈탈트'로 구글링하면 종종 뜨는, 가운데 흰 부분에 집중하면 꽃병으로 보이고, 외곽의 검은 배경에 집중하면 두 사람의 옆얼굴로 보이는 '루빈의 꽃병'(Rubin's Vase, 1921) 그림이 대표적이다. 물론 여기서 '배경'은 둘 중 어떤 것을 '형상'으로 간주하느냐에 따라 바뀐다. 덴마크의 심리학자였던 에드가 루빈(Edgar John Rubin)이 그린 이 그림이 '루빈의 얼굴'이라고도 불리는 건 이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서로를 닮은 두 손과 뜬 돌, 표본과 제라늄은 게슈탈트 그림에서 한 공간에 병치됐던 '형상과 배경'을 서로 다른 두 개의 공간에 떼어놓은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 간의 시각적 유사성은 무엇보다 드로잉의 '투박함'을 통해 얻어지는데, 이는 바로 전해까지만 해도 그가 그 누구보다 잘할 줄 알았던 섬세한 묘사를 작가가 자발적으로 방기한 결과이다. 「아키라」의 신경증적 디테일 묘사를 떠올려주던 펜 선 계열의 선명한 드로잉에서 거칠고 투박한 드로잉으로의 이러한 이행은, 형상과 배경 사이의 명확한 구분에서 '게슈탈트'적인 시각적 유사성, 혹은 혼동과 변용의 장으로의 이행과 정확하게 조응한다. ● 이렇게 하나의 공간 안에 놓인 게슈탈트적 형상과 배경을 서로 다른 공간에 분리시키는 방식은, 이후 사진의 원판과 네거티브처럼 일련의 '짝패(pair)'를 이루는 방식으로 변주된다. 이를테면 「조용한 불사람」(2014)과 「타오르는 불사람」(2014), 「검은 숲 속」(2014)과 「좀 더 흐린 숲 속」(2014) 사이의 대립이 대표적이다. 각각 판화와 수묵화를 연상시키는 이들 사이의 대조는 선의 굵기나 채도 차원에서 이뤄지는데, 이는 이번 전시에서 한 화면 내에 겹쳐지는 얇은 두께의 차원으로 다시 변주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각은 해당 형상이나 배경이 사라지고 있는 것인지 현현하고 있는 것인지, 밝아지고 있는 것인지 어두워지고 있는지 단정할 수 없다는 공통점을 여전히 공유하며, 이러한 분리와 대립을 작가는 바람과 모닥불 양자로 보이는 「바람과 모닥불」(2014)에서처럼 다시 통합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분리와 통합의 변주는 이듬해 「검은 바람, 모닥불 그리고 북소리 Darkest Wind, Bonfire and Drum Sound」(2015)이라는 애니메이션 작업으로 번안되고, 특히 불사람은 밴드 혁오의 노래인 'Tomboy'의 뮤직비디오로 사용된다. 이러한 기술을 통해 내가 환기하려는 것은 하나에서 둘로, 정적인 드로잉에서 움직이는 애니메이션으로, 또는 그 반대로 이루어지는 '이행(passage)'의 위상이다. ● 그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러한 '이행과 변형의 장'은 『맨 온 필로우 Man on Pillow』(2012) 전시장 벽에 이미 구현되었던 것이다. 작가는 10장이 넘는 거대한 드로잉 작업들을 마치 애니메이션 셀처럼 다닥다닥 벽에 붙여 수평으로 붙여 놓았는데, 그 중 대부분(여덟 장)은 새를 그린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들 중 몇몇은 말 그대로 새'처럼 보이'는 것일 뿐이고, 더 자세히 보면 맨 왼쪽의 달 또는 지구로 보이는 원형의 이미지와, 맨 우측에 놓인, 뜬 돌과 닮은 손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모아진 사람의 두 손 이미지 사이에서 이들 전체가 일종의 '변형'을 겪는 '과정(passage)'에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예를 들어 새처럼 보이는 드로잉 왼편에는, 관객을 직접적으로 응시하는 한 여성이 바람인지 억새인지 알 수 없는 배경을 바탕으로 서 있다. 후자에서 명확하게 유지되는 '형상과 배경' 사이의 구분이, '새'의 드로잉에서는 단 하나의 형상으로 통합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벽면 맨 우측에 놓인 사람의 손 드로잉 역시 실상은 병실 침대에 누운 환자의 왼손을 그린 것이지만, 이러한 정황을 알 길 없는 일반 관객들에게는 옆에 병치된 새의 외양과의 유사성만이 관심사가 된다. 여기서 변형의 잠재성은 관객으로까지 전이되고, 이를 통해 '변형'의 폭과 결은 더욱 넓고 두터워진다. ● 이렇게 두터운, 아니 '두터움과 얇음'의 고전적 구분 자체를 재정의한다는 의미에서 작가의 초기작들은, 이번 전시를 포함해 이후의 박광수가 섬세하게 세공하게 될 장/면을 압축적으로 내포한다. 많은 평자들이 겨우 '새'라는 도상적 모티프만을 추출하거나, '베개를 베고 누운 남자'라는 전시 제목과 '꿈과 현실'의 뒤엉킴이라는 작가 자신의 고백에 의존해 초현실주의나 에드거 앨런 포라는 외재적 모티프와 연결시키곤 하지만, 작가는 '형상과 배경', 드로잉과 애니메이션, 공간성과 시간성 사이의 이행이라는 문제를, 명확한 윤곽선에서 거칠고 투박한 드로잉으로의 이행과 게슈탈트적 '형상과 배경'의 분리, 그리고 애니메이션을 환기하는 개별 드로잉들의 시공간적 병렬을 통해 이미 '내재적으로' 포착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박광수_두 나무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6.8×80.3cm_2019

