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자리

박춘화展 / PARKCHUNHWA / 朴春花 / painting   2019_1211 ▶ 2019_1217 / 월요일 휴관

박춘화_노을_장지에 아크릴채색_145×194cm_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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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 / 문화체육관광부_서울특별시_서울문화재단

관람시간 / 11:30am~06:30pm / 월요일 휴관

아트비트 갤러리 ARTBIT GALLERY 서울 종로구 율곡로3길 74-13(화동 132번지) Tel. +82.(0)2.738.6699 www.artbit.kr

눈 앞에 가져온 먼 풍경 ● 크고 많은 것들을 그렸어도, 그의 그림은 애초에 텅 비어 있는 것처럼 공허하고, 괜한 소외와 불안이 안에서 불쑥 떠오른다. 이 안, 그러니까, 내 두 눈 속에서 지각된 것인지, 어딘가에 있는 마음 속에서 느껴지는 것인지, 서성이는 내 몸의 피부 안으로 와서 닿은 것인지, 그의 그림과 마주하고 섰을 때 안에서 떠오르는 정체 모를 소외와 불안은 그림과 나 사이의 규명할 수 없는 "상실"과 "연대"를 동시에 환기시킨다. 말하자면, 저 알 수 없는 그림이 갖고 있는 공허와 나의 (시각적 혹은 심리적 혹은 신체적) 결여가 하나의 사건으로 엮여 마치 징후처럼 그 인과를 주고받는 것 같다가도 결코 가서 닿을 수 없는 서로 간의 단절로 인해 각각의 공허와 결여가 아무런 인과 없이 극대화될 뿐임을 알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평범하기 그지 없어서 그 진부함으로 가로 막힌 박춘화의 풍경 그림은 생의 진부함이 지닌 거대한 공허 때문에 나로 갑작스러운 무력감에 빠지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저 풍경이 가로 막고 있는 풍경 너머의 속사정을 도무지 알 수 없는 나의 태생적인 결핍이 나를 그의 그림에서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불안에 빠져들게 하는 것인지, 그 사이에서 나는 깊은 혼란에 빠진다. ● 박춘화는 이번에도 풍경을 그렸다. 바다와 산과 하늘이 있고, 파도와 모래와 나무가 있으며, 눈과 안개와 아주 간혹 사람의 형상이 풍경을 이룬다. 그가 붙인 이번 전시의 제목은 『가장자리』인데, 서로 상관 없지도 그렇다고 서로 상관 있어 보이지도 않는 적막한 풍경 그림 열 한 점이 벽에 붙어서 무표정하게 가만히 정면을 향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산도, 하늘도, 바다도, 박춘화가 그린 풍경은 꽤 먼 곳의 "거리감"을 나타내 보이지만, 그 거대한 풍경의 "표면"을 증명이라고 하려는 듯 세심하게 그린 그의 붓질에 남 모르게 시선을 빼앗기게 되면 어느새 저 먼 풍경은 내 눈 앞에 바짝 다가와 있는 듯 하다. 그 무표정한 풍경과 이러한 모순 속에서 대면하는 일은, 박춘화의 그림에서 쉽게 피할 수 없는 경험이다. 그것은 이미 박춘화가 그림 이전의 "풍경들"과 대면했던 모든 현실의 순간들에서 겪었을 법한 경험일 텐데, 그렇다면 그는 어쩌면 그 풍경을 단지 무심하게 그리려 했다기 보다는 그와 풍경과의 단절감을 고조시키는 무표정한 거리감을 어떻게든 서로에게서 멀찍이 떨어뜨려 놓는데 그치지 않고 그 공허한 속을 켜켜이 헤집어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말하자면, 그의 풍경 그림은 공백으로 가득한 헤아릴 수 없는 거리감을 지각하는 것과 더불어 나와 풍경 사이에 있는 그 분리감을 온채로 감각하는 것을 한꺼번에 실현시킨다. ● 한편 『가장자리』라는 말이 포괄하는 풍경들은 안개, 설경, 모래, 포말(泡沫), 파도, 노을, 산비탈, 풀 등을 아우른다. 수식어 하나 없이 무미건조한 이 낱말들은 각각 어떤 의미를 가진 형태로 가늠할 만한 명사적 존재를 나타내는데, 이 낱말들이 하나의 엮임 속에 한 사람의 시선을 담아낸 일련의 풍경 그림으로 나란히 공존할 때 제 스스로 갖고 있는 의미만으로는 부족한 무언가를 내비치곤 한다. 마치 제 이름을 수식하는 형용사가 따라 붙어, 스스로를 초월하는 그 이면의 서사가 공허함을 뚫고 표면에 기습적으로 나타나 알 수 없음에 대한 결핍에 어떤 정서(분위기)를 중첩시키는 것 같다. 이를테면, 진부할 정도로 익숙하고 평범한 풍경들이 하나 둘 계속해서 그림 안에 붙잡혀 들어 올 때, 박춘화의 풍경 그림은, 새삼스럽게도 그 진부함을 견디며 일상의 클리셰 속에 오명을 뒤집어 쓴 채 감춰지고 지워져 버린 개별적인 감각에 대해 새로이 가늠케 한다.