III. 드로잉의 역사적 계보 ● 박광수의 드로잉 작업이 한국 동시대 미술씬에서 거의 독보적으로 포착한 것으로 보이는 이러한 변형과 중첩, 또는 형상들 사이의 '이행(passage)'은 과연 그에게만 고유한 것일까? 그는 기댈 아무런 역사와 전통도 갖지 못한, 단독자적 고아에 불과한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미리 말해두자면, 혹여 그러한 전통이 있다 해도 그가 이를 단순히 답습했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그는 그 전통에 참여하면서도, 어떤 근원적인 의미에서 '당대적'으로 그 전통을 업데이트한다. ● 이를테면 미국의 그래픽 아티스트인 레이먼드 페티번 Raymond Pettibon에 대한 에세이에서, 저명한 비평가인 벤자민 부클로는 드로잉의 모델을 크게 두 가지 축을 중심으로 구분한 바 있다. 하나는 "순수한 모체로서의 드로잉(drawing as pure matrix)"으로, 여기서 드로잉은 예술가 개인의 주관성에 대한 "지표"로 작동하지 않는다. 재스퍼 존스(Jasper Johns)가 육화한 이 계보에는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이나 앤디 워홀(Andy Warhol) 등이 포함되는데, 이들은 드로잉을 자유분방하게 뛰놀게 하기보다는 딱딱하게 "경화(rigidify)"시키고 "고전화(classicize)"하며, 주어진 대상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affirmative)" 경향을 보인다. 그 대척점에 있는 모델을 부클로는 언어의 음소(音素 phoneme)에 대응하는 것으로서의 "순수한 자소(字素 grapheme) 모델"이라 부르는데, 여기서 드로잉은 예술가 개인과 그 주관적 표현성의 "순수한 지표성 pure indexicality"으로 전경화된다. 사이 톰블리(Cy Twombly)로 대표되는 이 모델에서 드로잉은 "신경운동이나 성심리적 충동"을 보이는데, 부클로는 페티본의 만화적이고 캐리커쳐적인 드로잉이 이 두 가지 모델을 절묘하게 융합한다고 평가한다. ● 부클로의 논의에서 "모체 모델이 대상의 추상적 형태를 보여준다면 자소 모델은 주체를 추상적으로 변형시킨다"고 재규정하면서, 크라우스는 이를 디 세뇨(disegno)와 콜로레(colore), 즉 '드로잉과 색'이 만드는 유장한 이분법적 전통의 역사 속에 집어넣는다. 라파엘과 미켈란젤로에서 기원해 자크-루이 다비드와 앵그르, 조르주 쇠라와 폴 시냐크로 내려온 드로잉의 로마적 계보는, 벨리니, 조르조네, 티치아노, 틴토레네, 베로네세와 같은 베네치아 화가들로부터 들라크루아나 클로드 모네, 오귀스트 르누아르, 마티스로 이어지는 색채의 계보와 길항한다. 하지만 이러한 이항대립은 자신의 작업을 "디자인에 의한 색" 또는 "드로잉에 의한 색"이라 규정했던 마티스나, 말년 작업인 「뉴욕시 New York City」(1941)나 「승리 부기우기 Victory Boogie-Woogie」(1942-1944, 미완성)에서 보듯 현란한 색채의 마스킹 테이프를 덧붙임으로써 "선과 색의 차이를 내파"시킨 몬드리안을 통해 도전받고, 무엇보다 흩뿌린 물감으로 색과 선의 구분 자체를 뭉게 버린 폴록의 '드립 페인팅'에서 가장 스펙터클하게 종합된다. ● 후자의 실험적 변주들이 "재현의 궁극적 원천인 선線이 추상에 봉사하는... 역설적인 흐름"에 속한다고 쓰면서, 크라우스는 부클로가 얘기한 모체와 자소의 이분법을 이 이차대전 이후의 시기에 위치시킨다.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 드로잉은 쇠퇴했다는 게 크라우스의 견해다. 박광수의 2015년 작품인 「검은 바람, 모닥불 그리고 북소리」에 포함된 '지나간 바람'의 형상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여섯 개의 벽 각각에 고르게 분포된 1인치 선 1만 개 Ten thousand one-inch (2.5cm) lines evenly spaced on each of six walls」(1972) 같은 솔 르윗의 작업이 대변하듯, 이제 드로잉은 개별화되기보다는 공장의 산물처럼 몰개성화된다. 이는 워홀이나 리히텐슈타인처럼 드로잉을 추상이 아닌 재현의 영역으로 가져간 이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가능한 진단이다. ● 페티본의 작업은 후자의 만화적 양식을 가져오면서도, 드로잉을 통해 개인들을 캐리커쳐화 함으로써 추상과 재현, 개인과 집단 사이의 대립을 다른 방식으로 전치시켰던 것인데, 이 계보에 크라우스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표적 예술가인 윌리엄 켄트리지의 드로잉과 이를 이용한 애니메이션 작업들을 집어넣는다. "모체도 자소도 아[닌]", 이 이 이중적 부정성의 공간에서 작동하는 켄트리지의 드로잉과 애니메이션 작업의 원리는 이전의 글이 남긴 흔적이 희미하게 겹쳐지는 양피지, 즉 팔랑프세스트(palimpseste)로, 이를 크라우스는 "지워진 선의 흔적들이 페이지에 남겨져 목탄의 흐릿하고 뿌연 자국을 형성하는 지움의 형식"으로 간주한다. "모체 (matrix)가 대상에 행하고 자소(grapheme)가 주체에 행했던 것을 팔랑프세스트는 시간에 대해 행한다"고 요약하면서, 그는 켄트리지의 "팔랑프세스트는 시간을 추상화한다"고 결론 내린다.

박광수_크래커 003_종이에 잉크_18×12.5cm_2019

IV. 선과 면,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의 드로잉 ● 드로잉의 이 유장한, 다분히 서구적인 계보에 대한 부클로와 크라우스의 논의는 박광수의 작업에 어떤 함의를 가질 수 있을까? 뒤집어 말하자면, 이러한 드로잉의 역사 앞에서 박광수의 작업은 어떤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까?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한 편으로 박광수는 캐리커쳐를 통해 '모체'와 '자소'를 통합시키는 페티본이나, 크라우스가 '팔랑프세스트'에 비유한 방식의 애니메이션으로 시간을 추상화하는 켄트리지와 달리, 개별 형상에 내재하는 (탈)게슈탈트적 변용 가능성이 분산되고 수렴하는 궤적을 추적한다. ● 보다 최근의 작업들 속에서 그의 이러한 궤적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구분을 건드리는데, 이 지점에서 박광수의 작업은 이전까지의 드로잉 전통을 본격적으로 업데이트한다. 특히 이번 전시에 선보인 적지 않은 신작들은, 디지털이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플랫폼'의 차원에서, 다시 말해 '인프라 스트럭쳐 infrastructure'로서 구현/작동되는 시대에 드로잉이 취할 수 있는 가장 미묘하고 다채로운 변용(devenir/becoming)의 캔버스를 구성한다. 이는 이른바 '포스트-디지털'이라는 이름하에 종종 소환되는, 자신이 '힙스터'임을 증명해주는 증거로서 '기계식 타자기'가 역설적으로 획득한 변별적 가치 또는 위상과는 다르다. 그러한 관습적 오해보다 중요한 건, 이미 '디폴트'가 된 디지털적인 이미지들 속에서 박광수가 드로잉을 업데이트하고 세공하는 방식이다. ● 예를 들어 2017년 서울 두산갤러리에서 열린 그의 개인전 『부스러진』의 일부로 건물 외부의 윈도우 박스에 설치된 네 편의 영상은, 그의 드로잉 작업들에 대한 현란한 줌인과 줌아웃으로 이루어졌는데 세로로 디스플레이된 네 개의 모니터 스크린에 비춰진 그의 드로잉들은 점과 선이 면으로 변환되고 다시 전자로 되돌아가는 일련의 과정을 보여줬다. 줌인과 확대의 과정에서 이들은 사각형으로 픽셀화되어 보이지만, 다시 줌아웃되면서 아날로그적인 선으로 되돌아간다. 물론 이들이 아이패드로 만들어진 벡터 이미지였다는 점에서 이러한 구분은 잘못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이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시각적 구분 자체가 해상도와 연동하는 차원의 문제일 수도 있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실지로 아날로그적인 선과 디지털적인 (사각)면 사이에서 진동, 혹은 유예된 무수한 기호들은 이번 전시에 포함된 신작들을 가장 강력하게 특징짓는 요소들 중 하나다. 박광수의 그림이 갖는 평면성이, 마치 디자인용 컴퓨터 그래픽 툴인 '일러스트레이터'를 사용해 그린 것 같다는 유진상의 지적은 이를 지칭하는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 이러한 효과는 박광수가 언뜻 투박한 방식으로 개조한, 펜과 붓 사이에서 진동하는 일련의 도구들에서 나온다. 단단한 스펀지를 다양한 형태로 잘라 길고 가는 나무 끝에 묶은 뒤, 거기에 먹을 찍어 만들어지는 선들은 단순한 '선'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넓은 '면'과 중첩되며, 이를 통해 '윤곽선'의 위상을 넘어선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적 이미지 사이를 가로지르는 특성은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 이는 한지와 먹을 사용하면서도 산수화를 그리드화, 더 정확히 말하면 '픽셀화'시키는 장재록의 시도와 다르다. 후자의 작업에서 픽셀은 디지털적인 이미지와 시각적으로 닮은 것, 즉 도상성의 차원에서 작동하는데, 이들은 때로 QR코드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부분 part'의 기능을 수행하며, '전체 whole'로서의 산(山)이라는 도상적 이미지를 구성함으로써 산수화의 전통을 면면히 잇는다. 장재록의 이러한 시도는 그리드와 모노크롬을 중첩시키면서 마치 안개나 바람 속의 나뭇잎 같은 효과를 만들어냈던, 「바람 속의 꽃 Flower in the Wind」(1963)이나 「잎 Leaf」(1965)과 같은 아그네스 마틴(Agnes Martin, 1912-2004)의 1960년대 작업들의 작동원리를 뒤집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산수화의 도상적 기호에 거의 전적으로 복속되는 그의 '픽셀'들과 달리, 마틴의 그리드들은 디지털 플랫폼 이전의 산물일 뿐만 아니라, 그 어떤 도상적 기호로도 수렴되지 않는다. ● 오히려 마틴의 작업은 바로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줌인과 줌아웃, 즉 드로잉과의 거리에 따라 디지털과 아날로그 이미지를 오가는 박광수의 작업에 흥미로운 참조점이 된다. 크라우스는 이 방향의 독해에 다시금 실마리를 제공하는데, 그는 추상적인 모노크롬 작업에 '숭고'의 정념을 손쉽게 가져다 붙이려던 1960년대의 "유행"과 "형이상학적이고 초월적인 것을 연상"하는 관습적 독해를 비판하면서, 마틴의 모노크롬 그리드 작업이 "구조주의적"이라고 단언한다. 