박춘화_포말I(泡沫)_장지에 아크릴채색_145×194cm_2019

그는 지난 1년 간 강원도 고성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풍경으로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것일까?"그는 스스로에게 던진 이 풀리지 않는 질문을 앞에 두고, 오랫동안 지속해 왔던 풍경 그림에 대한 생각을 거기서도 이어갔다. 눈에 익고 손에 익었을 법한 이 풍경 그림에 대해 스스로 회의하고 또 스스로 명분을 찾아내다가 어느 때쯤 "가장자리" 풍경에 다다른 것 같다. 그는 "멋진 바다는 눈앞에 놔두고 발 밑 포말에 시선이 멈추고, 해변의 아름다운 석양 보다도 고립된 작업실 근처의 메마른 도랑에서 만난 해질녘에 마음을 뺏겼다"고 했다. 그렇게 모아진 것을 박춘화는 "가장자리의 풍경"이라 말했다. 이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아니, 이 말이 그려내는 상황을 떠올려 본다. 그의 말대로, 그는 저 멀리 펼쳐져 있는 거대한 자연 경관과 마주 서서 그것의 아름다움에 온전히 마음을 두지 못한 채, 자신의 처지 앞에 와 닿은 그것의 끝자락만 애꿎게 들여다보며 매만지고 있지 않은가. 애초에 자신의 발 밑에 시선을 고정해 두었던 것이 아니라, 그의 시선은, 저 먼 풍경을 눈앞에 두고 헤아리다가 어느 샌가 자신의 몸이 닿을 만큼의 발 밑까지 그 긴 거리를 훑고 당도한 것일 텐데, 그래서 더욱 고민스러웠던 걸까. 박춘화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무표정한 풍경을 애써 그려가며, 그 공허한 것에 대한 감각을 나타낼 만한 그림 그리는 자로서의 확신을 (되)찾고자 했던 것 같다. ● 전시장 한 켠, 양쪽 벽이 마주하는 모서리를 가로질러 허공에 부유하듯 비스듬히 걸려 있는 「모래」(2019)를 보면, 저 그림 속 풍경과 마주했던 한 사람의 시선이 역력하다. 파도가 왔다 간 흔적인지, 바람이 만들어 놓은 형상인지, 해변의 모래는 물결처럼 어지러운 표면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그림 속 어디에도 큰 파도는 없다. 큰 바람도 없고. 그는 왜 이토록 정황을 알 수 없는 해변의 모래를 그렸을까. 거대한 경관 안에서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아 보이지 않지만, 이 모래의 표면은 내 발 밑에서 당장에라도 제 스스로에게 잠식당할 것처럼 메마르고 연약한 형상을 하고 있다. 현재의 이 고요한 침묵과 사라진 격렬함 사이에서, 박춘화는 그 두 개의 모호한 사건이 일으키는 낙차를 풍경의 표면에 담아낸 것 같다. 그것은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림의 표면이라 할 수도 있다. 그는 적막할 정도의 무심한 풍경 그림을 그리면서,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풍경, 즉 극도로 비워진 풍경의 공허함을 상기시킨다. 그것은 즉각적으로는 공허한 풍경과의 분리이자, 동시에 연대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거대한 자연 경관의 격렬함과 역동성에서 밀려난 가장자리의 풍경은 생동감도 없이 조용한 포즈로 고집스러워 보일 만치 무표정한데,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먼 풍경 보다 시선으로부터 분리되기에 충분하며 동시에 눈 아닌 것으로도 감각할 만큼 익명의 몸들과 연대해 있는 진실함을 나타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저 멀리 하나의 소실점을 가진 「모래」 그림 앞에서 우리의 시선은 그 소실점을 향해 망설임 없이 직행하면서도, 그 눈을 가진 나의 몸은 어지러운 표면을 가진 메마른 모래 위에 서서 발 밑의 아무 것도 없는 풍경을 곁눈질 하며 자꾸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박춘화_모래_장지에 아크릴채색_145×194cm_2019

그의 여느 그림과 마찬가지로, 장지에 아크릴로 채색한 「포말Ⅰ」(2019)과 「포말Ⅱ」(2019)는 화면 전체를 바다 풍경으로 채웠다. 하나는 해안에 가까운 바다를 그렸고, 또 하나는 그림 속 사람의 형상을 가늠해 볼 때 해안인 듯 하나 먼 수평선이 화면 가장자리에 살짝 걸쳐 있도록 그렸다. 둘 다 제목은 "포말"이다. 하나는 가로의 길이가 2미터에 가깝고, 또 하나는 1미터가 조금 넘는 크기인데, 가로로 긴 이 풍경 그림에 박춘화는 거대한 바다를 화면 가득 채워 놓고 스스로 바다 표면에 맺혔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는 하얀 색 포말을 그리는데 열중했다. 물감에 적당한 양의 물을 섞어 장지에 스미도록 색을 칠한 후 이내 말리며 쌓기를 하염없이 반복하면서 깊고 거대한 바다를 그렸을 텐데, 그는 이 모든 일들을 마치 "포말"을 그리기 위해 감수한 것처럼 푸른 바다 표면의 하얀 거품에 온통 마음을 빼앗긴 거다. 그림 속에는 한 사람이 서 있는데, 그래 물 속인지 그림 속인지 모를 곳에 한 사람이 서 있는데, 그로 인해 이 거대한 크기의 바다 풍경이 나타내고 있는 시선으로부터의 거리감과 더불어 바다 표면에 맺혔다 사라지는 포말이 피부에 차갑게 닿는 감각을 우리는 동시에 경험할 수 있게 된다. 말하자면, 「모래」와 마찬가지로 「포말」 연작에서는 광대한 자연 경관으로서의 풍경의 끝자락에서 나타났다가 금세 사라지는 포말을 손끝에 두고, 서사도 없고 사건도 없는 한갓 물거품에 지나지 않는 것을 거대한 풍경 그림 안에서 먼 데를 보고 있는 우리의 시선과 힘껏 겨루게 하는 셈이다. ● 박춘화는 그 풍경이 무엇이 됐든 간에 풍경의 대상이 지닐 법한 거대함과 장엄함으로부터 비껴 서 있다. 하지만 그는 그 풍경의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거대함에 대한 시각적 경험을 바탕에 두고, 그 이면과 혹은 그 가장자리를 살펴왔다. 그의 초기 작업을 보면, 노량진의 어느 오래되어 보이는 큰 빌딩 뒷모습에 주목해 그 일부를 비스듬한 각도로 화면에 옮기거나 인도를 따라 나무가 우거진 담벼락 밑에 천막으로 가려 놓은 노점을 그리기도 했다. 2014년의 일이다. 그는 자신이 그린 풍경 그림이 도시의 이면을 담고 있으며, 그것은 주로 가치 없는 것, 방치되어 있는 것, 낡고 허름해 진 것, 약해진 것이라 말했다. 도시의 스펙터클한 풍경에서 밀려나 방치되어 무의미해진 풍경을, 그는 먼 곳을 향한 우리의 익숙한 시선으로부터 멀찍이 벗어나 그 방치된 형상들이 스스로 취하고 있는 공허한 포즈를 손 닿을 만큼 화면에 바짝 갖다 놓은 것이다. 근본적인 거대한 풍경과 견줄 때, 그것의 이면 혹은 가장자리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림에서 소실점으로부터 먼 그림의 표면에서 더욱 힘껏 공명한다. 그런 관점에서, 「파도Ⅰ」(2019)과 「파도Ⅱ」(2019) 역시 같다. 박춘화는 먼 바다로부터 밀려온 파도를 화면의 중심에 가져다 그리면서, 거대한 바다에서 밀려와 격렬하게 부서져 사라질 파도의 형상을 살피려 했다. 이처럼, 먼 풍경에 대한 거리감은 곧 사라질 쓸모 없는 형상에 대한 예민한 감각과 상응하면서 그의 풍경 그림에 중첩되어 있다. ● 「안개」(2016)와 「노을」(2019)을 보자. 화면 깊숙이 사라져 가는 한 사람의 형상이 자신을 바라보는 임의의 시선으로 하여금 저 먼 풍경을 향하도록 인도하지만, 그러한 시각적 충동에 맞서 또 다른 충동이 새롭게 생겨나는데, 그건 화면 가득한 공허함을 채우고 있는 회색 물감으로 인한 일종의 섬망 같은 색채에 대한 감각이다. 안개 낀 풍경은, 그림의 표면을 시각에 대한 보호망처럼 가득 채운 회색 물감은 풍경의 가장자리로서 피부 끝에 닿는 안개의 촉감을 재현하는 듯하다.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한 사람의 형상은, 먼 풍경을 향한 시각적 충동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수평으로 마주한 임의의 몸(나)이 곧 느끼게 될 그림에 대한 표피적인 감각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노을」에서도, 산 너머로 지는 해의 노을 빛은 박춘화가 그린 풍경 그림의 한복판에 놓인 얕은 개울에서 다시 한번 반복되면서, 그 시각적인 물질로서의 빛을 물에 반사된 촉각적인 감각으로 다시 재현해 놓은 셈이다.