카샤 린빌 Kasha Linville에 따르면, 마틴의 그림이 주는 시각적 경험은 세 가지 종류로 나뉘는데, 관객이 그림에 가까이 갈 때 도드라지는 표면의 "물질성(materiality)"은, 뒷걸음질 치면서 "빛나지 않는, 투과할 수 없는 안개"와 같은 "대기(atmosphere)"로 바뀌나, 그림에서 가장 멀어질 때에는 "돌처럼 움직일 수 없는" 벽의 육중함으로 이행한다. 크라우스가 지적하듯, 이 "대기"의 인상은 관객의 단순한 "직관"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단위"와 연동하는 효과다. 이 단위란 물론 거리마다 달라지는 "체계 내에" 속하는 것으로서, '안개'는 '벽'과, 캔버스의 물질성은 벽의 단단함과 대립한다. 이런 맥락에서 크라우스는, 그것이 마틴의 작업은 "구름이든 하늘이든 빛이든 무한의 숭고함이든 특정한 어떤 것을 '묘사하는 것'과 관련이 없다"고 단언한다. 나는 이러한 단언이 박광수의 작업에서 보이는 일련의 상징과 이에 대한 논평들에도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지만, 문제는 새나 숲이라는 상징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상징의 발생과 출현, 혹은 소멸인 것이며 박광수는 상징을 '내용'으로 가져다 '드로잉'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드로잉 자체가 상징의 발생과 소멸 자체를 가능하고 불가능하게 하는 장이며 이 차이를 놓쳐서는 안 된다. ● 사실 더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영어로는 'Suprematism,' 한국어로는 '절대주의(絶對主義)'로 번역되는 말레비치의 'Супрематизм'는 주지하듯 대개 현실의 물질세계를 벗어나, 말 그대로 대상 없는(gegenstandslose) 초월적 정신세계를 그리는 시도로 요약되곤 한다. 하지만 이러한 식의 요약과 이해는 치명적 맹점을 갖는다. 그것은 말레비치가, 일종의 선언문이었던 자신의 저서 『대상 없음으로서의 세계 World as Objectlessness』(1927)에서 그러한 '초월적' 세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물질적' 조건을 명확하게 적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절대주의의 추상화 과정을 당시의 운송수단의 발달, 특히 비행기를 통해 가능해진 항공사진과 직결시킨다. 사람, 나무, 건물 등은 지상에서 분명히 '대상 gegenstand'으로 인식되지만,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일련의 점으로 축소되고 마는 것이다. 이 점을 보다 강조하기 위해 그는 도판 자료를 첨부하는데, '속도'를 강조했던 미래주의를 가능하게 한 조건으로 기차나 자동차를 보여주고, 절대주의의 경우는 까마득한 고공에서 내려다본, 점으로 환원된 지상의 이미지들을 보여준다. 정확하게 이런 맥락에서 박광수의 드로잉이 유예시키는 아날로그와 디지털 기호 사이의 구분은, 이른바 '디지털 시대'라 불리는 우리 시대에만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 다른 한편 이번 전시에서 그가 선보이는 새로운 계열들 중 「깊이 – 스티커 Depth – Sticker」(2019)와 같은 작품들은, 어떤 얇은 막이 드리워진 듯한 인상을 준다. 그의 작업실에서 나눈 대화에서 작가는, 이 작업들이 얇긴 하지만, 결코 두께가 없다고는 할 수 없는 깊이와 공간감을 드러낸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 자신이 에둘러 강조했듯, 이는 젊은 작가들의 작업들을 '(초) 납작'하다거나 '평평'하다고 퉁 쳐 묶는 투박한 풍조에 대한 나름의 반박이다. 하지만 이 두께가 어디에서 온 것인가 물을 필요는 여전히 남는다. 특히 선들 사이의 명도 차이를 강화하는 번짐 효과를 활용한 이번 전시의 신작들은 "뚜렷한 선과 안개처럼 뿌연 흔적이 교차"하는데, 작가는 이를 거울 표면에 그려진 그래픽 스티커에 비유한다. 그가 "1에서 3센티 사이의 깊이"를 얘기했던 것 역시 이런 차원에서 보면 충분히 설명이 된다. ● 그런데 왜 거울일까? 다시 말하지만, 이 거울은 대상을 그대로 비추거나 재현하는 전통적 기능보다는, 얇고 깊이감 없는 표면에 일종의 반투명한 두께를 만들어내는 기능에 좀 더 무게가 쏠려 있다. 그리고 "얇고 깊이감 없는 표면에 일종의 반투명한 두께를 만들어내는 기능"을 가장 잘, 그리고 전 지구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건 핸드폰의 액정화면이다. 이 미묘한 두께의 반투명성은 초기작의 셀 애니메이션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지만, 예를 들어 2012년에서 2014년 사이에 걸쳐있는 '응시' 연작에서도 그 자취를 찾을 수 있다. 지극히 섬세하게 묘사된 새의 두부(「표정2」, 2012)는, 새인지 얼굴인지 아니면 장갑 낀 손가락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흐릿한 드로잉들(「응시 – 흐린」 2013, 「응시 – 사라진」, 2013)과 대조되는데, 이는 2014년 이들과 비슷한 크기와 외곽선을 유지한 채, 훨씬 작지만 세부 묘사가 명확한 일군의 새들을 그린 드로잉(「밤의 새 무리」, 2014)과 하나의 계열을 이룬다. 즉 이들은 단순히 새를 소재로 그린 작업들이 아니라, 초점의 상태와 연동하는 대상의 시각적 정체를 탐사한 작업인 것이며, 이를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번짐 효과를 통해 개별 작품 안의 이중적 레이어로 통합시킨 것이다.

박광수_부엉이의 밤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6.8×80.3cm_2019

V. 나가며: 다채로운 까마귀? – 흑백과 색채의 문제 ● 서문 작성을 위해 만나 가질 대화를 준비하면서, 나는 몇 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했는데, 그중 하나는 색채에 관련된 것이었다. 에드가 앨런 포우의 「갈가마귀 The Raven」을 참조점으로 삼는 이번 전시의 제목('Nevermore')이 웅변하듯, 그의 작업은 지금껏 검은색(과 흰색)만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흑백의 세계에 색채가 들어올 수 있을까? 그것은 기존의 세계에 무엇인가를 덧붙이는 것이 될까, 아니면 그 세계 자체의 구성 방식 자체를 뒤흔들거나, 최소한 (풍성하게) 오작동시키는 불순물이 될까? 이러한 질문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그의 작업실에는 짙은 고동색과 황금색 사이를 넘나드는 일련의 작업들이 완성되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이들은 놀랍게도 단순한 색채의 덧붙임을 넘어서는 지평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 박광수의 다른 작업들이 그렇듯, 이 지평 역시 하나가 아니라 몇 가지의 겹들이 중첩된 방식으로 구성되는데, 그것은 한 편으로 불교의 탱화(幀畫)나 자개와 같은 동양적인 참조점을 소환한다. 이러한 인상은 그가 표면에 중첩시키는 일련의 붓질이 연상시키는 비늘, 또는 파충류의 것과 같은 거대한 생물의 피부에서 온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것은 리들리 스콧의 영화 「에일리언 Alien」(1979)이나, 그 프리퀄로 몇 년 전 제작되었던 「프로메테우스 Prometheus」에 등장하는 외계 생명체의 시각디자인으로 널리 알려진, 스위스의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화가인 H. R. 기거(H. R. Geiger)를 떠올려주기도 한다. 에어브러쉬를 주로 사용했던 기거가 후기에 이르러서는 파스텔과 마커, 잉크와 같은 전통적인 재료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이러한 연상은 흥미롭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덧붙인다면 문신을 들 수 있을 텐데, 이 부분은 크기의 차원에서 좀 더 숙고가 필요해 보인다) ● 그가 최근 세실리 브라운(Cecily Brown)을 사숙하는 것은, 이 색채라는 난관을 돌파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서양미술사의 고전들을 윤곽선 없이, 거칠고 화려한 색채의 브러쉬 스트로크로 재해석하는 브라운의 작업들은 드로잉으로 형상과 배경의 구분을 허물고 구부리는 박광수의 작업과 흥미로운 공명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박광수의 이후 작업이 탐사하게 될 또 다른 이행과 중첩의 지평에, 이들이 효과적인 탐침 역할을 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문제의 작가가 하나의 선 안에서 분기하는 숲을 보고, 그 맹목의 길을 그 누구보다 탁월한 방식으로 더듬어온 박광수라면 말이다. ■ 곽영빈

박광수_60 페이지_드로잉애니메이션, 반복 재생_150×46×15cm (including plinth)_2012~9_스틸컷

Drawing After 'Figure and Ground' (or William Kentridge): Adventures of Park Gwangsoo and Transformation of Drawing in the Digital Age ● Despite minute differences, writings on Park Gwangsoo's oeuvre have something in common. On the one hand, they emphasize the fact that his works are made up of drawings. On the other, they point out the 'symbolism' operative in them, taking recurrent visual images of birds or (black) forests as the artist's angst or as an extension of some surrealist motifs. (This exhibition's title, Nevermore, is also drawn from Edgar Allen Poe's famous poem The Raven (1845)) Still, this type of reading implicitly insists on reading Park's graphic images as 'form,' distinguishing them from 'content' or what the form selectively takes and tweaks. Ultimately, it is made possible on condition that one wholly accepts the conventional binary schema of 'figure and ground.' Namely, that the artist expresses 'content' through the 'form' or technique called drawing. ● It is a glaring absence or destruction of such blithe binaries, which constitutes the most intimate core and source of Park's drawings manifested via a marvelous set of variations. Park has never 'expressed' any contents by taking some symbols through 'drawing.' For his drawings themselves amount to the field in which symbols emerge and disappear, or the primal scene in which 'figure and ground' distinction as such is redefined. This is far from rhetorical flourish. No one should miss this difference. Park engages less with symbols and figures than with their emergence and annihilation, as the immanent problem of (de)figuration. Unless we clearly seize upon this difference, tedious discussions of addressing 'contents, coupled with putative praising of his drawings as 'form' are doomed to be repeated.

I. 'Figure and Ground' in Distorted Time ● This is precisely why the distinction between figure and ground is ambiguous, or it often seems unclear if any given figure is in the middle of disappearing or emerging in Park's drawings. Fall is indistinguishable from the ascent, disassembly from construction, entry from leaving, and the wind are conflated with fire. This ambiguity, however, is an exact one, if you will. While saying that "drawing is similar to go astray in the dark forest," the artist added that "despite my concerted efforts to catch the object, it continues to move in vibration without revealing its clear identity to me." If his drawings feel like "go[ing] astray in the dark forest," it is because "[the object] continues to move in vibration," not the other way around. He also writes that "black lines become the contour lines of the forest, darkness, and branches," whereby "the lines continue to expand this world by changing their roles." Put differently, what precedes is not the forest and darkness; rather, a tree or the object as such disperses "in vibration" in a way indistinguishable from the forest and darkness. At stake is not so much the clearly delimited 'lines of the forest' as 'the forest of lines,' or 'lines as forest' which "continue to change their roles in vibration" without remaining as stable lines. ● That objects "continue to change their roles in vibration" signifies that Park's drawing works are 'temporal.' As the face made up of dozens of ice cubes waiting to melt away in Ice Man (2014) rather explicitly illustrates, the figure for Park is always already in time, accompanied by the possibility of destruction or transformation. Park describes the (de)figured objects of the Walking in the Dark (2014) exhibition as "aging people, energy being burned off, crumbling lines in falling, and existences gazing at these events of disappearance." Various characters and landscapes populating Crack (2017) exhibition were all in the middle of disappearing or emerging. This 'ambiguity' indicates that temporality Park's drawings capture is far from linear and chronological, that it is 'suspended' at particular moments. ● Clues to this peculiar temporality can be found in his first exhibition, 2001 A Space Colony (2011). This venue was born of a newspaper article with images from 1982 he came across, which dealt with a space city to be built in 2001. Notable here is that the first thing the artist imagined from reading it was the "disruption born of the distortion of Time." As Park's description of the "first slicet cutting the Space, black coffee throwing up a new cosmos, a refrigerator freezing stars to fall" amply demonstrates, drawings of his first exhibition depicted "the final, fantastic moments in which physical orders of the space residents are scrambled due to the explosion of the space city," all born of Park's imagination of distorted Time.