박춘화_파도_장지에 아크릴채색_130×194cm_2019

이로써, 그의 풍경 그림에서 내내 혼란스러웠던 징후들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본다. 박춘화가 말하는 "가장자리의 풍경"은 언뜻 공허한 현실의 풍경을 포착한 듯 하다. 무심하고 무표정한 그의 풍경 그림은, 그것과 마주한 시선을 자꾸 먼 풍경 너머로 유인한다. 바다 너머, 산 너머, 안개 너머, 하나의 소실점을 향하듯 시선은 그림 깊숙이 뚫고 들어갈 것처럼 보이지 않는 풍경 너머를 쫓는다. 역설적이게도, 그 공허함에 대한 불안과 그로 인한 시각의 충동은 풍경 너머에 이르지 못한 채 그림의 표면, 즉 현실에 방치되어 쉽게 사라질 것 같은 풍경의 가장자리를 경험하는 것으로 일련의 변환을 겪게 된다. 그것은 시각적이라기 보다는 감각적이고 보이지 않는 먼 곳에 대한 상상력이라기 보다는 그 거리감으로부터 덜컥 떨어져 나온 내 발 밑의 공백을 힘껏 재현하는 일이다. ■ 안소연

Vol.20191214i | 박춘화展 / PARKCHUNHWA / 朴春花 / painting