II. Drawing as the field of transformation and passages of Gestalt ● This imagination of explosion or transformation appears to be forged under the shadow of Akira (1988), Katsuhiro Otomo's masterpiece Japanese animation. Until then, to be sure, both 'figure' and 'ground' were drawn in an elaborate yet clearly distinguishable manner. This way of retaining distinction is closer to cel animation where background, characters, and tools are drawn separately than to fine art tradition. While this distinction seemed to be maintained in his next exhibition, Man on Pillow (2012), it was accompanied by some decisive change. For example, the drawing of two gathered hands- which seem to be accompanied by a gesture to cover one's face, is presented here without a face- (Two Hands, 2012), looks similar to that of a floating rock- which simultaneously evokes Rene Magritte's Le Château des Pyrénées (1959) as well as Hayao Miyazaki's animation work Castle in the Sky (1986), clearly inspired by the former- (A Floating Rock, 2012). Nonetheless, these images are not inscribed in the same plane, and spatially separated just as the beetle specimen (A Specimen, 2012), while resembling a geranium (Geranium, 2012), is juxtaposed to the latter vertically in the exhibition. ● Worth emphasizing in this deceptively simple change is the visual impression that similarity between visual motifs subscribes to the 'Gestalt' model. Rubin's Vase (1921), one of the first pictures popping up when you google 'Gestalt,' is the most well-known example, where a vase emerges when focusing on the white middle part while two profile images of male appear when paying attention to the black, marginal background. Of course, the 'background' changes depending on which one you choose to consider as 'figure.' This is why this picture by Edgar John Rubin, a Danish psychologist, is called 'Rubin's Face' as well. With this in mind, one can see more clearly that the two faces and the floating rock, as well as the specimen and the geranium, turn out to be the 'figure and ground' otherwise integrated in one space in Gestalt pictures, rendered separated in two different spaces in Park's drawings. The visual similarity between these images is achieved by the 'crudeness' of the drawing, an effect garnered by the artist's voluntary abandonment of elaborate description clearly demonstrated in the previous year's exhibition. The transition or passage from a distinct drawing, reminiscent of almost psychotic description of details in Akira, to a coarse, crude drawing style, precisely corresponds to another passage from the clear distinction between figure and ground to the visual similarity of 'Gestalt' model or the field of confusion and transformation. ● Later, this manner of separating figures and grounds in the Gestalt model, normally stored in one space into different spaces, is given another twist, that is, just like a photograph and its negative form a pair. Exemplary is the opposition between Quiet Fire (2014) and Burning Fire (2014), Dark Forest (2014) and A Bit Vaguer Forest (2014). Reminiscent of print or engraving, as well as sumie or ink-and-wash painting respectively, the contrast between each pair is operative on the register of the line's thickness or chroma, which is given another twist in this exhibition in terms of thin thickness layered onto one surface. Still, each of these drawings shares the inability to decide if the given figure or background is emerging or disappearing, or if it is getting brighter or darker. As in Wind and Bonfire (2014), the artist often chooses to synthesize what appears to be wind and bonfire in place of separation and opposition. This variation of separation and synthesis is readapted next year in his animation work Darkest Wind, Bonfir, and Drum Sound (2015), along with the 'Man of Fire,' which became the music video of Tomboy', a song by Korean popular indierock band Hyukoh. What I seek to evoke through these descriptions is the status of these 'passages' from one to two, from static drawing to moving animation, or vice versa. ● While this 'field of passage and transformation' seems to have failed to garner the attention it deserves, it has been already realized in the gallery wall of Man on Pillow (2012) exhibition. The artist hung more than 10 huge drawings to three sides of the gallery wall, side by side like animation cels, and many of them (8) appear to be images of birds. Upon scrutiny, however, some of them literally 'appear' to be birds. A closer inspection reveals the fact that, deployed in between the drawing of a round shape or what appears to be the Moon or Earth on the far left and two hands gathered differently than two hands resembling a floating rock on the far right, the entire drawings are in the middle of a 'passage' undergoing some sort of 'transformation.' For instance, to the left of a drawing of what appears to be a bird is found a drawing in which a lady is standing while staring at us against the background of what appears to be wind or Silver Grass. The distinction between 'figure and ground' firmly maintained in the latter drawing gives way to the synthesis in terms of the figure of a 'bird.' Lastly, while the drawings of a man's hand on the far right corner are based on the left hand of a patient on his sickbed, the only concern for uninformed spectators remains the hands' similarity to the neighboring bird's appearance. Here the potentiality of transformation is transferred even to the spectators, and as such, the range and layers of this 'transformation' become wider and thicker. ● In a sense that they redefined the classic distinction between 'thickness and thinness,' Park's early works thickly imply the field and scene that Park will delicately refine- including this exhibition. While many commentators simply pull out an iconic motif called a 'bird' or, relying on the exhibition titled, called, Man on Pillow and the artist's confession of the scrambling of 'dream and reality,' associate his works with extrinsic motifs like Surrealism or Poe, the artist was doing something else. Through the passage from distinct outlines to a coarse, crude drawing, separation of 'figure and ground' in the Gestalt model, and spatio-temporal juxtaposition of individual drawings evoking animation works, Park was already capturing the problems of figure and ground, drawing and animation, and passage between spatiality and temporality, immanently or from within.

III. Historical Genealogy of Drawing ● Is this transformation and superimposition, or 'passage' between figures, which Park seems to have almost single-handedly captured in the contemporary Korean art scene, exclusive to him only? Is he a lonely orphan with no history or tradition to turn to? I think not. To say in advance, even if such history or tradition existed, I do not think Park simply imitated it. Rather, while he partakes of it, Park fundamentally updates it in a 'con-temporary' way in its radical sense of the term. ● In his essay on Raymond Pettibon, prominent American graphic artist, for instance, art critic Benjamin Buchloh distinguished two models of drawing. On the one hand, there is the model of "drawing as pure matrix." In this model, drawing is not presented as an "index" of the artist or her subjectivity. Embodied by Jasper Johns, this lineage incorporates Roy Lichtenstein and Andy Warhol as its members, whose works tend to "rigidify, to classicize, and thereby to become affirmative," rather than rendering lines malleable or letting them run wild. At the opposite end lies the model of what Buchloh calls pure "grapheme" in contradistinction with linguistic phoneme. In this model, drawing is foregrounded as the "pure indexicality" of the artist as well as her subjective expressivity. Represented by Cy Twombly, this model discloses "neuro-motoric and psychosexual impulses." According to Buchloh, Pettibon effectively manages to synthesize these two models. ● Rearticulating that while "the matrix model of drawing delivers an abstract form of the object, the grapheme model performs an abstract version of the subject" in Buchloh's discussion, Rosalind Krauss integrates them in her wide-ranging discussion of Western art history, traversed by a dichotomy of 'disegno vs. colore,' i.e., drawing vs. colors. Originating from Raphael and Michelangelo, then bequeathed to Jacques-Louis David and Jean-Auguste-Dominique Ingres, then to Georges Seurat and Paul Signac, this Roman lineage of drawing, according to Krauss, has quarreled with that of colors, to which Venetian painters such as Bellini, Giorgione, Titian, Tintoretto, and Veronese belong, along with Eugène Delacroix and Claude Monet, August Renoir and Matisse. And yet, this binary opposition has been challenged by figures like Matisse who defined his works in terms of "color by design," or "color by drawing," or Mondrian whose final phase works like New York City (1941) or Victory Boogie-Woogie (1942-1944, incomplete) "implod[ed] the difference between line and color" by weaving florid masking tapes, and synthesized by Jackson Pollock whose 'drip painting' most spectacularly collapsed the distinction between line and color. ● Noting how these later experimentations partook of "this paradoxical deployment of the line (the ultimate resource of re-presentation) in the service of abstraction," Krauss situates Buchloh's dichotomy of matrix and grapheme in the historical period after the WWII. According to Krauss, drawing became virtually "obsolete" in this process. As Sol LeWitt's Ten thousand one-inch (2.5cm) lines evenly spaced on each of six walls (1972)- a work bearing a striking resemblance to a figure in 'Wind Run Past,' a part of Park's 2015 work Darkest Wind, Bonfire and Drumsound- represents, now drawing is less individualized, and deindividualized like a factory product. The same can be said to Warhol and Lichtenstein, artists who took drawing to the domain of representation rather than abstraction. ● If Pettibon's drawings displaced the opposition between abstraction and representation, individual and collectivity through partial adoption of the latter mode of comics, Krauss adds the drawings and animation works by William Kentridge, arguably the representative artist of South Africa, to this lineage. The operational principle of Kentridge's works in this space of dual negativity, or "neither matrix nor grapheme," according to Krauss, is a palimpsest, parchment made of lamb, calf, or goat kidskin in which traces of previous writings are kept if vaguely. She considers this "a form of erasure, in which the traces of erased lines remain on the page, forming a faint charcoal mist." Recapitulating that "palimpsest does for time what matrix had done for the object and grapheme for the subject," she concludes that Kentridge's palimpsest "renders [time] abstract."

IV. Drawing between Line and Plane, Analog and Digital ● What implications can we draw from Buchloh and Krauss's discussions of drawing, one of epic, if unabashedly Western lineage offers to Park's works? Put differently, where in this history of drawing can Park's oeuvre fit into? As we've explored thus far, Park- unlike Pettibon who synthesizes 'matrix' and 'grapheme' through his caricatures or Kentridge who abstracts time with this animation Krauss likened to 'palimpsest'-, tracks down the trajectory in which potentials of becoming or transformation in/away from Gestalt immanent to each and every figures. ● In his more recent works, this trajectory touches on the distinction between analog and digital- arguably the very spot where Park updates the extant tradition of drawing in full swing. As a matter of fact, quite a few new works for this exhibition constitutes a canvas of devenir/becoming at its most subtle and elaborate- in a time when the digital is implemented/operates less as a tool than as a platform or 'infrastructure. To be sure, Park differentiates himself from the so-called 'post-digital' movement wherein a mechanical typewriter for hipsters acquires a differential value or status. More important than such conventional misunderstanding is to recognize the specific ways in which Park updates and refines drawing in the midst of digital images, now rendered as the 'default' setting or ground. ● Recall, for instance, his four moving images installed in the window box outside of Doosan Gallery, Seoul in 2017 as part and parcel of his solo exhibition, Crack. Essentially flashy zoom-ins and zoom-outs of his drawing works, they manifest a series of processes in which a point becomes a plane only to undo the transformation in four vertical monitor screens. Everything appears pixelated in rectangle shape during the process of zoom-in or enlargement before reverting to analogue images while zoomed out. That these images are vector images created from the iPad seems to render naught our distinction itself. Still, it paradoxically points to the idea that the visual distinction between analogue and digital images are coextensive with the degree of resolution. In fact, numerous signs oscillating or suspended between analogue lines and digital (rectangle) planes are what forcefully characterize new works in this exhibition. That flatness of Park's works resemble that of Illustrator, a computer graphic tool for design, points to this aspect. As is well-known, this peculiar visual effect derives from a series of tools Park has somewhat crudely modified, ones that are oscillating between pens and brushes. After cutting solid sponges into various shapes, tying them onto the tips of thin and long wooden sticks, he dips them into Chinese ink. Lines created in this process are more than simple lines. They overlap with large 'planes,' and thereby go beyond the status of 'outlines.' The above-mentioned features traversing analogue and digital images are born of this process. ● This is different from Jang Jaerok's attempt, however, which renders Chinese landscape painting into grids, or pixels while using hanji, traditional Korean paper, and Chinese ink. In Jang's works, pixels strictly operate in the iconic dimension, i.e., as something that which resembles digital images. Similar to QR codes, ultimately, they play the role of 'parts,' and thereby constitute the iconic image of mountains as a 'whole,' continuing the tradition of Chinese landscape painting. Jang's attempt appears to be the opposite of the main protocol of Agnes Martin's works during the 1960s such as Flower in the Wind (1963) or Leaf (1965) in which grids and monochromes were superimposed only to generate the impressions of mist or leaves in wind. Unlike Jang's 'pixels' which are almost completely subordinated to the iconic signs of Chinese landscape painting, however, Martin's grids are not only prior to the digital platform, but, most significantly, are irreducible to any iconic signs. ● Rather, Martin's works could be an intriguing reference for Park's works oscillating between digital and analogue images through zoom-in and zoom-out, that is, in proportion to the relative distance from the surface. Krauss offers clues to this line of reading again. Denouncing the 1960s "rage" and conventional readings to attach the affect of 'sublime' as well as "metaphysical, transcendental associations" to abstract monochrome works, she categorically declares Martins' works as "structuralist." According to art critic Kasha Linville, visual experience we get from Martin's works can be divided into three kinds: the "materiality" of the surface rendered almost palpable upon approaching the paintings; the "atmosphere" of "non-radiating, impenetrable mist" one gets as she steps back from the paintings; and lastly, the heaviness of walls "immovable as stone" when one gets the farthest. As Krauss notes, the impression of "atmosphere" is not so much spectators' "intuition" as an effect coextensive with "an unit" as part of a "system." 'Mist' as opposed to 'Wall' while materiality of the canvas is contrasted with the walls' hardness. In this sense, Krauss submits that "Martin's art is not involved in "picturing" anything specific, whether that be clouds or sky or light or sublime immensity." I think the same can be said almost verbatim of a series of symbols visible in Park's works and critical commentaries on them. For, to reiterate, what is at stake is not symbols such as birds or forests themselves but their emergence or sheer appearance as well as disappearance. Park does not 'express' symbols as 'contents' through 'drawing.' Park's drawings constitute the field itself which makes the emergence and disappearance of symbols possible or impossible. We must not miss this difference. ● We can go further than this, however. Take Kashmir Malevich's 'Супрематизм,' rendered 'Suprematism' in English and 'Absolutism' in Korean, for instance. Often summarized as an attempt to go beyond the material world of reality in order to paint transcendental spiritual world, literally without objects [gegenstandslose], this idea of Suprematism suffers from fatal blind spots. For, among other things, Malevich explicitly pinpoints 'material' conditions, which renders such 'transcendental' world possible in World as Objectlessness (1927), his manifesto of sorts. In particular, Malevich draws a direct link between the process of abstraction in Suprematism and the contemporary development of means of transportation, especially aerial photography rendered possible by airplanes. While people, tress, and buildings are recognized as 'objects or gegenstand' on the ground, they become nothing but dots when seen from above. As a way to emphasize this point, he provides images in the book in which trains and cars are presented as the historical conditions of possibility of Futurism, a movement (in)famously underlined 'speed,' while for Suprematism, images on the ground, when seen from above. are irreducibly reduced to dots. Set against this historical backdrop, the distinction between analogue and digital signs, suspended in Park's drawings, is not exclusive to our allegedly 'digital age' only. ● On the other hand, a number of works from the new series of drawings Park shows in this exhibition such as Depth - Sticker (2019) seems to accompany some thin membranes. In a conversation I had with the artist, he noted that these works manifest a sense of depth and space, admittedly thin yet in no way lacking thickness. As he underscores in a roundabout way, this statement is his rejoinder to the clumsy tendency to round up young artists' works as all '(super)flat' or 'even.' Still, a question remains as to where this thickness could have come from. In particular, regarding the notable intersection of the distinct lines and the obscure, fog-like vestiges in the new drawings utilizing smudge effect whose emphasis on the difference of brightness between lines is distinctively pronounced, the artist makes reference to graphic stickers on the mirror surface. His reference to "1 or 3 centimeters deep "thickness during our conversation becomes more or less understandable. ● But why a mirror, though? To be sure, this mirror is geared less towards the traditional function of reflecting or representing an object as it is than towards creating a kind of translucent thickness onto the thin depthless surface. Which one serves the function of "creating a kind of translucent thickness onto a thin depthless surface" better than, say, liquid crystal screens these days? As to the potential origins of this translucency imbued with subtle thickness, one can hark back to the sheets of transparent plastic in cel animations to which Park made reference in his early works. At the same time, we can trace back to the Gazeseries he made between 2012 and 2014. The elaborate description of the head of a bird (Face 2, 2012) is contrasted with murky drawings in which one can hardly tell if it is a bird or someone's face or even a gloved finger (Stare – Vague, Stare – Gone, 2013). Along with the drawing of a flock of birds from 2014 (A Flock of Birds in Dark, 2014) in which much more elaborate description is rendered with the similar size and outlines, they constitute one and the same series. In other words, they are not simple drawings of birds but works exploring the question of visual identity coextensive with the degree of focus. It is precisely this latter issue Park addresses in this exhibition yet with a significant twist, i.e., with smudge effect, if only to synthesize it into two layers within one single drawing.

V. Colorful Ravens? - Question of B/W and Colors ● Prepping for meeting with the artist towards the end of my writing process of this catalogue essay, I came up with some core questions, and one of them concerned colors. As Nevermore, the title of this new exhibition- while clearly referencing Edgar Allan Poe's The Raven strongly suggests, it is safe to say that Park's works have revolved around black (and white) only. Can colors enter this black and white world? Would that amount to adding something to the extant world, or shaking it to the core? Will they serve as some foreign matter causing, if possible, some (fruitful) malfunction? As if he expected these questions in advance, a series of new works straddling thick maroon and gold colors were in place in his studio, glimmering beyond the horizon where colors are simply added. ● Not unlike Park's other works, this newfound horizon is also structured in a way several layers are overlapped, evoking Asian references such as a Buddhist painting or shell-encrusted mother-of-pearl. The latter impression, in particular, is derived from the image of scales a series of brushstrokes he applied and layered on the surface or that of a huge, say, reptilian organism's skin. On this peculiar visual resonance, one is reminded of H. R. Geiger, Swiss graphic designer and painter well-known for his contribution to the production design of alien figures in Ridley Scott's seminal film Alien (1979), and its prequel, Prometheus (2012). This association is quite intriguing if we take into account the fact that Geiger, a long-time user of airbrush, used traditional tools like pastel, marker, and ink toward the later phase of his works (One could add tattoos to this list of potential layers of associations but it calls for more consideration in terms of size). ● His recent, speculative engagement with British painter Cecily Brown seems to be incorporated into these attempts to overcome this difficulty, if not the dead-end. For Brown's characteristic acts of reinterpreting canons of Western art history through her rough and colorful brushstrokes without clear outlines, betray amusing resonances with Park's works that collapse and bend 'figure-and-ground' distinction. No one knows if they would serve as an effective probe in the horizon of another passage, and overlaps Park's subsequent works might explore down the road. There is no need to worry, though- if the artist in question turns out to be Park Gwangsoo, one who saw forking forests in one line, and has groped and charted blind paths better than anybody else. ■ Yung Bin Kwak

Vol.20191211f | 박광수展 / PARKGWANGSOO / 朴光洙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